컨퍼런스/신부를 찾으라

그분이 오실 때 (I)

Hernhut 2019. 6. 3. 11:3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니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위로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내가 떠나면 내가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내 아버지께로 가므로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라.”(16:7-11)


요한복음 14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 그분은 그분이 곧 떠나가실 것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 시작했다. 그분은 제자들이 있을 곳을 준비하시러 30년 넘게 계셨던 곳을 떠나 하늘들 안으로 떠나시려 하셨다. 하지만 잠시 가시는 것이었고, 어느 날 돌아오실 것이다. 그분은 하늘들로 그분의 제자들을 데려가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이 하늘들은 그분께서 이미 준비하러 가셨던 곳이다(14:1-3).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계속되었다. 그리스도는 곧 닥치게 된 것으로 주목을 받으셨다. 이는 그분께서 하늘들 안으로 그들을 데려가실 때가 임박했다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부재하시는 동안 그들과 함께 있을 또 다른 분이 하늘에서 보내어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분께서 진리의 그영으로 알려주신 또 다른 위로자를 주시도록 아버지께 요청하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14:16-17). 그리스도는 당시 위로자이셨다. 하지만 그분이 떠나신 후 또 다른 위로자가 보내어졌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위로 없이 남겨지지 않았을 것이다(14:18).

위로자라는 단어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Parakletos.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는 합성어로 불러 곁에 두다의 의미다. 파라para, 곁으로”; 클레토스kletos, 부르다를 뜻한다. 이것은 돕도록 누군가의 곁에 부르거나 보내어진 자와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위로자는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의 번역이라기보다는 주된 표현이다. “위로 없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오르파노스orphanos. “오르파노스orphanos오어펀orphan에서 유래되었다. “오르파노스orphanos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돕기 위해 곁으로 불려 나오신 분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보내지셨다. 그분은 돕기 위해 사람들 앞으로 보내지신 분이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떠나신 후 그영께서 사람들에게 보내지셨다. 그영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부재하신 동안 사람들을 돕기 위해 보내어지신 분이시다. 사람들은 이런 방면에서 오어펀orphan으로 남겨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필요로 할 때 하늘로부터 돕도록 보내어지신 분 없이 남겨지지 않았다.

요한복음 14:26절에서 그리스도는 그분이 하늘로 떠난 후에 일어날 일들에 관해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세상으로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를 보내실 분이시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5:26; 16:7절에서도 예수님은 말씀을 이어가신다. 그 메시지에서도 자기가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를 보내실 분이시라고 말씀하셨다. 두 말씀 다 예수님과 그영에 의해 수행될 사역을 가리키고, 그영에 의해 수행될 사역과 관계가 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은 각각 분리되어 불리지만 한분이 되신다(6:4; 10:30). 예수님은 종종 이런 방식으로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분으로 자기를 알리셨다. 하지만 번역문제 때문에 영어 원문에서는 읽을 수 없는 문제다.

마가복음 13:32절은 그리스도의 진짜 정체성과 번역 문제를 볼 수 있는 볼 수 있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그분의 신분을 계시하셨다. 하지만 이 구절은 영어로 번역된 방식 때문에 이 신분을 보고 이해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결코 아무도 알지 못하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알지 못하고 아들도 알지 못하며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헬라어 원문에서 이 구절 후반부에 두 단어가 있다. “에이 메ei me인데 대부분의 영어 버전에는 그러나로 잘못 번역되었다.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읽어야 한다.

아버지가 아니라면 혹은 그분 없이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른다.”

영어 원문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들이 아버지가 아니고서는 아들이 모른다는 것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이심을 분명하게 암시하는 구절이다. 다시 말하자면 육신적인 아들로서는 하나님이 아니시지만 영의 본성에 있어서는 분명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아신다는 말씀이 된다. 육신적으로는 말씀하실 수 없으셨고 세상에 선포하실 수 없으셨다. 다만 그분은 영으로서 그분이 언제 다시 오실지 비밀에 두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번역했다.

내가(예수님)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심지어 나는 그날도 모르고, 그 시간도 몰랐을 것이다.”

그분은 그날과 그 시간을 아셨지만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기 위해 선포하시지 않고, 비밀로 숨겨두신 것이다.

그런 다음 요한복음 18:5-6절에서 예수님은 다시 아버지로 자신을 알리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에 답하셨다.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가 아니라 나다.”로 자기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3:4). 구약성경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은 신약에 아무것도 없다. 신약성경에 있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이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도마를 만났을 때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20:28).

그리스도께서 주로, 하나님으로 같은 사역을 수행하시는 것을 종종 본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에 의해 수행되셨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시는 분이 되신다고 계시되었다(고후 1:9).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그리스도를 일으키셨다(2:30-32). 그영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그리스도를 일으키셨다(8:11). 아들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그분 자신을 일으키셨다(10:18). 아버지는 그분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기 때문에 그분의 아들을 일으키셨다. 그영께서는 그분께서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는 분 안으로 생명을 호흡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일으키셨다. 아들은 그분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스스로 일어나셔야 했다.

그러므로 그영과 아들은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의 자격으로 움직이셨다. 그영과 아들은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그영과 아들은 다른 형태로, 다른 목적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하나님, 아들, 그리고 그영께서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움직이심에 관한 자기의 증언 외에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 또 사람이 성경이 계시하시는 것을 넘어 설명하려고 하지 말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에 관해, 그분 자신 안으로 계시하신 것은 그 시잠에서 남겨진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믿어야 했다. 유한한 사람은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에 관해 계시하시지 않고 떠나시기로 하셨던 것을 이해하고 설명할 입장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영역 안에서 어떠한 것을 계시하시지 않기로 하신 이유가 있다. 유한한 사람이 계시된 것을 넘어가려는 것은 완전히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꾸짖을 것이다.

 

요한복음 16:7-11절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10일 후 오순절 날에 보내지실 그분에 관한 그영의 사역과 관계가 있다. 이 그영의 사역은 당연히 창세기 24장의 예표에서 볼 수 있었던 장면이었을 것이다. 창세기 23-25장에서 정해진 전체적인 예표의 틀 안에 있는 이 그영의 사역은 두 시점 사이에서 일어날 것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한 시점은 사라가 죽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따로 떼어지게 됐고, 다른 한 시점은 아브라함이 재혼함으로서 이스라엘이 회복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두 시점 사이에서 일어나는 메소포타미아에서의 엘리에셀의 사역은 오늘날 그영의 사역을 유일하게 예표할 수 있다. 이런 방면에서 요한복음 16:7-11절에 있는 교회시대 동안 일어날 그영의 사역과 관련된 그리스도의 계시는 1,400년 전 모세가 창세기 24장에 정한 것에 따른 것이다.

예표에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아들 이삭의 신부를 얻기 위해 메소포타미아로 자기의 노종을 보냈다. 실제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얻으려고 세상으로 성령을 보내셨다. 그영에 의한 이 사역의 수행과 완성은 예표에서 일어났던 대로 실제에서 이뤄질 것이다.

 

1) 그영의 사역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6:7-11절에서 세 부분으로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중심 메시지는 장차 그영의 사역에 관한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후 그영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실 것이다(16:7-8). 이 세 부분으로 책망하시는 그영의 사역은 짧은 말씀으로 설명되었다.

죄에 대해서라 함은 ....... 때문이요, 의에 대해서라 함은 ....... 때문이요, 심판에 대해서라 함은 ....... 때문이라.”(16:9-11)

꾸짖다로 번역된 헬라어 엘랭코elegcho는 더 광범위한 의미로 쓰인다. “엘랭코elegcho꾸짖다, 책망하다, 드러내다, 폭로하다, 바로잡다로 나타낼 수 있다. “엘랭코elegcho는 진짜 지식, 올바른 지식, 그리고 진리에 대한 지식을 알게 한다.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그영의 사역은 사람이 깨닫는 범위 안에서 문제들을 드러내기 위해 꾸짖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자의 좋은 예는 후자를 위한 것이다. 바울은 디도서 처음 부분에 디도에게 말을 했다. 바울은 자기들이 이미 가르쳤던 신실한 말씀을 빨리 받아들이지 않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말을 했다. 그들은 다루기 힘든 자들이 되었고, 헛된 말을 하는 자들이 되었으며, 속이는 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또 믿음을 뒤엎고, 말살하고,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당시에는 한 도시의 다양한 장소에서 집 교회로 모였다. 오늘과 같이 대형 교회당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이 가르쳐서는 안 되는 그런 가르침을 교회 안에 퍼뜨렸다(1:9-11). 바울은 이런 사람에 대해 디도에게 말을 했다.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것은 그들이 믿음 안에서 건전한 자가 되라.”(1:13).

여기서 꾸짖으라는 명령이 바로 엘랭코elegcho. 이 꾸짖는 일을 하는 디도는 그영의 사역 일부를 수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수행하는 꾸짖는 일은 하나님께서 사용하라고 믿는 이에게 주신 유일한 것이었고, 그영의 지시에 의한 것이다. 디도는 그영의 능력으로 행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 영께서 주시는 말씀을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영의 말씀으로 특정한 사람들을 꾸짖었을 것이다. 그의 꾸짖음은 그들 각자가 건전한 믿음을 가질 것이라는 관점으로 행해졌을 것이다.

그 결과는 히브리서 11:1절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엘랭코elegcho의 명사형인 엘랭코스elegchos가 사용되었다. “엘랭코스elegchos밝혀지다. 드러나다.”로 더 나은 번역이요,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말씀을 통해 그영은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을 드러내신다. 그렇게 되면 믿음으로 생활할 것이다. 히브리서 11:1절의 내용은 혼의 구원과 관계가 있다(10:35-39).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하시는 그영은 창세기 24장의 예표와 완전히 일치하는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으시는 일을 하신다.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으시는 그영의 사역은 빛에게로 죄에 대해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한 문제를 가져올 것이다. 그분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신부로서 참여하게 될 혼의 구원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으실 것이다. 그영께서는 그분께서 이루어 내도록 보내어지신 사역의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얻기 위해 이 사역을 수행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6:7-11절에서 묘사된 그영의 사역은 구원받지 않은 자들과 관계가 있을 수 없다. 어려울 때 하나님의 사람들을 돕도록 보내어지신 그분의 사역은 오로지 구원받은 자들 가운데서 미래의 사역과만 관계가 있었다. 이것은 예표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오직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서...”( 24:4)

또 이것은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내가 떠나면 내가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16:7)

비록 구원받지 않은 자들이 그영의 심판 사역이 있겠지만 동시에 그영의 이 심판 사역은 막 수행하려고 하였던 사역을 행하도록 그영을 보내시는 것과 관련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4,000년 동안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방면에서 구원받지 않은 자들 가운데서 그영의 사역은 중단되는 것 없이 계속되고, 변하지 않았다.

 

2) 세상

그런 다음 그영께서 먼저 죄를 언급하심으로 세상에 있는 자들을 꾸짖을 것이다. “세상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에 의해 잘못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리스도는 불법과 죄로 죽은 세상에 있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꾸짖으라고 그영을 보내실 것을 말씀하시고 계셨다.

세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코스모스kosmos. “코스모스kosmos는 성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쓰였다. “코스모스kosmos는 항상 성경 문맥을 이해해야 한다. 간혹 세상은 물질적인 세상으로 언급된다(1:9-10). 또 사탄에게 지배를 받는 세상 시스템을 말할 때도 세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18:36; 요일 2:15). 또 다른 곳에서는 세상을 세상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기도 한다(3:16; 7:7). 세상에 있는 사람으로 말할 때 코스모스kosmos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 그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방면에서 코스모스kosmos는 모든 사람을 포함할 수도 있고,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다. 코스모스kosmos는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면 문맥적으로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 3:16절에 있는 세상은 세상에 있는 모든 자를 포함하는 코스모스kosmos. 하나님은 모두에게 예수님을 주셨다. 하지만 요한복음 18:20절에 있는 코스모스kosmos는 세상에 있는 모든 자가 아닐 수 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의 땅에 속한 사역을 하시는 동안 자주 세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 땅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사역하시는 데만 꼭 필요로 했던 단어다. 이스라엘 땅 안팎에 있던 이방인, “코스모스kosmos에 있는 이방인들은 포함하지 않았다(10:5-6; 15:24). 요한복음 16:8절에서도 코스모스kosmos가 쓰이는데 이는 요한복음 18:20절에서 보았던 것처럼 문맥적으로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16:8절의 코스모스kosmos는 그영께서 보내어질 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된다. 그영께서 보내어진 자들은 구원받은 자들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한새사람을 구성하는 자들이다(12:19). 또 이런 유형을 따라 코스모스kosmos는 골로새서 1:6절에서도 사용되었다. 골로새서 1:6절은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왕국말씀을 전하고 있다. 바울 시대 동안 이 메시지 선포는 구원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어떤 연결도 될 수 없었고, 관계도 없었다. 다만 그 메시지는 코스모스kosmos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 메시지는 구원받은 자들에게만 전파되는 메시지였고 아직도 남아있는 메시지다.

 

죄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께 멀어진 자들에 관한 것보다 훨씬 더 폭 넓게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죄 질문을 다룬다. 성경이 죄를 다루는 방식은 복음을 다루는 방식과 유사하다. 복음이라는 단어는 80% 이상이 신약성경에 나타난다. 복음은 오로지 구원받은 자들에게 선포되는 좋은 소식이다. 성경은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관련된 죄의 모든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유사한 특성이 있다. 성경의 죄에 대한 메시지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지시한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지시하는 것이다.

창세기 25장은 주로 아브라함에게 흐르는 셈의 혈통을 다룬다(25:5b-11a). 셈의 혈통은 아브라함을 비롯해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12아들들로 흘렀다(25:11-34). 죄를 다루는 구약성경은 셈의 후손에 관한 중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인도해 냈을 때 죄 문제는 유월절 어린양들을 죽이는 것과 그 피의 적용으로 시작한다(12:1-51). 한 방면에서 죄 문제는 이 부분에서 끝났지만 다른 방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죄 문제에 대한 이 양면은 오늘날 실제 안으로 전달되었다. 유월절 어린양께서 살해되셨다. 이 어린양의 피의 적용을 믿음으로 사람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나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미 죽음이 존재하고 있던 곳에 생명을 가졌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의 영원한 생명 속에 죄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다시 그 문제에 대해 한 요인이 될 수 없다.

사람의 영원한 구원은 과거에 기초한다. 영원한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끝낸 사역이다.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죽으셨고, 피를 흘리셨다. 사람의 영원한 구원은 과거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생명이 없는 자들에게 생명을 호흡하신 그영께서 끝낸 사역이다. 그리스도와 그영의 사역은 오늘날 세상에서 구원 받은 자들과 영원한 구원과 관련이 있다. 이는 과거에 수행된 사역이고, 끝이 난 사역이다. 끝난 상태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나간 자들이 영원한 구원을 오늘날 소유하고 있는 한 더 이상 죄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구원받은 자들에 대한 죄 문제는 또 다른 영역에 존재한다. 구원받은 자들의 죄는 현재와 미래의 구원과 관련이 있다. 현재와 미래의 구원은 혼의 구원이다. 혼의 구원은 과거에 일어난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과거에 일어난 구원은 영의 구원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영의 구원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혼의 구원이라는 단계가 남아 있는 것이다. 혼의 구원은 영생과는 관계가 없다. 혼의 구원은 하늘에서의 상급과 관계가 있다.

모세 시대에 죄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존재했다. 그로 인하여 출애굽기 12장에서 처음 난 자들은 죽임을 당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레위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었던 제사장 사역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또 매년 속죄의 날에 죄 사하는 대제사장의 사역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맏아들의 죽음에 대한 예표에 따라 오늘날 교회시대에도 이 같은 방면이 기독교에 존재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늘에 속한 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서 오늘날 그리스도의 사역이 필요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은 남아 있다. 위로부터 태어났지만 그들은 옛 죄 본성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요일 1:8-10). 그들은 이 죽음의 몸 안에 있는 한 이 옛 죄 본성을 소유할 것이다(7:24).

이 사실은 모세 시대에 흘린 피를 바탕으로 하는 대제사장 사역을 필요하게 한다. 또 오늘날 흘린 피를 통한 대제사장 즉 그리스도의 사역을 필요하게 한다. 모세 시대에 이 제사장 사역은 어느 날 제사장들의 왕국과 그 안에 있는 상속으로 땅에 속한 영역에 들어가기(19:5-6; 3:28; 11:8) 위해 이미 맏아들의 죽음을 체험한 자들에 대해 깨끗함이 되었다(12:1-51).

오늘날 교회시대에도 이 제사장 사역은 맏아들의 죽음을 체험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어느 날 왕들이요, 제사장들로서 하늘에 속한 영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영역에도 이전에 약속하신 상속이 있다(1:3, 11; 1:5, 12; 5:10).

요한복음 13장에서 그리스도는 수건을 잡아 자신의 몸을 묶고 대야에 물을 받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다. 이 사역은 아론이 성소에서 하던 사역이었다. 이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는 이미 과거에 깨끗해졌던 자들을 위해 오늘날에 깨끗해질 필요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왔을 때 베드로는 자기의 발을 주님이 씻는 것을 거절했다.

절대로 주께서 내 발을 씻지 못하시리이다,”(13:8a).

그는 그의 말 속에 단호함이 있었다. 그는 강조하기 위해 이중 부정을 했다. “결코 않다를 뜻하는 헬라어는 오우 메ou me.

절대로, 결코 주께서 내 발을 씻지 못하실 것입니다.”

어쩜 주님, 전 주님께서 발을 씻기시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습니다. 절대 제 발을 씻으라고 발을 물에 담글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그런 베드로에게 반응하셨다. 예수님은 그분께서 하시고 계신 것에 대한 진실을 밝히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나와 함께할 몫이 네게 없느니라.”(13:8b)

이 일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실 깨끗케 하는 사역을 상징했다. 베드로가 이 일을 하시는 그리스도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베드로는 그분과 함께 할 부분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는 일은 영원한 생명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 일은 오히려 선포되는 메시지와 관계가 있었다. 그 메시지는 왕국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 왕국 메시지는 구원받지 않은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자들을 위한 것이다. 가르쳐지는 진리는 구원받은 자들과 관계가 있었다. 이 진리는 하늘에 속한 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사람들을 구원한다. 이 사역은 오늘날 교회시대과 창세기 24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부를 얻기 위해 그영께서 세상에 계신 동안에 일어난다. 이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더럽게 오염된 것을 씻도록 허락하는 구원받은 자들과 관계가 있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발을 씻는 것은 옛 죄 본성과 그리스도인이 사는 오늘날의 세상과 접촉함으로 더럽혀진 것을 씻는 것과 관계가 있다. 아마도 제자들의 발은 그들이 걸어서 바닥과 접촉함으로 더러워졌을 것으로 본다. 짐작컨대 그들의 발이 아니라 그들의 혼이 더러워졌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성소에서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몫은 없을 수 있다. 이 이유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계시되었다.

에베소서 5:25-27절에 따르면 과거에 그리스도는 교회에게 그분 자신을 주셨고(25), 오늘날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하게 하려 하시고”,(26) 장차 또 그것을 점이나 주름이나 그런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자기를 위해 제시하려 하심이며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27)고 한다.

왕국에서 그분과 함께 할 몫이 있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은 베드로는 즉시 자기의 생각을 바꾸고 말했다.

주여,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소서.”(13:9)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이미 씻긴 자는 모든 곳이 깨끗하므로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3:10a).

헬라어 로우오louo니프토nipto는 씻는 것에 대한 다른 형태로 함께 쓰였다. “로우오louo는 완전히 몸을 씻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니프토nipto는 손이나 발 등이 오염됐을 때 부분만을 씻는 것을 나타낸다. “니프토nipto는 요한복음 13:8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고 계셨을 때 사용하신 단어다. 요한복음 13:8-10절에서 가르쳐진 것은 구약성경 예표에서 유래된 것이다. 구약성경의 제사장이 그 직분에 들어갔을 때 이미 그의 온 몸은 씻었으며, 반복해서 씻지 않았다. 온 몸을 씻는 것을 출애굽기 29:4; 40:12-15절에 묘사되어 있는데 70인역은 여기서 로우오louo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성소에서 제사장들이 일을 하려면 몸의 일부분을 씻어야 하는데 70인역은 출애굽기 Ex. 30:21; 40:30-32절에서 니프토nipto를 사용했다.

다가오고 있는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어느 날 왕들과 제사장들이 될 자들에게도 같이 적용되는 단어다. 완전히 씻는 것 즉 로우오louo는 과거에 일어났다. 이 씻음은 반복될 수 없다. 주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나갔다. 하지만 완전히 씻은 적이 있다면 부분적으로 씻는 것 즉 니프토nipto는 완전히 씻은 후에 일어나야 한다(요일 1:6-2:2).

로우오louo는 동사의 완료시제다. 이미 몸이 씻긴 상태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13:8). 베드로는 이미 과거에 씻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그는 침례를 받아 죄, 더러움에서 씻긴 상태였다. 다음부터 어떤 유형의 씻는 행위는 과거에 완료된 것을 다시 행할 이유가 없었다. 전신을 씻는 행위는 더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오늘 씻는 것은 니프토nipto. 이것은 이미 전신을 씻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그분과 함께 몫을 차지한다면 일어나야 한다. 성령님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문제를 빛 비추시기 위해 세상에 계시다. 그영의 사역에 대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는 저들이 나에 대해 믿지 않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말씀하셨다(16:9). 그 말인즉슨 저들이 내 안에서 믿음을 훈련하지 않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말하신 것이다(14:1; 1:16-17).

믿음믿는다는 헬라 원문에서 같은 단어로 쓰인다. “믿음은 명사요, “믿는다는 동사다.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야 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한편으로 신앙이라는 명사도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야 하는 믿음을 훈련하는 것이다.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이 분명하게 계시하는 이유다(10:17). 이는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해 하늘에 속한 성소에서 사역하시는 보혜사”,의로우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긍휼의 자리에서 대제사장에 속한 사역을 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있는 죄를 위해 속죄하시는 분이시다(요일 2:1-2).

이미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땅위로 보내셨다. 땅위에 오신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는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그영이 땅위로 보내지셨는데 그분이 파라클레토스Parakletos. 하지만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분의 승천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의 사역은 하늘에서 계속되었다. 교회시대의 그리스도는 하늘에 있는 성소에서 사역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의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두 파라클레토스Parakletos가 있다. 파라클레토스Parakletos가 하늘에서와 땅에서 나란히 그리스도인들을 돕고 계시다.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의 사역들은 완전하게 서로를 보완한다. 두 사역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땅 위의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는 사역의 일부를 수행하고 계시고, 하늘의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는 땅 위의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에 의해 수행하시는 사역이 완성되도록 사역의 나머지를 수행하신다.

 

의에 대하여

 

의는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것을 따라 살고, 올바른 생활을 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것이 육체의 사람보다 영의 사람을 따라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입혀진 혼인 예복은 의의 행위로 만들어졌을 것이다(19:7-8). 의의 행위는 옳은 생활로 돌아가고, 말씀에 계시된 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16:10절에서 그영의 사역에 대해 말씀하신 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의로우신 분이시오, 살아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하늘로 가셨다. 이 땅에서 부재하신 동안 참되신 의는 쓰여진 말씀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의이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 안에 임재 하신다. 그영께서 말씀이 말해야 하시는 것을 모든 방면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도록 오늘날 세상에 계신다. 의로우신 분이 부재하시는 동안 의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를 통과시키기 위해 그영께서 꾸짖기 시작하셔야 하신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말씀께서 의에 대하여 말씀하셔야 하는 것에 대해 빛 비추는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지시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아들들로서 어린 아이를 훈련하는 것이요, 장차 아들 신분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맏아들들이어야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공동상속자로서 왕국 안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12:5-8, 23). 히브리서 12:14-17절은 아들들로서 어린 아이를 훈련하는 과정을 실패할 가능성과 관련해 경고하고 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따르라. 그것들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부지런히 살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하고 쓴 뿌리가 돋아나 너희를 괴롭게 하거나 그것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더럽게 되지 않도록 할지니 이것은 음행하는 자나 혹은 먹을 것 한 조각을 위해 자기의 장자권을 판 에서와 같이 속된 자가 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 뒤에 그가 복을 상속받고자 하였으되 거절당하였으니 그가 눈물을 흘리고 염려하며 뜻을 돌릴 곳을 구하였으나 그것을 찾지 못하였느니라.”

이것은 혼의 구원에 대한 것이 될 것이다. 혼의 구원은 그리스도인이 혼인 예복을 소유하고, 신부로서 연회장에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보좌 위에 앉아 계신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그분께서 그분의 보좌에 앉아 계신 기간은 시편 110:1절에 묘사됐다.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그리스도의 발받침으로 삼으실 때까지다. 또 창세기 24장에서도 그 기간을 묘사했다. 오늘날 그영께서 세상에 계시면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으시는 것을 마칠 때까지다.

하늘에 있는 보좌에 안으신 그리스도는 어느 날 그분의 보좌 위에 그분과 함께 앉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하신다(3:21). 그리스도는 오늘날 교회시대에 그영께서 그분의 신부를 얻으신 후, 또 다니엘의 이뤄지지 않은 70주를 완성하신 후 이 보좌에 오르실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은 아들에게 모두가 복종할 곳에 데려오실 것이다. 교회시대 동안 그영의 부르심과 지시에 주의를 기울인 수많은 그리스도인은 다가오고 있는 시대에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오를 자격을 갖춘 자들 중에서 자기를 발견할 것이다.

 

심판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분의 사역으로 이 세상의 왕이 심판받았기 때문이라.”(16:11)는 것을 빛 비추러 심판을 가지고 오시는 그영을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왕은 사탄이다. 헬라원문에서의 워딩은 사탄이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계시한다. 심판을 받았다는 완료시제다. 이 번역은 문자적으로 읽어야 한다.

이 세상의 왕이 심판받았기 때문이라.”(16:11)

완료시제가 사용됨으로 이 말은 과거의 심판인 것이다. 이 심판은 끝이 난 상태로 존재한다.

오늘날 심판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사역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16:27; 고전 3:12-15; 고후 5:10-11). 이 심판에 대한 것은 요한복음 16:7-11절에 계시된 뼈대가 된다. 이 심판은 죄와 의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재임 중인 통치자는 이미 죄와 의에 대해 심판을 받았다. 사탄이 점령한 후 왕국을 물려받도록 불려나온 자들 역시 죄와 의에 대해 심판을 받았다. 사탄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심판을 실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심판받은 이후에 일어날 것이다.

죄와 불의는 재임 중인 통치자 즉 사탄에 대한 거절과 자격상실로 결론을 맺게 되고, 또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국상속을 받으러 불려 나온 수많은 그리스도인에 대해 거절과 자격상실로 결론이 날 것이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육체, 그리고 마귀를 이기는 것 것을 보여 줄 것이다. 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올라 왕국에 있는 상속을 받아 들 것이다.

파라클레토스Parakletos께서 오늘날 한 목적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사역하시기 위해 세상에 계신다. 또 다른 파라클레토스Parakletos께서 같은 목적으로 그리스도인들과 동역하기 위해 하늘에 계신다. 그리스도인들은 각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의 사역에 집중하거나 또는 무시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영원한 생명에는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다가오는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기다리는 데는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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