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신부를 찾으라

신부를 찾는 방법

Hernhut 2019. 5. 7. 11:06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연로하니라. 주께서 모든 일에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니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종 곧 자기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던 종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네 손을 내 넓적다리 밑에 넣으라. 내가 너로 하여금 하늘의 하나님이시며 땅의 하나님이신 주를 두고 맹세하게 할 터인즉 너는 나와 함께 거하고 있는 가나안 족속의 딸들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지 말고 오직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라, 하니(24:1-4).

 

창세기 24장은 하나님께서 사람과의 거래를 통해 시대를 완전히 분리하고 나누는 일과 관계가 있다. 창세기 24장에 전개된 일들은 두 시대 사이에서 일어났다. 하나는 창세기 23장에서 사라가 죽었다. 사라가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따로 떼어 놓으셨다는 것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창세기 25장에서 아브라함이 그두라와 재혼을 했다. 아브라함이 재혼을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거래를 재개하신다는 말이다. 창세기 24장은 그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은 시간과 아브라함의 재혼 사이에서 이삭의 신부를 얻도록 메소포타미아로 그의 가장 나이 많은 종을 보냈다.

오랜 후 이 일은 교회시대에 일어날 일과 관계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따로 떼어 놓으신 때와 이스라엘과 회복하실 때 사이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신부를 얻도록 하시려고 세상으로 성령을 보내셨다. 예표에서 아브라함은 그의 모든 소유를 노종에게 맡겨 메소포타미아로 여행하도록 했다. 노종이 여행을 떠나기 전 아브라함은 여행의 본질에 관해 지시했다. 노종은 메소포타미아로 여행하는 목적은 한 가지 뿐이었다. 그의 임무는 이삭의 신부를 얻는 것이었다. 그 노종은 신부가 아브라함의 친척 중에 선택되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종이 메소포타미아로의 여행을 떠나기 전 아브라함은 자기의 넓적다리에 종의 손을 넣게 하고 하나님으로 맹세하게 했다. 이 맹세는 아브라함의 가족에게서 자기 아들의 신부를 얻게 하겠다는 것이다. 신부는 가족의 범위로만 얻는 것으로 좁혀졌다. 가족 이외의 여인들은 신부가 될 자격이 되지 못했다(24:1-10a).

넓적다리나 허리는 생식능력을 상징한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의 손을 자기의 넓적다리에 넣으라고 한 것은 아브라함의 아들로 후손을 얻게 하라는 강한 의지의 메시지였다. 창세기 46:26절에서 야곱의 후손은 그의 허리에서 난다고 기록되었다. 창세기 24:2, 9절은 이삭의 아내가 아브라함의 후손을 잇도록 맹세하는 아브라함의 노종과 관계다. 이것은 환유법이다. 이 맹세는 아브라함의 친족에서 취해야 하는 이삭의 아내와 관계가 있었다. 친족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출산 능력과 연결되었다. 아브라함의 안중에 친족 외에 사람들은 없었다.

그 같은 일은 정확하게 오늘날 교회에서의 그영의 사역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영은 오늘날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으신다. 신부는 하나님의 가족에서 산출되어야 한다. 위로부터 난 자이어야 신부가 될 수 있다. 신부는 출산 능력이 있는 거룩한 곳에서 선택되어야 한다. 이런 거룩한 생식능력은 하나님께로 나온다. 하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의 신부를 찾는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브라함의 더 큰 아들 그리스도를 통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을 따른 상속자들이다(3:29). 아브라함과 그의 노종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는 것이었다. 그런 관계가 오늘날 하나님과 성령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창세기 24장은 메소포타미아로 가는 노종의 긴 여행, 신부를 찾고, 신부에게 지참금을 주고, 다시 신부와 함께 가나안으로의 긴 여행을 설명한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으로 다시 와 노종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얻은 여인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가 되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끝난다(24:10b-67). 창세기 24장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교회시대가 끝나갈 무렵과 끝난 직후 일어날 일들이다.

이스라엘은 따로 떼어졌다. 한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그분의 거래를 멈추셨다. 하나님의 거래가 중지된 것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는 불순종 때문에 취하신 조치였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제안된 왕국을 거절했고, 그리스도의 초림 때 유대의 왕이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절정이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과의 거래중지는 창세기 24장에서 사라의 죽음을 통해 일어난 것처럼 교회 산출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따로 떼어지는 것을 야기했다. 이스라엘이 따로 떼어진 후 하나님은 땅으로 그영을 보내시기 전 그분의 소유를 유일하게 그영에게 맡기셨다. 그영은 유일한 목적만을 가지셨다. 그영이 가지신 유일한 목적은 예수님의 신부를 얻는 것이다. 그영은 하나님의 친족 즉 교회 가운데서 신부를 찾고, 얻도록 특별한 지시를 받아 가지고 오셨다. 예표에서의 이런 다양한 일들이 실제에서 똑같아야 하는 것이 주된 쟁점이다. 하나님의 그영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아버지께 속한 모든 것을 맡으셨다(24:36; 16:15). 하나님의 그영은 이스라엘과의 거래가 완전히 중지된 시대에 이스라엘에게서 분리된 사람들에게 사역을 수행하도록 세상으로 보내어지셨다. 또 하나님의 그영은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방식을 따라 이 사역을 수행하신다.

내가 아직 너희에게 말할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그것들을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분은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자기가 들을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 그분께서 나를 영화롭게 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내게서 받아 그것을 너희에게 보이실 것이기 때문이라. 아버지께 있는 모든 것은 내 것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분께서 내게서 가져다가 그것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16:12-15)

이 구절은 예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완전하게 부합된다. 이 말씀은 교회시대에서 일어날 그영의 사역에 대한 본질을 분명하게 계시한다. 그리스도의 신부를 얻으시는데 그영께서 오신다는 의미는 그영께서 하나님의 소유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요, 신붓감에게 그 소유를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그분의 소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되었다. 그영의 신붓감을 찾는 이 사역은 구원받은 자들 가운데서만 수행될 수 있다. 구원받은 각 사람만이 모든 진리로 인도된다. 구원받은 각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계신 그영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된다. 구원받은 사람은 각자의 깨달음으로 이 말씀을 열게 된다. 이것은 구원받은 각자가 아들에게 속한 것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2:14).

A.D. 33년 오순절 날에 세상으로 성령을 보내신 하나님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나 은혜의 구원과 관계가 없다. 오히려 예표에 따르면 A.D. 33년 오순절 날 일어난 일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고, 얻음과 관계가 있다. 은혜의 구원은 A.D. 33년 오순절 날의 성령의 사역에는 들어가지 못했고, 교회시대인 오늘날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은혜의 구원은 그영의 사역과 완전하게 분리된다. A.D. 33년 오순절 날 보내어진 그영의 사역과 은혜의 구원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고, 지금도 관계가 없다. 잃어버린 자에 대한 구원에 관한 그영은 항상 세상에 계셨다.

또 사도행전과 21권의 서신서는 한 사람을 말해야 한다. 이것은 창세기 24장을 해석한 내용이다. 사도행전과 21권의 서신서들은 창세기 24장이 창세기 21장에서 25장의 중심내용인 것처럼 신약성경의 중심내용이다. 두 부분이 서로 유사하다. 두 부분이 이스라엘이 따로 떼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사람과 거래하시는 것과 관계가 있다. 두 부분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거래를 중지하신 시대와 관계가 있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가운데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한 백성을 취해 내실 때와 관계가 있(15:14).

이런 방면에서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은 이스라엘이 따로 떼어져 있을 때 이스라엘과 별개의 독립체와 사역을 수행하시기 위해 세상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을 시작된다. 이 일은 창세기 24장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이 다뤄져야 한다. 신약성경의 이 부분은 성경의 중심부분이다. 이 부분은 구약성경에서 설명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부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다양한 일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오순절 날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세상으로 보내신 이유는 창세기의 기본적인 자료에 분명하게 계시되었다. 오순절 날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보내시기 시작해 서신서에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은 구약성경의 기본적인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다. 후자의 계시는 전자 위에 건축된다. 후자의 계시를 아는 것은 전자의 어떤 지식을 갖는 것이다. 전자의 지식과 계시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후자의 계시를 깨닫는데 있어 부정적인 반사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창세기 24장과 사도행전, 서신서 이 두 부분은 정확하게 같은 것을 다룬다. 창세기 24장은 뼈대요, 틀이요, 기본적인 것이다. 또 사도행전, 서신서는 토대 위에 덧붙여 건축하는 것이다. 이 신약 부분은 기본적인 계시, 힘줄, , 피부 등을 뼈대에 덮는 형태가 된다.

이 모든 것은 요한계시록에까지도 미치게 된다. 요한계시록 1-4장은 오로지 그리스도인들과 관계가 있다. 요한계시록의 처음부분은 교회시대가 끝날 때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심판대와 관계가 있다. 교회가 하늘로 올라간 후 심판대에서 나오는 결정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이 전개되고 있다. 이 일들은 서신서에 이미 정해진 일들이지만 요한계시록 4장에서 길게 다뤄졌다(고전 3:11-15; 15:51-58; 고후 5:9-11; 살전4:13-5:9).

요한계시록 4장을 지나 5-19장까지는 야곱의 고난에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다. 이 부분은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하나는 상속 구속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회개의 장소로 나오게 되고, 또 다른 하나는 이방세계의 능력을 제압하는 내용이다. 이 때 7년 환란을 통해 상속 구속이 완료가 되고, 이스라엘은 민족적 회개가 이어지고, 깨끗해지고, 회복되고, 그리고 두 혼인이 일어날 것이다. 아버지는 그분의 아내로 다시 이스라엘을 취할 것이고(25:1-4), 아들은 그영이 이미 아들의 아내로 얻은 신부를 취할 것이다(24:1-67; 4:1-17; 9:24-27).

 

은혜의 구원

 

이미 말했듯이 오순절 날에 성령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은 믿음으로 받는 은혜의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통과하는 인류구원은 성경의 커다란 불변성 중의 하나다. 타락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공급하심은 창세기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다. 이것은 절대 불변의 법칙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이 법칙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시대적 견지에서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시대에 맞게 변한다. 그영의 사역 역시 시대마다 바뀐다. 오늘날 교회시대에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는 그영의 사역은 특별히 이 시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은혜의 구원은 시대의 문제가 아니다. 은혜의 구원은 시대마다 사람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다양한 사역에 완전하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은혜의 구원은 시대 속에서 어떤 하나님의 움직이심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은혜의 구원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의 그영께서 사람의 구원을 점령하시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는 그영의 계시된 사역과 관련해 기초를 놓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세기 1:1절에 이 기초를 놓기 시작하셨다.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은 그 땅위에 사탄을 두셨다. 사탄은 이미 타락한 상태였다. 사탄은 하나님의 왕국에 있는 수많은 통치자 중 하나였다. 사탄은 우주 가운데 수많은 통치자 중 하나였다. 사탄이 더 높은 제왕의 위치에 있기를 원했고, 가장 높은 자가 되려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정률에 반대하고, 하나님의 법칙에 벗어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가 다스리게 하고, 통치하게 했던 영역인 이 땅은 어두움으로 그의 왕국이 덮여 있었고, 황폐함, 혼돈으로 줄어있었다(1:2a; 14:12-17; 45:7; 28:14-19).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1:2a)

이 땅이 타락하고, 황폐화 된 영역의 상태로 얼마나 길게 존재했는지에 대해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사탄이 황폐화 된 땅위를 다스릴 수밖에 없었지만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이 깊음의 표면 위에 있던 기간 내내 사탄은 홀()을 계속해서 붙잡고 있었다.

성경적인 통치의 원칙은 통치자가 현재 뿐만 아니라 홀을 취하고 보좌에 오를 준비가 되었을 때까지 계속 홀을 붙잡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아담과 사탄이 맞부딪혔던 이야기, 다윗이 사울과 맞부딪혔던 이야기, 예수님께서 초림 때 사탄과 맞부딪혔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타락한 왕권을 가진 자를 대체하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신 데 이어 황폐화된 영역을 회복시키기 시작하신 그날 오셨다. 하나님께서 황폐화된 영역을 회복시키는 데 있어 사용하신 방법은 그분께서 다음 타락한 창조를 회복시킬 모형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모형, 예표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완벽한 것을 정하셨기 때문에 어떤 것도 바뀔 수 없다. 이 회복하시는 모형으로 하나님께서 사역하심이 창세기 1:2b-5에서 시작했고, 그영의 사역이 소개된 곳이다.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나누시고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더라.”(1:2b-5)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떤 계시된 방식을 통해 회복 사역을 시작하셨고, 그분 자신이 말씀하심에 이어서 그영께서 움직이셨다. 어둠만이 만연되어 있었던 곳에 빛을 산출하시고 그 빛을 좋았다고 선포하셨고, 빛과 어둠 사이를 나누셨다. 그리고는 다음 다섯 날을 회복사역을 하셨다(1:6-25). 마지막 여섯째 날에 하나님은 반역자요, 타락한 이 땅의 통치자를 바꾸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종류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그는 사탄을 대신해 홀을 붙잡고, 회복된 영역을 다스리고 있었다(1:26-28).

하지만 사탄은 사람을 타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람이 홀을 붙잡는 데 자격을 상실시키고, 타락케 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사탄의 손에 홀을 넘겨주었다. 그러므로 사탄은 계속해서 통치를 했다. 반면 사람은 더 이상 사탄을 대체할 위치와 입장이 되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다시 한번 자기를 닮은 타락한 사람을 다루셔야 했다. 타락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은 타락한 상태로 다시 한번 창조물을 가져오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사탄이 타락한 때에 행하신 것들이다. 하나님께서 두 번 그렇게 하신 후에 그분은 타락한 창조물을 맡으셨다.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신 것이다.

첫 번째 타락은 창조물과 더불어 사탄과 그의 천사들과 관계가 있었으며, 두 번째 타락에 있어서는 창조물과 사탄을 대체하기 위한 창조된 사람과 관계가 있다. 사탄이 타락했을 때 그와 함께 통치하기 위해 천사 이 함께 타락했다. 사탄은 천사들을 유혹에 빠뜨렸다. 그의 유혹에서는 빠져나올 수 없다.

하지만 사탄이 타락한 이후 사람이 타락했을 때 문제들은 현저하게 달라졌다. 하나님은 즉시 회복되는 방법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타락한 사람을 회복시키는 데 사탄이 타락했을 때 사용하신 방법을 주셨다. 하나님은 이미 사탄이 타락했을 때 이 땅을 회복하신 방법을 가지고 계셨다. 거기에 어떠함을 가미해 더 좋은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사람이 회복되는 방법을 주신다. 창조물에 대해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첫 번째 움직임은 타락한 창조물 위를 하나님의 그영이 움직이시는 것과 관계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영이 앞에서 타락한 창조물 위에서 움직이셨던 것처럼 타락한 사람의 회복을 위해서 타락한 사람 안에서 그영이 먼저 움직이셔야 한다. 그런데 사탄, 천사들과 좀 다른 사람은 어떻게 회복되었는가? 말하자면 그영이 사람 위를 움직이셨는가? 그 답을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해 보는 것이다(고전 2:9-13). 사람을 회복하시는 그영의 사역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으로 읽어야 하는 성경은 창세기 2:7절이다. 창세기 2:7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땅의 먼지로 아담을 만드셨을 때 아담은 생명 없이 창조되었다. 마치 아담은 어느 광장에 세워진 동상과 같았다. 아담은 죽은 독립체였다. 에덴동산에 동상으로 세워졌었다. 계시된 한 가지 방법으로 생명이 그에게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그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셨고, 사람이 산 혼이 되었다.”

창세기 2:7절에서 하나님의 움직이심은 또 다른 변할 수 없는 원칙을 세우신다. 하나님은 어떻게 생명 없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입하시는가? 그 답은 하나님의 호흡이다. 하나님은 동상같이 생명 없는 존재에게 생명의 호흡을 하셨다. 생명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호흡과 끊을 수 없는 관계다. 하나님은 사람 안으로 호흡을 하셔서 생명을 주입하신다. 생명을 주입하시는 이 방법은 성경에서 바뀔 수 없다. 창세기 2:7절 이후 생명이 사람에게 주입되는 때는 오로지 한 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의 호흡을 통해서 생명이 주입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얼굴이 새파랗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 때 용기 있는 한 젊은이가 달려들어 응급처치로 가슴을 여럿차례 압박했다. 그래도 깨어날 줄 모르자 다른 청년이 달려들어 입안을 벌리고 호흡을 해 주었다. 몇 번을 그렇게 하자 다 죽어가던 그는 머금고 있던 물을 토해내며 기침을 하고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호흡은 이와 같은 것이다.

오늘날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불법점유와 죄들로 죽어있다. 하나님은 오늘날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명을 주입하실까? 그런 질문에는 성경적인 대답만 있다. 성경적인 대답은 창세기 2:7절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생명이 없는 자에게로 호흡을 하심으로 생명을 주입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영의 사역이 창세기 1:2b-5절에 나타나 있다. 에 대한 단어와 호흡에 대한 단어는 히브리어 루악ruach와 헬라어 프뉴마pneuma와 같다. 예를 들어 창세기 1:2b절에 있는 영이라는 단어와 에스겔 37:8-10절에 있는 호흡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원문 루악ruach과 마찬가지로 70인역 헬라어 원문 프뉴마pneuma가 같은 뜻으로 쓰였다. 신약성경 헬라어 원문에서는 프뉴마pneuma가 호흡으로 드물게 쓰였다. 그렇지만 프뉴마pneuma가 신약성경에서 이런 방식으로 쓰였을 때 번역가들은 예외 없이 영으로 오역했다(8:55; 살후 2:8; 2:26). 그래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이들이 오해하게 됐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의 도움으로 구원받지 않은 사람 안으로 생명을 호흡하신다. 이런 면에서 그분의 영은 하나님의 호흡이시다. 이미 보았던 것처럼 창세기 1:2b절에 의하면 그영은 먼저 황폐화된 창조물을 회복시키셔야 한다. 타락한 창조물의 회복과 관계가 있는 그영의 움직임은 창세기 1:2b절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의 사역과 관련된 정확한 본질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또 창세기 8:1절에서 노아의 홍수가 끝난 후에 회복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물이 마르도록 하시려고 바람을 만드셨다. 이 때 이 바람은 히브리어 루악ruach으로 영이요, 호흡이다. 창세기 8:1절의 바람은 창세기 1:2b절의 하나님의 영과 같다. 이것은 처음에 변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세워지고 정해졌다. 하나님이 타락한 창조물을 회복하셨을 때 그분의 영으로 움직이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으로 창조된 사람에 관한 그영의 사역과 관련된 정보가 풍부하다. 성경에서 이 최초 정보는 창세기 2:7절이다. 하나님은 생명이 없는 자들 안으로 생명을 호흡하신다. 또 하나님은 그분의 호흡이신 그분의 영의 도움으로 생명을 생명이 없는 자들에게 불어 넣으신다. 그영은 타락한 창조물 안으로 생명을 호흡하시며, 황폐화된 창조물 위에서 움직이신다. 그러고 난 후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빛이 존재하는 것을 보시고 빛이 좋다고 말씀하시고, 빛과 어두움 사이를 나누신다. 이미 생명이 없는 자들 안으로 생명을 호흡하시는 그영과 동의어는 하나님께 빛이 있으라는 그분의 말씀으로 시작하셨다. 사람은 영적으로 살아있다. 사람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통과하지만 그의 혼은 사람의 본성과 관계가 있다. 육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산 것이 좋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과 혼 사이를 나누신다. 하나님은 빛과 관계있는 영적인 사람과 어둠과 관계있는 천연적인 사람을 나누신다(3:6; 4:12). 사람에 대한 영원한 부분은 인류사 가운데 어떤 부분과 관련이 있다. 사람 안으로 생명을 호흡하시기 위해 그영은 오늘날 타락한 창조물 위에서 움직이셔야 한다. 이렇게 계속되는 그영의 임재와 그분의 사역은 어느 때라도 절대 변할 수 없다. 인류는 세 2000년 동안 이어져 왔다. 그럼에도 그분의 임재와 사역은 변할 수 없다. 그영 성경에서 정하신 변할 수 없는 이 두 가지 일을 수행하신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 흘림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죽음과 피 흘림은 아담이 죄를 지은 직후인 창세기 3장에서 볼 수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동물가죽으로 덮어주신 것에 함축되어 있다. 이 장면은 창세기 4장에서도 볼 수 있다. 가인과 아벨에게서 이 죽음과 피 흘림에 대해 더 많은 빛 비춤을 준다. 이 복합적인 장면이 창세기 22, 이삭의 제물로 더 많은 빛을 비추게 된다. 그리고 죽음과 피 흘림에 관해 출애굽기 11-12장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하나님께서 생명 없는 곳에 생명을 가져오도록 하는데 하는 방법은 호흡하시는 것이다. 그분의 영의 도움으로 하나님은 사람 안으로 생명을 호흡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죽음과 피 흘림을 기초하여 생명호흡을 하신다. 이 모든 것이 창세기 초반부에 정해졌다. 그 다음부터는 그 정해진 계시에 추가된 정보들이다.

그러므로 구원과 관계있는 그영의 사역, 사람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새로 남은 사람 창조 전과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해 주셨다(1:1-2:25). 그 후 그영께서 죽음과 피 흘림을 수행하신 근거는 사람이 타락한 직후 정해졌다(3:1-24). 이 모든 것은 그 때부터 오늘날과 인류가 끝나는 날까지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오순절 날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보내심은 전체적인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이 날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보내심은 이미 4000년 동안 그영의 변하지 않는 사역에서 완전히 분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같은 그영께서 A.D. 33년 오순절 날에 보내졌을 때 그영은 이미 여기에 계셨다. 그렇지 않다면 타락한 사람에 대한 구원은 오순절 이전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그영은 생명을 가지지 못한 자 안으로 생명을 호흡하심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영의 생명호흡은 오순절 전후 모두 있었다. 오순절 날 보내어진 그영은 그분의 계속되는 은혜의 구원에 대한 사역과 완전하게 분리하시려는 목적과 관계가 있었다. 이 사역은 처음 부분과 끝 부분 둘이 있다. 그영의 사역은 사람의 영원한 구원도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를 얻기 위한 그영의 사역은 교회시대 동안 지속할 것이다. 그분의 사역은 오순절부터 신부가 얻어지는 그날까지 지속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얻어지면 신부는 옮겨질 것이다. 불법과 죄로 죽은 사람을 구원하실 그영의 사역은 교회시대를 지나 주의 시대에도 계속될 것이다. 죄와 죽음이 남아 있는 한 그영의 사역은 7000년 동안 지속할 것이다. 그영의 사역은 아담의 타락부터 그리스도의 왕국 끝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영의 사역은 사람의 타락을 통해 죄와 죽음이 존재했던 그날부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심으로 죄와 죽음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지속될 것이다(3:6-7; 21:4-5).

 

사도행전과 서신서

 

그영은 A.D. 33년 오순절 날에 세상으로 보내어 지셨다. 그렇지만 그분의 사역은 그 날과 약 30여 년 동안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는 데는 한계가 없으셨다. 세상에 이미 계셨던 그영과 관련이 있는 이 시대에는 그분의 사역이 계속되었다. 영원한 구원과 관련이 있는 사역과 그분의 계속되는 임재가 계속되는 것과 같다. 오순절 날에 그영의 사역이 시작해 로마에서 바울의 선포로 끝나는 그영의 사역은 이스라엘에게 왕국을 재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이 당시 표적이 나타난 권능의 배경은 그영께 왔다(12:22-32). 궁극적으로 에스겔 37장에서 예언된 것처럼 민족 안으로 생명을 호흡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권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요엘의 예언이 사도행전 2장에서 이뤄지기 시작했고, 32년 후 로마에서 바울의 마지막 3년 동안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에게 선포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보내졌고, 그들이 그것을 들을 것이라.”(2:16-21; 28:28; 2:28-32; 13:46; 18:6)

이스라엘에게 왕국을 처음 제안하실 때 예수님은 그영의 권능으로 놀라운 사역을 수행하셨다(12:28). 이스라엘에게 왕국을 재제안을 하실 때 그영의 권능이 계속됨으로 메시야께서 부재하시지만 놀라운 사역을 하신다. 이 왕국에 대한 재제안은 첫 번째 이스라엘에게 왕국을 제안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는 그영과 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계속해서 볼 수 있었던 그영의 계속되는 사역이었다. 그영의 이 계속되는 사역은 사도행전 2장에서 세상으로 그영께서 보내어지신 이유로 완전하게 분리되었다. 이스라엘과 왕국과 관계있는 이 그영의 계속되는 사역은 교회시대 약 30년 동안만 지속되었을 것이다. 표적들, 기사들, 그리고 능력들은 이 당시에 왕국이 이스라엘에게 재제안이 되었다는 증거가 되었다. 표적을 요구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이다(고전 1:22). 표적들은 성경에서 늘 두 가지 일과 관계가 있었다. 그 두 가지 일은 이스라엘과 왕국이다. 이 두 가지는 항상 따라 다녔으며, 표적들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왕국, 표적들, 기사들, 능력들로 인하여 이스라엘과 거래하시지 않으신다면 성경적 관점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이 왕국에 대한 재제안 이후 표적들과 관계가 있는 그영의 사역은 중단되었다. 이스라엘이 더 이상 시야에 없었기 때문에 표적들, 기적들, 능력들은 중단해야 했다. 왕국이 시야에 남아있었지만 이 때 이후 왕국 메시지는 오로지 표적들을 요구하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새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표적들, 기적들, 능력들은 왕국이 이스라엘에게 재제안되고 있었을 때에나 그 후에도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으시는 그영의 사역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다시 말해 A.D. 33년 오순절 날부터 A.D. 62년까지는 이스라엘에게 왕국을 재제안하는 시기요, A.D. 62년부터 현재까지는 왕국을 제안하는 시기가 끝난 시기다. 그러므로 오순절 날 이후부터는 표적들, 기적들, 능력들을 요구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행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표적들, 기적들, 그리고 능력들은 오로지 이스라엘과만 관계가 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른 형태의 표적들, 기적들, 그리고 능력들이 나타나는 것은 완전히 부적절한 것이 될 것이고, 그러므로 그영의 사역은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어떤 서신서들은 사도행전 기간에 쓰였다. 그것이 고린도교회에 표적, 기적, 그리고 능력들이 나타난 이유다(고전 12:1-14:40). 고린도교회는 이방에서 시작한 교회였다. 그 교회에 표적, 기적, 그리고 능력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사도행전이 일어난 시대에 고린도교회가 세워지고 사역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그영은 그 당시 이방인 교회에서 초자연적인 사역을 나타내기 위해 각인에게 권한이 부여되었다. 하나님의 그영의 사역은 그리스도인들의 유익이나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는 그영의 사역 부분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에게 시기를 유발하도록 하는 수단이었다(10:19-11:14). 전체 시간에 2%미만이 경과한 신약교회시대는 이스라엘과 관계있는 이 추가적인 사역을 수행하도록 성령으로 사로잡혔다. 이때에도 그영은 창세기 24장에서 세우신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고 계셨다.

그영의 이 사역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으시는 것이다. 그분의 이 사역은 그리스도의 땅에 속한 사역을 하시는 동안 그분에 의해 예언 되었다(16:7-15). 이 그영의 사역에 대한 여러 방면은 사도행전에 이어 21권의 서신서에 서술되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신약성경을 이해한다면 틀림없이 인정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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