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신부를 찾으라

신부를 찾는 시기

Hernhut 2019. 4. 28. 16:30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연로하니라. 주께서 모든 일에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니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종 곧 자기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던 종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네 손을 내 넓적다리 밑에 넣으라. 내가 너로 하여금 하늘의 하나님이시며 땅의 하나님이신 주를 두고 맹세하게 할 터인즉 너는 나와 함께 거하고 있는 가나안 족속의 딸들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지 말고 오직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라.”(24:1-4).

 

우리는 창세기 중간 부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려고 한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여러 신랑과 각시가 등장하지만 이삭과 리브가의 사랑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나중에 나오는 보아스와 룻의 사랑이야기와 견줄 만큼 좋아한다. 내가 처음 이삭과 리브가의 사랑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청년시절이었다. 한 형제가 메시지를 전하러 앞으로 나와 실제 사랑의 체험을 말하듯 달콤하게 전했다. 얼마나 신선하고 아름다웠던지! 나는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3-4만 명 정도가 모인 그 집회에서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나는 손을 높이 들고, 눈을 감고서 외쳤다.

주여, 이제야 성령을 알았습니다. 제 삶을 성령께서 만져 주소서.”

그 외침으로 주변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주변부터 한 둘씩 일어나 외치기 시작했다. 그들도 점점 성령으로 뜨거워졌고, 한동안 메시지는 중단되었다. 많은 시간이 지나 잠잠해 졌을 때 그 형제는 다시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형제는 자기가 메시지를 전달했던 어떤 시간보다도 가장 뜨거웠던 집회였다고 말했다.

창세기 21-25장은 온통 예표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에서 이 다섯 장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부터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이뤄지는 사건이 연대순으로 나열하였다. 인류가 존재하는 6000년 동안 벌어지는 일들 중 마지막 2000년을 약간 넘겨 일어날 일들을 가리킨다. 이 기간은 유대인들의 시대가 끝나갈 무렵에 시작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전 시대를 덮고, 그리스도의 왕국 시대로 이끄는 내용이다. 이 시대는 신약성경에 계시된 시대와 정확하게 같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으로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 것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왕국과 관계있는 사건들로 끝난다. 물론 그리스도의 왕국은 유대인들의 시대가 다시 시작되고, 그리스도인 시대가 끝나는 때이다(1:18-25; 20:1-6; 22:7-21).

이 다섯 장은 창세기의 핵심이요, 중심적인 이야기고, 뼈대와도 같다. 마치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에서 보는 것 같다. 이곳에 나오는 인물들이 의미가 있고,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안다면 요한계시록을 연구할 때 확장된 방식으로 같은 주제를 정확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신약성경은 뼈대에 힘줄, , 그리고 피부가 붙고, 옷을 입히는 것이다(37:1-10).

신구약성경은 예표와 실제관계다. 이 예표와 실제관계로 읽지 않으면 성경이 달리 해석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심지어 메시지나 성경연구가 단지 위인전, 역사, 도덕적인 것으로 흘러 엉뚱한 주제로 흐르기도 하고, 간혹 이단파당을 형성하거나 교파교리로 전락해 하나님의 경륜을 잃어버리게 된다. 예표와 실제관계는 창세기가 나머지 신구약성경과 나란히 놓고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할 때 볼 수 있는 어떤 것이다(고전 2:9-13). 창세기를 이런 방식으로 열면 나머지 성경이 보인다. 창세기 1:1-2:3은 창조, 타락, 회복, 그리고 안식을 기록하고 있다. 그 외 나머지 성경의 내용은 정해진 기본적인 틀을 해석해 내는 것이다. 뼈대 틀은 처음에 정해졌다. 나머지 성경은 힘줄, , 그리고 피부가 붙여지고, 이 뼈대 틀 위에 옷이 입혀진다.

앞서서 정해진 성경 구조에 따르므로 한 가지 것은 아주 분명해야 한다. 해석이 나누어 있다는 지식을 전제로 해석해야 한다. 힘줄, , 피부는 뼈를 전제한다. 그것들은 뼈에 순서대로 기능에 따라 달라붙고, 또 꼭 있어야 하는 곳에 붙는다. 나머지 모든 성경은 처음에 정해진 기본적인 재료에 잇고, 붙이는 방식으로 기록되었다. 나머지 성경은 이미 놓인 토대를 읽고, 연구하는 것을 전제로 주어진 것이다. 이런 전제를 따르지 않았을 때 그 주제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에서 벗어나 해석하게 된다. 또 이런 원칙을 지키지 않을 때 많은 이들은 적절한 곳에 붙어 적절하게 해석되어야 하는 뼈대에서 벗어나 힘줄, , 그리고 피부를 붙이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부분을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성경의 뼈대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정하신 것이라고 해도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것이 될 수 없다. 성경구조는 기본적인 구절들을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기본적인 구절들을 이해하지 않고서 나머지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당하게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창세기 21장에서 25장까지

 

오래 전 한 소그룹모임에 참석했었다. 그곳에 여러 명의 형제들이 말씀을 말해냈다. 아주 짧은 메시지였지만 어떤 형제의 메시지는 그리스도로 풍성해지도록 말해냈다. 어떤 형제는 빈약한 메시지를 말해냈다. 그들의 메시지는 차이가 났다. 마치 전자의 형제는 진수성찬의 메시지와 같았고, 후자의 형제는 주전부리 정도의 메시지였다. 그 메시지 차이는 기본적인 뼈대의 성경구절에 필요적절하게 힘줄과 살과 그리고 피부를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아버지하나님을 예표하고, 이삭은 아들하나님을 예표한다. 이 예표는 창세기 22장에서 의심할 나위 없이 분명해 진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땅에 있는 한 곳에서 그의 아들을 제물로 드린다. 이것은 2,000년 후 바로 그 모리아 땅 갈보리에서 하나님께 그분의 아들을 제물로 드리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삭이 제물로 드려져야 했던 곳에 대해 아브라함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지시하셨다.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 줄 산들 중의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22:2)

그 이유는 분명하다.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데 아브라함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어느 날 아버지께서 그분의 아들을 제물로 드리도록 하는데 있어 그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변할 수 없는 예표다. 하나님의 아들은 외견상 아브라함이 여호와 이레Jehovah-jireh를 불렀던 주님의 산에서 제물로 드려졌다(22:14). 하나님은 두 다른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대체물을 준비하셨다. 그분은 아브라함 시대에 그곳에서 대체물 숫양을 준비하셨고, 2,000년 후 그곳에서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을 준비하셨다.

아브라함이 아버지 하나님을 예표한다면 그의 아내 사라는 여호와의 아내인 이스라엘을 예표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아내가 있다고 하는 말에 의아해 한다. 하지만 여러 번 말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내로 두셨다. 이 이야기가 교회 몸 생활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기 좋은 이야깃거리다. 하지만 나는 이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면 사실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처음부터 구약성경 전체가 그분의 사랑이야기요, 신약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의 사랑이야기다.

어느 날 어떤 비그리스도인이 내게 물었다.

하나님, 예수님이 결혼을 했는가?”

나는 대답해 주었다.

그렇다. 구약의 하나님은 결혼을 하셨다.”

그는 내게 또 물었다.

그럼 누구랑 결혼했나?”

이스라엘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이혼하셨으며, 이 땅으로 육신을 입으시고 오셔서 인성을 가지시고 낮아지신 예수님은 인성의 한계로 죽으신 후 부활하시어 하늘에 계시면서 성령님을 통해 현재 교회 안에서 그분의 신부를 찾고 계시는 중이다.”

물론 그의 질문이 나를 넘어지게 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흠을 내려는 것이었음을 나는 안다. 그는 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오랜 시간 교회생활을 해온 사람들도 이해를 못하는데 성경을 읽지 않고, 어떤 세상의 원리로만 생각하는 그야 어찌 이해를 하겠는가. 나는 그런 사람을 설득하고 얻고자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교회생활이라는 어떤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이들에게 오늘날 예수님께서 하시고 계시는 것을 알려 주고자 이 주제를 꺼내는 것이다. 이 사랑이야기는 성경구조상 예표적으로 완벽하게 맞는다.

사라는 불임이었다. 그녀가 불임이었기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갈을 통해 씨와 관련한 하나님의 약속을 얻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노력,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사람의 노력과 생각을 퇴자 놓으신다. 하나님의 눈에는 사람의 가장 좋은 노력이 하나님의 최악의 수고보다 못하다. 사람의 생각, 세상의 원리, 이론, 습관, 풍속 등에서 나오는 모든 요소들을 하나님은 완전하게 거절하신다(16:1-4; 17:18-19; 64:6). 하나님만이 그분의 시간에 그분의 사역을 하신다. 사라가 나이가 들어 아이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녀의 삶에 초자연적인 사역을 수행하셔서 이삭을 낳았다(17:17-19; 21:1-5).

아주 오랜 후에 이스라엘은 사라와 같이 불임의 상태가 되었다(21:18-19). 하나님은 스펙트럼의 또 다른 끝에서 아주 흡사한 어떤 것을 행하셨다. 하나님은 유대인 처녀를 취하셨다. 그 유대인 처녀는 남자를 알지 못했고, 남자와 육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은 자연적인 임신을 할 수 없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그녀의 생명에 초자연적인 사역을 수행하셨고, 이삭이 예표한 한 분을 낳게 하셨다. 사라가 불임이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불임이었지만 초자연적인 사역을 통해 사라가 출산했던 것처럼 이 민족도 출산하였다(1:18-25).

그러므로 창세기 21장에 있는 이삭의 초자연적 출생은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출생을 예표한다. 22장에 있는 이삭이 제물로 드려짐은 그리스도께서 제물로 드려짐을 예표한다. 그런데 22장에 나타난 것처럼 어떤 계획적인 일이 발생했다. 그것은 23장에 있는 사라의 죽음을 통해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이삭이 제물로 드려진 뒤 죽었다. 이것은 실제에서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아내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께서 제물로 드려진 이후 죽었다. 이스라엘은 한 시대 동안 구별되었다. 그녀는 죽음의 장소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요나가 물고기의 뱃속에서 죽어 있는 것이나 요한복음의 일곱 번째 표적 즉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요나와 나사로는 죽은 자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어느 날 죽음의 장소에서 일어나 나올 것을 말한다. 요나와 나사로 둘 다 세 번째 날에 일어났다(1:17-2:10; 12:39-40; 16:21; 11:6-7, 43-44). 이것은 이스라엘 역시 세 번째 날에 일어나게 될 것을 가리킨다. 세 번째 날은 창세기 22:4절에서 볼 수 있다. 산 위의 사건은 세 번째 날에 일어났다. 이 세 번째 날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모형으로 받은 날까지 포함한다(11:19). 아브라함의 아들을 드림은 두 의미로 간주한다. 하나는 모형적인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예표적인 것이다.

예표는 분명하지만 히브리서에서는 모형이라 불렸다. 헬라어 파라볼레parabole는 파라para+볼레bole의 합성어로 나란히 옆에 놓다라는 뜻이다. 파라볼레parabole는 앞의 진리를 설명하는 것을 돕고, 앞의 진리 곁에 나란히 두어 나중 진리를 빛 비추는 것이 된다. 다른 방면으로 예표는 비유와 반대의 의미로 성경적 진리를 가리킨다. 예표가 먼저 나타나고, 시대가 흐르면서 예표에 맞게 실제가 나타난다. 예표, 모형은 같은 기본적인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 예표와 모형과 관련해 설명하고, 또 빛을 비추기 위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주께서 선택하신 산 위에서 그의 아들을 제물로 드렸다. 물론 그의 죽음은 대체물로 일어난 것이었다. 그 모리아 산에 숫양 한 마리가 덤불에 걸렸고 그 숫양이 이삭을 대신해 죽었다(22:9-14; 11:17-19). 이삭은 대체물로 죽었고, 아브라함은 모형으로 죽은 자로부터 그의 아들을 받았다. 이 일은 이미 계시된 진리다. 창세기 3-4장에 죽음과 피 흘림과 관련된 가르침이 소개되었다. 이삭이 제물로 드려지는 사건 역시 예표다. 실제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피 흘림은 절정을 이룬다(27:35-37).

세 번째 날은 예표에서 이삭의 부활, 실제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맏아들들 모두가 하나님의 시야에서 살아날 그때를 가리킨다. 하나님께는 세 맏아들들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 이스라엘, 그리고, 교회다. 이 세 맏아들들은 세 번째 날에 일어나야 한다. 이 세 번째 날은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그날부터요, 아브라함이 모형으로 그의 아들을 받은 그날부터다. 그날은 세 번째 1000년에 일어날 것이다. 그들이 일어나는 날 그들은 능력과 권위의 위치로 올라갈 것이다. 그날 아브라함은 대체물로 효력을 얻어 죽은 자에서 일어난 자기 아들을 모형으로 받았고, 그 아들은 그의 능력과 권위에 올랐다. 하나님은 그분의 맏아들들 중 하나인 이스라엘을 세 번째 날에 회복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일은 사라가 죽고, 이삭이 신부를 얻은 이후 아브라함이 그두라와 재혼을 하는 것으로 예표된다. 아브라함의 재혼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현재 이혼 상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재혼은 오늘날 교회시대가 끝난 이후에 일어날 사건이다(9:24; 5:13-6:2).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약 2000년이요, 아브라함에서 예수님까지 2000년이요, 교회시대가 2000년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면으로 볼 때 세 번째 날에 주님이 오시고,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이 맞다.

아브라함의 나이 든 종이 아브라함의 아들을 위해 신부를 얻은 이후 그는 그두라와 재혼했다. 그두라는 사라가 불임이었던 곳에서 임신한 여자였다. 그두라는 6명의 아들을 아브라함에게 낳아 주었다. 신성한 개입을 제외하고 사라가 어떤 아들들을 낳지 못했던 곳에서 그두라는 6명을 낳았다. 이것은 민족의 회복 이후 다가오고 있는 그날에 이스라엘의 열매가 많을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창세기 25장은 그리스도의 시대로 사건이 옮겨간다. 창세기 25장은 이스라엘 회복을 담고 있다. 창세기 24장은 교회시대를 가리킨다. 이스라엘을 따로 떼어 놓고, 또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시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오늘날 교회시대다. 창세기 24장은 실제에서 이스라엘이 2000년 동안 죽음의 장소에 누워있을 때 일어난다. 죽음의 장소에 누워있는 이스라엘은 요나와 나사로로 예표되었다. 24장에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의 아내를 얻도록 가장 나이 든 종을 메소포타미아로 보내는 것과 관계가 있다. 실제에서 이 사건은 한 가지 일만 가리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 예수님의 신부를 얻기 위해 세상으로 성령을 보내시는 것을 가리킬 수 있을 뿐이다. 24장 전체가 교회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고, 얻는 것이다.

창세기 21-25장은 각 장마다 어떠한 것을 예표해 나열하고 있다. 이것은 실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부터 그리스도의 왕국까지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5장을 통해 일어나는 일의 순서를 이해해야 정확한 시각으로 교회시대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인식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시대는 두 부분 사이에서 수행되고 있다. 하나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이스라엘이 따로 곁에 떼어 놓은 시간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혼인하셨다가 이혼한 상태에 있는 시간이다. 또 다른 하나는 다가올 미래의 시간이다. 이때는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시간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재혼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때는 사라가 아닌 그두라였던 것처럼 완전히 변화된 이스라엘이 될 것이다. 그 사이에 오늘날 교회시대가 끼어 있다. 교회시대에서 수행하고 있는 일은 유일한 하나님의 목적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얻기 위해 세상으로 성령님을 보내신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늘날 교회시대를 통해 그분의 거래를 하신다. 그분의 거래는 성경적인 관점으로 볼 때 창세기 24장에 기록된 거의 4000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이해하는 것과 갈라놓을 수 없다. 세상에서 교회 산출에 대한 신약성경의 계시와 오늘날 교회시대에서의 성령사역은 약간의 배경설명을 하고 있다. 교회 산출과 교회시대의 성령사역에 대한 계시는 이전에 관련된 계시로 보여주고 있다. 구약성경의 예표로 신약성경의 모든 계시를 찾을 수 있다. 교회 산출과 그 교회에서의 성령의 사역에 대한 기본적인 재료는 구약성경의 예표에서 이미 계시되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구약성경에서 교회 산출이나 성령의 사역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구약성경에 없는 계시가 신약성경에도 없다. 신약성경에 있는 계시는 구약성경에서 말해졌기에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론과 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이단파당이 등장하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분명함이 없고, 분별되지 못했을 때 우상을 숭배하고, 교파교리에 집착하고, 교회 행사나 프로그램에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교회 산출과 성령의 사역에 분명해졌을 때 하나님에 대해 선명해진다.

 

이삭의 초자연적인 출생과 제물로 드려짐(21:1-22:24)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출생은 창세기에서 언급된 이삭의 초자연적 출생보다 복음서에 약간 더 많이 언급된다(17:15-19; 18:9-14; 21:1-5; 1:18-25; 1:26-35; 2:1-7). 초자연적 출생은 예표와 실제에서 간단하게만 다뤄졌다. 공관복음을 비교해 보면 신약성경이 예수님과 침례자요한의 출생과 연결된 일로 시작한다.

마태복음에는 침례자 요한의 출생에 관해서 약 30살 때까지는 기록이 없었으며, 예수님의 출생에 관해서만 다뤘다. 침례자 요한이 약 30살이 넘어 메시지를 가지고서 유대광야에 나타났다.

너희는 회개하라! 하늘들의 왕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라.”(1:1-3:12)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과 침례자 요한의 출생에 관한 내용은 없다. 다만 30살 쯤 된 침례자 요한이 그의 사역을 함으로 시작한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과 침례자 요한의 출생에 관한 상세한 말씀으로 시작한다(1:1-80).

침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 약 6개월 먼저 태어났다. 침례자 요한이 출생할 때부터 그가 메시아에 대한 선견자로서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유대광야에서 사역을 시작할 때까지 요한에 관한 기록은 없다(40:3-5; 11:13, 14; 1:17).

유사한 방식으로 한 짧은 사건을 제외하고(2:41-52), 예수님의 출생에 관한 일부터 땅에 속한 사역을 시작할 때까지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은 없다. 예수님은 침례자 요한이 자기의 사역을 시작한 이후에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또 침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예수님은 침례자 요한이 이미 선포하고 있었던 같은 메시지를 선포하셨다(4:17-25; 3:22-36). 그러므로 공관복음은 침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들 앞에 있는 사건에 관해 아주 짧게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또 침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공관복음은 거의 대부분 그리스도의 사역을 다룬다. 이 일들은 이스라엘이 복음과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일로 이어진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을 박는다. 그 이후는 그리스도께서 죽고, 매장되시고, 부활에 이르게 된다.

이런 방면에서 복음서는 창세기 3-421-22장에서 이미 읽을 수 있는 사건으로 덮여있다. 복음서는 구약성경에 이미 소개한 뼈대에 힘줄, , 피부를 붙이고, 옷을 입혀 해석한 것이다.

 

사라의 죽음 (23)

 

사라가 죽었다. 사라의 죽음은 실제에서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심을 의미한다(22:1-14). 하지만 앞서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얻기 위해 세상으로 성령을 보내신 것을 예표한다(24:1-67). 그리스도의 죽음 때 하나님은 민족으로서 여전히 이스라엘과 거래를 하셔야 하셨다. 그리스도는 유월절 어린양이셨고, 이스라엘만이 이 어린양을 살해할 수 있었다(12:1-51).

그렇지만 창세기 23장에 소개된 사라의 죽음으로 예표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힘과 죽음이 일어났고, 뒤 이어서 삼일 째 되던 날에 그분의 부활이 이어졌다. 구약성경 예표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와 분리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날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일 사이의 50일 동안 어떤 영향을 미쳐야 했던 것이다. 왜냐면 사도행전 2장에서 일어난 것은 창세기 24장에 일어난 일로 채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 이스라엘이 따로 떼어짐

 

복음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창세기 23장에 등장하는 사라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와 분리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땅에 속한 사역을 더 많이 다루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 매장, 그리고 부활 이후에는 그분의 땅에 속한 사역은 수행하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와 따로 떼어지는 일은 마태복음 12:22-50절의 성령을 대적하는 자들부터 마태복음 21:43에 있는 그리스도의 선포까지 사건의 연대순으로 설명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와 따로 떼어져 분리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이어진다. 마태복음 12:22-50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사람에게서 마귀에게 던져지도록 사탄의 능력을 사용해 그리스도를 저주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영의 권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계셨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사탄의 능력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선포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갖 종류의 죄와 신성모독은 사람들이 용서받되 성령님을 대적하여 신성모독하는 것은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하고 또 누구든지 말로 사람의 아들을 대적하면 그는 용서받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님을 대적하면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나 그는 용서받지 못하리라.”(12:31-32)

마태복음 12장에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신성모독을 하는 행동을 했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선포를 하셨다. 그리스도의 이 선포는 그리스도께 주된 전환점이 된 사역이 되었다. 같은 날 이 선포 직후 그리스도는 집밖으로 나가, 바닷가에 앉아 비유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집은 이스라엘의 집이요, 바닷가는 이방인들과 관계가 있었고,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늘의 왕국의 신비들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라. 있는 자는 누구든지 받아서 더욱 풍성하게 될 터이나 없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에게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니라. 이사야의 대언이 그들 안에서 성취되었으니 이르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지고 그들의 귀는 듣기에 둔하며 그들은 눈을 감았나니 이것은 언제라도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보므로, 너희 귀는 들으므로 복이 있도다.”(13:11b-16).

비유는 이미 계시된 진리와 연결된다. 비유를 깨닫기 위해 사람은 비유가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깨달아야 한다. 전자는 후자에 따라 달라진다. 제자들은 비유로 말한 것에 대해 이미 계시된 진리를 알도록 허락받았고, 깨달았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비유들을 깨닫는 입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그런 입장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계시된 진리를 거절했다. 그리고 비유를 깨닫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유들은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집 밖에서 네 가지 비유들을 주셨다. 그리고는 그분은 다시 집으로 들어오셔서 세 가지의 비유들을 더 주셨다. 이방인들과 관계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집에 들어오셔서 주신 비유들은 이스라엘과도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 비유들을 주시기 전에 집 안으로 다시 들어오셔야 했다. 하지만 집으로 다시 들어오시는 그리스도는 집을 떠나시기 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오신다는 신호가 없으셨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집을 떠나시기 직전보다 훨씬 더 강퍅해졌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민족으로서 이스라엘과 거래하시고 계시지만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분의 이름을 위해 한 사람들을 취하시려고 하실 때(15:14)의 상황은 이스라엘이 따로 떼어지기 시작할 무렵보다도 더 악화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이방인들과의 하나님의 거래가 마태복음 15:21-31절에서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의 딸이 앓고 있는 질병을 고쳐주신 것이다. 그런 후 마태복음 16:18-20절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언급하셨다. 이 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인하여 구성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에 대해 환기를 시키시면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모르는 사람에게 말하도록 그분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지시하셨다. 왜냐면 마태복음 12:22절 이후부터 이방인들 즉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이들에게 자기를 알리시기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그분의 사역에서 처음으로 십자가를 보여주셨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장로들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 날 다시 일으켜질 것을 자기 제자들에게 보이기 시작하시니”(16:21; 17:22-23; 20:17-19; 21:18-19, 38-39).

왕국은 마태복음 12:22절 이후 사건부터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은 것일지라도 실제로 선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직전까지 이방인들에게 넘겨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버지께서 너희로부터 하나님의 왕국을 빼앗아 왕국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시리라.”(21:43)

그런 후 그리스도의 죽음, 매장, 그리고 부활이 이어질 때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계속 거래하셨다. 창세기 22-23장의 예표론에 따라 이 일이 있은 후에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거래를 중단하실 수 있으셨다. 창세기 24장의 예표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얻기 위해 세상으로 성령을 보내시기 직전 이스라엘과의 거래를 끝내셔야 했다. 이 일은 사도행전 2장에 실제로 일어났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와 따로 분리됨은 복음서에서한 번, 사도행전에서 또 한 번, 두 번에 걸쳐 이뤄졌다.

누가복음 24:13-31절에서 온 민족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로 예표되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날부터 이틀 동안 눈이 보이지 않았으며, 그들의 시야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세 번째 날에 회복되었다(24:20-21, 25-31). 이 일은 이틀 즉 2,000년 동안 지속될 것인데 이는 오늘날 교회시대 동안 이스라엘이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시야는 십자가에 못 박은 날부터 세 번째 날 즉 세 번째 1,000년 초에 회복될 것이다. 그들의 시야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자기를 들어내심으로 회복될 것이다(5:15-6:2; 12:10-14; 13:6; 45:1-28).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께서 수난을 당하신 후 40일 동안 하나님의 왕국과 관련이 있는 일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1:3). 그 때 제자들은 왕국이 이스라엘에게 회복된다면 언제가 그 때인지를 주님께 물었다(1:6). 그들의 질문에 그리스도는 간접적으로 반응하셨다. 성령님이 보내어 졌을 때 그로 인하여 제자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아 충만해져야 한다고 하셨다(1:8; 2:1-4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가 이때에 산출될 뿐만 아니라 왕국이 이스라엘에게서 왕국을 빼앗아 소유하고 있는 새 창조에 의해서 이스라엘에게 다시 제안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왕국 회복은 이스라엘의 회개에 달려 있는 것이다(2:37-38; 3:19-21).

창세기 23장에서 이스라엘이 따로 떼어졌다. 실제에서 이스라엘이 따로 떼어진 때가 바로 사도행전의 교회가 산출될 때다. 창세기 24장에 따르면 성령님께서 세상으로 보내졌다. 이는 사도행전에서 교회를 통해 왕국의 열매를 산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떼어 놓으셨고, 문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기까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2) 또 다른 사람이 열매를 맺도록 부르심

 

마태복음 21:43절에서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은 것에 대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다. 이 왕국은 이스라엘이 창조될 때부터 그들에게 제안되고, 약속된 부분이었다. 이스라엘은 이미 두 영역을 약속 받았다. 하지만 이제 하늘들의 왕국 부분은 예수님께 빼앗겼다. 예수님께서 빼앗은 하늘들의 왕국은 나중에 산출될 그것의 열매를 맺을 한 민족에게 제안하셨다. 이 민족은 A.D. 33년 오순절 날 산출되어 베드로전서 2:9-10절에 언급된 민족이다.

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이것은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가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지나간 때에는 백성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긍휼을 얻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긍휼을 얻었느니라.”(벧전 2:9-10)

왕국은 이스라엘에게서 몰수 하셨다. 유대인도 아니요, 이방인도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독립체, 새창조(고후 5:17; 3:26-29; 2:11-15)가 이스라엘이 거절한 그 왕국을 받도록 산출하셨다. 창세기 24장에서 볼 수 있는 이 새 독립체는 A.D. 33년 오순절 날 일어난 일을 통해서만 산출될 수 있었다(2:1-47).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까지 실제에서 그영은 보내질 수 없었다(7:38-39). 일반적인 믿음과 반대로 이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영광을 받으신 몸으로 부활하시지 않았다. 그분이 부활하신 몸은 영광으로 감싸인 몸이 아니었다. 그분은 살과 뼈가 있는 몸으로 부활하셨다. 무덤에 있던 몸이었다(28:6; 24:39).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처럼 이 몸은 그분의 부활 때에 영광의 덮개가 부족했다. 이 몸은 40일이 지나기까지 영광으로 감싸이지 않았다. 40일이 지난 후에 그분은 영광 안으로 올려 가셨다(1:9; 딤전 3:16).

우리는 영광의 덮개로 가리지 않았던 때와 가렸던 때를 볼 필요가 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그분의 몸을 응시할 수 있었고, 그분의 몸인지 다른 사람의 몸인지를 알지 못했다(24:15-39; 20:14-18, 26-28). 결국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가 만난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감싸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눈이 보이지 않았다. 한낮의 태양이 빛을 비추는 것 같았다(9:3-5, 9; 26:12-15). 어느 날 그리스도인들은 영광으로 감싸여 해같이 빛나는 그분을 응시할 것이다(1:16).

그리스도의 승천 10일 후에 일어나는 A.D. 33년 오순절 날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얻기 위해 가장 나이 든 종을 세상으로 보내신 유일한 때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이삭의 신부를 얻도록 자기 노종 엘리에셀을 메소포타미아로 보낸 것을 의미한다. A.D. 33년 오순절 날에 일어난 일은 구약 예표를 통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본질적인 일이 시약성경에서 일어났다. 이 일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심으로 영광을 입으시고 성령으로 오신 것이다.

이스라엘을 따로 떼어 놓은 새 시대 즉 교회시대 동안 하나님은 새로운 독립체와 거래를 하시고 계시지만 여전히 교회시대의 처음 약 30여 년 동안 이스라엘에게 왕국에 대해 다시 제안하였었다. 이 재 제안은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아 소유하고 있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에 의해 이뤄졌다. 이스라엘에게 왕국을 다시 제안하는 것은 새 창조가 산출되었던 그날 시작되었다. 이런 제안이 이스라엘에게 있었음에도 그들은 전처럼 여전히 표적, 이적, 기적을 원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새 창조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하늘왕국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했다(2:1-43).

사도행전은 이스라엘에게 왕국에 대한 제안을 상세히 설명한다. 이 제안은 A.D. 33년 오순절 날 시작해 바울의 세 번째와 바울의 마지막 선교를 할 때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세상으로 확장되었다.

그런즉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로 보내어진 것과 그들이 그것을 들을 줄을 너희가 알라.”(28:28)

따로 떼어져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때까지 왕국에 대한 메시지의 선포로 붙잡을 우선권이 있었다. 하지만 요한이 복음전파에서 갈보리 사건까지와 다르게 그 범위 안에 이방인들도 포함되었다. A.D. 33년 오순절 날에 그영의 보내짐부터 사도행전 28:28절에 기록된 로마에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선포한 바울의 말까지 그 메시지가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이방인에게였다(1:16; 2:9-10). 바울이 로마에서 유대인들에게 선포한 사도행전 28:28절은 약 A.D. 62년에 전달된 것이다. 하지만 사도행전 28:28절에서 바울이 말한 후 이스라엘은 더 이상 우선권이 없었다. 이 이후에 전달되는 메시지는 유일하게 한 무리에게 선포되었다. 사도행전 28:28절에서 바울이 말한 후 하늘에 속한 왕국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새사람에게만 적용되었다. 주로 이방인들부터 구성되는 한 몸이기 때문에 이 한새사람은 이방인들이거나 무할례자들과 관계가 있었다(1:16; 2:9-10; 2:2, 7). 하지만 한새사람의 정체성은 유대인이나 이방인과 분리된다(3:26-29).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새사람은 이스라엘이 거절한 하늘들의 왕국을 받았고, 이스라엘이 실패한 곳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 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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