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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간호사

“약 사십 년 동안 그들의 행실을 참으시며 광야에서 지내셨느니라.”(사도행전 13:18, KJV) 단 하나의 그리스어 글자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전체 그림을 바꿔 놓을 수 있다. 킹제임스성경으로 사도행전 13장 18절을 읽으면, 이를 악물고 참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약 사십 년 동안 그들의 행실을 참으시며 광야에서 지내셨느니라.” 여기 사용된 동사는 트로포포레오(tropophoreō)인데, 트로포스(tropos, “행실, 태도”)와 포레오(phoreō, “지니다, 견디다, 짊어지다”)가 결합된 말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불평과 원망을 이를 악물고 견뎌 내셨다는 그림을 그려 준다. 그런데 단 하나의 글자만 바꿔 보라. 파이(π)를 피(φ)로 바꾸면 단어는..

말이 사람을 갉아먹기 시작할 때

『그로 청컨대 그는 반쯤 살이 썩고 죽어서 모태에서 나온 자 같이 되지 않게 하소서.』 민수기 12:12 아론이 자기 누이를 위해 드리는 간구는 제사장의 진단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절규에 가깝다. 『그로 청컨대 그는 반쯤 살이 썩고 죽어서 모태에서 나온 자 같이 되지 않게 하소서.』(민수기 12:12) 영어 성경에서는 「썩고(consumed)」라고 번역되었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훨씬 더 충격적이다. 여기 사용된 단어의 어근은 아칼(אָכַל, ’ākal, H398) 로, 문자적으로는 「먹다」, 「삼켜버리다」라는 뜻이다. 아론은 단순히 피부병이 번지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무서운 부패가 미리암의 살을 갉아먹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한때 이스라엘의 승리의 노래를 이끌었던 여선지..

노역 감독관과 전차

“르호보암 왕이 조세 감독관 하도람을 보냈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돌로 쳐죽인즉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역대하 10:18 (KJV) 역대하 10:18에는 놀라울 정도의 영적 맹목이 기록되어 있다. 르호보암 왕은 솔로몬의 채찍 대신 전갈 채찍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이미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을 분열시켰다(역대하 10:14). 열 지파는 반란 직전까지 이르러 있었다. 그런데 왕은 평화를 협상하기 위해 하도람이라는 사람을 보냈다. 하도람은 대사가 아니었고 제사장도 아니었다. 그는 「노역」(막maç), 곧 국가가 강제로 부과하는 노동 징발 제도를 감독하는 책임자였다. 그는 백성들이 이미 벗겨 달라고 간청했던 「무거운 멍에」(역대하 10:4)의 살아 있는 상징이었다. 분노..

거인들 사이에 선 살아 있는 사람

『비록 노아와 다니엘과 욥 이 세 사람이 그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14:14 노아, 욥... 그리고 다니엘? 이 이름들 가운데 하나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노아는 물로 심판받은 세상에서 살아남은 고대의 조상이었다. 욥은 우스 땅의 재 더미 위에 앉아 고난을 겪었던 옛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살아 있었다.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들 가운데서 이 말씀을 기록할 당시, 다니엘은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느부갓네살의 왕궁을 섬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을 선택하여, 두 고대의 거인들 사이에 놓으셨다. 왜 하필 이 세 사람인가? 이들은 우연히 선택된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역사상 가..

높은 것이 골짜기를 채우리라

『내가 네 살점을 여러 산 위에 두고 네 높음으로 골짜기들을 채우리라.』— 에스겔 32:5 「네 높음으로 골짜기들을 채우리라」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추상적인 비유처럼 들린다. 그러나 에스겔은 점잖은 시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처참한 심판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향해 말씀하시며, 에스겔 32:2에서는 그를 「탄닌(tannîn)」, 곧 나일강의 물을 휘저으며 날뛰는 거대한 바다 괴물로 묘사하신다. 바로의 가장 큰 착각은 자신을 스스로 만든 존재라고 믿는 데 있었다. 에스겔 29:3에서 그의 교만은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나의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바로는 자신의 생명과 제국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통..

거룩한 장소에서 굳어진 마음

“그러나 어떤 이들은 마음이 굳어 믿지 아니하고 무리 앞에서 그 길을 비방하므로, 그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라 하는 어떤 사람의 학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사도행전 19:9, KJV) 누가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말씀을 선포했을 때 “어떤 이들은 마음이 굳어”졌다고 기록한다(사도행전 19:9). 그 헬라어 동사 에스클레루논토esklērunonto (스클레리노sklērýnō에서 유래)는 미완료 시제로 쓰였다. 이것은 단 한 번의 결정적인 문 닫힘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굳어짐을 묘사한다. 이 장면이 더욱 두려운 이유는 그 장소 때문이다. 이 일은 이교도 아르테미스 신전의 그늘 아래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회당 안에서 일어났다. 종교적..

충성된 자들의 지워짐

“왕이 왕을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며 왕을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니, 왕께서 오늘 왕자들과 신하들을 전혀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심을 나타내셨나이다. 내가 오늘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우리 모두가 오늘 죽었더라면 왕이 기뻐하셨으리이다.”사무엘하 19:6 방금 다윗 왕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군사들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마하나임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은 마치 전투에서 패배하고 달아난 사람들이 부끄러워 몰래 숨어 들어오듯 조용히 성으로 들어왔다(사무엘하 19:3). 그때 다윗은 윗방에 올라가 얼굴을 가린 채 앉아 있었다(사무엘하 19:4). 그는 승리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오직 압살롬의 죽음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그 압살롬은 바로 다윗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으려 했던 아들이었다. 결..

정직한 만남을 위한 조건

“오직 내게 두 가지만 하지 마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 앞에서 숨지 아니하겠나이다.”욥기 13:20 (KJV) 여기서 욥은 놀라울 정도로 대담한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만날 때의 기본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내게 두 가지만 하지 마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 앞에서 숨지 아니하겠나이다.” (욥기 13:20) 성경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피해 숨는 것은 보통 죄책감의 반사적 행동이다. 아담은 동산을 거니시는 주님의 소리를 듣고 나무 사이로 몸을 숨겼다(창세기 3:8). 그러나 욥이 사용한 재귀적 히브리어 동사 사타르sātar, 곧 “내가 스스로를 숨기다(hide myself)”는 전혀 다른 의미의 무게를 지닌다. 욥은 어떤 은밀한 죄 때문에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그늘 아래서 에봇을 입고

“아히야는 이가봇의 형제요, 비느하스의 아들이며, 엘리의 손자인 아히둡의 아들이었는데, 그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었고 에봇을 입고 있었다. 백성은 요나단이 떠난 것을 알지 못하였다.”사무엘상 14:3 (KJV) 긴박한 군사적 대치 상황의 한가운데서 사무엘상 14장 3절의 기록자는 갑자기 이야기를 멈추고 하나의 족보를 제시한다. 그런데 그 족보에는 눈에 띄는 경고 표지가 있다. 사울의 진영에 있던 제사장이 특별히 “이가봇의 형제” 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이름은 당시 사람들에게 분명한 아픔과 충격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히브리어 ‘이가봇’(’Î-ḵāḇôḏ) 은 문자적으로 “영광이 떠났다” 는 뜻이다(사무엘상 4:21). 이 이름은 언약궤가 빼앗기고 타락한 엘리의 집안이 심판받던 비극적인 날에 ..

성전의 은을 사용하다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서 은과 금을 꺼내어 다메섹에 거주하는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열왕기하 16:2 (본문은 실제로 역대하 16:2) 35년 동안 신실하게 개혁을 추진해 온 아사 왕은 이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물 창고를 열기 위해서였다. 그는 여호와의 전의 곳간인 '오차르('ôṣār), 곧 하나님께 바쳐진 보관 창고에서 금과 은을 꺼내어 수레에 싣고 다메섹으로 보냈다(역대하 16:2). 그의 목적은 매우 현실적이고 정치적이었습니다. 아람 왕 벤하닷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의 국경을 위협하던 경쟁 왕국을 견제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장면의 비극은 아사가 악한 왕이었다는 데 있지 않는다. 그는 오랫동안 “여호와 보시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