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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속에서 들리는 음성

“다윗이 그를 가리켜 말하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은 그분께서 내 오른편에 계셔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시기 때문이라.”(사도행전 2:25)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청중의 시선을 곧바로 눈앞에 있는 한 무덤으로 향하게 한다. 그는 족장 다윗이 죽어 장사되었으며, 그의 무덤이 여전히 그들 가운데 남아 있다고 상기시킨다(사도행전 2:29). 다윗의 육신은 썩음을 보았으므로, 자신의 혼이 부패를 면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다윗은 시편 16편을 기록할 때 단순히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로서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 예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25절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다윗이 그를 가리켜 말하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

피곤함을 주지 않는 위로

“그러나 나는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슬픔을 덜어 주었으리라.”(욥기 16:5) 욥은 재 가운데 앉아 있었지만, 그의 세 친구는 그의 재앙을 신학적인 법정 사건으로 만들어 버렸다. 욥이 그들을 가리켜 “번뇌하게 하는 위로자들”이라고 말했을 때(욥기 16:2), 그는 그들이 자신에게 지운 정확한 짐을 묘사한 것이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그 표현은 ‘아말’(‘āmāl)의 위로자들을 가리키는데, 이는 그들의 위로가 지치게 하는 수고의 원천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고난당하는 혼에게 안식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죽어 가는 사람이 자신의 정직함을 변호하는 데 남아 있는 힘을 소모하도록 만들었다. 두 절 뒤에서 욥은 그들에게 거울을 들이댄다. 욥기 16장 4절에서 그는 상처받지 않은 구경꾼이..

골짜기에 울려 퍼진 모든 말씀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 가운데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들과 그들 가운데 함께 생활하던 타국인들 앞에서 읽지 아니한 말씀이 하나도 없었더라.”(여호수아 8:35) 아이 성의 폐허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여호수아 8:28), 가나안 왕들은 이미 전쟁을 위해 군대를 모으고 있었다(여호수아 9:1, 2). 그러한 때에 여호수아는 군사 작전을 멈추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주변 지역이 재정비하기 전에 계속 진격하여 승기를 굳히는 것이 마땅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온 백성을 이끌고 북쪽으로 약 48km 떨어진 세겜으로 행진하여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의 천연 원형극장과 같은 골짜기로 들어갔다(여호수아 8:30-33). 모세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가면 바로 이 일..

교만한 육체를 위한 소금

“소금은 좋은 것이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의 맛을 내겠느냐?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마가복음 9:50, KJV) 가버나움에 도착하여 집 안에 들어갔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길에서 무엇을 논쟁하였느냐고 물으시자 제자들은 죄책감에 잠긴 침묵을 지켰다(마가복음 9:33). 그들은 길을 오는 동안 누가 가장 큰 자인가를 두고 다투고 있었기 때문이다(마가복음 9:34). 이러한 지위 다툼은 곧 편협한 질투심으로 이어졌고, 결국 요한은 그들이 마귀들을 쫓아내고 있는 어떤 사람을 막으려 했다고 고백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라는 것이었다(마가복음 9:38).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야망에 대해 제단의 언어로 응답하셨다. 그분은 범죄하게 하는 손이나 발..

바닷가에서 장막 말뚝을 뽑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인도하여 내니 그들이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광야에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였더라.”(출애굽기 15:22, KJV) 출애굽기 15:22의 첫 구절에는 예상 밖의 동사가 들어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인도하여 내니.” 모세오경에 기록된 여정들을 살펴보면, 대개 회중이 스스로 길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나사(nāsaʿ) 의 사역형으로, 본래는 장막의 말뚝을 뽑아 진을 거두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바닷가에서 떼어 놓아야 했으며, 그들을 움직이도록 재촉해야 했다. 그들이 그곳에 머물고 싶어 했던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미리암은 방금 소고를 들고 여인들을 이끌어 춤을 추었고, 애굽의 병거들은 ..

산을 옮기는 믿음

참된 믿음은 능동적인 측면과 수동적인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이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볼 수 있다. 능동적인 측면에서 믿음은 어떤 사람에 대한 우리의 충성심, 또는 의무나 맡겨진 신뢰에 대한 성실함의 실제적인 표현이며, 그와 관련된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자신에게 맡겨진 약속이나 신뢰에 책임 있게 응답하고 그것을 이행하는 것이다. 수동적인 측면에서 믿음은 다른 이의 말이나 보증을 확신 가운데 신뢰하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발견하고 소유하는 것이다. 성경을 연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기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향해 보여 주시는 신실하심과 돌보심을 신뢰한 사람들의 본을 통하여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

도랑의 물

“그가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시편 110:7 (KJV) 시편 110편은 다윗의 주를 여호와의 오른편에서부터 왕들이 쓰러진 전장까지 인도한 후,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를 흙바닥에 무릎 꿇린 채 남겨 둔다. 처음 네 절에서 메시아는 하늘에 보좌에 앉으시고 영원한 제사장 왕으로 맹세를 받으신다(시편 110:1-4). 이어 시편 110:5, 6에서는 전쟁의 심판이 펼쳐진다. 그분은 통치자들을 쳐부수시고, 골짜기들을 시체들로 가득 채우시며, 많은 나라들 위에서 그들의 머리(로쉬rōʼsh)를 상하게 하신다(시편 110:6). 이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옛 약속을 성취하는 것이다(창세기 3:15). 그러나 이 시편은 상아궁전 안이나 승리의 잔치 자리에서 끝나지 않는..

골고다에서의 편집 항의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나는 유대인의 왕이라 하였다’고 쓰소서.” ― 요한복음 19:21 (KJV)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 밖에서 두 강도 사이에 달려 계시는 동안, 대제사장들은 한 가지 편집상의 불만을 제기하기 위해 서둘러 재판정으로 되돌아갔다. 로마의 관례에 따르면,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죄목이 적힌 팻말을 지고 가야 하였다. 그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문이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무리에게 절도, 반역, 혹은 폭력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내걸지 않았다. 가시관 위에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로(요한복음 19:20), 아무런 조건도 없는 사실의 선언이 못 박혀 있었다. 곧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요한복음 19:19)이라는 문구였다..

십자가 위에서 달아 본 저울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로마서 14:15) 로마서 14:15에서 바울은 한쪽 저울에는 평범한 식사를 올려놓고, 다른 쪽 저울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올려놓는다. 그것은 전혀 균형이 맞지 않는 비교이다. 불과 한 절 앞에서 바울은 음식을 먹는 사람의 교리가 옳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였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은 없느니라.”(로마서 14:14) 음식 자체는 깨끗하다. 구약의 의식적인 음식 규례는 이미 폐지되었다. 그러므로 식탁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인의 교리는 정확하다. 그의 지식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이 없는 올바른..

첫 걸음을 떼기 전에

시편 80편에서 시편 기자는 깊은 고난과 황폐함 가운데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를 돌이키소서”라는 표현은 단순히 포로 된 백성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 사용된 히브리어 슈브(šûḇ) 는 성경에서 회개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단어로,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던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영적 회복을 의미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시편 기자의 기도가 담고 있는 의미이다. 그는 “우리가 이미 돌아왔으니 이제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돌이키소서”라고 간구한다. 이것은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갈 힘조차 없음을 인정하는 고백이다. 죄와 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