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교회II

5-7 자유의 법(약 2:12)

Hernhut 2014. 12. 13. 14:06

 

어떤 사람들은 자유의 법이 우리를 심판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면 야고보서 2:11절에서 십계명 중 두 계명을 인용하기 때문에 율법이 계속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야고보서 2:8절은 레위기 19:18절을 인용합니다. 이 율법 또한 자유의 법의 일부입니까? 그렇다면 모든 구약율법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안식일주의자들 주장은 그들 자신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이상을 증명합니다. 모든 율법이 유효하거나 유효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모든 명령들은 신약성경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이 구약성경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신약성경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모두 유효하다는 것입니다(7:1~7).

 

야고보는 오늘날 십계명과 안식일이 유효하다고 말하나요? 사실상 야고보는 모든 율법의 참되다는 원칙을 설명하려고 단순히 이 명령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2:10~11). 야고보는 신약성경 명령으로 그 원칙을 적용합니다.

 

고린도전서 9:9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여기서 바울은 복음전파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모세의 율법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율법이 오늘날 유효하다고 증명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야고보서 2:11~12절과 마찬가지로 단지 신약성경에 적용을 설명하기 위해 옛 율법을 사용했습니다.

 

10계명은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10계명은 단순히 법이지 용서가 아닙니다. 율법은 묶고, 행동을 속박합니다. 율법은 궁극적으로 죄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구약율법은 용서의 소망이 없어 죄책감으로 사람들을 묶을 수밖에 없습니다(10:1~39).

 

율법은 죄로부터 어떤 누구도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3:20). 왜냐면 율법은 용서를 계속 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율법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죄에 대한 지식을 주는 것이었고, 사람들이 죄책감이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3:10~18, 23, 3:19, 22~23).

 

돌 판에 새겨서 써졌던 10계명은 자유의 사역이 아니라 죽음의 사역입니다(고후 3:6~11,17). 그것이 율법이 사라진 이유입니다(고후 3:11). 자유는 주님의 영을 통해 알려집니다(고후 3:17).

 

십계명을 포함한 구약율법의 명령들은 사람들이 불순종했을 때 죄를 알리고, 죄책감으로 사람들을 묶을 수 있을 뿐입니다. 십계명이 용서를 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십계명은 자유가 아니고 죽음과 속박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라졌고 복음에 그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자유는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복음 아래에서만 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죄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실 수 있는 진리입니다(8:31~32, 34). 우리는 아들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실 때 자유하게 됩니다(8:36). 하지만 아들께선 신약성경의 희생인 그분의 죽으심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십니다(10:9~10).

 

남편이 죽은 여자는 남편의 법에서 자유하기 때문에 그녀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 율법으로부터 건져졌음을 묘사합니다(7:2~7). 무슨 율법입니까? 그 율법은 탐내지 말라고 말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자유의 법이 아닙니다. 자유의 법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케 하신 것에서 온 법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죄와 죽음의 법에서 자유하기 때문에 거기엔 비난이 없습니다. 율법은 이런 것을 할 수 없고 비난만 있을 뿐입니다(8:1~3).

 

율법 아래에 있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자유를 정탐하고 있고, 우리를 속박 안으로 끌어들일 것입니다(2:4, 4:21).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에 한 시간도 굴복하지 말아야(2:5)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셨고, 속박의 멍에에서 다시 얽히기를 거절함으로 자유 안에서 굳게 서야 합니다(5:1).

 

이 모든 구절은 자유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 안에 있기 때문에 자유만이 용서를 증명한다고 말합니다. 십계명은 용서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유의 완벽한 법은 십계명이 아닌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4:18, 1:16, 6:7, 17~18, 22, 벧전 1:22~25).

 

자유의 법은 완벽합니다(1:25). 하지만 복음만이 완벽합니다. 구약율법은 불완전합니다. 십계명 율법이 완벽했었다면 왜 하나님께서 신약성경을 주셨을까요? 주셨던 것이 이미 완벽했었다면 왜 어떤 다른 시스템이 필요했었을까요?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을 우리에게 했습니다.

 

이전의 명령은 완벽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무효화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나은 언약으로 더 나은 소망으로 이끄셨습니다(7:18~19, 22).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첫 번째 언약을 폐지하셨고, 그분의 희생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되도록 우리에게 두 번째 언약을 주셨습니다(10:9~10). 이 제사는 거룩케 된 자들을 완벽하게 합니다(10:14).

 

복음은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셨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보다 더 나은 언약입니다(7:22, 8:6, 8~9). 그 첫 번째 언약은 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 다른 언약을 주셨습니다(8:7). 십계명을 포함한 첫 번째 언약은 폐지되었습니다(8:6, 9:23).

 

예수께서 죽으시기 전에는 완벽함이 없습니다. 십계명과 모든 율법은 예수께서 죽으시기 오래전에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완벽은 십계명을 통해 이뤄지지 않지만 예수와 그분의 복음을 통해 이뤄집니다. 그러므로 자유의 완벽한 법은 십계명이 아닌 신약성경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판단 받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2:12절은 자유의 법이 우리를 판단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로마서 2:16절과 요한복음 12:48절은 예수의 가르침, 복음으로 판단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2:16절은 우리를 안식일에 관해 판단 받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유의 완벽한 법은 십계명과 안식일이 아니요, 예수의 복음이요, 그분의 가르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