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강해/마태복음

예수의 족보중에서

Hernhut 2009. 9. 29. 09:50

야곱의 아버지는 이삭이요, 이삭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임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마 1:2)

 

“그런데 전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집에서 나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하리니 네가 복이 되리라.”(창12:1~2)

 

“나로 말하건대, 보라, 내 언약이 네게 있으니 너는 많은 민족들의 조상이 될지니라. *이제부터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조상으로 삼았음이니라.”(창 17:4~5)

 

우린 다시 2절에 왔다. 신약의 첫 장에 그리스도의 계보가 있음을 알고 있다. 이 계보를 이해하려면 우리가 구약을 알아야 하는데 이 계보를 통해 간결하게 알게 된다. 우리가 아주 중요한 것을 알려고 하면 요약본을 만들어 숙지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가 이 마태복음의 계보를 이해하려면 모든 구약 성경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 계보에서 모든 이들은 구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지막이시며, 복음의 처음이시다. 그러므로 이 계보 이해는 구약을 이해하는데서 온다. 계보의 줄거리와 내용은 모두 구약에 있다. 구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계보를 보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약을 연구하는 데에는 구약을 이해함으로 커다란 바탕이 된다. 구약을 읽고 연구하지 않고서 신약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마태복음 1:2을 같이 한 목소리로 읽겠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마 1:2)

 

나는 이 말씀을 다시 작성해 보기로 했는데 “유다와 그의 형제들의 아버지는 야곱이요, 야곱의 아버지는 이삭이요, 이삭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니” 이 말에 동감하는가? 마태복음의 시작에 있어서 계보의 시작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수의 계보의 시조는 아브라함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이것은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러분은 이 의미를 알고 있는가? 한편 누가복음은 계보에서 아담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누가복음은 구원을 다루고 있고 마태복음은 왕국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은혜를 통해 선물을 받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 아담에 의한 대표되는 피조됨과 타락한 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왕국은 오직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즉 아브라함에 의한 대표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족속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창세기 안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시고 그분을 위해서 다스리시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표현되고 다스리심을 받기 위해서는 그분의 성분 즉 거룩하고 신성하며, 그분으로 조성되어 있어야만 한다(창 1:26, 29). 그러나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분으로 조성되는 것에서 벗어나서 타락, 즉 인성으로만 조성되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본성에는 영이 죽어있는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 반을 읽어 보라. 하나님의 의도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피조된 족속들과 함께 역사하시를 원하셨지만 그분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이 죽어 있는 사람들의 상태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점점 인성의 흥미와 쾌락과 만족과 욕심과 교만으로만 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점점 하나님을 피하고 멀어졌다. 사람은 영이 죽어 있는 이들끼리 모이면 모일수록 교만에 빠진다. 거대한 인성적인 요구사항들을 내놓고 서로 타협한다. 사람들이 모여 극도로 하나님ㅁ을 거역하고 거슬러 타락함으로서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대체물로 바벨탑과 성(城)을 건축했다. 그들은 왜 그런 짓을 했는가? 그들은 하나님께 에덴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인성을 표현할 그들만의 왕국을 세우고자 성(城)을 건축했고, 하나님을 상징하는 탑을 쌓아 그 탑을 숭배하기 위해서였다(창 11:1~9). 이것이 오늘날의 영이 죽어있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또 오늘날의 교파에서도 이런 것을 발견한다. 성 형제는 전에 우리들과 교통하는 가운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오늘날의 교파는 하나의 바벨 성과 같습니다. 사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듯이 보이나 하락한 모임과 같습니다. 그들은 각각의 성역을 쌓고 그들의 탑을 쌓고 있습니다. 그들은 혼합주의와 문화와 철학과 학문과 타협해 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몹시 미워하시는 것인데요. 심지어는 미신에 가까운 신앙을 믿는 이들이 많습니다. 더 높아지기 위해 신학을 세웠습니다. 신학을 배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신학교에 가고 그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있고 또 목사들이 됩니다. 이제 교회 안에서 세상의 학교에서의 석, 박사들이 직분을 가지고 바벨화를 만들어 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 말에 나도 동의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피조되고 타락한 족속을 포기하시고 또 다른 족속의 조상이 되도록 그 족속으로부터 한 사람 아브라함을 세우셨다. 이 부르심을 받은 족속으로부터 왕국이 나온 것이다(창 12:1~2, 17:4~5). 성형제는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이 완벽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는 아주 연약한 사람이었다. 그의 출신 성분은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우상을 섬기는 이였다. 출신 배경으로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이 형편없고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를 부르셨다. 우리가 비록 배경과 성분에 결점이 있으나 우리는 주님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아야하며, 순간순간 깨어 있어야만 한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형편없는 사람들이다. 여러분은 완벽하고 거룩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주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형편없을 때 부르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나오는 것은 그들이 형편없지만 그들이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을 얻는 그분의 백성은 아담이 아니라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으로서 아브라함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아브라함에게서 영적인 시작을 가지셔야 했으며 아브라함에게 어떤 일을 이루셔야 하셨다. 이삭과 야곱에게 똑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함을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에게도 갈대아 우르(지금의 이라크)를 떠났을 때 여전히 힘겨움에 압박을 받았다. 여행 중에 가나안으로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힘겨움에 이집트(즉 세상)에 전전하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또한 여기에 적용할 수 있다. 우리의 목표가 그리스도이신 가나안을 얻고 그리스도를 누리지만 우리에게 재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어렵고 압박을 받을 때 우리는 신앙에서 하락하여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향하곤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가나안을 가져야 한다. 이삭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받아야함을 보여 준다. 이삭은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죽기까지 믿음을 보여 준 사람이다. 이삭에게는 모든 것이 있다. 우리는 이삭을 누릴 필요가 있다. 이삭은 성경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 않지만 그는 부요하신 예수를 상징한다. 우리는 이 부요한 이삭을 누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부요함을 받았을지라도 성령의 통제가 없으면 우리에게는 여전히 문제가 된다. 우리는 항상 성령의 통제가 필요하다. 우리가 성령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길로 갈 것이다. 이것이 야곱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