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강해/마태복음

예수의 족보 중에서 - 유다와 다말 -

Hernhut 2009. 10. 12. 09:41

유다와 다말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마 1:3~4)

 

“성문에 있는 온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주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에브라다에서 훌륭하게 행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될지니라. *주께서 이 젊은 여자로부터 네게 씨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룻 4:11~12)

 

오늘 우리는 유다와 다말에게 왔다. 우리가 예수의 족보를 읽을 때 잃어버리지 않고 관심을 갖는 것이 바로 유다와 다말일 것이다. 다말은 누구인가? 그녀는 본래 유다의 맏아들의 아내였다. 그 아들 즉 엘은 장자의 권리를 상속받아야 했다. 그러나 다말의 남편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사람이었기에 그의 생명을 취하셨다.

 

“유다가 자기의 맏아들 엘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니 그녀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유다의 맏아들 엘이 주의 눈앞에 사악하므로 주께서 그를 죽이시니 *이에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그녀와 결혼하여 네 형에게 씨를 일으켜 세우라, 하니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아니할 줄 알았으므로 자기 형수에게로 들어갈 때에 자기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그 씨를 땅에 흘리매 *주께서 그가 행한 일을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도 죽이시니라. *유다가 자기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내 아들 셀라가 다 클 때까지 네 아버지 집에서 과부로 지내라, 하니 이는 그가 말하기를, 셀라도 자기 형들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에 다말이 가서 자기 아버지 집에 거하니라.”(창 38:6~11)

 

엘이 죽고 난 후 결례에 따라 둘째 아들에게 다말을 주었으나 그도 역시 주님 보시기에ㅔ 악함으로서 오난의 생명도 역시 취하셨다. 고대 이스라엘 규례에 따르면 유다는 장자권을 이어가기 위해 한 아들을 얻으려다가 못 얻으면 둘째 아들에게 다말을 안배하여 아들을 얻도록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난 역시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고 유다 또한 그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뒤에 유다의 아내 곧 수아의 딸이 죽으매 유다가 위로를 받은 뒤에 자기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낫으로 올라가 자기의 양털 깎는 자들에게 이르렀더니 *어떤 이가 다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보라, 네 시아버지가 양털을 깎으려고 딤낫으로 올라온다, 하므로 *그녀가 자기의 과부의 옷을 벗고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감싸고 딤낫으로 가는 길 곁의 트인 곳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長成)하였음을 그녀가 보았는데도 그가 그녀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창 38:12~14)

 

여기서 잘 읽어보면, 우리는 유다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데 11절에서 셋째 아들 셀라가 어려서 그가 장성할 때 까지 과부로 지내라고 했다 그리고 유다는 14절에 가면 셀라가 장성하였지 다말을 셀라에게 안배할 생각이 없었음을 본다. 다말이 과부의 표식을 벗고 창녀처럼 생활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유다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다말은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장자권을 갖기 위해 정당치 못한 방법을 사용하게 됐다. 어찌 보면 예수의 족보에서 이 부분도 빼버리고 싶은 형편없는 가계도였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근친상간으로 인해 잉태를 했다(창 38:6~27). 다말은 유다로부터 두 아들 즉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 도덕적으로 말하자면 아주 통탄할 노릇이다. 또 윤리적으로 말하면 정말 끔찍한 일이다. 세상에는 이런 일이 없지 않아 있을 수 있지만 암담한 일들이 성경에 기록되었다. 아무도 이런 일들이 의롭다거나 합당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의 잘못은 다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말을 속이고 셀라에게 안배하지 않은 시아버지인 유다에게 있었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녀가 나보다 의롭도다. 이는 내가 그녀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녀를 알지 아니하였더라.”(창 38:26)

 

우리는 다말의 행동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근친상간에는 언제나 쌍방이 다 연루되어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물론 다말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 그러나 유다가 말했듯이 그녀는 의로웠으며 그녀는 오로지 장자권을 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다말이 가지고 있던 목표를 여러분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는 생활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낳고 또 우리는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장자권을 얻어야 한다. 다말은 장자권을 얻기 위해 규례나 규칙들을 지키지 않았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 규례나 규칙을 지키지 말라.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또 얻으라.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악을 행하고 부당한 일을 하며, 합당치 않을 일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해하지 말라. 다말은 만약에 자신이 끊기는 일이 생긴다면 자기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끝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그녀의 방법이 잘못되었지만 그녀는 장자권을 갖는 꿈을 소중히 여겼음으로 결국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갈 수 있었다. 다말은 부적당한 방식으로 장자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성경에는 다말이라는 이름이 많이 기록되어있다. 이 이름이 나쁜 이름이 아니다. 룻기 4:12에는 이 이름을 신성함을 가리키고 있다.

 

“주께서 이 젊은 여자로부터 네게 씨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나는 다말을 높이 평가한다. 다말이라는 이름은 신성하다. 이 이유는 그녀는 어떤 죄스러운 것도 주의하지 않고서 오직 장자권에만 관심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주의하고 그분을 추구한다면 우리가 그분을 잉태하고 얻는 길이 어떤 것이든 간에 바르고 합당한 것일 것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장자권을 얻기를 갈망하고 또 분투해야 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