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모세

성막을 건축함(4)

Hernhut 2017. 8. 4. 21:57

 

예수님의 인성을 살아냄

흥미로운 것은 아카시아나무만이 성막건축에 쓰였다. 하나님은 아주 구체적이셨다. 소나무, 참나무, 다른 어떤 나무들이 유용했더라면 모세는 아카시아나무를 사용할 수 없었다. 물론 이런 나무가 이용되지 못했던 것은 그 나무들이 사막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카시아나무만이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아카시아나무

아카시아나무는 하나님에 의해 사역하신 합당한 인성을 대표한다. 아카시아나무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증거하신 것처럼 인간의 모습을 하신 예수님에 의해 살아내신 인성이다. 또 그분께서 교회생활 속에서 그분의 증거를 위해 오늘날 우리 안에서 산출하시는 인성이다.

우리는 그분께서 갈망하시는 증거가 매우 영적이고, 하늘에 속해 있고, 천사 같은 이들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께서 양식으로서 하늘에 속한 만나를 주신 것처럼 성막을 건축하시기 위해 하늘로부터 영적인 나무를 내려 보내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광야 환경에서 자란 땅에 속한 나무를 사용하도록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오늘날 그분의 증거가 우리 주변 광야 환경에서 자라는 예수님의 인성을 사용해 건축되기 원하신다.

 

기둥들과 갈고리들

성경은 바깥뜰의 기둥들에 관해 많은 말을 하지만 기둥들이 만들어진 것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앞 메시지에서 보았듯이 어떤 학자들은 기둥들이 단단한 놋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아카시아나무에 놋을 도금했다고 말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아카시아나무로만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성막이 오늘날 교회생활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카시아나무로만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동의한다. 하나님은 곱게 꼰 아마천으로 대표한 그분의 증거를 선포하는 사람들이 필요하시다. (심판)의 증거는 사람들을 끔찍하게 할 것이다. 아카시아(인성)의 증거는 사람들이 오게 한다.

바깥뜰 기둥들은 은 갈고리가 은 빗장을 걸어야 했다고 성경이 분명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 갈고리들이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 분명치 않다. 우리가 몇 가지를 연구한다면 우리는 각각 다른 학자들에 의해 두 견해가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보여주고, 어떤 학자들은 저런 방식으로 보여줄 것이다. 성경이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 체험에 의하면 성막은 교회생활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안에서 연결되었다고 본다. 이것은 기둥 뒤에 아마천을 매달도록 했을 것이고, 기둥이 보일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아마천이 앞에 있었다면 아무도 성도들 안에 있는 예수님의 인성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아카시아나무를 볼 수 없었다.

 

교회생활

교회생활은 신성한 속성에서 나오는 품위 있는 인성을 전람한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고,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그분을 누릴 수 있다(1:27). 우리가 함께 그분을 누릴 때 달콤한 어떠한 삶이 산출된다. 달콤한 어떠한 삶이 산출되는 것은 놋의 삶이 아니고, 아카시아나무의 삶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두렵게 하면 잘못된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함께 끌리게 하고, 초대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이 든 형제자매를 존경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절대 그들을 두렵게 하지 말아야 한다. 두려움은 우리가 서로 함께 있지 않게 한다. 지나친 영적 놋 형제가 우리를 향해 온다면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교제가 사라지게 되고, 교회건축은 좌절된다. 이것은 증거하시는 하나님이 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도 우리 가운데 이런 두려움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꿈이 있다. 나는 어떤 누구와도 교제가 사라지지 않게 하고, 자유롭게 성도들 가운데 생활하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나는 아마도 수년이 지나 나의 강한 사역 때문에 많은 이들이 나를 두려워 할 줄 안다. 한번은 내가 모임에 슬며시 들어가 줄 뒤에 숨었다. 사역을 하고 있던 형제는 꽤나 체험이 있었고, 아주 잘하고 있었지만 그는 나를 뒤에 앉게 했다. 재빠르게 그는 메시지를 맞췄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내 자신에게 물어야 했다.

내가 그 놋인가?”

분명 이런 방식으로 그 형제가 반응하는 것이 내게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아카시아나무가 그 곳에 있었는가?

교회생활에서 우리의 미래는 이기는 것이나 영적인 것이나 심지어 그리스도를 확대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을 찾지 못한다. 오히려 그러한 것이 진짜고, 건강하고, 정상적인 삶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처럼 사는 우리를 볼 때 그들은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교회생활이 인간적인 사랑이 풍성해지고, 관심이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과 섞일 때 우리는 사람들이 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사랑과 관심

내가 아는 노부부는 반드시 진리가 풍성치 않고, 지나치게 영적이지 않지만 실행적인 방식으로 성도들을 돌본다. 젊은이들은 그들을 통해 교회생활을 했다. 여러분이 이 젊은이들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면 그들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로 이 부부를 언급한다. 젊은이들은 이 노부부와 함께 있기를 기뻐한다. 젊은이들은 할머니의 요리에 관심을 갖고, 할아버지의 관심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기쁨을 느낀다. 젊은이들이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을 때 조언과 위안을 받기 위해 그들에게 와서 그런 감정을 느낀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 부부는 다른 성도들보다 더 영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교회생활에서 그들의 아카시아나무인 인성을 전람하려고 시간을 낸다. 그것이 그 부부의 매력이다. 이것이 우리가 갈망하는 교회생활이다.

몇 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많이 겪고 있다. 우리는 오고 가도록 하는 성령의 강한 움직임을 보았다. 우리는 높은 진리를 보았지만 결국 우리가 보는 진리는 어둑해질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 기록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되 대언은 있다 해도 없어질 것이요, 타언어들도 있다 해도 그칠 것이며 지식도 있다 해도 사라지리라....... 그런즉 이제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은 항상 있으나 이것들 중의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고전 13:8, 13)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두신 사랑은 항상 남아 있을 것이다. 젊고, 약하고, 용기가 없는 이들을 위한 사랑은 항상 거기에 있을 것이다. 성도들과 함께 있으려고 하는 사랑은 영원히 자리를 잡았다. 사랑이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교회는 축복을 받고, 모든 교회는 이러한 부부들이 있을 수 있다.

 

한 계획

우리가 이와 같은 사람들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는 성도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기만 해야 한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받을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많은 일을 겪어왔다. 많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인간적으로 상처를 입었다. 그들은 그들을 사랑하는 것 외에 동기나 체험이 아닌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줄 우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것을 하도록 이상과 계시를 보여줄 필요가 없다. 우리가 집이 있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하고, 하나의 계획을 세우라. 단지 영감만을 주지 말라.

여러분 자신에게 물으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들에게 내가 어떻게 용기를 줄 수 있을까? 내가 다음 주 그들과 차를 마실 수 있을까?”

모일 기회를 기다리지 마라. 어떤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라. 그 계획이 어떤 큰 것이 되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의 사랑은 어떤 부족함을 덮을 것이다. 우리가 이 인간성을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가 연락하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의 일의 목적, 표적이 될 것이고, 그들은 그런 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가 시도하기 힘들면 힘들수록 우리는 더 그들을 소유할 것이다. 아무도 우리의 일의 목적이 되고, 우리 허리띠에 있는 표시가 되기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인수에 집중하면 할수록 우리의 인수는 더 적어져 갈 것이다. 예수님의 아카시아나무 인성을 살아내는 이들은 열매 맺는 이들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15:4-5)

 

한 처방전

내가 오늘날 교회의 필요에 대한 처방전을 쓸 수 있다면 단순히 인성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운 인성을 훈련하라. 심지어 우리는 많은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생활을 기초로 한 가족, 따뜻함은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교회가 약하다고 말하지 말라. 새로 연락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말라. 모든 것을 잊어버려라.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교회생활 안에서 행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건강한 인성을 압박하고, 훈련하는가? 교회생활이 우리 인성을 통해 표현된 그 실제로서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가? 우리는 아카시아나무 조각인가? 우리는 성막에서 그리스도의 꼬아 만든 고운 아마천 연결할 수 있는 기둥인가? 이것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한 교회에서만 머물 수 있다면 나는 형제들 가운데 교회생활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게 할 것이다. 나는 아침, 점심, 저녁을 그들과 함께 먹기 위해 시간을 보낼 것이다. 나는 그들과 기도를 하고, 성경연구를 하고, 찬양을 할 것이다. 아무도 구원받기에 너무 늙지 않았다. 우리가 전파하는 것을 믿는다면 아무도 소망 없는 사람은 없다. 그들 안에 있는 생명은 영원하고 영원히 신선하고, 새롭다. 우리는 절대 그들이 늙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참된 증거를 줄 것이다. 나는 많은 슬픈 것으로 오랫동안 기쁨 없이 압박을 느낀다. 그럴 때에도 아는 사역을 계속하고, 교회를 섬긴다. 어느 날 젊은 부부의 가정이 나를 초대했고, 어떤 다른 사람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를 한 후 나는 소파에 앉아 그들을 보았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했다. 그들의 형제애는 나를 상승시켰다. 나는 슬픔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때부터 나는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나는 좋은 메시지를 듣는 것, 성경을 읽는 것에서 도움을 받지 못했다. 아무도 나에게 증거를 위해 크게 서고, 비통함을 잊으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주님께서 그것을 나에게 말씀하셨을지라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 저녁식사를 함께 한 형제애가 나를 구원했다. 그 순간 나는 나를 주님께서 지키시고, 나의 슬픔을 사라지도록 말했고, 그분은 그렇게 하셨다. 내가 그들을 본 인성의 전람은 나를 구원했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의 인성의 전람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격이 없다고, 많은 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소망이 없고, 시간을 같이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소망이 있다. 유일한 질문은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기 원하는가? 그들에게 신경 쓰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신경 쓰기 원한다면 그것은 소망이 있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우리가 그들을 관심 갖는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교회생활에서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주님, 천사들, 성도들 심지어 복음친구들도 알 것이다. 교회는 다시 신선해질 것이다. 왜냐면 우리가 서로 건강하고, 합당한 인성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명이 우리 가운데 정상적으로 되어 간다면 주님은 증거될 것이고, 우리는 축복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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