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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을 건축함(3)

Hernhut 2017. 8. 3. 00:30

 

성막 뜰

성경은 성막은 벽이 필요했다고 기록하지 않지만 뜰이 필요했다고 기록한다(27:9). 기둥들로 세워지고, 천을 매단 이 뜰은 하나님과 사람들이 함께 올 수 있었던 곳이었고, 바깥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증거를 분명히 나타낸 곳이었다. 기둥과 매단 천은 바깥에서 성막으로 접근한 어떤 누구에게든 첫인상을 갖게 했을 것이다. 기둥과 매단 천으로 두른 것은 하나님께서 여기에 계셨다는 것을 모두에게 선포한 것이다. 기둥과 매단 천은 오늘날 교회를 묘사하고, 교회가 전달하는 그리스도의 건강한 증거를 묘사한다.

 

그 치수

이 둘레는 가로가 100큐빗(45.72m)이요, 세로가 50큐빗(22.86m)이었다. 60개의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었고, 그곳에 고운 아마천으로 꼬아 만들었다. 기둥이 남편에 20, 북편에 20, 서편에 10, 동편에 10개가 있었다. 이 기둥들은 입구에 만들어진 천을 지지하는 것들이었다(27:9-16). 기둥 높이가 5큐빗(2.286m)이었다(27:18). 바깥뜰 안에 에워싸인 성막 그 자체는 이 높이의 2배였고 오소리나 돌고래 가죽으로 번역된 튼튼하고, 보기 싫은 가죽으로 덮여 있었다(26: 14, 16).

 

성막이 바깥뜰 둘레 높이 두 배였기 때문에 오소리 가죽 덮개의 모든 추함이 눈에 보였다. 이것은 교회생활이 매우 어지러울 수 있음을 대표한다. 우리가 아름답고, 끌리는 어떤 것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을 놓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교회를 선택한다. 누가 가장 큰 십자가를 가지고 있으며, 누가 가장 좋은 의자를 가지고 있으며, 누가 가장 환상적인 빌딩을 가지고 있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아주 단순한 어떤 것을 갈망하신다.

 

오소리 가죽이 엉망인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반면 그것을 둘러싼 고운 아마천에 연결된 기둥은 매력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성막은 사람들을 밖에 계속 있게 하는 것이 아니었고, 사람들을 오게 하고, 보게 하는 어떤 것이었다.

 

바깥뜰의 기둥들

성경은 우리에게 60개의 기둥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은 캡이 있고, 놋 밑받침에 세워지고, 은색 막대기나 띠를 잡아매는 은색 갈고리가 있고, 꼬아서 만든 고운 아마천이 이 은색 막대기로 이 기둥에서 저 기둥으로 이어지게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38:9, 17). 그런데 성경은 이상하게도 기둥들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 기둥들이 전체적으로 놋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내가 젊었을 때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고체이고 입체적인 놋이 광야에서 이동시키기에 너무 무거울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놋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표한다. 성막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에워싸였더라면 모든 사람은 겁에 질렸을 것이다. 기둥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고, 하나님 가까이로 사람들을 이끄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다른 학자들은 놋 도금을 한 아카시아나무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이것은 더 가볍고, 운반하기 더 쉽기 때문에 합리적일 수 있지만 그 겉모양은 여전히 모두 놋이다. 나는 심판이 가득한 교회생활을 원치 않는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서 와우! 당신네 사람들은 정말 경건해 보여. 당신은 죽음으로 나를 겁주고 있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우리와 함께 하기 원한다면 당신은 모두 들어가거나 모두 나가거나 둘 중 하나을 해야 해라고 말할 것이다. 분명 그와 같은 것에는 옳지 못한 어떤 것이 있다.

 

세 번째 학자들은 기둥들이 아카시아나무만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기둥들은 놋 밑받침에 세워진 반면 놋은 사람들의 시각에서 벗어났다. 아카시아나무는 곧고, 단단하다. 성경에서 아카시아나무는 가장 좋은 인성을 대표한다. 아카시아나무는 하나님을 위해 일어서도록 그분에 의해 사역되고, 교회생활 안으로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는 인간성이다.

 

아카시아나무

아카시아나무는 적은 물만으로도 사막에서 자랄 수 있다. 한번은 가뭄으로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아카시아나무를 본적이 있다. 아주 인상적이었다. 아카시아나무는 크고, 높게 자란다. 어떤 동물들도 해를 주지 못하도록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 아카시아나무는 성막에서 사용된 유일한 나무다.

 

우리가 여전히 우리의 경력, 사업, 학력,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소망한다면 우리는 사막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없다면 우리는 아카시아나무가 아니다. 사막은 소망 없는 곳이다. 우리가 사막에 있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물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나머지 모두 헛된 것이고, 추구하는 것이 무가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아카시아나무는 싹틔우기 시작한다. 비록 우리가 소망 없는 사막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발견한다. 우리는 급속하게 자라고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시를 내기 시작한다. 이것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아카시아나무다.

 

교회생활은 아카시아나무 사람들이 필요하다. 선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젤리 같고, 묵 같다. 그들은 곧게 설 수 없고, 무엇이든 잡고서 일어선다. 하나님께서 교회생활에서 이런 사람들을 사용하시기 어렵다. 하나님은 그분의 관심을 위해 세워져 기둥이 될 아카시아만큼이나 단단한 사람들의 무리를 얻기 원하신다.

 

5큐빗(2.286m) 높이

모든 기둥들은 정확하게 5큐빗(2.286m) 높이였다(27:18). 이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모두 같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 어떻게 내가 사도바울처럼 같은 높이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새 그리스도인이 나와 같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우리 중 누구를 잘라내시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쓰시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교회생활 속에서 기둥이라면 이 그림에 따라 우리 각 사람은 5큐빗(2.286m) 높이다.

 

성경에서 숫자 5는 책임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숫자 5는 우리의 영적성숙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숫자 5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분의 증거를 전달할 수 있도록 기꺼이 아카시아나무 한 조각이 되도록 전적으로 책임을 지시고 계심을 말한다. 가령 이 책임이 하나님이 없다면 사도바울이 한 조각의 쓰임 받는 나무로 변화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의지한다. 한 달란트를 가진 이나 다섯 달란트를 가진 이나 같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위해 그분 스스로가 책임을 지셨다.

 

은 캡과 놋 밑받침

각 기둥은 은 캡으로 관이 씌워져 있었고, 놋 밑받침 위에 세워졌다. 은은 하나님의 구원을 대표하고, 놋은 그분의 심판을 대표한다. 기둥이 은과 놋을 가지고 있어 너무 좋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의 구원 없이 그분의 심판만을 갖는다면 우리는 분명 지탄을 받았을 것이다. 은 캡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판을 지셨고, 우리를 위해 지탄을 받으신 것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인간적이기를 기대하신다. 왜냐면 우리의 인간성이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분의 구원이 필요하다. 젊은이들은 아직 많은 죄를 짓지 않았을 수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그들 위에 은 캡을 씌우신다. 나이가 든 우리는 더 많이 죄 지었지만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 캡을 쓰고 산다. 우리가 분을 내거나 분 내지 않거나 구원이 필요하다. 우리의 악함과 선함도 구원이 필요하다. 우리의 모든 것은 은 캡이 필요하다.

 

우리는 감히 서로를 판단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주님은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느냐?”(7:3)고 말씀하셨다. 나는 당신이 나쁜 만큼 나쁘고, 당신은 내가 나쁜 만큼 나쁘다. 나는 당신이 선한 만큼 선하고, 당신은 내가 선한 만큼 선하다. 세세한 것만 다를 뿐이다. 우리 상호간의 구원은 우리 둘 다 놋 밑받침에 세워지고, 은 캡을 쓴다는 것이다.

 

모든 이들은 놋으로서가 아닌 아카시아나무로서 서로를 보았다면 교회생활은 정말 좋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나이 든 형제들을 공경하고, 이끄는 이들을 존경해야하지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는 함께 있기를 좋아해야 한다. 이와 같은 교회생활이 건강한 것이다.

 

회개한 때부터 우리는 이 캡을 절대 벗을 수 없다. 우리 온 인격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과정에 있다. 우리의 삶은 그분의 구원 안에 거하는 생활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심판의 놋 밑받침에 세워져 있기에 전소(全燒)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 위에 서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저주 받으셨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구속받고, 구원받았다. 사탄은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 우리의 죄는 용서함 받았다. 우리는 주님이 있고, 그분의 구원으로 모자를 썼다.

 

은 갈고리와 은 빗장

또한 기둥은 은 빗장을 채우는 은 갈고리를 있다. 은 빗장 위에서는 모두에게 보이도록 꼬아 만든 고운 아마포가 내려온다. 이 아마포는 그리스도의 고운 인성을 대표한다. 우리가 놋이 아닌 은과 연결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우리는 여기서 서로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인성을 전람하는 것이다.

 

기둥을 연결하는 빗장은 곧다. 이것은 합당한 교회생활이 치리될 수 없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우리가 서로 말하는 것으로만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실제로, 실질적으로 서로를 사랑한다. 우리는 구부러지고 이기적인 책략 없이 아주 정직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동료 기둥들의 유익과 하나님의 증거를 위한 것이다.

 

각 갈고리는 은으로 만들어졌다. 은 갈고리는 하나님의 구원에서 오는 우리 사이에 있는 이들과 연합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우리 사생활을 보호한다. 우리는 천연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자신만만하고, 독립적이고, 과장적이다. 심지어 우리가 함께 모일 때 우리의 특유한 천연적인 사람이 있고, 우리는 너무 쉽게 싸운다. 우리가 함께 머무는 방법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통하는 것이다.

 

오늘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큰 사역을 갖고 있거나 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기둥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놋 밑받침과 은 캡이 있지만 왼쪽 오른쪽 기둥을 연결하는 은 갈고리가 보족해 보인다. 그들은 남들 없이 자신들끼리만 영광을 받으려고 혼자서 서 있다. 은 갈고리와 은 빗장 없이 꼬아 만든 고운 아마포를 전람할 곳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이 외로운 기둥들을 크게 인정할지 모르나 그리스도의 증거는 놓치는 것이다. 교회생활의 매력은 형제자매들이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해 함께 그분을 전람할 때만 발견된다.

 

우리가 구원을 체험하면 할수록 우리의 갈고리는 더 강해진다. 우리는 아주 조금 그리스도를 체험하면 우리의 갈고리는 부서지기 아주 쉽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경을 읽기 시작할 수 있다. 그런 후 한 동안 우리는 멈춘다. 왜 그런가? 우리의 갈고리가 너무 약하고, 빗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함께 처음 읽을 때 너무 기쁠 수 있지만 몇 번 지나면 우리에게 압박이 되었다. 우리는 재미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구원을 체험하면 할수록 우리의 갈고리는 더 강해질 것이다.

 

성경이 말하지 않지만 나는 변화된 아름다운 아카시아나무가 고운 아마천에 덧붙일 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기둥 뒤에 거는 갈고리와 빗장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정말 매력적인 아름다운 아카시아나무가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을 것이다. 그들이 아마포로서 우리의 멋진 그리스도를 볼 뿐만 아니라 그분의 관심을 변호하려고 그분과 서는 변화된 사람들과 구원받은 이들을 보게 된다. 우리 각자가 상당히 다를지라도 우리는 모두 놋 위에 서 있고, 은 캡을 쓰고, 은 갈고리와 빗장으로 연결되었고, 꼬아 만든 고운 아마를 전람하고 있다. 이것은 매력적인 교회생활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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