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열매의 두 유형

Hernhut 2014. 10. 10. 16:37

 

, , 귀한 보석이나 나무, , 검불

두 땅은 히브리서 6:7~8절에서 대조를 보입니다. 첫 번째 땅은 땅을 일구고 가꾸는 자들에게 채소를 냅니다. 이 땅은 하나님에게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땅은 가시와 찔레를 냅니다. 이 땅은 버려지고, 저주가 가까이 있어 끝에서는 불살라 질 것입니다.

 

가나안 땅과 이집트 땅은 대조적인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한 면에서 히브리서 6:7절의 땅과 유사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축복을 받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다른 면에서 이집트 땅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땅은 저주 아래에 있었습니다. 저주는 1,000년 즉 천년왕국 동안 풀리게 될 것이지만 이때의 끝에서 땅과 그 안에 있는 사역들은 불살라질 것입니다(벧후 3:10~13).

 

히브리서 6:8절에 있는 땅은 이집트 땅과 같은 것입니다. 가시와 찔레를 내고 그 끝은 불살라진다고 말했습니다. 7절에 있는 열매와 땅과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이집트 땅은 오늘날 사람이 사는 세상의 예표입니다. 이 세상은 가시와 찔레를 내는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3:17~18).

 

저주 아래에 있는 땅이든 천연적인 사람이 그 땅과 연결되어 있든 하나님께서 관련되어 계시는 한 총체적이고, 완전한 거부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가시와 찔레를 내는 것은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에 있는 언급은 땅 위에서 구속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실 그는 거절 되었습니다.

 

이 언급은 구속받은 사람이 땅을 일구고, 가꾸는 사람들에게 채소를 내는 땅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가시와 찔레를 땅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이 언급은 가나안 땅과 관련하여 10명의 사악한 보고를 믿었던 가데스바네아에서 모세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앞에 놓인 가나안 땅으로 가기보다 오히려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13:31~14:4).

 

이스라엘사람들은 일구고 가꾸는 사람들에게 채소를 내는 땅을 향해 가기보다는 오히려 가시와 찔레를 내는 땅을 향해 되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의 전복(顚覆)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되돌아가려고 했던 이집트 땅에 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야 했던 것에 완전히 일직선상에 있었습니다. 그들 앞에 놓인 그 땅과 그들의 부르심과 관련된 그들은 거절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권(神權) 안에서 하나님의 맏아들로서 가나안 땅에 거주하도록 이집트로부터 불러내어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 목표치에 미치지 못하여 광야에서 전복(顚覆)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경고는 같은 예를 따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같은 운명의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구원을 받았나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세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사람들이 그들의 부르심의 목표에 이르지 못한 곳에서 피의 오른편에서 전복(顚覆)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아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한 유형에 따라 같은 이유로 같은 곳에서 전복(顚覆)될 수 있습니다(고전 9:24~10:11).

 

 

의로운 롯

의로운 롯에 대한 체험(벧후 2:7~8)은 또 다른 구약성경의 다른 관점입니다. 구속된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땅으로 불러내심은 세상에서 옮기신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있는 말씀은 영적인 영역 안에 어떤 깊이 있게 행동하는 육욕적이고 세상에 속한 사람의 무능력과 관련된 것에 정말 유익함을 줍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창세기 14장에서 왕들과의 전쟁에서 구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록에는 멜기세덱이 이 전쟁 이후 빵과 포도주를 내놓았을 때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멜기세덱으로부터 아브라함만이 축복받았고, 세상이 주었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에 관해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14:18~24).

 

한 가지 측면은 롯이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체험에 들어가는 것에서 롯은 배제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멜기세덱의 나타남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라함과 그의 씨와 약속하고, 다루심이 아닌 구원받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이 측면에서 가르치는 것은 다가오는 왕국이 그리스도인들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제사장직분을 발휘하실 때 나타날 것이지만 모두가 축복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아브라함과 롯은 히브리서 6:1~6절과 맞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멜기세덱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되었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배경을 보면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듬해 이들 두 사람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는 정말 교훈적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구릉지역 헤브론 근처 마므레 초원에서 살았습니다(13:18, 14:13, 18:1, 23:17~19, 35:27). 반면 롯은 낮은 지대인 요르단 초원에 있는 소돔에서 살았습니다(13:10~12, 14:12, 19:1).

 

이 두 곳의 차이는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의 차이와 유사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구릉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고, 여리고는 요르단 남쪽 끝 사해 근처 낮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여리고는 성경에서 서로 현저한 대조를 보입니다. 하나는 다가오는 시대에 땅의 민족들에게 축복이 흐를 위대한 왕의 도시”(48:2, 14:1~21)지만 다른 곳엔 저주가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6:18, 26). 아브라함과 롯이 살았던 두 곳은 현저히 상반된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롯의 내리막은 창세기 13:10절에서부터 19:1절까지 다른 위치를 볼 수 있고, 그의 내리막의 결과는 창세기 14:12~24, 19:1~38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롯은 눈을 들어 요르단 초원을 바라보았습니다. 요르단 초원에는 우물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르단 초원을 선택했고, 초원 도시에 거주했으며, 소돔에 그의 장막을 쳤습니다. 이것을 행하는 과정에서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자신을 분리했습니다(13:10~12). 그것은 육욕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믿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한 것입니다.

 

롯이 다툼이 생겼고, 아브라함에 의해 구해지는 그날이 왔습니다(14:12~16). 초원과 관계있는 그의 갈망은 왕들의 전쟁 후 멜기세덱이 나타났을 때 멀리 바라보는 것을 막았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14:18~24). 그가 멀리 바라보는 것을 실패한 것은 초원의 도시와 관계되기 이전의 그의 갈망과 결부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소돔에서 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의 일들과 연결되었습니다(19:1). 도시의 일들은 롯과 같이 문에 앉아있던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에 롯을 구하고 소돔에서 의로운 자를 대신해서 기도할 때를 제외하고는 아브라함은 초원의 도시에서 옮겨 구릉지대에서 거주했습니다(14:14~16, 18:23~33). 요르단 초원에서 사람들의 일은 그에게 순간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초원의 도시들이 멸망에 이르렀던 그날 완전히 대조적인 구원받은 두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날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6:7~8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각각의 영역에서 하나는 가치 있는 것으로 다른 하나는 가치 없는 것으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고전 3:12).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멜기세덱과 관련된 가르침을 계속해서 볼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관심은 요르단 초원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고 구릉지역에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갖습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롯처럼 멜기세덱의 가르침을 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관심은 구릉지역이 아닌 초원의 것에 관심을 둘 것입니다.

 

 

소돔에서의 탈출

요르단 초원의 4도시는 아브라함과 롯의 시대에 하늘로부터 내리는 유황과 불로 멸망되었습니다(19:24~25, 29:23). 하지만 롯은 소돔에서 구출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구출은 고린도전서 3:15절에 있는 말씀처럼 되었습니다. 불에 의해 구출된 것처럼 구출된 것입니다.

 

멸망 이전 롯은 소돔 밖에 있었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네 생명을 건지기 위해 도피하라. 너는 네 뒤를 돌아보거나 이 온 평야에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피하라. 네가 소멸될까 염려하노라”(19:17) 여기에 네 부분의 명령이 있습니다. “네 생명을 위해 피하라.” 이것은 혼/생명의 구원입니다. 육체적인 생명이 이런 경우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명령에서 분명히 하는 것처럼 육체적인 생명보다 훨씬 이상의 것입니다. /생명과 관련된 세 부분은 다음처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1) “뒤 돌아보지 말라.” (9:62, 12:1~2)

2) “이 모든 초원에서 머물지도 말라.” 이집트와 같은 낮은 곳에서 남아 있지 말라

3) “산으로 도망하라.” (“은 왕국을 상징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산은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의미합니다(2:1~5, 2:35, 44, 45, 17:1~5).

 

어떤 영어 번역과 대조적으로 창세기 19:17절의 히브리 원문에 있는 KJV처럼 단수입니다. 그 말은 산들이 왕국들을 상징하지 않고, “이 왕국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산들의 차이는 이사야 2:2~3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들에 {}의 집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세워지며 작은 산들 위로 높여지리니 모든 민족들이 그곳으로 흘러들리라. *많은 백성들이 가며 이르기를, 너희는 오라. 우리가 {}의 산에 오르고 야곱의 [하나님]의 집에 이르자. 그분께서 자신의 길들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터인즉 우리가 그분의 행로들로 걸으리라, 하리니 이는 법이 시온에서 나아가며 {}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라.”

 

초원에서 산으로 피하는 것은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도망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다가오는 왕국과 관계있는 땅입니다. 이 땅은 사람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곳입니다. 이 땅은 그리로 피하는 사람들이 거할 곳입니다.

 

이 네 부분의 명령 다음에 사람들에게 일어날 일들이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소멸되지 않도록 산으로 피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것은 소멸될 것은 소멸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그는 그의 혼/생명을 잃을 것입니다.

 

하지만 롯은 그 명령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네 가지 명령을 그에게 주셨지만 그는 그 명령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영적인 감각은 충분하게 개발되거나 훈련받지 않았습니다. 그가 행한 것은 단지 육욕적인 방식에 따라 행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19:19~20). 이것은 주님께서 산 대신 소알로 가려고 했던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시고 불평하시지 않은 이유가 분명합니다(19:21~23).

 

소알은 롯이 종사했던 초원의 도시였습니다. 소알은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초원의 도시들이 멸망된 후 롯은 소알에서 거주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가 전에 피하도록 명령받았던 산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같지 않았습니다. 롯은 주님 앞에 서있기 보다는 오히려 동굴에서 거주했습니다(19:27, 30, 18:22). 그는 사실상 영광의 장소보다 오히려 부끄러움의 장소에서 거주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두 순례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방식을 따라 자신들의 삶을 다스립니다. 어느 날 전혀 반대인 위치를 차지하려고 찾고 같은 목적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순례여행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관리한 것에 완전히 비례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산 위에 있기를 바랍니다. 主護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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