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고의적인 죄

Hernhut 2014. 10. 9. 04:00

 

고의적인 죄는 무엇인가?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들의 결과

 

“(약속하신 분께서 신실하시니) 우리의 믿음의 고백(소망의 고백)을 흔들림 없이 굳게 잡고 *서로를 살펴보아 사랑과 선한 행위에 이르도록 격려하며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지 말고 서로 권면하되 그 날이 다가옴을 너희가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진리에 관한 지식(헬라어 에피그노시스epignosis로 성숙한 지식을 의미함)을 받은 뒤에 고의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죄들로 인한 희생물이 남아 있지 아니하고 *대적들을 삼킬 심판과 불 같은 격노에 대하여 두렵게 기다리는 어떤 일만 남아 있느니라.”(10:23~27).

 

그리스도는 죄를 위해 희생물로서 그분 자신을 주셨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피는 하늘에 있는 긍휼의 보좌 위에 있습니다. 또 그분은 오늘날 죄를 짓는 그리스인들을 대신하는 하늘에 속한 희생물로 대제사장의 사무를 차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짓는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깨끗이 하는 일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깨끗함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죄를 고백하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그리스도인들에게 깨끗함이 일어납니다(요일 1:9).

 

히브리서 10:26절에 있는 고의적인 죄(희생이 없는 죄)를 다룰 때 성경을 연구하는 어떤 학생들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에 속한 사역을 다루는 히브리서 10:19~22절을 보고, 또 하늘에 속한 희생 안에 있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사역을 사용하는 것을 스스로 거절하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고의적인 죄로 보려고 합니다(26).

 

이런 측면에서 유일한 희생을 거절하는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이 구절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희생물이 그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아있지 않음으로 보는 것이요, 죄 안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어떤 죄와 같이 히브리서 10:26절에 있는 고의적인 죄는 더러움을 낳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이 의미에서의 죄와 같지 않게 다른 상황에서 이 죄가 존재합니다.

 

히브리서 10:26절은 이 구절에서 다룬 방식에 따라 죄를 범한 사람에게는 희생물이 남아있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만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 있는 희생물은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오늘날의 사역으로부터 고의적인 죄를 분리할 것입니다.

 

이 희생물은 그리스도인이 공급된 희생물을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지 계속해서 존재합니다. 각각의 성도는 다른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고의적인 죄는 그리스도인들이 범할 수 있는 어떤 다른 죄들과 어떻게 다를까요? 어떻게 하면 이 죄가 그리스도의 오늘날 사역 아래에 오도록 할 수 있으며, 사람들의 고백으로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한다면 어떨까요?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가요? 육체의 죄를 숨기고, 이런 죄들을 고백하기를 거절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서 10:26절에 있는 경고 받는 것이 불가능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히브리서 10:23~25절과 계속해서 이견이 맞지 않습니다. 이 견해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백을 하든지 고백을 하지 않든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 구절에 있는 고의적인 죄가 고의적이고, 계획적이고, 알고도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른 넓은 의미의 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진리가 알려져 있었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른 대부분의 죄가 단수의 범주로 나누어졌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던 것은 그들이 저지른 죄였고, 저지르고 있었던 죄였으며, 저질렀던 죄였습니다.

 

히브리서 10:26절에 있는 고의적인 죄를 합당하게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희생물이 없기 때문에 문맥적으로 이 죄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사람은 이 부분이 언제나 잘못될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있는 모든 경고 중 첫 번째는 구약성경으로부터 심하게 묘사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두 번째 경고는 모세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에서 왔고(3:1~4:16), 세 번째 경고는 그리스도인들과 관계있는 문제를 같은 의견으로 계속 경고합니다(6:4~20).

 

두 번째 경고와 세 번째 경고에서 죄는 네 번째 경고에서 공개적으로 나타났고, 볼 수 있도록 언급되었습니다(10:26~39). 모세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희생물이 없었기 때문에 죄를 범했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결과에 따라 똑같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네 번째 경고는 이 죄와 관련된 의견이 계속되고, 문제는 정말 위대한 구원과 관계있습니다. 그 결과가 장자의 권리와 관계있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12:1~29).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르심을 받았던 그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절함으로 희생물이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의 죄에는 희생물이 없었음으로 하나님은 그 문제에 관해 미리 정하셨던 그분의 마음을 변하시지 않으셨고, 변하실 수도 없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하늘에 속한 땅과 관련된 똑같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처럼 희생물은 이와 같은 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표에서처럼 하나님은 오늘날 그분의 백성들이 죄를 지었다면 이미 정하신 마음을 바꾸실 수 없으시고 바꾸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6:4~6절에서 말한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님]께 참여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본 자들이 *만일 떨어져 나가면 다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함이 불가능하니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아들]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그분을 모욕하느니라.”

 

이 죄에 대한 언급은 오늘날 제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이도록 하는데 중심적인 목적을 가지고 계속됩니다. 주일(일요일)에 정기적으로 모이거나 한 주간 중 다른 시간에 서로 모이도록 하는 것입니다(10:23~25). 본문에 주어진 특별한 목적은 단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경주에 대해 서로 격려하고 권고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입니다. 그들 앞에 놓인 소망과 관계있는 믿음의 경주(믿음의 고백)서로권고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23). “믿음의 고백소망의 고백으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앞에 놓인 이 소망은 그들이 어느 날 깨닫게 될 그들이 부르심을 받았던 바로 그 소망입니다.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믿음의 경주에서 관을 얻게 되고 그분의 능력의 날에 그리스도의 통치 위치를 차지할 것입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함께 모여 권고합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정기적으로 함께 모이는 것에 대한 실패의 위험성을 서로 경고합니다. 함께 모이는 것을 통해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서로의 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서로의 힘을 위해 모이는 것을 실패할 수 있습니다. 정기적인 모임으로 고의적인 죄를 포함해 배교의 위험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앞에 놓인 소망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성숙한 지식에서 옴에 따라 고의적인 죄는 단순히 배교와 관계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두 번째, 세 번째 경고에서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위대한 구원을 소유하는 것을 실패할 것입니다(첫 번째 경고). 이것은 장자권을 깨닫는 것을 실패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다섯 번째 경고).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기를 거절한 직후 민수기 15:30~31절은 희생물이 없었던 죄와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룹니다. 이와 같은 죄에 대한 예는 사람이 안식일을 지기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희생물이 없었던 죄와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은 가데스바네아에서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관계가 끊긴 후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과 관계있습니다. 문맥적인 예는 가데스바네아에서 시작된 이스라엘 사람들의 체험과 관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과도 관계가 있었습니다(15:32~36).

 

가데스바네아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사람들은 안식일을 어겼습니다. 그와 같이 지은 죄에는 희생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두 경우 다 주님은 죽음이 수행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결국 책임이 있던 모든 세대들은 죽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장막 바깥으로 쫓겨나 돌로 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앞에 놓인 땅은 창세기 2:1~3절에서 그려진 안식, 안식일 안식과 관계있습니다(4:4~9). 이 땅에서 등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은 모세 아래에서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행했던 것과 똑같이 당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을 둘러싸고 있던 성숙한 지식을 가졌었지만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의 부정적인 정탐꾼의 말을 들은 자들은 결국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떠 다른 측면에서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놓으시고 안식일 안식에 관해 말씀하신 것을 어길 것입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표적(31:13~17)으로서 주신 것으로서 민수기 15:32~36절에서 안식일을 어기는 사람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오늘날 6일 사역에 이어지는 안식의 날을 가리키는 표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 타락된 창조(물질적인 창조)6일 간의 회복사역을 하신 후 일곱 번째 날에 안식하셨던 것처럼 그분은 오늘날 타락한 창조들을 6(6,000)간 회복사역을 하신 후 일곱 번째 날(7,000년 째)에 안식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수기 13:1~15:41절과 히브리서 3:1~4:16, 6:1~20절에서 그리는 것은 히브리서 10:26~39절에 있는 것을 오늘날 고의적으로 죄를 지을 수 있고, 그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의적인 죄는 한 가지 수단을 통해서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부르심을 둘러싼 진리에 대한 성숙한 지식을 갖고 난 후 이 진리를 저버리는 배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동을 저지르는 그리스도인은 히브리서 10:29절에 따라서 3가지 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발아래에 짓밟힐 것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것을 그리스도의 피로 여길 것입니다. 은혜의 영께 모욕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께서 자신의 아들의 통치와 관련해 말씀하신 것을 붙잡고 높은 곳에 계시기 때문에 단순히 이 본질의 범주에 고의적인 죄를 두십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 영역 안에서 말씀하신 것에 대한 성숙한 지식을 가진 후 배교하는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는 한 가지 것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적들을 삼킬 심판과 불 같은 격노에 대하여 두렵게 기다리는 어떤 일만 남아 있느니라.”(10:27)

 

히브리서 10:30~31절과 고린도후서 5:10~11절을 비교해봅시다. 원수 갚는 일은 내게 속하였으니 내가 갚아 주리라. []가 말하노라, 하시고 또 다시, []가 자신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하고 말씀하신 분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 안으로 떨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로다.” 여기서 두렵다라는 단어는 무시무시하다, 끔찍하다, 소름끼치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포베로스phoberos입니다.

 

심판대의 사건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할 가장 끔찍한 시간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심판대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두렵고, 끔찍한체험을 하게 됨을 알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에 대한 공포가 나타나고, 보상만이 완전하게 선고될 것입니다. 主護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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