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중생(거듭남)

거듭남 7. 우리는 새 생활의 필요를 받았음(1)

Hernhut 2009. 8. 6. 10:39

7. 우리는 새 생활의 필요를 받았음(1)

 

우리가 거듭나게 되었던 것을 봄으로 세 결과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믿었던 순간 새 생명, 새 입장, 그리고 새 생활의 필요를 받았습니다. 이 세 결과 중 소홀히 다루었던 하나는 아마 세 번째 것 즉 새 생활의 필요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거듭나게 되는 것과 또 거듭남의 실제를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새 생명을 모두 받았지만 반면에 새 생활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후에 새 생활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병원에서 깊은 혼수상태(coma)에 있는 사람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혼수상태에서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하던 사람과 어떻게 영향을 미치게 하든지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그는 아직까지 인간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인간)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맞습니다. 허지만 그는 건강하고 또 정상적인 사람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코마상태에 있는 사람은 느낌과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정상적인 인간의 실재가 아닙니다. 같은 방식으로 거듭나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신성한 생명을 갖는 것은 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작정하셨던 생활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듭나는 것은 새 생활의 필요의 결과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새 생활을 돌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적인 코마상태”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거듭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코마상태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첫 번째 강의에서 말했던 것처럼 “하늘에 가고 있음”의 가르침은 사람의 양심을 유혹할 수 있으며, 영적인 느낌이나 감각이 없도록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것이 단지 하늘에 가는 것을 기다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살아가는 동안에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가 구원받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진실로 거듭났나요?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생활의 필요를 받았다는 것을 깨달을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그가 거듭났으나 그가 거듭났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가 거듭났다고 깨닫는 것은 그에게는 심히 어렵습니다. 불행하게도 여러분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할 때 여러분은 그들이 영적인 혼수상태인 코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당신은 거듭났습니까?”라고 물을 때 그들은 “예,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들에게 “그 후에 당신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묻는다면 그들은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질문하는 것에 의해서 설명한다면 “당신이 거듭난 이후에 당신에게 일어난 것이 있습니까? 당신의 생활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질문하면 그들은 당신에게 어떻게 대답할지 모를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어떤 생활의 종류를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은 “인간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난 개처럼 살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인간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인간의 생활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이 거듭났을 때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그 생명은 다른 종류의 생활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코마상태”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은 우리가 받은 새 생명과 어울려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누리는 새 생활

 

우리가 거듭난 후에 가져야할 새 생활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째로 누리는 생활입니다. 우리 누구든지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시간에 우리 구원의 풍성을 누려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스스로 교회를 잘 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인 아무도 “천국에 가고 있다고” 만족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릴 수 없다면 미래에 대해 소망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이가 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매일의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해서 거듭났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거듭남과 동시에 나는 풍성한 누림 안으로 데리고 왔노라. 너희 생활은 그리스도의 풍성한 누림으로 충만되어야 하노라. 다음 시대까지 기다리지 마라. 오늘 네가 이 땅에 있는 동안 너는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풍성한 누림 안에 있어야할 것이라. 어느 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땅으로 하늘에서부터 내려올 것이다. 그런 후 나는 영원을 위해서 모든 나의 풍성을 나태내고 전람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너의 기회를 놓지는 것과 새 예루살렘을 기다리는 것을 원하지 않노라. 나는 새 예루살렘을 놀라운 미리 맛보는 너희를 원하노라. 나는 너의 매일의 생활에서 모든 나의 풍성을 누리는 너희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실재의 영은 그리스도의 누림 안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임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방법을 계시하십니다. 그 방법은 그 영(the Spirit)이십니다. 요한복음 16:13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듣는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실 것임이라.”

 

그리스도의 누림의 실재 안으로 우리에게 가져오실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요한복음 16:13에서 계시하신 것처럼 실재이신 그 영이십니다. 또 이 구절에서 그 영께서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나타내 보이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재의 그 영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을 설명하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누림 안에 있다면 우리는 몇 년 후에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풍성이 놀라운 그 영에 의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나타내 보이실 때 달라집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누리기 원한다면 우리는 모든 누림이 실재이신 그 영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우리 사람의 영을 쓰심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누림 안으로 들어가며, 실재이신 그 영 안에 있을까요? 우리 또 다른 구절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24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가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할지니라.”

주 예수께서는 아주 흥미로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너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가? 하나님은 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적인 영역(왕국)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또 신학적인 영역 안에서도 역시 계시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물질적이시지도 철학적이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시며, 무엇이십니까? 주 예수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너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하는가? 만일 너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한다면 너희 영 안에 계신 그분을 예배할 필요가 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이십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인데 그는 또한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우리 사람의 영안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3:6은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영 안에서 거듭났고, 또 우리는 영 안에서 지금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생각이 우수하고, 우리의 IQ가 높다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알 수가 전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철학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각을 찾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땅에 계셨을 때 그분은 이런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그분은 “너희가 하나님을 알기 원하느냐? 하나님은 영이시다. 너희가 하나님을 경배하기 원하느냐? 그렇다면 너희는 어희 영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그분과 함께 깊고, 개인적이고, 친밀한 접촉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빈번히 예배의 참된 의미를 이해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너무 높이 계시고 우리는 너무 낮은 곳에 있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 아래로 머리를 숙이는 것을 의미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의 목적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이시며, 영 안에서 우리는 그분께 예배를 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배의 끝의 결과는 두 영 즉 하나님 그 영과 우리 사람의 영이 하나가 됩니다. 예배는 그 영과 그 영을 함께 가지고 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시며 그분은 여러분의 영과 함께 섞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하나님은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하나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접촉하고 그분을 체험하고 그분을 누립니다. 우리가 영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을 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재이신 그 영께서 우리의 주관적인 누림을 위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베일을 벗기기 위해서 우리 영 안에서 움직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누림

 

우리가 거듭난 후에라야 새 생활 안에서 우리가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누림은 우리 사람의 영 안에서 일어납니다. 주님은 많은 다른 분위기와 느낌을 누리는 우리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많은 흥분이나 열심을 누리는 우리를 원치 않습니다. 주님은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그분을 누리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다른 생각들을 누리려고 갈망할지 모르나 주님께서는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좋은 느낌, 흥분이나 복을 주기 원치 않는단다. 나는 내 자신을 누리려고 너희에게 주기 원한단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완전하게 깨달아 본적이 있습니까? 거듭난 이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새 생활의 필요를 받았습니다. 이 새 생활은 그리스도의 사람을 누리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누림을 빼고서 진정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이나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복을 누릴지 모릅니다. 그들은 드물게 “나는 살아계신 분의 임재를 누립니다. 그리스도 자신은 나의 누림이십니다.”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누리기 위한 살아계신 분이시다는 것을 보아야합니다. 우리는 흥분의 종류나 감정을 누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신 실재의 사람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이십니까? 반면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어떤 풍성입니까? 그리스도의 풍성은 100가지의 생각을 포함할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으로부터 6가지의 생각을 봄으로서 시작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림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로다.”(요 1:29)

 

우리는 어린양으로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누립니까? 우리는 우리 모두가 죄에 빠져있다는 것을 깨달음에 의해서 그분을 누립니다. 우리 모두의 죄가 단지 덮여졌으며 용서함 받은 것이 아니라 심지어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제 저지른 죄뿐만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20년 후에 저지를 죄들 까지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미래에 있는 죄들은 이미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주님에 의해 끊겼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께 말해야 합니다. “주여,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저는 저의 구원자로서, 어린양으로서 당신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저의 모든 죄는 끊어졌습니다. 할렐루야!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몇 년 후에 지을 죄들은 어떻습니까? 그러한 죄들은 이미 끊어졌습니다. 우리는 우리 영 안에서 이런 방식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 주님을 찬양합니다. 제게 하나님의 어린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어린양께서는 나의 모든 죄, 즉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과 또 내일의 모든 죄까지도 끊고 계십니다. 저의 모든 죄는 처리되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를 누리면 누릴수록 죄가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스도를 누리면 누릴수록 세상과 구별됩니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은 저의 하나님의 어린양을 누림에 의해 처리되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할렐루야!” 심지어 우리가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어린양으로서의 그분을 체험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여,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할수록 어린 양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사란으로서의 그분을 얻게 되어서 우리에게 주관적이 되십니다. 우리는 “내가 아주 깨끗하고, 만족하며, 죄를 씻음 받은 것은 어린양 때문이다. 저는 더 이상 죄와 문제가 없다.” 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오 주 예수여, 이 죄에서 끊어 주옵소서.”라든지 “주 예수여, 나의 죄를 이기도록 나를 도우소서.”라는 기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할 필요가 없고 우리는 어떠한 누림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사람을 누리기 위해 거듭난 것입니다. 또 풍성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어린양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해서 거듭났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면 누릴수록 어린양을 체험하며, 또 우리의 죄들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에 이러한 체험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누림 안에서 아주 많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에 관해서 완전하게 잊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도 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를 “너희는 죄인이다.”라고 비난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나는 당신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너희는 오늘 아침에 부적당하게 처신하지 않았는가?”하고 말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 미안하다. 나는 그것에 관해서 모두 잊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에 관해 잊을 수가 있는가?” “나도 모른다. 나는 한사람과 함께 있을 뿐이다. 나는 내 죄들과 내 결점들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이 분은 아주 거룩하시다. 내가 그분을 체험하고, 그분을 누릴 때 그분은 죄와 연결된 모든 것들을 끊으신다.” 우리는 어린양으로서 이러한 그리스도의 누림을 모두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2. 우리의 친구로서 그리스도를 누림

그리스도를 누리는 두 번째 방법은 친구로서 입니다. 요한복음 15:14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그분께서는 우리의 친구이십니다.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터놓는 사이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올 때에 우리는 우리의 처지에 관해서 아주 정직하고 솔직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숨기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넌지시 떠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의 친구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완전하게 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그분께 말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빈번하게 주님께서 우리가 하락하기를 기다리시며, 우리를 관찰하시려고 우리 위에서 멀리 떨어져 계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분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계시는데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화나게 한다면 우리를 책망하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또 만일 우리가 그분의 임재에 온다면 그분의 단 한가지의 질문은 “오늘 잘못한 것이 어느 것인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주님이 있다면 우리 모두는 곤란해 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친구십니다. 첫 번째로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들을 끊으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그 다음에 그분은 우리의 친구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면 누릴수록 우리가 그분께 모든 것을 열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것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심지어 아주 나쁜 죄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분께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가족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하더라도 그분께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진정하신 우리의 친구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에 관해서 그분과 함께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간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에 귀기우리시는 귀를 가지고 계십니다. 베드로전서 5:7에서 그 이유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이는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기 때문이니라.”

 

우리는 친구로서 주 예수께 모든 것을 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이 훈련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집에 있으면서 어떤 시간을 갖고 있을 때 비록 그 시간이 몇 분 정도 일지라도 여러분 자신을 그분께 열려고 하십시오. 그분께 모든 것을 말하십시오. 여러분이 너무 창피한 것이나, 낮은 것이거나,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관해서 그분께 말씀드리십시오. 여러분은 그런 것들은 그분께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것들을 알면 알수록 그것들에 관해 모두 그분께서 아시도록 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말해야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 나의 친구이신 것과 모든 것을 말씀드릴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주님 당신께서 나의 문제에 관해 내게 말씀해 주옵소서. 당신께서 나의 낭패에 대해 말씀해 주옵소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뿐입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문제들이 없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자신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문제들이 있고, 여러분의 하루의 생활 곳에서 근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모든 문제들을 그분께 여러분 모든 존재를 열어 드림으로 인해 살아계신 인격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친구시며 그분은 여러분에게 들을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알고 계시며, 이해하시며, 그분은 회복하시고, 또 여러분과 함께 교제하실 수 있으십니다.

 

3. 우리 맏형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림

우리는 또한 형님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려야합니다. 요한복음 20:17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대지 말라. 이는 내가 아직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음이라. 그러나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그분은 하나님의 첫 번째로 태어나신 아들이 되셨고 우리는 그분의 많은 형제들이 되었습니다(롬 8:29). 주님께서 우리의 맏형이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최초(먼저)가 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께서는 완전하신 인성을 가지셨고, 우리는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그분께서 사셨던 방식으로 우리 또한 살아야 합니다. 우리 맏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이 호칭은 우리가 그분인 것처럼 똑같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형상에 똑같아지게 되어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그분께서는 우리가 되어 가는 것의 원형(原形)이십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미래의 형상입니다. 어떤 날에 우리는 오늘날의 이 놀라운 그리스도와 똑같이 정확하게 맞게 될 것입니다.

 

4. 선한목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누림

 

우리는 선한목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누려야 합니다. 요한복음 10:11을 기도로 읽겠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주거니와”

 

그 다음에 요한복음 10:14도 읽읍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들을 알고 양들도 나를 아는 것이”

 

그분께서 땅에 계셨을 때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그분의 생명을 저버리시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그분은 하늘에서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주의 직분과 왕의 직분과 권능자로 즉위하셨으며, 또 높여지셨습니다. 이와 같으신 그분은 오늘날 우리에게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삶을 주권적으로 배열하심에 의해서 외적으로 우리를 먹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상황의 중심에서 우리에게 그분자신을 사역하심으로서 내적으로 우리를 먹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먹이심에 관해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목자로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림은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와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에 관해서 연관시키거나 너무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 결혼, 직업, 교육 등에 관해서 너무 많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보좌 위에 계시고 그분은 우리의 선한목자이십니다. 거기에는 걱정이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놀라우신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분을 진실로 예배할 것입니다. “주여, 저는 이와 같이 크고 놀라운 목자가 되심을 당신께 경배를 드립니다. 내 생명은 당신의 손에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께 내 자신을 맡길 수 있습니다.”

 

5. 몸의 건축자로서 그리스도를 누림

 

다섯 번째 방법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건축자로서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그것을 일으켜 세우리라, 하시니”(요 2:19)

 

주께서는 무엇을 건축하고 계십니까? 그분은 성전을 건축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이 구절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는 육체적인 성전이 아니라 그분의 몸의 성전입니다. 그분께서는 “만일 너희가 이 성전을 헌다면, 나는 삼일 안에 그것을 일으켜 세우시겠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적인 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 영으로서 주님은 부활 안에서 우리 안으로 분배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비밀한 인 그분의 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함께 주님께서 세우실 건축 재료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가지지 말아야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누리면 누릴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안에서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의 건축은 우리 인간의 노력에 의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나는 당신과 함께 세워지기를 원한다.”고 서로에게 말할 문제가 아닙니다. 비록 이것을 말하는 것이 선하다할지라도 만일 진정으로 우리가 함께 건축되기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을 누려야 합니다. 그분은 그분의 몸의 건축자이십니다. 우리가 우리 영 안에서 살아계신 인격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리면 누릴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건축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리스도의 사람을 누리는 수고를 하면 할수록 우리는 의 다른 지체들 모두와 함께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 건축은 우리의 건축자 자신의 누림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우리가 결정하지 말고 세워지도록 분투해야만합니다. 몸의 건축자이신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사람을 누림에 의해 순수하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건축될 수 있습니다.

 

6. 신랑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림

 

마지막으로 우리는 신랑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려야 합니다. 요한복음 3:29에서 침례자 요한은 인용하고 있습니다.

 

“신부를 얻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그 음성으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나니 그런즉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 3:29)

 

여기서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불렀습니다. 친구로서 신부를 얻고 계셨던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기뻐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이 신부입니다. 우리가으로서 건축되어짐으로서 우리는 또한 그분의 신부로 준비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과 결혼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사람을 누리면 누릴수록 우리는 그분께 약혼자가 되고 있는 감각을 가져야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주 예수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오, 주여! 너무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나의 모든 존재를 당신께 드리기 원합니다. 오, 주 예수여, 나는 당신에게 속했습니다. 당신은 너무 만족스럽습니다. 당신은 너무 자양(滋養)이 되십니다. 당신은 아주 강하십니다. 당신은 놀랍고도 신선하시고 달콤하십니다.”라고 기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나는 이 한분과 결혼할 것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이 놀라우신 신랑과 결혼할 거야.”하고 확실하게 느낍니다. 할렐루야! 우리 영안에서 살아계신 한 사람으로서 주 예수를 누림으로서 우리는 그분과 함께 준비된 결혼을 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