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중생(거듭남)

거듭남 8. 우리는 새 생활의 필요를 받았음(2)

Hernhut 2009. 8. 10. 20:38

8. 우리는 새 생활의 필요를 받았음(2)

 

우리는 거듭나게 된 결과 새 생활에서의 필요를 보았습니다. 이 새 생활은 새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어린 양과 친구와 우리의 맏형과 우리의 목자와 신랑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누리야 합니다. 우리가 누리면 누릴수록 이러한 생각 모든 실재를 갖게 됩니다. 우리는 확실해 지고 성장하게 되고 강해질 것이며, 우리가 우리의 매일의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주관적인 체험과 생활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릴 때 우리는 그분을 갈망하는 예배를 하나님께 사실적으로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진실한 예배는 그리스도의 누림입니다. 이 누림은 우리 영 안에서 일어나며, 실재의 그 영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의 베일을 벗기십니다.

 

우리 매일의 필요를 위해 공급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누림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방면을 더 다룰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누리기 위한 살아계신 인격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 매일의 필요를 얻는데 공급이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생명시시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분은 생명의 빵이시고, 생명의 물이 되시며, 생명의 빛, 생명의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또한 그분은 또한 은혜와 실재, 만족과 자유와 부활이시고 참된 포도나무이십니다. 이 모든 풍성의 누림은 우리 매일의 생명 안에서 모든 필요를 얻도록 공급하실 것입니다.

 

1. 생명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림

 

우리의 첫 번째 필요는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진정한 생명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체험 안에서 어떤 다른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먼저 해야 합니다. 이후에만 우리가 모든 따르려는 생각으로서 그분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생명으로 그리스도를 누림은 우리의 모든 다른 누림을 위한 바탕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짧을 때 모든 것은 “암울하게”될 것입니다. 아무것도 우리에게 흥분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주님, 저는 당신에 대해서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들은 나에게는 진정한 것이 못됩니다. 저는 당신께서 저의 주님이시며, 당신께서 저를 돌보시지만 저는 진정으로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되심과 제가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저는 기뻐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체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많은 시간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참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와 함께 진정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활동적이고, 강하고, 정력적이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뻐하고, 밝고, 활발해야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을 알고 있으나 꼭 같이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될 수 없을까요? 우리가 생명으로서 그리스도의 누림이 짧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서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매일의 필요를 접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하기를 단순하게 나쁜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태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오, 나는 정말 초라하고 너무 약해”라고 비난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곧 주님께 돌이키고 생명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짧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고 성경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영으로부터 “오, 주 예수여, 오, 주 예수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한 두 구절의 말씀을 읽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 후에 우리는 조금 기도를 하고 다시금 주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또 조금 다시 기도하고 또 다른 구절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고, 아마도 20~30분 정도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금방 생명으로서의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졸음과 나쁜 느낌, 우울감, 문제들, 불안들, 그리고 모든 부정적인 것들이 사라짐을 느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생명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우리의 모든 것들은 교회 안에서 우리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주님께 봉사하며 사랑하는 갈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주님께 오면 올수록 생명의 흐름이 우리 안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거듭나 믿는 이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지나치게 민감해 집니다. 만일 어떤 것이 우리의 영적인 상태로 잘못된다면 우리는 곧 그것을 압니다. 우린 그것을 강렬하게 느낍니다. 어떤 것들이 세상을 위한 사랑이나 죄와 같은 것으로 우리생활 안에서 부적당할 때 우리는 그것에 의해서 깊게 문제점이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의 비밀함은 결코 우리 문제들 안에서 머물지 않고 또 우리 자신이 비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부정적인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생명으로서 즉시 그리스도를 누리도록 돌려야 합니다. 만일 세상이 우리를 압도한다면 우리는 생명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이 죄가 있거나 건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안게 된다면 또한 생명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리도록 돌려야 합니다. 사탄이 우리의 환경을 괴롭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누려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해답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들을 만족시키시기 위해 공급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저를 양육하시고, 저를 강하게 하시며, 저를 깨우쳐 주십니다. 강신의 생명 안에서 저는 저의 필요의 모든 것을 갖습니다.”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적인 사람이나 윤리적인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릴 필요가 있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개선하는 것과 적당히 처신하려고 함으로 만족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의지하여 누림 안에서의 새 생활의 필요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저는 죄가 있는 생명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또한 윤리적인 생명도 원치 않습니다. 세상적인 생명과 종교적인 생명 또한 원하지 않습니다. 전 다만 그리스도의 진정한 생명을 바랄뿐입니다.”

 

2. 생명의 빵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림

 

우리는 일반적인 방식 안에서 생명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릴 뿐만 아니라 또한 진정한 생명의 빵으로서 먹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매일의 생활 안에서 강하게 되도록 하는 생명의 빵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7)

우리가 끊임없이 살게 된 것은 생명의 빵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림에 의한 것입니다.

 

3. 생명의 물로서 그리스도를 누림

 

우리는 또한 우리의 목마름을 해소시키기 위해 생명의 물로서 그리스도를 누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 명절의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ㆍ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한 것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요 7:37~38)

 

우리의 인간적인 생명 안에서 우리는 먹을 필요가 있으며, 또한 마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강해질 필요가 있으며, 또한 상쾌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생명의 빵으로서 그리스도를 많이 누린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생명의 물로서 그분을 더욱 누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안에서 강해지고 또 살아나게 될 가능성이 있으나 한층 목말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상쾌해질 수 있는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 목마름을 가시게 할 어떤 것을 마실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목마름을 가시게 할 마실 것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마신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다시 목마르게 될 것입니다(요 4:13). 우리가 생명의 물로서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마실 때 우리는 상쾌해지고, 또 우리의 목마름이 참으로 가실 것입니다.

 

4. 생명의 빛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림

 

우리는 또한 생명의 빛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시매”(요 8:12)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누릴 때 바르게 걷는 방법을 압니다. 우리가 더 이상 어둠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깨닫습니다. 생명의 빛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걸음을 위해 우리 안으로 빛 비추십니다.

 

5. 생명의 말씀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림

 

우리는 또한 생명의 말씀으로서 그리스도 누림을 갖습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경을 탐구하라. 이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이니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거하느니라. ㆍ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요 5:39~40)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분께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더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누려야 할 생명의 말씀이 되셔야하는 성경 자신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오직 “그 성경(the Bible)”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것은 너무 객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이 우리를 위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아주 주관적인 것입니다.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의 책으로서가 아닌 윤리적인 책으로서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 안에 있는 것의 그리스도의 풍성을 알지 못합니다. 성경은 윤리적인 가르침의 책이 아니라 성경은 생명의 책입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윤리적인 가르침을 위해 오직 성경을 찾는다면 우리는 잘못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생명의 말씀으로서 그리스도 자신을 누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누림은 그분을 누리는데 우리를 격려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님을 누리는 것, 즉 기도하는 것, 찬양하는 것, 노래를 노래하는 것, 말씀을 읽는 것, 아니면 다른 방식입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생명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생명은 여러 가지 방면입니다. 우리를 강하게 하고 살게 하는 생명의 빵, 우리를 상쾌하게 하고 우리의 목마름을 가시게 하는 생명의 물, 우리의 매일의 걸음을 위해 비추는 생명의 빛, 우리를 격려하는 생명의 말씀 등이 이 방면에 속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매일의 필요를 위한 이러한 풍성 모두로 생명으로서 누리세 하시는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6. 은혜로서 그분을 누림

 

우리는 또한 은혜로서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韜生)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주님, 당신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있도록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릴 우리의 필요에 대해 말했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은혜의 정의입니다. 은혜는 그리스도 자신을 진정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을 오해하고 또 그분께서 우리한테 항상 화를 내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주님, 저는 다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저에게 너무 많은 벌을 주지 말아주옵소서.”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거친 얼굴을 가지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얼굴은 밝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은혜가 충만하십니다. 은혜는 그리스도 그분 자신의 누림의 풍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복을 적당하게 누리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으로부터 온 은사들과 복을 맛봄을 발전시켜 왔으나 그들은 결코 주시는 이이신 그분자신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았으나, 그리스도로부터 온 모든 은사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아주 초라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로서 그리스도 자신을 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은혜가 풍성하십니다.

 

7. 실재로서 그리스도를 누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韜生)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가 은혜로서 그리스도를 누릴 때 또한 실재로서 그분을 갖습니다. 실재로서 그리스도가 없는 우리의 삶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재로서 그리스도를 가질 때 어떠한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깨닫는 것은 모든 것이 거짓이요, 모든 것들이 헛된 것입니다. 이 우주에서 오직 실재는 그리스도뿐입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실체화하고 체험하고 또 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 의해 진정으로 체험되셨을 때 그것은 실재입니다. 우리가 은혜로서 그리스도를 가지면 가질수록 실재로서 그분을 갖게 됩니다.

 

8. 만족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림

 

은혜와 실재로 그리스도를 체험한 후에 우리는 우리의 만족으로서 그분을 갖습니다. 혼인날에 물을 포도주로 변화 시킨 주님의 기적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포도주는 만족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후에 혼인의 주인은 신랑에게 “이르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사람들이 충분히 마신 뒤에 덜 좋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었도다, 하니라.”(요 2:10) 고 말했습니다. “좋은 포도주”이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공급할 수 있는 모든 포도주보다 더 좋거나 만족케 합니다. 그리스도 자신은 가장 높으신 만족이십니다.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그분께 비교할 수 없습니다.

 

9. 자유함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림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참된 자유이십니다.

 

“진리를 알리니 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롭게 되리라.”(요 8:36)

 

어떻게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까? 이 진리는 교리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리적인 지식은 결코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은혜, 실재, 만족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릴 때, 우리는 자유롭게 됩니다. 우리의 자유함으로 그리스도를 가질 때 아무것도 우리를 묶을 수 없습니다. 죄나 세상이나 아니면 어떠한 부정적인 것이 우리를 묶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릴 때 우리는 “저는 진리가 있습니다. 저는 아들이 있습니다. 저는 자유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0. 부활로서 그리스도를 누림

 

우리는 부활로서 그리스도를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부활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리는 사람은 또한 부활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릴 때 우리는 모든 것 위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현재 보이는 어떠한 우리의 걱정거리처럼 작은 것들 위에 있습니다. 또 미래의 모든 걱정들처럼 큰 것들 위에도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들, 근심들, 상황들 위에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탁월하고 높여지기 위해서 부활 안에 있게 될 필요가 있습니다.

 

11. 참된 포도나무로서 그리스도를 누림

 

마지막으로 우리는 참 포도나무로서 그리스도를 누려야 합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시라.”(요 15:1)

 

이것은 유명한 구절이나 아주 몇 사람들만이 그것을 이해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포도나무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분은 포도나무의 진정한 생명이십니다. 포도나무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그 가지인 우리 사이의 참된 연합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이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이는 나 없이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요 15:5)

 

가지들로서 우리는 포도나무의 생명을 받으며, 포도나무의 모든 풍성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거듭났을 때 우리는 포도나무의 생명을 받았으며, 포도나무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참된 포도나무 안에서 가지들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입니다. 포도나무는 단체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깨닫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서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포도나무 안에서 많은 가지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그분의 풍성들을 단체적인 나타냄 안으로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거듭났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누림인 새 생활의 필요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매일의 생활을 통한 그분의 모든 풍성 안에서 그리스도를 누리면 누릴수록 그리스도의 몸의 단체적인 나타냄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참된 포도나무로서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 강의에서 더 완전하게 이 문제를 다룰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