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중생(거듭남)

가나에서 일어난 기적

Hernhut 2009. 9. 9. 22:32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어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있고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도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더니 *그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지매 예수님의 어머니가 그분께 이르되,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하시매 *그분의 어머니가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에 유대인들의 정결하게 하는 관례(貫簾)에 따라 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더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물항아리들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그들이 아귀까지 채우니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떠서 잔치를 맡은 자에게 가져다 주라, 하시매 그들이 가져다 주었더니 *잔치를 주관하는 자는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그 물을 떠온 종들은 알더라.) 이에 잔치를 맡은 자가 신랑을 불러 *이르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사람들이 충분히 마신 뒤에 덜 좋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님께서 이 처음 기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을 믿으니라." (요 2:1~11)

 

이 말씀을 우리는 자주 보고 또 메시지를 들었을 것이다. 아마 1년에 한두 번 듣거나 책을 읽었던 말씀일 것이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다시 한 번 하려고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사들이 말을 전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임의 기적을 말한다. 사실 요한복음에서 일어난 사건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이 말씀을 기적의 문제로 다루기 시작하면 기적의 문제로 볼 수밖에 없다.

 

배경은 혼인집에서 일어났다. 혼인이라는 것은 구약에서부터 아니 열조시대와 창조 직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완성과 완결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브를 이끄셨을 때의 목적은 "돕다. 혹은 격려하다"였다.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제 이것은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녀를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자기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2:22~24)

 

또 계시록 마지막 장 새 예루살렘에도 여전히 혼인한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교회)가 나타난다. 창세기 사람창조와 더불어 시작하여 성경 마지막 새 예루살렘에까지 혼인 잔치가 있는 혼인집에서 누리는 것이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 하시더라.”(계 22:17)

 

우리는 혼인집에 와 있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들은 혼인집에 초대받았다. 혼인집에 우리가 왜 초대받았는가? 우리는 신랑과 신부를 축하하고 그 혼인을 누리기 위해 와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혼인집에 와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어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있고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도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더니

 

사실 여기의 배경은 어떤 혼인집입니까?

 

시간적 배경은 1절에 보면 사흘째 되던 날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흘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침례자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시고 제자들을 택하신 후이지만 내면의 상징적인 의미로 보면 이후 3년 후에 일어나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거치심을 상징한다. 침례를 받으셨다는 의미는 그분께서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죄를 위해 죽으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침례는 그분께서 죄를 위해 죽으시고 죄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 부활로 우리와 연합됨, 합병됨을 말한다. 물론 여기서 십자가의 죽으심이니 부활이니 하는 말씀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의 상징성에서는 그러한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장소적 배경은 갈릴리 가나이다. 이곳은 예수께서 사역의 시작 거점 도시이며, 복음시대를 상징한다. 사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혼인집으로 가신 곳은 위치적으로 복음의 시대에 가셨지만 이곳은 율법의 혼인집에 가신 것이다. 침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과 복음의 분수령이다. 침례자 요한은 율법의 마지막 제사장이요, 예수께서는 복음의 첫 번째 제사장이시다. 혼인집에 가신 목적이 율법시대의 혼인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갈릴리 가나에 가신 것은 그곳이 율법의 마지막이요, 복음의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율법시대에도 여전히 혼인잔치는 있어 왔다. 여기는 율법에 속한 집회가 열리는 곳이다. 그 근거는 바로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그곳에서 봉사하고 시중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녀는 율법의 혼인잔칫집에 있었을까? 그녀도 그 당시에는 율법 안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세상이나 자신이나 혹은 다른 종교나 교파에 속해서 습관과 관례로 생활하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의 집회에 참여하신 목적이 우리와 다르시다. 그분은 유대교 시나고그에 가셔서 그들에게 자신께서 하나님이시며,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가르치셨다. 여기 혼인집에 가신 목적도 바로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지매 예수님의 어머니가 그분께 이르되,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그 혼인잔치에 왔던 그들 즉 유대교 율법집회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문제가 생겼다. 그들에게 즐길 수 있는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의 영향력은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짐은 대단히 당황케 했다. 율법은 예수님 앞에서는 효능이 없다. 율법을 지켜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 앞에서 효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율법의 봉사를 하고 시중을 들었던 마리아는 예수께 와서 포도주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라. 그녀는 그들에게 내어놓을 포도주를 예수께 구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다. 주님의 목적은 율법이든 다른 종교든 자신이든 세상이든예수께 나아와 포도주를 구해야한다. 마리아는 어떤 종파나 교파에 이 포도주를 구하지 않았다. 그녀가 포도주를 구한 것은 바로 예수 자신인 것이다. 그러나 헤른훗 성 형제는 말하기를 “나는 여러분에게 교파 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가더라도 예수님께서 취하신 본을 원칙을 따르라. 교파의 교리나 활동을 추구하거나 따르는 것을 주의하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 누릴 포도주를 구하라”고 말했다. 또 그는 “교파는 유대교처럼 신선한 포도주를 사모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가진 신선한 복음은 그들에게 이단으로 부딪칠 경향이 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에게 이단으로 몰려 십자가의 짐을 가지셨다.”고 말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님께서 즉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깜짝 놀라니 이는 그분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셨음이더라. *그들의 회당에 부정한 영이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나사렛 예수님이여, 우리를 내버려 두소서.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오셨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시니이다, 하매 *예수님께서 그를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그 부정한 영이 그 사람을 쥐어뜯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서 나오므로 *그들이 다 심히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 어찌된 일이냐? 이 얼마나 새로운 가르침이냐? 이는 그가 권위로 명령한즉 부정한 영들조차 순종하기 때문이라, 하더라.”(막 1:21~27)

 

이에 온 갈릴리를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들에서 선포하시고 또 마귀들을 내쫓으시더라.”(막 1:39)

 

여기서 유대교 시나고그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마귀를 쫒아내시지 아니하셨는가? 우리도 이 원칙을 따라야 한다. 교파에서 종교와 규례와 율법을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된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교파에서 이단으로 출교 당할 것이다. 나도 청년 시절에 그런 이유로 출교된 적이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새로운 가르침이다.

사실 마리아가 찾은 포도주는 율법의 누림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율법의 포도주를 주시지 않으셨다. 어떤 교사들은 이 포도주를 추구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이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 그러나 여전히 갈급해 하고 큰 누림이 없을 것이다. 교파의 교리나 활동들은 예수의 포도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께 나와 “포도주가 없다.”고 해야만 한다. 율법은 우리의 만족이 아니요, 또 교파의 교리도 역시 우리의 만족이 아니다. 우리의 만족이요, 누림은 예수의 포도주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하거니와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신부방 아이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애곡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날들이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새 옷감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사람이 없나니 이는 기우려고 붙인 것이 그 옷을 당기어 그 찢어짐이 더 심할 것임이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사람도 없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흘러나오고 부대도 버리게 되느니라. 오직 사람들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나니 그리하면 둘 다 보존되느니라.”(마 9:14~17)

 

여기서의 새 포도주 역시 예수님을 상징한다. 새 옷감과 신랑도 예수시다. 우리의 만족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시다. 여러분은 율법과 세상과 또 교파 안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신랑을 맞이하고 또 옷감으로 옷을 만들고 있는가? 우리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것은 아무리 학위를 받고 박사들이 즐비하고 교수들이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새것이 아닌 낡고 옛것에 불과하고, 또 그곳엔 이미 바닥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파 안에서 배울 것은 없다. 다만 우리가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은 바로 예수의 가르침, 새로운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하시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잠시 머물러 보기로 하겠다. “여자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여기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마도 마리아가 “포도주가 없다”고 말한 것에 대한 대답으로 여기의 뉘앙스로 보아 마리가가 말한 의미는 율법의 관례대로 혼인집에서 마셔야할 포도주가 없다는 것을 말한 듯하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그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여전히 율법의 가르침이나 교파의 교리를 추구하지만 예수님은 새로운 가르침이요, 교리가 아니고 교파가 아니요, 신포도주가 아닌 새 포도주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옛 것을 추구하는 사람과는 상관이 없다고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 주님의 때는 언제인가? 그 때는 곧 예수를 주(主)라고 시인하고 옛 생활에서 새 생활로 바꾸고 옛 사람에서 새 새사람을 입었을 때 주님의 때를 체험할 때인 것이다. 마태복음 9:16~17을 다시 한 목소리로 읽겠다.

 

“*새 옷감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사람이 없나니 이는 기우려고 붙인 것이 그 옷을 당기어 그 찢어짐이 더 심할 것임이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사람도 없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흘러나오고 부대도 버리게 되느니라. 오직 사람들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나니 그리하면 둘 다 보존되느니라.”

 

우리는 새 옷인 그리스도를 옷 입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는 새 포도주 이신 예수를 항상 마실 필요가 있다. 옛 것을 추구하는 이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이들이다.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너희가 옛 사람과 그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골 3:9~10)

 

우리는 분명 예수를 만났다면 새사람을 입은 이들이어야만 한다. 새사람을 입은 새로운 이들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옛 습관, 옛 가르침, 옛 교리를 취하거나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를 타락케 하고 멸망케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것을 자주 접하게 된다. 창세기를 다시 보기로 하자.

 

남자와 그의 아내가 둘 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5)

 

“이에 이 두 사람의 눈이 열리매 그들이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고는 무화과나무 잎을 함께 엮어 자기들을 위해 앞치마를 만들었더라.,,,,,주 하나님께서 또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니라. ”(창 3:7, 21)

우리는 아담과 이브가 먼저는 벌거벗고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였다. 그러나 죄를 범하여 타락된 후에 그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참으로 부끄럼이 몰려왔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무화과 잎을 가지고 옷을 만들어 입었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의 지혜로움을 말하지 모르나 이는 우리는 참으로 어리석음을 알아야 한다. 이 무화과 잎으로 만들어 가린 것은 인성을 상징한다. 인간의 어떠함은 결코 하나님의 창조의 형상을 회복시킬 수 없다. 우리는 이 무화과 잎을 추구하고 찾으려고 하지만 이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르고 영원할 수도 없고 전처럼 회복될 수도 없다. 우리는 이처럼 율법의 옛 포도주를 계속 떨어지지 않도록 추구하고 갈망한다. 교리나 율법이나 교파의 것들은 우리에게 만족을 줄 수 없고 갈증만을 준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가죽 옷이 필요하고 또 새 포도주가 필요하다. 완전하게 회복될 수는 없으나 무화과 잎의 옷이나 율법의 옷보다는 우리에게나 하나님께 만족함을 줄 수 있는 가죽옷과 새 포도주가 필요하다. 우리가 율법의 포도주를 누리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의 만족이 바닥남을 드러낼 뿐이다.

 

그분의 어머니가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에 유대인들의 정결하게 하는 관례(貫簾)에 따라 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더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물항아리들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그들이 아귀까지 채우니

 

예수께서 어머니가 율법의 포도주가 없다는 말에 율법의 포도주를 추구하는 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그런 것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시자 그분의 어머니는 문맥상으로 보면 예수가 주(主)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같다. 그분의 어머니가 율법에 종사하는 봉사자들에게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분께서 율법보다 훨씬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같다. 우리도 역시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수행해야만 한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불리한 것을 말씀하시든지 유익한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에도 우리에게 책망하시는 말씀이나 심판적인 말씀을 보는 것을 포기하거나 교회생활 안에서 불리한 것은 행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이들은 그 말씀의 유불리(有不利)를 따지는 것은 잘못된 생활이다. 교회에는 그런 것이 아니다. 교회생활의 정상적인 생활은 판단해서 유리한 것만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불리하다 할지라도 기꺼이 실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주 하는 말 중에 하나가 “기도해보고 하자”이다. 기도해보고 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는 것 같지만 이는 사실상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는 불신으로 하는 것이요, 인간적인 생각과 사탄의 꿰임에 넘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의 어머니는 분명 율법에서 복음이신 예수께 속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의 종들에게도 믿음으로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교회의 생활이다. 모든 지체들이 유기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교회생활이다. 물론 억지로 시키니까 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는 율법의 종에서 복음의 종으로 바뀐 이들의 생활은 정상적이고 유기적인 교회생활이다. 이제 우리는 율법의 생활에서 복음의 생활로 바뀌었다. 만일 인간의 생각이 섞여있다면 마리아나 종들은 그렇게 말하거나 실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생각이나 기도해보고 하겠다고 안다면 이는 사탄의 작용에 동참하는 것과 같다. 교회생활의 유기적인 생활은 자신의 은사와 직임에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다. 우리의 교회생활에서 기도해보고 라는 말은 하지 말라.

 

여기서 우리는 또 보는 것이 있는데 바로 유대인들의 정결하게 하는 관례(貫簾)에 따라 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 개다. 유대인들은 집회에 참여하거나 다른 집에 가서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손과 발, 얼굴 등을 씻는 것이 관례였다. 이는 신약에서의 침례를 말한다. 이 관례는 예수께 속한 이들은 모두 침례를 받아야 함을 상징한다. 침례는 죄를 씻고, 죄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 하나님과의 연합과 합병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어떤 교사들은 침례는 단순히 구원의 표시에 불과한 것이고 구원받는 것과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이다. 만일 침례가 구원과 관련이 없다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실 이유가 없으셨으며, 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또 예수께서 침례가 구원에 관련되어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로되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예수께서는 “구원을 받으려면 믿음이 유일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믿게 되면 반드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믿지 않는 이들은 침례를 받을 수 없다. 왜냐면 믿지 않는 자들은 정죄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지 않고 침례를 받는 이들이 있기는 하다. 이들에게는 침례가 구원과 관련이 없는 것이다.

 

여기 유대교 관례에 집회에 올 때 꼭 몸을 씻어야 되는 물 항아리가 있었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 보면 물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신 것과 물 항아리 아귀까지 채운 것을 보면 이 물도 말라 있었던 것 같다. 이 또한 침례의 예표인 이 율법의 물도 우리의 죄를 씻기에는 역부족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율법의 물은 우리의 죄를 완벽하게 씻을 수 없다. 율법의 물은 우리의 죄를 폭로한다. 이 물도 새로운 것으로 채워야 하는 것이다. 옛 물은 쏟아버리라. 이것은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이제 거기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님께서 여행에 지치셨으므로 우물 위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길으러 오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마실 물을 달라 하시니 *(이는 그분의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도시로 갔음이라.) *그때에 사마리아 여자가 그분께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내게 마실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相從)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마실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네게 생수를 주었으리라. *여자가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선생님께는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자녀들과 가축들이 다 마셨는데 선생님이 야곱보다 더 크시니이까?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구든지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되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 *여자가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로 물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6~14)

 

요한복음 4장에도 물이 나온다. 물 또한 예수님을 상징한다. 율법의 물을 먹던 옛 생명들은 그들이 마시던 야곱의 우물물을 마시지만 계속해서 갈증이 나고 목마름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물이신 예수께서는 우리가 마시면 마실수록 더 충만해 지는 것이다. 율법의 우물물은 율법에서 나지만 영존하게 하는 우물물은 예수께 흘러납니다. 이 물은 우리 죄를 씻어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물일뿐만 아니라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여 그분께로부터 우리 안으로 흐르게 함으로서 우리 안에서 그분으로 충만케 하는 물이다. 헤른훗 성 형제는 고린도후서 5:17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파한 적이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옛 사람은 죽고 새사람을 입었고, 옛 법은 새 법으로 대체 됐으며, 옛 물은 바닥이 드러났고, 그곳에 새 물이 채워졌고, 옛 가르침은 복음으로 가르침을 받으며, 옛 회당은 교회가 되었다.”

 

이런 관례도 더 이상 관례가 아니다. 단지 율법은 완성된 복음의 바탕이 될 뿐이다. 여기서의 물은 옛 물이 아니다. 이 물은 예수께 흘러나오는 물로 물 항아리 아귀까지 채운 것이다. 만일 이 물이 예수께 나온 물이 아니라면 그 물은 여전히 바닥날 것이다. 여러분 안에 있는 물 항아리에 예수께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로 충만하게 채우라. 그럴 때 여러분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떠서 잔치를 맡은 자에게 가져다주라, 하시매 그들이 가져다주었더니 *잔치를 주관하는 자는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그 물을 떠온 종들은 알더라.) 이에 잔치를 맡은 자가 신랑을 불러

 

이 물이 변화되어 포도주가 됐다. 이 물은 예수께 흐른 물이다. 예수께로부터 흘러나온 물은 곧 예수의 성분이 녹아있는 물이다. 이 물을 마시는 것은 곧 예수를 마시는 것이다. 잔치를 맡은 자라 함은 율법을 가르치고 회당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을 말한다. 이 제사장들은 종들이 가져다 준 이 포도주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 포도주는 바로 예수시며 새 율법이요, 율법과 대치되는 복음이다. 율법 안에 있는 이들은 포도주를 맛보지만 그 비밀한 포도주에 대해 체험하지는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시중드는 종들과 율법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종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본래 예수의 제자들이 아니라 율법 안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만난 후 예수의 포도주를 맛보았을 뿐만 아니라 체험을 가져 삶 전체가 변화되었다. 우리도 이런 사람들이 필요하다. 주님께서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들을 찾으신다. 그들은 이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높은 자리에 앉기 원하지도 않았고 다만 빛도 없이 섬기고 시중드는 이들이었다. 오늘날 교회에서 봉사하는 이들과 비교해 보라.

 

*이르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사람들이 충분히 마신 뒤에 덜 좋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었도다, 하니라.

 

구약의 율법은 사람의 즐거움, 누림이 충만하지 않는다. 여기의 구약의 제사장들이 복음의 효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율법의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고, 교파의 포도주를 마셨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의 포도주를 마셔야 한다. 이 얼마나 맛있는 포도주인가? 제사장들과 하객들은 신랑을 칭찬하는데 이는 우리 주님을 찬송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 우리는 생명으로 충만되었다. 여러분도 예수의 포도주, 생명의 포도주, 새 포도주를 마셔라. 그럴 때 우리는 새사람이며, 새 생명이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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