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강해/룻기II

실패에서의 회복, 일탈에서 돌아옴(2)

Hernhut 2014. 11. 5. 19:00

 

 

룻기 2장의 부분과 관련 성경구절을 읽겠습니다.

나오미에게는 그녀의 남편 엘리멜렉의 가족에 속한 친족으로 부유하고 강력한 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밭에 가도록 허락하소서. 내가 누구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가며 곡식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녀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그녀가 가서 밭에 이르러 곡식 베는 자들을 따라가며 이삭을 줍다가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에게 속한 밭의 일부를 만나니라.”( 2:1~3)

그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네가 듣지 아니하느냐?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거나 여기를 떠나지 말며 여기에 내 소녀들 옆에 가까이 있으라.”(2:8)

 

보아스가 그녀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뒤에 네가 네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또 네가 네 아버지와 어머니와 모국을 떠나서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을 내가 분명히 보았느니라. *{}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해 주시기를 원하며 {}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날개 아래로 의지하러 온 네게 충분히 보상해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거늘”(2:11~12)

 

이처럼 그녀가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자기가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일 에바쯤 되었더라. *룻이 그것을 가지고 도시로 들어가 자기 시어머니에게 자기가 주운 것을 보이고 자기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가져다가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그녀의 시어머니가 그녀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어디에서 주웠느냐? 어디에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알아준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녀가 자기가 누구와 함께 일했는지 자기 시어머니에게 알리고 이르되, 오늘 나와 함께 일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이니이다, 하매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께서 그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산 자와 죽은 자에게 친절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녀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가까운 친척이요, 우리의 가까운 친족 중 하나이니라, 하니라. *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또 내게 말하기를, 내 청년들이 내 모든 수확물을 거둘 때까지 너는 그들 옆에 바싹 붙어 있으라, 하더이다, 하매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네가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감으로써 그들이 다른 밭에서 너를 만나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니 *이에 그녀가 보아스의 소녀들 옆에 바싹 붙어 있으며 보리 수확과 밀 수확을 끝마칠 때까지 이삭을 줍고 자기 시어머니와 함께 거하니라.”(2:17~23)

 

그녀가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내가 행하리이다, 하니라.”( 3:5)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을 따라 살도록 육신에게 빚지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하나님][]에 의해 인도 받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니”(8:12~14)

 

지난주에 우리는 역사 이야기가 현상에 대해 우리에게 흘낏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 역사 뒤는 이 모든 사건에 직접적인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이 있음을 나누었습니다. 그 시대 곳곳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스러운 뜻을 따라 일을 하셨고,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길을 갈 수 있는 사람들을 축복하셨습니다.

 

룻기의 가장 큰 가치는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춰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족보는 우리에게 이 노선, 혈통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 구약성경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고 있는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의 이 혈통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측선(測線)이요, 다림줄입니다. 룻기의 특성은 각 사람들이 이 노선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축복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사사시대가 룻 이야기의 배경이요,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어두운 기간이었다는 것을 나누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서 출발했고, 적의 압박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상태는 정말 슬프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룻기를 읽을 때 우리는 사사들의 기간이 어두운 시대였다고 알게 됩니다. 하지만 룻기 1장을 보면 사사시대에 기근이 있었음을 말합니다. 이제 재판관들이 다스리던 때에 땅에 기근이 드니라. 베들레헴유다의 어떤 사람이 자기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머물렀는데”(1:1)

 

사사들의 온 기간의 끔찍한 결과는 기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준비가 없었습니다. 지난 주 엘리멜렉의 가족이 기근 때문에 피하여 타협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이 기근에 대한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또 하나님께서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 그분의 자녀들은 이런 가난에서 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런 황량한 상태에서 살고 있었을 때마다 그들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있지 않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근은 하나님에게서 온 심판이요, 저주였습니다. 아주 분명하게 우리가 룻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원한 목적으로 다시 한 번 그분의 사람들을 데려오셔야 했었다면 가장 간단한 첫 번째 단계는 그들이 채워지도록 하셨어야 합니다.

 

기근이 있고, 힘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 행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교회의 외적조건들은 전체적으로 사사시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세대는 대단히 위험한 세대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상태에서 어떻게 구출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룻기를 두십니다. 룻기가 우리의 큰 경고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룻기를 두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탈출하는 방법을 알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 앞에 룻기를 두십니다. 우리가 룻기를 이해할 때 그것은 우리의 상태와 관계없이 우리에게 엄숙한 암시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룻기는 회복되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런 시각에서 룻기를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는 은사에 초점을 맞춥니다. 룻기는 생명과 생활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는 은사에 의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은사에 의지해야 합니다. 은사는 좋은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사사시대에는 은사에 의지했습니다. 모든 사사들은 은사가 뛰어났습니다. 물론 그들은 믿음이 풍성한 사람들이었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집을 사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사기 전체에서 사사들은 때를 지연시킬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대신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일시적인 구출이 있었던 것은 은사가 있었던 사사들의 손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사사기는 은사를 강조합니다. 룻기는 생명에 초점을 맞춥니다. 오늘날 우리 각자는 이 생명체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은사에 의지할 수 없고, 생명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진실로 생명에 초점을 맞추거나 은사에 초점을 맞추나요? 우리 앞에 나오미와 삼손이 있다면 여러분은 누구에게 관심을 두겠습니까? 나는 우리 중 아무도 나오미에게 관심 갖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노() 자매, 노인은 호감이 가지 않아 보입니다.

 

삼손이 여러분 앞에 나타났을 때 그를 바라봄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나는 여러분 다수가 큰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은사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나님은 그분께서 높이신 사사들과 무관한 것이 아니지만 룻기는 우리에게 훨씬 더 하나님은 룻기에서 보통의 사람들과 관계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보통의 사람들의 삶의 결과가 진실로 하나님의 영원한 뜻의 영광의 나타남을 산출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삶 속에서 만족을 따라 추구할 때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초점은 몸의 만족뿐입니다. 부유한 어떤 사람은 그들의 혼의 만족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일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관심을 여전히 몸의 만족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혼의 만족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들은 영에 대한 일에 등한시합니다. 우리는 몸을 위해 먹고, 마시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는 맛이 좋은 것, 건강에 좋은 것을 추구합니다. 어떤 것이 그것으로 잘못되었을 때 아주 조금 우리는 그것에 관심을 둡니다. 어떤 사람들은 혼, 감정, 생각을 만족시키려고 합니다. 우리는 많은 책을 읽고, 많은 만족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의지, 능력, 명성과 위치를 추구할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영이 만족했을 때에만 참된 만족이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의 영이 만족되었을 때 결과적으로 우리가 부족하다고 해도 모두 옳은 것입니다. 비교의 여지가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부족해 보이는 조건에서 살지만 거기엔 많은 기쁨과 큰 만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령 안에서 만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요! 우리의 영이 충만할 때 우리는 안식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 속에서 안식이 있습니까? 우리 생활에서 안식이 없을 때 그것은 우리의 영이 채워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양육되는 아이가 어머니의 가슴에서 만족케 한다고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안식에는 만족과 풍성의 다른 단계가 있습니다. 굶주리는 사람이 안식할 수 없습니다. 맞죠? 우리가 굶주리는 아이를 볼 때 울고불고 난리를 칩니다. 그 아이가 배부르다면 편안해 질 것입니다.

 

어른들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영 안에 풍성해질 때 우리가 안식 안에서 생활하도록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풍성해질 때 우리의 삶은 기쁨을 드러낼 것입니다. 엊저녁엔 승현, 조이, 스쾃형제님이 야고보서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여러 시련과 유혹 한가운데 있는 것이 기쁨의 충만입니다. 이런 말씀을 전달해 줄 때 감동이었습니다. 영 안에서 강한 성도들은 이런 방법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영 안에서 만족하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기쁨이 나올까요? 우리는 어디서도 기쁨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 또한 우리가 여러 시련과 유혹이 있을 때 큰 기쁨이 우리에게 충만하다고 말합니다. 속사람이 힘이 있고, 영이 만족할 때 우리는 이러한 기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영의 충만한 자들에게 말합니다. “[]를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것들을 쓰는 것이 참으로 내게는 부담이 되지 아니하며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3:1) 이것은 빌립보서를 쓸 때 그가 감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빌립보서를 쓰고 있었을 때 사슬과 족쇄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 안에서 충만한 자들은 환경이 그것들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우리는 우리가 사역할 수 있기 전에 만족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영적인 사역을 향해 갈 수 있기 전에 우리 영 안에서 먼저 충만되고 만족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영적 전쟁에서도 같습니다. 여러분은 전쟁터로 굶주린 군인들을 보낼 수 없습니다. 그들이 굶주린다면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요? 교회에서 우리는 전쟁하러 가는 군대로 볼 수 있지만 정말 많은 굶주린 군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요?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것은 우리가 배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사야에서 이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시리아 왕이 이스라엘에 큰 압제를 가할 것이지만 그들이 살찌고 풍족해졌을 때 적들의 속박을 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몸이 배부르지 않고, 풍성하지 않고, 건강하지 않지만 기름부음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사는 것은 적이 우리 위에 정말 무거운 멍에를 두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멍에를 벗어버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기름부음이 가득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가 아주 강하고,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는 충만하게 되어야 하고 만족하게 돼야 합니다.

 

여러분,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영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딤후 4:22)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디모데는 선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주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었고, 바울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겉으로는 우리가 이것이 좋은 상태였다고 보지만 바울은 디모데가 약했다고 느꼈습니다.

 

바울은 많은 체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디모데가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선하다하더라도 영이 안 좋다면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아니하시고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느니라.”(딤후 1:17)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이 충만하고, 우리의 선함이 우리의 봉사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약하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에 관한 성경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룻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본래의 목적에 따라 그분의 백성을 회복시키시기 위해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먼저 기근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에 스데반의 증거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은 스데반의 아주 독특한 조건을 기록합니다. 그것은 스데반이 충만되었고, 영의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을 기록입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과 대면했습니다. 그는 유대 모든 종파와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영 안에서 얼마나 강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충만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우리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가득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살아있지만 죽은 것 같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죽은 것 같지만 어떤 생명의 표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상태는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만족될 필요가 있고, 충만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더 다가감으로 우리는 영 안에서 만족될 수 있습니다.

 

최근 주님은 모임을 섬기도록 나를 이끄셨습니다. 모임에서 나는 형제와 자매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들은 내게 형제님, 저는 굶어 죽을 지경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외적인 만족에 그들의 소망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슬픈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께 돌아가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정말 부요하시고, 풍성하시고, 풍부하신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꺼이 먹이십니다. 하나님은 풍성하게 되고, 만족하게 되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버리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가는 방법을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이 방법으로 충분하게 만족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데 힘을 가질 것입니다.

 

룻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첫 번째로 우리의 영이 충만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강한 영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둘째로는 룻기 2, 3장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인데 우리는 분명한 인도함을 가져야 합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는 거룩함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룻기에서 아주 분명하게 이런 특징들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으로 돌아가도록 우리는 아주 분명한 지시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과 아주 유사합니다. 우리는 간섭이나 이끎이 아주 단순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진리는 순종하기에 매우 어렵습니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방법입니다.

 

왜 교회가 빗나갔나요? 그것은 잘못된 간섭 때문입니다. 그것이 맞습니까? 지시에 대한 이 문제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람은 지시를 따르는 면에서 성공보다 대개 실패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1세기 말엽부터 교회의 상태가 하락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4~5세기 교회는 가톨릭주의가 되었습니다. 그 후 1천년 이상 암흑시대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늘날을 뒤돌아볼 때 아주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현혹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시가 잘못될 때 얼마나 두려운지 압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이와 같은 혼란의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지시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스런 목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시는 그분의 지시는 항상 그분의 본래의 목적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가 구약성경 전체를 읽을 때 분명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빗나갔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 선지자들을 일으키셨습니다.

 

이 선지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너희가 벗어났다. 너희는 돌아가야 한다. 너희는 다시 한 번 바른 길로 가야 한다.” 하나님의 이 종들, 선지자들은 사람들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순종했을 때 그 상태가 변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불순종했을 때 그들은 아주 가련한 상태에 계속해서 있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도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만큼 우리는 지시가 필요합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룻기에서 우리는 룻이 아주 선한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룻기 2~3장에서 우리는 확실한 지시의 엄숙한 중요성을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들에서 곡식을 모으러 나가라고 말했습니다. 룻은 제가 나가길 원합니다.”라고 말했고, 나오미는 가라.”고 말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필요함이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들에서 이삭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허용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아주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룻이 베들레헴 땅으로 온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여인이었던 룻은 들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보아스의 들에서 이삭을 모으는 일이 정말 일어났습니다. 룻은 우연하게도 보아스 소유의 들에서 이삭을 모으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 돌이켜 볼 때 이것이 완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은밀하게 비밀스럽게 이끄십니다. 우리의 삶에서 아주 많은 우연을 볼 수 있지만 사실은 그것들 모두 하나님에 의해 분배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비밀스럽게 선물을 준비하시고 우리가 주님께로 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에게 선물을 준비하셨다는 말씀도 하시지 않으시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슬프게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셨다는 것을 모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미 아주 많은 것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우연은 사실 하나님의 비밀한 공급입니다. 물론 보아스 소유의 들로 이끄신 분은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우리가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을 이해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이 그분의 아들과 그분의 아들의 들에 대해 영원히 지시일 것입니다.

 

룻기 2장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은 보아스 앞에 룻을 데려오셨을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보아스 들로 그녀를 이끄셨습니다. 많은 때 우리는 형제자매들이 우리가 형제자매들을 섬길 때 주님의 임재 앞에 그들을 데려와 나눈다고 듣습니다.

 

나는 주님 앞에서 여러 해를 이것을 생각해 왔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 어떤 부족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과 주님의 뜻 안으로 이와 같은 성도들을 데려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룻기에서 보는 완전한 계시입니다. 진실로 하나님과 그분의 집을 사랑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보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것은 들이 보아스의 사역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우주 가운데서 그분의 사역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또 그분의 뜻을 사랑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이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우리가 알고, 그분의 아들과 관련 있는 영광스런 영원한 뜻을 이해하기를 갈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조차도, 우리는 룻에게서 주님의 아름다운 이끄심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룻기를 읽을 때 극히 부지런한 자매 룻을 보게 됩니다. 정말 부지런하게 되는 것이지만 여기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상기시킵니다. 올바른 지시 아래에 있는 우리의 부지런함만이 좋은 성과를 산출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모든 교회에는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지런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기꺼이 사역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많은 형제들 자신들이 이런 방식으로 행하는 것을 볼 때 거기에 한숨이 있습니다. 이런 부지런함만이 올바른 지시 아래로 이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하지만 아주 슬프게도 많은 부지런함이 하나님께서 추구하시는 것을 산출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도할 때 우리를 헛된 것으로 수고하게 하고 이끌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생명의 모든 사역 알고, 수고하고, 계속할 때 그것은 부질없는 것이고, 끝난 것이요, 우리는 많이 후회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따르기 위한 대가가 있음을 알지만 그 대가는 올바른 것에 지불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 형제자매들에게 대가를 치루고, 헌신하도록 격려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 격려를 받아들지만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저버리고, 그들의 방식으로 수고를 하는 그들은 오도하고 낭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바른 이끎이 있을 때에만 우리의 수고가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올바른 지시를 갖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아주 많이 내가 나의 삶을 반사할 때 나는 우리 주님을 향한 감사가 넘칩니다. 나는 이미 지난주에 내가 보통사람이라고 나누었습니다. 나는 지혜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일찍이 내 안에 영으로부터 분명한 이끄심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생명 전체에서 내 주변에 하나님은 좋은 종들을 두셨습니다. 그들은 내게 좋은 지시를 합니다. 매 시간 나는 이것에 대해 생각하고, 주님을 생각합니다.

 

여러분, 내가 지혜를 선택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되어야 합니다. 나는 많은 형제자매들과 여러 번 나누었습니다. 나는 아는 것이 없고, 하나님께서 내게 대한 가지고 계신 긍휼이 없이 시작하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나는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내가 많은 시험을 통과할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주님께서 나의 여행을 하는데 긍휼을 베푸시고, 잘못된 길을 걷지 않도록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앞에 우리를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은 그분의 들로 우리를 이끄셨습니다. 룻기는 보아스의 어떤 것을 우리에게 줍니다. 우리는 보아스가 얼마나 부유하고, 풍성하고, 친절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아스라는 사람으로 우리는 주 예수의 어떤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아스가 예수 타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아스가 룻을 대했을 때 얼마나 친절하게 대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젊은 사람들에게 룻을 다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또 룻을 위해 곡식단을 남겨두도록 그 청년들에게 맡겼고, 그와 함께 식사를 같이 하게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대하신 것과 같이 보아스가 룻을 대했던 방법을 압니다. 보아스는 내 딸아, 네가 듣지 아니하느냐?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거나 여기를 떠나지 말며 여기에 내 소녀들 옆에 가까이 있으라.”(2:8)고 룻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에도 말했습니다. 이 들을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냅니다.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만이 그분께서 사역하시는 한 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을 읽으면 바울은 교회가 하나님께서 사역하시고 가는 들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역하시는 들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온 우주의 창조자시오, 사람의 창조자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시고 계신 가장 큰 목적은 교회를 건축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건축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가지신 유일한 사역이시오,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체험에서 너무 일찍 또 다른 들로 나갑니다. 오늘날 기독교에는 너무 많은 사역이 있고, 이런 사역들이 교회 밖으로 우리를 끌어냅니다. 사람들은 교회 자체에 많은 흥미로움이 없고, 기독교의 사역 때문에 많이 흥미로워합니다. 이 사역은 일찍 우리를 교회 밖으로 끌어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긍휼이 필요하고, 유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 이러한 것을 가르쳐준 많은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이 세상에서 한 사역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우리의 눈을 열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하도록 나를 부르셨다고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교회를 제외하고 나는 다른 어떤 흥미도 가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보아스가 룻에게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라고 한 말을 빠르게 붙잡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들이 성경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 방식으로 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태와 같이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에 많은 흥미를 찾지 못하고 다른 책을 읽는 것에 흥미를 갖습니까? 우리는 영적인 책을 읽거나 전기(傳記)를 읽을 때 기쁨을 느끼지만 성경을 읽을 때 금방 눈꺼풀이 내려와 잠이 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아무 맛도 없습니다. 하지만 보아스가 룻에게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고 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성경에서 큰 빛을 얻지 못할 수도 있고, 아주 적은 유익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우리가 만족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여러분, 보아스는 룻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룻은 들에서 보아스의 소녀들을 가까이 따랐습니다. 룻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추수한 밭에서 아주 부지런히 이삭을 주웠습니다. 보아스의 종들은 룻에게 아주 자비로웠습니다. 종들은 심지어 고의적으로 곡식단을 그녀에게 남겨주었습니다.

 

룻은 얼마나 이삭을 주웠을까요? 룻은 보리 1에바를 주웠습니다. 1에바는 얼마쯤 됩니까? 나는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알게 되었는데요, 1에바는 정말 많은 양입니다. 1에바는 40kg이 넘습니다. 룻이 주운 이삭은 정말 많았습니다. 그 많은 이삭을 집으로 날랐습니다. 혼자서 그것도 여자가 40kg을 옮기는 것은 아주 무거운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조금 달랐을 것입니다.

 

우리가 룻기를 읽을 때 우리가 룻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상이 무엇인지 나는 모릅니다. 우리는 룻이 아주 예쁘고,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많은 여인들이 아름답다고 기록했지만 룻에 대해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룻 안에 있는 미덕과 아름다움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에서 우리는 룻이 아주 강했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아주 강한 여인이라고 말할 때 여인의 후손이 아주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40kg를 들고서 옮길 수 있었다면 그녀는 아주 강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룻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내면으로 아름다워야 하고, 외면적으로 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너무 신사적일 수 없습니다. 나는 젊은이들 중에 아주 방자한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들을 섬김으로 그들을 소중하게 여긴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무거운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주님을 따랐던 성도들은 그들이 엄격하게 다뤄졌을 때 꾸짖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채워지고 만족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우리는 섬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방법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섬길 수 있을까요?

 

이윽고 주님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이 아닌 상태로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이 작은 증거를 나누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몇 년 전 나는 외딴 곳에 갔었습니다. 겨울이었기 때문에 그곳은 몹시 추웠습니다. 그곳에 사는 우리를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는데 나는 이곳이 여러분이 머물고 있는 곳이군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불은 겹겹이 두껍게 깔려있었습니다. 내가 추워서 이불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나는 이불을 뒤집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이불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에 이불을 들어 올려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덜덜 떨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그런 상태일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여러분은 투덜댈 수 없습니다. 다음 날 책임을 맡은 형제가 왔습니다. 그들은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오늘 너무 따뜻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을 어떤 환경으로 이끄실 때 여러분이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섬기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룻은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는 강한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조건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룻의 아주 독특한 특성임을 볼 수 있습니다. 룻은 부유해졌고, 풍성해졌습니다. 룻이 자기의 몫을 먹고 그런 다음에 시어머니에게 가져다준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어떤 오해를 일으킬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것은 원문에서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번역은 아주 좋지 않습니다. 며느리가 자신의 몫을 먹은 후 시어머니에게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좋지 못한 것일 것입니다. 룻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시어머니에게 가져갈 몫을 이미 준비했습니다. 그녀가 나오미에게 돌아왔을 때 그들의 대화를 통해 나오미는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룻기를 읽는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표현으로, 묘사로서 나오미를 쓰셨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나오미의 일의 어떤 나타남은 성령을 대표하지만 여기서 나오미는 성령의 형태가 아닙니다. 나오미는 주님을 사랑하는 여인이고,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여인입니다. 여기서 나오미는 룻을 어떠한 훈련을 시켰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 영적인 생활 속에서 두 가지 형태의 이끄심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지시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성도로부터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각자가 다른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 그들 자신들은 먼저 하나님의 지시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있기 전에 먼저 성령에 의해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 영적인 생활에서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영적인 말씀과 계시들을 공급합니다.

 

나오미는 이와 같은 사람들의 무리를 대표합니다. 나오미는 룻이 보아스에 대해 더 알도록 룻에게 지시했습니다. 여기서 나오미는 보아스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섬기는 자와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말해야 합니다. 나오미는 죽은 자와 산 자에게 친절을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한 보아스에 대해 말했습니다. 정말 보아스는 매우 자비롭고,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때 우리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격려를 말합니다. 우리는 자비로운 주님, 선하신 주님, 그리고 풍성으로 부요하신 분,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분으로서 우리 주님에 대해 말합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나오미는 보아스가 그들의 친족이었다는 것을 룻에게 말했습니다. 나오미가 이 친척에 대해 말을 했을 때 그들은 관계를 가질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숨길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 주님 자신은 우리에게 친족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관계를 알지만 우리는 이런 실제를 가지고 있는가?” “주님과의 우리의 관계가 친족관계, 가장 가까운 관계인가?”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서 끊임없이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성도들이 많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나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 번 나는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고 있는 주님은 멀리 떨어져 하늘 높이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도록 간청을 하지만 사실 주님은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와의 그분의 관계는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깝습니다. 심지어 우리 부모나 아이들보다도 더 가깝습니다. 그분과의 우리의 관계는 생명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과의 이 친근하고 친밀한 관계를 자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시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친밀한 관계로만이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오는 풍성한 공급을 선용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나오미만이 율법 아래에서 알았던 그들은 같은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이 뒤에는 참된 실제가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오미가 룻에게 주었던 격려를 알 수 있습니다. 이 격려는 보아스가 룻에게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내 종들을 따르라고 룻에게 말합니다. 이 종들은 추수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보아스는 내 여종들과 여기에 머물라고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이 또한 우리가 오늘날 주님을 따를 때 가져야하는 체험입니다. 여기서 보아스가 너는 나의 추수하는 자들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제를 갖는다면 주님을 진실로 따르는 참된 종들을 따라야 하고, 그들과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왜냐면 그 종들은 우리의 영적 생활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생활에서 어릴 때 주님을 직접 의지하는 방법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 각 사람들을 일으키십니다. 이 돕는 자들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보아스의 소녀들 곁에 머물도록 하십니다. 이 소녀들은 우리 영적인 동료들입니다. 우리가 주를 따를 때 우리는 또한 영적인 동료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보아스의 소녀들을 진실로 따라야 합니다. 나는 룻기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게 촉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오미는 다시 룻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딸아, 네가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감으로써 그들이 다른 밭에서 너를 만나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 좋으니라”(2:22) 나오미는 주님을 진실로 아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룻은 두 가지 아주 귀한 지시를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이끄심이요, 다른 하나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이끎입니다. 나는 오늘날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우리도 이런 지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전에 이끎이 아주 단순한 가르침이라고 언급했었습니다. 하지만 따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왜 따르는 것이 어려운가요? 여기서 우리가 그 자체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룻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룻이 극히 순종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에게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모두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룻이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시가 주어졌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이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자아 때문에 우리는 아주 개인적입니다. 우리는 강하고 고집스럽습니다. 가끔 우리는 주님, 저를 이끄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이끄실 때 우리는 하나님, 저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저런 방식으로 이끄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합니다.

 

때론 여러분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끝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 의해 이끌어지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아는 극도로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룻의 미덕은 그녀가 그녀의 자아를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네 남편이 죽은 뒤에 네가 네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또 네가 네 아버지와 어머니와 모국을 떠나서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을 내가 분명히 보았느니라. *{}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해 주시기를 원하며 {}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날개 아래로 의지하러 온 네게 충분히 보상해 주시기를 원하노라”(2:11~12)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룻이 자신의 자아로 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자기 자아를 기꺼이 부인하는 사람만이 이끌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지만 여러 번 그 이끎이 자아와 맞부딪힐 것이고, 하나님께 어려움을 가져올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룻의 미덕을 보아야 합니다. 이 순종은 자아를 부인하는 헌신으로부터 왔습니다. 룻은 또 보아스의 소녀들과 같이 다니고 있었습니다. 룻기 2장 마지막 구절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이에 그녀가 보아스의 소녀들 옆에 바싹 붙어 있으며 보리 수확과 밀 수확을 끝마칠 때까지 이삭을 줍고 자기 시어머니와 함께 거하니라.

 

성경은 왜 우리에게 이런 방식으로 기록했을까요? 세상에는 많은 유혹이 있음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룻은 젊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고, 늙은 시어머니를 떠나도록 유혹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와 여전히 살고 있었던 것을 기록한 방식은 아주 중요한 체험입니다. 룻은 어떤 환경이나 사람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령을 따르는 것처럼 그 또한 같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을 따르는 것에 중요한 체험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룻기 2~3장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본래의 목적을 다시 한 번 되돌려 그들을 이끄시고 계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분명한 이끄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자아를 부인하는 헌신을 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썼을 때 그는 두 가지 문제를 함께 가져왔습니다. 로마서 8장은 이끌림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할 원칙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몸의 욕구를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자아 속에는 사악한 행동들이 있습니다. 자아생명은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사사기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으며, 모든 사람이 자신의 눈에 옳은 것을 행했다고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자신의 눈에 옳은 것을 행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원하는 것을 따라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나는 앞장서서 했을 것입니다. 내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앞장서서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생활과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자아의지입니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일을 어떠한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그런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거기에 어떤 반대나 다른 의견이 있다면 즉시 충돌과 갈등이 생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를 섬길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 자아는 하나님께서 다루셔야 하는 가장 큰 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기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끌림 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룻이 주님 앞에서 축복받은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룻은 자아생명 안에서 살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이 번영이라면 우리는 몸의 욕구를 절제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아의지로 살지 않을 때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여러 해 동안 이런 교리를 들어왔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지시이끎은 아주 단순하지만 우리가 실행하기가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것은 자아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결정, 생각, 방법, 그리고 감정 모두 우리의 영적생활을 방해합니다.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을 요청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상태로 계속해서 산다면 우리 안에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사들의 시대와 같을 것입니다. 룻의 시대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매년 이러한 교리들이 우리의 실제가 되고 실행되어야 합니다.

 

값을 치루는 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무엇인지를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과 내가 그것을 말하기에 부끄러운 것입니다.

 

나는 내가 주님 앞에 나의 많은 실패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 우리 교회와 모임에서 주님에 대한 증거가 너무 약합니다. 나는 자주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서 주님, 제가 주님을 방해하는 자입니다. 모든 해에 당신께 순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주님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저를 이끄셨습니다. 이 자아는 죽이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사역을 많이 방해하는 이유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나는 내가 이런 메시지를 말할 자격이 없음을 알지만 우리는 우리가 순종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 룻이 했던 것처럼 주의 긍휼을 위해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 주님은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사역은 끝이 났고, 오늘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몸의 욕구를 절제하기에 어렵지 않지만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야 하고, 우리는 이 공과를 배워야 합니다. 여러 번 나는 봉사하는 형제들과 나눕니다.

 

우리 주님은 분쟁을 주시기 위해 하늘에서 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이와 같은 분쟁을 다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분쟁을 다루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분쟁을 만드는 자들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트러블메이커들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이 트러블메이커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 또한 트러블메이커들입니다.

 

우리는 트러블메이커들이 되는 것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 자아를 부인하는 공과를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의 사역에 가장 큰 트러블메이커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대에 그분의 증거를 드러내는데 기꺼워 하지만 오늘날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뜻을 따라 주님을 따를 수 없고, 모든 것이 헛된 말을 한 것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로마서 8장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은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이 용어는 성숙한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진실로 성령의 이끄심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참된 성도들로 이 세대 곳곳에서 우리가 나눈 이끄심에 순종한다면 우리의 생활이 성숙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 짧은 룻기는 우리에게 있어 주님에 대한 아주 중요한 생각을 대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회복의 방식을 두십니다. 우리가 우리 영 안에서 만족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른 인도하심을 가져야 하고, 자아를 부인하는 이 공과를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바꾸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의 뜻을 해롭게 할 수 없지만 그대로 방치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때문에 축복을 잃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황량함 가운데 있는 교회의 상태는 사사시대의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럴 때 주님은 룻기를 통해 우리의 길을 빛 비춰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으로 되돌아 갈 것입니다. 우리의 사소한 생활은 하나님 손 안에서 아주 다른 가치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통 사람들인 우리에게 말씀하심을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손에서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主護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