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강해/룻기II

실패에서의 회복, 일탈에서 돌아옴(4)

Hernhut 2014. 12. 4. 11:45

 

오늘 룻기 4장에 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짧은 이야기를 여러 번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 속엔 보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그분의 갈망을 나타내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 모두가 보통의 사람들임이 우리 모두를 격려합니다. 하나님은 나오미를 쓰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룻을 쓰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보아스를 쓰실 수 있으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쓰실 수 있으십니다. 주님,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를 주옵소서. 구약의 이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아주 분명하고, 명쾌한 뜻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경을 읽읍시다.

내 딸아,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내가 네게 행하리니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내 백성의 온 도시가 아느니라. *참으로 이제 나는 너의 가까운 친족이나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3:11~12)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게 되었나니 이것은 너희가 다른 분 곧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분과 결혼하게 하려 함이요, 또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7:4)

또 너희의 죄들과 너희 육체의 무할례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셨으며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반대하던 규례들을 손으로 기록한 것을 지우시고 그것을 길에서 치우사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으셨으며”(2:13~14)

우리는 이 짧은 룻의 이야기의 배경에 이 모든 사건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변하시지 않으시는 영광스런 뜻이 있음을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있는 역사에서 이 원칙을 볼 수 있습니다.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위해 사람들의 무리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무리를 통해 하나님은 나타내실 것이고, 그분의 영광스런 뜻을 알리실 것입니다. 그것이 증거입니다. 한 세대라면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람들의 무리를 얻으실 수 없으시고 그분의 뜻은 앞으로 나아가겠지만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심각한 손실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나 가능성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룻기는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언급한 영원한 뜻, 하나님의 목적은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입니다. 이 노선과 관계있는 모든 사람들은 축복받습니다.

 

여러분, 룻기는 하나님께서 사역하시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대항해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았을지라도 그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출하시기 위해 사사들을 세우셨습니다. 사사들은 부분적인 구출로 그들의 기능을 발휘했습니다. 그들은 평강과 안식으로 사람들을 구출했습니다. 우리가 사사기를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20, 40, 80년 동안 평강을 주시기 위해 사가들을 일으키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구출이 제한된 시간 동안만 이었음을 우리가 주목합시다. 우리 하나님은 일시적인 것을 바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갈망하시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사를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황량함 가운데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은사를 받은 형제자매들을 그분 자신을 위해 일으키셨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부흥을 가져왔지만 아주 빠르게 이 은사를 받은 성도들은 세상을 떠났고, 사람들은 다시 사사들의 시대처럼 어둠으로 빠졌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사는 사사기와 아주 많이 흡사합니다. 물론 이 사사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헌신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좋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사들도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믿음이 강했습니다. 그들은 강했고, 재능이 있었으며, 전쟁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끌 수 있었으며, 적의 일을 이길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분적으로 구출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사에서 주님은 일시적인 구출과 안식을 가져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은사를 받은 많은 사람들을 일으키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은 이런 것에 있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자주 2~3세기 전 유럽에 퍼졌던 형제들 운동을 말해왔습니다. 형제들 운동도 부분적인 부흥만을 가져왔습니다. 풍성한 부흥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행하신 어떤 사역이십니다. 물론 형제들은 주님을 위한 좋은 증거였습니다. 그들은 많은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은사를 받은 형제들이 죽은 후 우리는 다시 한 번 형제들 운동이 속박과 어둠 안으로 빠진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을 보호하시려고 각 사람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영광스런 뜻을 나타내시려고 이와 같은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분의 사람들 속에서 완전히 수행될 수 없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어떤 사람들을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분 자신의 아들에게 있고, 모든 것이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 영원하신 것과 관계가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룻기는 우리에게 변치 않는 하나님의 뜻의 방식으로 산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그들이 다윗에게로 안내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사들의 가치가 훨씬 뛰어 넘었습니다. 이것이 사사시대의 가장 큰 목적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여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보호하시기 위해 주어진 은사는 정말 귀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큰 것을 하도록 시키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작은 사사들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룻기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것처럼 같은 원칙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은사들의 가치는 극도로 작습니다.

 

사사기에는 큰일을 행한 어떤 사사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삼갈을 아십니까? 삼갈은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을 때 그는 소 채찍으로 600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죽였습니다. 그는 그 때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기능이 귀하다는 것을 압니다. 아마 우리는 우리가 보통의 사람들임을 느끼고, 어느 날 주님께서 복음을 나누도록 우리를 쓰시기를 소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삼갈이 소 채찍으로 600명을 죽인 것처럼 600명이 구원 받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는 생명의 이끎 아래서 사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사기는 은사를 대표합니다. 룻기는 생명과 매일의 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나는 저와 동역하는 달오와 시덕형제님이 이런 노선을 따라 그들의 메시지를 나누고 계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룻의 원칙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룻기에서 오는 이끎은 우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이끎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룻기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을 기록해야만 합니다. 이런 생명의 방식으로 계속하기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은 룻기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은사를 쫓게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룻기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아주 중요한 원칙을 기록할 것입니다. 이렇게 기록하는 것은 이 원칙 아래서 살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나오미와 같아질 수 있습니다. 룻과 같아질 수 있습니다. 보아스와 같아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원칙이요, 회복의 원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영원한 목적 안에서 시작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언급한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윗이 때어났을 때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애에서는 그 영광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했다는 큰 영향력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교회사에 있다는 것을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교회사에는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다가오는 교회에서 큰 영향력을 준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몇 년 전 중국에 가서 몇몇 형제들과 함께 마가렛 바버자매의 무덤에 갔었습니다. 나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바버자매는 온 생명을 주님을 위해 드렸습니다. 그녀는 지혜가 가득했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의 아주 귀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녀는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친밀하게 주님의 이끄심을 따랐습니다. 그녀는 섬의 아주 작은 지역에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에는 이 부담만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중국에 젊은 사람들을 일으키시도록 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녀에게는 다른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밀접하게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녀는 젊은 사람들에게 엄격한 요구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들을 수가 없었고 결국 그녀를 떠났습니다. 마지막에 그녀는 6명의 젊은이들을 얻었습니다. 이들은 중국의 교회사에 큰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바이오그라피를 읽을 때 그녀가 큰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녀와 함께 있던 젊은이들은 당신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에 많은 곳에 가야하고, 특별집회를 열어야 한다. 왜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가?”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녀에게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주님을 밀접하게 따르는 여인이었습니다. 또 그녀는 제시 펜 루이스자매에게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펜 루이스자매 또한 주를 밀접하게 따랐습니다. 펜자매는 당신은 냉정하게 성령을 따라야 한다.”는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여러분, 냉정하게 성령을 따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가장 작은 요구를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각자가 교회에서 이와 같은 지속적인 영향을 갖는 이유가 있습니다. 중국에 있는 교회는 바버자매의 큰 희생 때문에 큰 부흥을 가져왔었습니다. 그 큰 부흥 뒤에는 바버자매가 있었습니다. 바버자매는 중국에 형제들 운동을 소개했습니다. 그 자매가 형제들 운동을 소개하지 않았다면 중국에 교회부흥을 가져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바버자매는 룻기에서 보여준 진리로 살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단순히 두었습니다. 그녀는 주님과 죽는 것을 기꺼이 배웠습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을 하시도록 큰 기회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주님과 밀접하게 살기 원하는 사람들은 룻기에 나타난 많은 영적인 원칙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룻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몇몇 원칙을 언급했습니다. 우리 생활에서 우리는 우리 영 안에서 만족되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우리의 환경이 황량해 보이기는 하지만 충만하고, 만족되도록 우리는 주의 임재로 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름으로 우리는 우리 영 안에서 강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룻이 보아스와 그의 밭에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정밀하게 따라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오늘날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직접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외에 다른 것으로 유혹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사역을 완성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분의 사역을 하실 그분의 방법을 가지시도록 해야 함을 나눴습니다. 그런 후 그분과 함께 죽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죽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사역하시기가 매우 어려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각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체험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스스로 죽는 한 아주 자연스럽게 주님은 그분의 사역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과거 나의 섬김에서 나는 이 말씀이 단순히 교리가 아닌 참된 체험임을 압니다. 많은 시간 나는 내게 있는 것을 반사하고, 또 사람들에 관해 생각합니다. 나는 아주 지혜롭지 못합니다. 많은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추구하는 큰 갈망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주님께 내 자신을 드립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만 느낍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기꺼이 따릅니다. 주의 손에 기꺼이 내 자신을 둡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모든 형제들을 봅니다. 그들은 얼마나 성경을 알고 있는지, 그들의 삶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압니다.

 

그들은 교회를 치리하는데 재능과 은사가 아주 많습니다. 나는 내가 그들 뒤에서 따르기만 한다면 내게 있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전투에서 앞장설 수 있고, 나는 그들 뒤에서 따르며 지원을 할 것입니다. 내가 나의 온 생명을 드릴 수 있다면 나를 만족케 했을 것입니다. 나는 어느 날 주님께서 이 형제들 가운데서 나를 뽑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환경을 만지시고, 홀로 있는 상황에 있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두려웠던지 모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없었음을 느꼈습니다. 내가 주님을 섬기기 위해 무엇을 할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내게 간단한 공과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내 자신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안식에 들어가려고 부지런히 분투해야 합니다.

 

전도여행 중에 나는 이 말씀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심지어 사역에서도 그 안에 안식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내게 단단히 매달려 있었습니다. 나는 어디로 가야하지요? 저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선교사역 하러 갈수도 가까이에 있는 지역에 복음을 전하러 갈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라고 주님께 말했습니다. 내가 고통을 당할 때마다 나는 방에 숨어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나는 나의 부족함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내 안에 안식을 계속 유지해야 했습니다. 나와 함께 있었던 어떤 형제자매들은 멀리 떨어진 형제들에게 나를 알렸습니다. 이 형제들은 내게 화를 내며 주호촌 형제, 소용없는 일이야. 안식한다는 것은 계속되지 않아.”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성경을 읽었을 때 안식하는 것이 계속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한 노() 자매가 형제, 염려하지 말아요. 형제는 주님께 속해 있는 교회를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역은 주님께 속해 있습니다. 형제가 해야 하는 모든 것은 이것입니다. 형제, 주님과의 조용한 시간을 보내세요. 그리고 주님 앞에서 기다리세요.”라고 격려해 주는 말을 내게 해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사역을 확대하는 방법을 제시하도록 우리에게 충고했지만 이 자매만이 내게 가장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프라하에 60여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확실히 몰랐습니다. 나는 우리가 우리 자아를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보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노선의 형제자매들이 모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회를 했습니다. 유럽의 언어를 전혀 하지 못했지만 그들과 자연스럽게 집회를 해 나갔습니다. 그중 한 한국 형제자매들이 일어나 통역을 해주는 사역을 했습니다. 나는 이 원칙을 고수해 나갑니다.

 

어제 대전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순탄치만은 않았고, 어떤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하지만 나는 주님과 함께 죽는 원칙이 가장 강력한 무기였음을 느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과 함께 진실로 죽었다면 적은 여러분에게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을 배울 필요만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 주변에서 주님의 사역을 볼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 안에서 그분의 방법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그분은 그분의 방법을 가지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는다면 그분은 그분의 방법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사역을 계속합니다. 내가 뽐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은사가 없고, 지식도 많지 않습니다. 나는 자주 영적인 책들을 많이 읽지 않았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성경에 있는 단순한 원칙을 따르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주님은 그분의 사역을 하실 것입니다.

 

룻기 3장의 체험은 진실입니다. 우리는 룻기를 교리로 여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따라야 하고,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스런 사역을 하심으로 여러분을 데려가시는 것을 볼 것입니다.

 

오늘 저녁 우리는 마지막 장에 왔습니다. 룻기 4장은 정말 아름답고, 영광스런 엔딩입니다. 그 끝의 결과는 다윗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구약성경 역사에서 중요한 사람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의 예시이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아브라함으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의 집안사람들을 얻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집안사람들은 다윗의 손에서 이스라엘의 민족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의 시작점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끝점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것은 완전한 예표입니다. 룻기의 가장 큰 가치는 왕국을 세우는 왕의 시작이요, 황량함이 끝나는 것입니다. 사사기에 있는 황량함의 수세기들은 마침내 다윗의 손에서 끝났습니다.

 

나오미, , 보아스는 아마도 이와 같은 영광스런 끝을 가져올 수 있다고 꿈도 못 꾸었습니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다윗이 구약성경에 나타났을 때 그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표와 영원한 목적을 채웠습니다. 다시 한 번 역사적인 이야기는 현상일 뿐입니다. 숨겨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그들 뒤에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윗의 통치가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통치의 예표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상태에 대해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 아무리 많은 은사를 가지고 있든, 이 은사가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던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의 상태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그분의 사람들 가운데서 방법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외적인 조직이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여러분이요, 나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그분의 방법을 얻으셔야 합니다.

 

룻기 4장에서 우리 주님은 그분의 영광스런 뜻을 이루시기 위해 두 가지 중요한 것을 완료하셔야 합니다. 그것들은 룻에게 한 보아스의 약속입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모든 상속을 구속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룻과 결혼을 했었다면 그는 상속과 사람 둘 다 구속해야 했습니다. 구속의 과정은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묘사하는데 그림을 사용합니다. 보아스의 마음에는 더 가까운 친척, 구속을 행사하기 위한 더 큰 우선순위가 있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고, 친척이 있었다고만 말했습니다. 아주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이야기를 통해 영적인 문제를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친척이 율법의 예표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주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구약성경 시대는 율법의 시대라고 불렸습니다. 은혜의 시대는 우리 주님과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먼저 왔고, 그리스도께서 나중에 왔습니다. 첫 만남은 가장 가까운 친척, 율법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먼저 율법의 이슈를 풀어야 했기 때문에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요구이기 때문에 그 큰 기능이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이 의로운 요구는 사람의 죄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를 고발합니다. 사람이 율법 아래에서 살 때 그는 아주 약해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를 약하게 느끼도록 할 수밖에 없고, 우리를 구속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율법 아래에 사람을 두셨습니까? 율법은 타락한 사람이 너무 약하고, 너무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율법은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고, 희생적인 삶을 사는 것을 불가능케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사람들의 실패를 증명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사람들을 율법 아래에 두셨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것 아래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큰 속박 아래에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은 여전히 율법의 속박 아래에서 계속 살기 때문에 아주 슬퍼합니다.

 

율법이 우리의 양심을 큰 속박 아래에 두고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기 어렵더라도 오늘날 이러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여전합니다. 율법은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 예수의 십자가 사역은 율법을 다루셨습니다. 골로새서 2장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반대하는 법으로 구성하고 있는 빚 문서를 없애셨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설명하시기 위해 구약성경에서 보아스가 행했던 것을 사용하신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날 아침 도시 문으로 가서 기다렸습니다. 중국어 성경은 우연의 일치로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는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이 가까운 친척을 데려오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삶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에 기초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가엽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방식을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한 부부는 그들이 잘못 결혼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우리에게 결혼은 하나님께서 합하게 하셨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 안에서 주의 깊은 계획에 따라 여러분 둘을 합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아내를 내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남편을 내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해보십시오. 여러분의 남편이 기분이 나쁘다면 여러분은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계속해서 바가지를 긁더라도 여러분은 주님께 감사를 해야 합니다.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상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구원 받은 순간부터 모든 것이 성령의 통제 아래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다스림은 큰 문제에만 제한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있는 사소한 것까지도 성령의 통제 아래에 있습니다.

 

보아스는 이 문제를 공적인 문제로 다루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친척에게 가까운 와서 앉기를 요구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정말 공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개인적으로 일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알려져야 했습니다. 우리는 보아스가 율법을 다룬 모든 과정을 보는 것을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썼을 때 그는 로마서 7:1~17절에서 십자가가 율법을 다룬 것에 대한 모든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속박 아래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보아스는 가까운 친척에게 앉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앉는다는 것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아스는 문제를 그 문제를 다루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과 함께 할 열 명의 장로들을 초대했습니다. 열 명의 장로들은 체험한 자들을 대표합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열 명의 장로들은 10계명을 대표는 것처럼 보인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율법이 구속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보아스가 그들의 형제 엘리멜렉의 땅을 구속하기를 원하느냐고 친척을 물었을 때 친척은 그가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상속에 관심 있음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구약에 주셨을 때 율법은 하나님의 상속을 보호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관심만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그 땅을 구속하기 위해 친척에게 말했을 때 동시에 룻도 구속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로 이 모압여인을 취해야 했습니다. 물론 친척은 엘리멜렉의 땅과 룻을 구속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율법은 죄인들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죄를 죄 없음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율법은 율법이 의롭기 때문에 이와 같은 라합여인과 룻을 용인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이러한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면 율법은 의롭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법이 됩니다. 이렇게는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율법 아래에 떨어진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율법을 시행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정말 엄격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가 율법의 한 부분에 대해 죄책감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죄책감이 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이유입니다. 요구가 얼마나 엄격한지요! 율법은 무자비합니다. 우리가 신약성경 시대에 사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구약성경, 율법의 시대에 살았다면 우리는 날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율법의 속박 아래에서 우리를 해방했습니다.

 

가까운 친척이 룻을 그의 아내로 취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율법은 자신의 신발을 벗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면 그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실행은 신명기 25장에 근거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죽은 형제의 아내를 기꺼이 취하지 않을 것이라면 그 여자는 그의 신발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신발을 벗기는 것은 이제부터 여러분이 더 이상 또 다른 사람의 상속에 발을 들여놓을 권리가 없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침을 뱉는 것은 당신이 당신의 형제를 돕지 못했을 것이기에 당신이 모욕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신발만 벗는 것만 보고, 얼굴에 침을 뱉지 않는 것을 봅니다. 왜냐면 율법은 불명예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성경이 정확하고, 정밀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침을 뱉었다면 큰 문제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발을 벗을 수만 있고, 침을 뱉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엘리멜렉의 땅과 룻을 구속할 수 없었을 때 보아스는 자신이 모든 것을 구속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땅이 구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도 구속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성경에 있는 것들을 우리가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체험가운데 있는 상속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후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끄셨고, 그들의 상속으로서 그들에게 그것을 주셨습니다. 에베소서는 우리가 그분 안에 있는 상속을 얻었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상속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상속을 얻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상속으로 얻을 수 없다면 그리스도는 그분의 상속으로서 우리를 얻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때 이 생명은 우리의 완전한 존재를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이 생명을 누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주의 생명을 누리면 누릴수록 주님께서 우리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속은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의 상속으로서 그분의 아드님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이 상속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완전히 이 상속을 누리면 누릴수록 하나님은 그분의 상속으로 우리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에베소서에서는 성도들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의 영광의 풍성들로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얻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매일 주님을 체험하고 누린다면 하나님의 생명은 그분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 안에서 성장할 것입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그분의 생명이 성장할 것입니다. 그 후 우리는 그분 안에 있는 완전한 상속을 얻을 것입니다. 또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을 완전하게 얻으실 것입니다. 상속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구속에 관한 한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아는 것을 멈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구속받은 것을 이해해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구속하셨다는 것은 잘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속의 부분을 간과합니다. 구원받는 것은 과정이지만 구속을 통해서만 우리가 하나님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구속에 관해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질서를 가지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 질서는 각 가정, 각 족속이 그 상속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가난이나 태만한 사람들 일부는 그들의 상속을 팔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상속을 판 후에도 여전히 가난했고, 아이들도 팔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아이들을 팔아도 여전히 굶주렸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을 팔았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얼마나 슬펐던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여느 가족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아이들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그 가족의 아이들입니다. 자녀들이 아무리 다툼이 있을지라도 여러분은 그들을 돌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나쁘다고 할지라도 그분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의 상속을 계속 유지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가운데 이 특별한 규례를 세우신 이유였습니다. 50년마다 희년으로 희년에는 여러분이 팔았던 그 땅, 아이들, 여러분 자신을 구속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해하십니까? 이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들에게 이 구속의 룰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많은 것들을 잃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재물을 낭비하는 탕자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나를 바라볼 때 나는 형편없습니다. 여러분을 볼 때 여러분은 아주 캐주얼하고, 영적인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가끔 이것이 우리가 눈물 흘리는 이유가 되게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때부터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위해 상속을 이미 준비하셨습니다. 시편 16장은 하나님께서 측량하는 줄로 우리의 상속을 재셨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것은 아주 풍성하고도 기쁨의 장소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몫이었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들은 장차 상속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몫을 내려놓아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는 방식으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아버지의 방식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의 기초 앞에 여러분을 위해 상속을 준비하셨습니다. 천년왕국에 우리가 들어간 후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완전한 상속이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이고, 여러분은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우리 주님을 기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구속에 대한 이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속이 우리 주님으로부터 온 큰 고통의 대가로 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는 십자가 위의 그분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경배하고, 고개를 숙여야 함을 생각합니다. 이것은 소중한 대가요, 가치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속해 있는 것을 멸시한다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가 이를 갈고 후회하게 될까요?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연말에 우리 서로 격려합시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우리 서로 기억합시다. 우리는 주임을 더 사랑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더 경건하십시오. 경건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6~7장에서 바울은 완전한 구원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두 장은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것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죄와 죽음을 다루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은 율법과 가련함, 그리고 타락한 육체를 다루셨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성령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우리 안에서 완성하십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 원하는 것을 그분께서 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보아스가 룻을 구속하는 것에 대해 결정을 했을 때 그는 다른 사람들과 그의 가족에게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주님의 구속은 영원히 경배를 받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집을 건축한 라헬과 레아와 같이 여러분의 집을 상속받는 여인을 삼으소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이 아브라함에게 계시되었지만 야곱은 라헬과 레아에게서 12족속을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함께였고, 약속의 이룸은 야곱과 함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아스를 축복하는데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소서.”(4:11b)라는 말씀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장차 권세와 영광을 얻으시도록 주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또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4:12)고 말했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이것이 죄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이 문제를 기록하셨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받아들이시고, 그분의 영광스런 뜻 안으로 그것을 두십니다. 이것은 저주의 상태에 있어야 했지만 하나님은 축복으로 저주를 돌리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치 없는 것을 가치 있게 하셨습니다. 보아스는 기생 라합의 아들이었고, 룻은 모압여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연합은 유대인의 눈에 저주가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크신 긍휼의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이야기요, 나의 이야깁니다. 우리는 저주를 받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은 우리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변의 것들을 완전하게 돌리셨기 때문에 저주는 축복이 되었고, 가치 없었던 것이 가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보아스는 룻을 위해 아주 놀라운 것을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율법 아래에 있는 우리를 해방하셨음을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아내로 룻을 취했습니다.

 

우리가 룻기를 읽을 때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려고 우리의 생각에 의지한다면 우리는 많은 질문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보아스가 정말 부유했었는데 당시에 왜 결혼을 하지 않았는지를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가 룻을 만날 때 그는 룻이 가난한 사람이든지 부자든지 젊은 사람들을 따라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보아스가 노인이었음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가 다시 반복합니다. 성경에서 이 이야기는 현상뿐입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적인 문제들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보아스가 룻과 결혼 하도록 하기 위해 그 때까지 싱글로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들이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아들을 얻었습니다. 성경은 나오미가 가장 평안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늦둥이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 늦둥이가 생명의 회복자가 되었을 것이고, 그녀의 노년을 부양하는 자가 되게 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녀는 어둠에서 나갈 수 있었고, 빛 안으로 걸을 수 있었습니다. 이웃은 그녀와 기뻐했고, 그녀의 며느리가 일곱 아들들보다 더 낫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일곱 아들들보다 훨씬 나은 것입니다. 그녀는 이 이 아이에게 부양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고통의 여러 해를 통과했습니다. 나오미는 손자를 아주 귀하게 여겼습니다. 거기엔 또 다른 예표가 있습니다. 나오미 안에는 성령의 많은 성품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나오미가 아이를 위해 보호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은 후 하나님은 우리를 누구에게 맡기십니까?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납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손에 우리를 맡기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위로자로 오시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그분은 여러분 안에 거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서 무엇을 하실까요? 성령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모든 시대는 성령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에 주의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가장 좋은 관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다니! 할렐루야!

 

여러분, 다른 어떤 사람들이 우리를 보호할 자격이 없습니다. 왕가(王家)에서 아이가 태어날 때 그들은 무심코 어떤 누구에게 보살피도록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를 보살피는 사람들은 엄격한 선택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세상의 왕자와 공주들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울 수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볼 자격이 있습니까? 천사들조차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령의 손에 우리를 맡기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일으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요! 이 아이 때문에 가족은 기쁨으로 충만되었습니다. 이 책 끝에서 우리는 이새가 다윗의 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윗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왕국은 세워졌고, 황량함의 기간이 끝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가장 큰 사역은 그분 아들의 통치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러 재림하실 때에만 땅 위의 황량함이 끝날 것입니다. 그 다음에야 하나님의 왕국은 땅 위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과정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두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일생에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상속을 계속해서 구속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상속을 구속하시게 할까요? 간단합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죽는 원칙 안에서 계속해서 살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사역을 하실 것이고, 여러분이 잃었던 모든 것을 구속하실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의 왕국이 장차 내려올 때 왕국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형제자매들이 풍성하게 공급될 것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체험에서 우리는 이미 풍성을 획득했습니다. 가난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재림하실 때 각 성도들 안에서 그분의 풍성을 보시길 원하십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그분을 환영할 때 그분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시는 그분의 사역을 계속해서 하시고 계십니다. 어느 덧 한 해가 지나갑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과거에 잃었던 것을 후회합니다. 우리가 단지 후회하는 것만 멈추지 말아야 하지만 우리는 이 시대에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구속하시기를 요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것들을 구속하실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한 날이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계산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루 동안 주님 안에서 산다면 주님은 1,000년으로 계산하십니다. 우리가 1,000년 동안 살 수 없지만 주님은 1,000년으로 하루를 계산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서 살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1,000년을 살지라도 주님은 하루로 세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잃었던 모든 것을 구속할 기회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으면 얻을수록 그분께서 우리를 더 얻으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생명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자마자 우리의 생활은 이미 주의 생명과 연합되었습니다. 모든 형제자매들은 구원받았을 때 주님의 생명과 연합되었습니다.

 

주님의 생명과 연합된 존재의 실제 안에서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생명이 우리 주의 생명의 모든 성품을 붙잡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그분 생명의 이끄심으로 주님 안에서 거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하고,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사역하시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갈망은 우리 성격을 그분의 성품으로 대체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분을 체험하고, 변화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환경이 오게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더욱 더 가질 때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형제들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쫓는 것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따라야 합니까? 주님의 생명과 연합된 존재의 실제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이 여러분의 생명 안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실제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매년 진전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모든 과정은 그들의 성격의 변화 가운데 놓여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볼 수 없지만 우리는 그 성격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람의 성격이 변하는 것을 볼 때 여러분은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이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생명 성장을 따라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격 안에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땅 위에서 계속 남아 있게 하시고, 그분은 이 문제들을 관심 갖도록 기회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주의 재림을 환영하기 위해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 주님께서 그분의 신부와 결혼하시려고 기다리신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오늘날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성품이 더욱 더 자라고,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우리 각자 안에서 사역을 준비하시고 계십니다. 교회가 장식될 때 그리스도의 성품을 준비하고 함유시키십시오. 그러면 교회는 주님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결혼이 완료될 때 하나님의 왕국은 나타날 것입니다. 성경에는 중요한 계시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의 왕국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압니다. 진실로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룻기에 있는 원칙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옳은 결정을 하도록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구합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사기와 같은 이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 앞에 룻기를 두셨습니다. 주님 말씀은 아주 분명합니다. 主護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