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강해/룻기II

실패에서의 회복, 일탈에서 돌아옴(3)

Hernhut 2014. 11. 24. 21:46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3~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우리가 오늘 룻기 3장에 다시 왔습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과 나누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사시대와 같은 시대에 있다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교회들은 아주 어두운 곳에 빠져있고, 혼돈의 상태에 있으며, 기근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모든 곳에 있는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해결책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어둠과 혼란과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사사기와 룻기를 구약성경에 두셨습니다. 우리가 룻기에 관심을 가질 때 그 해결책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은사를 강조하기 위해 사사기를 말하고, 생명을 강조하고 삶에 관해 말을 하려고 할 때 룻기를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너무도 쉽게 생명에는 소홀히 하고, 은사에 우리의 초점을 맞춥니다. 내가 청년시절이었을 때 우리 가운데 많은 형제들이 사사기 읽기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룻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한 노()형제님은 룻기에 있는 아주 좋은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그 형제님에 들었을 때 들을 때에는 참 좋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여러 사사들에 대해 나누었고 도전받는 모든 것들을 실행했습니다. 그 메시지를 들은 형제들은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도전받으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이 도전받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나는 모릅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사사들과 같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사를 갖고서 아주 도전적이고, 다채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물론 그런 성도들도 있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야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다채로운 삶을 살기보다 오히려 우리의 삶이 평강하고, 풍성하게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큰 명성 없이도 우리는 작은 명성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아니면 우리는 우리가 그들의 영광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유명한 사람들을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중에 주님은 내게 상기시키신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크고 도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좋은 것이지만 이것이 우리가 의미 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룻기가 이와 같은 책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룻기는 우리가 의미 있게 살도록 가르칩니다. 우린 모두 보통사람들입니다. 맞죠? 하지만 우리는 아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룻기에 있는 특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아주 보통의 사람들이였지만 그들의 삶은 아주 의미 있었습니다. 룻기는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채워지고 만족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영적인 문제들을 사랑하고, 갈망하도록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시기를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순수한 갈망을 갖도록 주님께 요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순수한 영적인 젖을 갈망해야 합니다. 이 의미는 우리 영적인 갈망이 황폐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건강하게 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영적인 갈망이 황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순수한 영적인 것들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혼합된 모든 것을 좋아합니다. 이러한 자녀들 때문에 우리는 자녀들의 갈망이 황폐하게 되고, 성장이 건강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자녀가 음식을 먹고, 젊은 시절부터 순수해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순수한 음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기독교에서 느끼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들 중 하나님 자녀들 가운데 대부분은 그들의 갈망이 황폐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순수한 영적인 문제들을 갈망하지 않는 다는 것이요,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삶을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 영 안에서 참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 주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은 이미 여러분 안에 거하시고 여러분은 매일 그분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양분을 공급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공급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영 안에서 잘 먹는 자들이 되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다윗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넘쳐흐르는 생명입니다. 얼마나 편안하고 기쁜지요!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은 강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이 의미 있기 위해서 룻기는 우리가 먼저 영 안에서 풍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 그것에 관해 이미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가끔 주님께서 나오미가 룻을 인도했던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나오미가 룻을 공급하고, 인도하는 시어머니였던 것은 하나님의 뜻에 근거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과 많은 형제자매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위해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서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안에서 오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요한의 마지막시대에 그는 기름부음에 대한 가르침을 언급했습니다. 모든 형제들은 기름부음에 대한 이 가르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직후 여러분은 구원받았고, 여러분은 가르침을 받습니다. 나는 빈번하게 내가 어렸을 때 나의 구원을 반사합니다. 나는 성경을 읽지 않았습니다. 나는 영적인 문제들에 대해 짧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은 나의 생활 속에서 아주 분명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매일 생활 가운데 기름부음에 대한 가르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 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가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자아를 부인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의 의지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 중년 내지는 노년 때에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해 동안 우리 자아 안에서 사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이것이 내가 항상 내가 일을 하는 방법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갑자기 내게 어떻게 다르게 일을 해야 할지를 말해 주도록 합니다.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젊다면 오히려 지시하기가 쉽습니다. 아이들이 3~4살일 때 그들에게 지시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지시하려고 합니다. 이것 해라, 저것 하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자아가 얼마나 강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도를 기꺼이 순종하는 룻과 같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자아를 설명하는 곳이 많습니다. 나는 우리가 주님 앞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절대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아가 자만하기가 너무 쉽습니다. 언제든 여러분이 자만하게 될 때 여러분이 임도함을 받기는 어렵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고집스럽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고집스럽습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지라도 우리는 오히려 끝까지 그곳에 머무를 것입니다. 이것은 슬픈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알지만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을 계속합니다. 이것은 큰 비극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브시드린교회 형제들의 특별 집회에 참여할 때 우리 앞에서 고인이 되신 어떤 형제들을 부러워합니다. 또 다른 형제들에게 미안함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 회개할 기회를 가졌지만 그들은 너무 고집스러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이것은 자아에 영향을 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안다면 회개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회개는 축복입니다. 회개는 평생교육 공과입니다.

 

여러분, 하시라도 어떤 문제에 있어 성령께서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빛을 비추실 때 우리는 즉시 주위를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어렵게 될 것입니다. 아주 잘 표현된 찬송이 있습니다. 주를 사랑하기에 나는 성령의 작은 명령까지도 기꺼이 복종하겠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방법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룻기가 우리에게 말하는 중요한 두 번째 문제는 안으로부터 인도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오늘 우리가 나눌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 매일의 생활에서 추구와 섬길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생활 가운데서 이루기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이루시게 하는 것입니다. 룻기 3장에서 이 길이 우리 앞에 분명하게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이 하나님 자신으로만 이루실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 사실은 성경이 사람과 함께 그분의 영광스런 뜻을 이루시기 원한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이루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룻기 3장에서 이 진리가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룻기 3장에 아주 중요한 2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첫 번째 포인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완료하시는 책임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 안에서 그분과 연합할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생활과 사역의 통칙(通則)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동역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사역한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우리가 그분과 함께 사역하고 있다고 하나님께 말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내려놓으려고 분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동역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책임이 여러분 자아를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죽으면 죽을수록 더 쉽게 그분의 사역을 하게 될 것이고, 그분이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룻기 3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실로 우리 하나님께서 광대하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말씀이 되시고, 육신이 되셨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사람으로 보고, 심지어 우리는 그분께서 나사렛 사람이 되셨다고 알게 됩니다. 우리는 심지어 그분보다 더 영리하다고 생각해 우리가 그분을 도우려고 하고, 그분을 위해 어떠한 것을 하기 원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분의 사역을 하시려고 여러분을 필요로 하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광대하시다는 것을 아십니까? 심지어 하늘과 땅도 그분을 품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광대하심은 여러분의 상상을 넘어섭니다. 나는 진실로 구약성경에서 느헤미야와 다니엘의 기도를 좋아합니다. 그들이 기도했을 때 그들은 크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불가해(不可解)한 위대함을 만졌습니다. 그분 앞에서 땅 위에 있는 권위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서 위대하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고, 우리가 절대 그분의 상담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께 어떤 도움도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룻기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자아를 죽이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아를 죽이는 것은 여러분이 그분의 방식으로 서지 못하고, 그분께서 여러분 안에서 그분의 사역을 이루시게 하지 못할 때 충분히 좋은 것입니다. 우리 자아를 죽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상기시키시려고 그분의 말씀을 계속해서 사용하심을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룻기 3장을 읽을 때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로 가시기 전, 성령께서 그분과 함께 죽는 의미를 여시기 전, 성령은 나오미와 룻 이야기를 통해 이 진리의 의미를 이미 계시하신 것을 보는 것이 놀랍습니다. 나는 이 역사에 기록된 사람이 주님께서 미래에 십자가에서 이루실 것을 전혀 몰랐지만 그분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 이야기에 기록되셨다고 믿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 우리의 체험을 놀랍게 설명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룻기를 주의 깊게 읽는다면 여러분은 각 장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림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그림에 있는 각 등장인물들이 여러분 앞에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성령에 의해 사용된 말씀은 정말 아름답고, 이 말씀 안에는 깊은 의미들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보통의 사람들 안에서 꼼꼼한 사역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이 에베소서 2장을 썼을 때 바울은 우리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걸작으로 우리를 설명했습니다. 걸작에 대한 본래의 의미는 시()입니다. 우리는 소중한 항목입니다. 나는 우리의 영적 사역과 생명에 관한 한 그것들은 예술가의 손 안에 있는 예술의 한 조각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것들은 보통의 화가의 일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세상에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아주 거친 그림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문제는 예술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들은 훌륭한 예술이 되어야 합니다. 가끔 내가 성경을 읽을 때 나는 안에서 한숨을 쉽니다. 많은 귀한 문제들이 잃었고,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는 아주 많은 것들이 얕고, 거친 것 같습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찬양을 부를 때에도 느낄 수 있습니다. 17~18세기의 많은 찬양들은 주님을 따르는 형제자매들의 체험에서 산출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어떤 찬양들은 머리 지식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이 커피를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는 동안 쓴 음악 같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들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임을 기억하십시오. 어떤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에서 하는 거칠고 무심한 사역을 받아들이실까요?

 

한번은 은사가 있는 노() 장로형제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그는 나와 함께 모임에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나는 그날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내가 한 시간 동안 메시지를 전한 후 그는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그 기도가 한 시간 동안 기도를 했습니다. 나는 이와 같은 것으로 부딪힌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내 메시지 안에 있는 모든 말씀들을 사용해서 기도했습니다. 다음 날 나는 그의 집에 갔습니다. 그는 나를 너무 사랑했고, 그가 나에게 형제, 형제의 메시지에서 의미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 메시지 자체가 너무 거칠어.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형제님은 아주 체험적이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충분히 나를 적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생각은 아주 깊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능변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 앞에 있는 형제들이 주의 말씀은 성령에 의해 밀어내셔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고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전히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 때 받아들인 그것은 내가 주를 섬기는데 있어 크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지를 전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 우리가 사는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보통의 화가의 거친 작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룻기에서 아주 좋은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주님의 죽으심에 관한 진리는 예수님께서 2,000년 후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시고 성령께서 바울 서신서를 통해 그것을 계시하시까지 계시되지 않았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전에 이 진리는 계시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룻기를 통해 이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를 함께 둘 때 우리는 바울의 편지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이 아름다운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놀라운 인도하심입니다. 우리가 웃기 3장으로 올 때 우리는 이 원칙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는 현상일 뿐입니다. 이야긴 겉으로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그것들 뒤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으로 다스리심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를 위해 큰 도움이 됩니다.

 

룻기 3장 처음에서 우리는 진실로 며느리를 사랑했고, 며느리에게 많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안전하게 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룻과 살았을 것입니다. 안전을 추구하는 것은 집을 찾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우리는 집으로 돌아간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 있는 작은 집을 가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금 완벽한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땅 위에 있는 우리의 집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어느 날 우리의 집은 끝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들은 진짜 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만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고, 우리의 참된 안식입니다.

 

나오미는 이미 그 때에 아름다운 생각을 가졌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과 함께 살기를 소망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집을 건축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집이 우리의 안전한 곳, 안식, 우리를 위해 공급하신 집이 되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오미가 이와 같은 생각을 가졌을 때 그녀는 룻에게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특별한 제안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특별한 문제들을 설명하시는 성령이셨습니다. 여러분 중 부모는 여러분의 아이들에게 이런 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이런 하나님의 가르침이 없고, 확인도 못합니다. 우리는 나오미가 이와 같은 이상한 생각을 한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서 관심을 갖고, 이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찾으려고 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어떤 생각도 없지만 한 가지를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원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이 이야기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겉 현상에 주의하는 우리를 원치 않으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유일무이한 준비를 했습니다. 나오미가 노인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룻이 보아스를 만났다는 것을 들었을 때조차도 그녀는 보아스가 그들의 가까운 친척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또 그녀는 가까운 친척이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법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나오미는 그들과 함께 하는 방법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보아스의 일상적인 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녀는 그 밤에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부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나오미가 사용할 수 있었던 어떤 기회를 찾기 위해 보아스에 대해 오랜 관찰을 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것이 그녀의 주의 깊은 관찰의 결과였고, 보아스가 밤에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부를 것이라고 룻에게 말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읽을 때 그림이 쉽게 그려집니다. 성경이 보아스의 밭을 언급할 때 그 밭은 주 예수님께서 이별의 사역을 하셨던 곳을 말합니다. 주님을 언급하는 복음서는 철저히 그분의 타작마당일 것입니다. 우리는 까부르는 보리의 의미를 이해합니다. 곡식이 모아졌을 때 검불과 왕겨와 티끌들이 혼합되었습니다. 저녁시간 바람이 불 때 사람들은 곡식을 들어 올려서 분리하고, 보리를 까부릅니다. 왕겨나 검불들은 바람에 날아가고, 알곡은 떨어집니다.

 

이 그림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요? 첫째로 하나님께서 생명을 가진 사람과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분리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오늘날 교회에서 사역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생명을 가지지 않은 자들에게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분리하십니다. 십자가의 사역은 새 창조에서 옛 창조를 분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오늘 밤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부를 것이다.”(3:2)라는 구절은 주 예수의 중요한 사역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너는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으로 내려가라”(3:3a)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서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어떤 중요한 원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원칙들은 구약성경에 있는 제사장들의 길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섬기기 위해 장막 안으로 들어갔을 때마다 그들은 그들의 몸을 씻어야 했고, 기름을 발라야 했으며, 옷을 바꿔 입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 앞에 갈 때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염으로 가득해져 있고, 땅에 속해 있고, 타락되어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예수님이 피로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체험에서 우리들 중 대부분은 예수의 피로 깨끗해질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오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만족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기름부음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성령의 기름부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옷 갈아입는 것을 말하자면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우리는 우리를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 때마다 해야 하는 어떤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모이러 오는 것에 익숙합니다. 일요일에 우리는 아침식사 후 곧 바로 모이기에 분주합니다. 우리는 떡 떼는 예배에 앉은 후 떡을 먹고, 잔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올 때마다 우리는 그분의 피로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기름 부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우리를 옷 입히실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정말 오랫동안 주님을 섬겼을지라도 나는 가끔 불가피하게 우리가 매일 생활 속에서 오염되었기 때문에 내 자신을 계속해서 상기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환란을 당할 때 가끔 우리가 낙심되고 슬프지만 우리는 모임에 오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것이 특별하게 우리가 참되게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좋은 기분이 아니기 때문에 모임에 가지 않고 집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쁜 기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집에 머물 수 없습니다. 내가 모임에 가기 전에 나는 집에 있을 때 내 자신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나는 주님, 저는 오늘 너무도 슬픕니다. 많은 압박을 받습니다. 저는 오염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상태로 예배하러 갈 수 없습니다. 제게 주의 긍휼로 덮으소서. 저를 깨끗케 하소서. 당신의 기름으로 저에게 기름 부으소서. 제게 당신으로 옷 입혀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모임에 갈 때 나는 형제자매들이 나의 미소를 보기 원합니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나는 참된 이스라엘사람이다. 내가 슬프다면 나는 여러분이 나의 시무룩한 얼굴을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위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 앞에서 여러분의 준비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나의 웃는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를 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보는 것은 나오미가 룻에게 말한 것과 같이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생명에 대한 비밀입니다. 너는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으로 내려가되”(3:3a)

 

룻은 진실로 순종적이었습니다. 룻은 전혀 의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시어머니에게 적합한 것인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녀의 평판은 엉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 둘 다 부끄럼을 당했을 것이고, 심지어 돌로 쳐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룻은 질문하지 않았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내가 행하리이다.”(3:5b)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룻은 가서 씻고, 스스로 기름을 바르고, 가장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타작마당으로 내려갔습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진실로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복종했습니다. 어두워졌을 때 타작마당으로 내려가 보아스가 누워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성경은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울 때에 가서 곡식더미 끝에 누우매”(3:7a)라고 보아스의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말씀을 읽을 때 무엇을 보는지 잘 모릅니다. 이 장면 뒤에 주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있음을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의 만족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셨을 때 완전히 기꺼워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분께서 그분 앞에 있었던 침례를 통과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마음이 열정으로 가득 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분께서 오신 이유였습니다. 끝에서 그분은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주님의 고통스런 체험이었지만 성령은 우리를 위한 다른 면의 이야기를 묘사하십니다.

 

보아스가 먹고 마신 후 그의 마음은 즐거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부르짖었습니다. 대가(代價)가 어마어마했을지라도 그분의 마음은 기쁨이 넘치셨습니다. 체험은 고통스러웠지만 주님의 마음 안에 이 기쁨을 가지셨습니다. 보아스는 곡식단 끝자락에서 잤습니다. 성경에서 잠과 죽음은 같은 의미로 말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죽었을 때 그가 잠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보아스가 곡신단 끝에서 잠을 잤다는 말은 그가 죽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 옆에 곡신단이 있었고, 그 옆에 그가 누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이 생명의 놀랍고, 풍성한 추수를 가져옴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12:24절과 마찬가지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남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미묘하게 구약성경의 배경을 말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 곧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리라.”(12:32)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무수한 곡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보아스가 누워서 잠이 들었을 때 룻이 몰래 와서는 보아스의 발을 드러내고 누웠습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죽음의 체험이 성도들의 감추어진 추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체험한 성도의 체험은 절대 대중적인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로 올려지고, 주님을 따른다고 말을 할 때 여러분은 그들이 십자가를 수행하고 있음을 그들의 얼굴을 보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십자가를 수행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온 교회가 알기를 소망하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않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여러분, 주님의 죽으심을 체험하는 것은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이 체험은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비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비밀을 가져야 합니다. 삼손이 어떤 것을 행한 후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관해 물었을 때 그가 비밀이라고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비밀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과의 우리의 숨겨진 교제 이야깁니다. 룻은 거기에 누웠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보아스가 누운 곳에 룻도 누웠습니다. 여기서 단순한 진리는 주님께서 죽으시는 곳이 어디든 우리 또한 거기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함께 죽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여러분이 합당한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합당하게 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기쁘지 않은 것에 부딪혔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위상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자신에게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내하고 참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를 꽉 뭅니다. 그것이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표면적으로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지만 안은 폭발을 기다리고 있는 화산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합당하지 않은 죽음입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죽는다면 여러분은 안식할 것입니다. 안식은 안에서부터 나옵니다. 안에서 나오는 안식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십자가의 가장 큰 체험은 죽음입니다. 가장 큰 결과는 부활입니다. 참된 죽음만이 참된 부활을 가져옵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진실로 참아야 합니다. 그래서 죽음이 우리 안에서 사역할 때 생명은 다른 사람들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섬김입니다. 얼마나 귀한 것인지요! 주님께서 어디서 죽으시든지 우리 또한 거기서 죽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부활생명을 흘러나오게 할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죽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예술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가장 작은 문제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룻이 보아스의 발밑에 자신을 눕혔을 때 성경은 보아스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발밑에 누워 있는 여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합니다. 교회사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많은 형제자매들은 일생을 추구했습니다.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관심을 받기를 소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께만 눈에 띄기를 원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보시기만 하신다면 저는 완전히 만족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갈망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드리고, 섬기는 이유는 그분의 눈으로 주목받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의 관심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너무도 자주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것에 너무 많이 가치를 둡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목하시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아스는 깜짝 놀라 깨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의 관심에 사로잡힐 수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그분의 죽으심 안에서 사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에 주목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 있는 스데반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이 표현이 우리 주 예수의 나타나심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스데반은 신실하고 용감했었고, 더 중요하게도 그는 죽음에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통해 주의 죽으심과 진실로 연합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치고 있을 때 스데반이 무릎을 꿇고서 뭐라 부르짖었나요? “[], 이 죄를 저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7:60) 이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찢기셨을 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이 하는 것을 저들이 알지 못하나이다. 저들을 용서하소서.”(23:34) 다른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치고 있을 때에 그는 마음으로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이 행동은 우리의 주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감람산에서 제자들이 주님의 승천을 증거했을 때 주님께서 구름으로 오르시는 것만을 볼 수 있었지만 그들은 구름 뒤를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이 죽을 때 그는 보라, 하늘들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내가 보노라”(7:56)고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 위에서 그분의 사역을 마치신 후 본래 보좌에 앉으셨지만 스데반의 죽음은 주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심지어 주님은 서 계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우리 삶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입니다. 어디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을 기꺼이 체험하는 성도들을 주님께서 주목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주님을 깜짝 놀라시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사는 하나님에 의해 주어집니다. 주님은 사람이 나타낼 수 있는 기능이 얼마나 많은지에 가치를 두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주님과 함께 진실로 죽는 성도들만이 우리 주의 눈에 붙잡힙니다. 보아스가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룻을 보았을 때 룻은 아름다운 간청을 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그러므로 당신의 옷자락으로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당신은 가까운 친족이니이다.”(3:9b) 그녀는 보아스에 의해 덮여지는 그녀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받는 권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위에 그분의 덮으심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덮음은 그분의 날개의 그림자로 번역된 운하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날개는 보호입니다. 우리는 주의 보호 아래에서 살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었고, 룻이 말하는 것을 칭찬했습니다. 네가 처음보다 마지막 끝에 친절을 더 많이 베풀었도다.”(3:10b) 이것은 우리가 주와 함께 죽는 방법을 안다면 우리는 더 큰 은혜를 받을 것임을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외의 모든 것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런 다음 보아스는 그녀에게 내 딸아,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내가 네게 행하리니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내 백성의 온 도시가 아느니라.”(3:11)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죽으심의 체험 안에서 연합되는 것만이 그분께서 우리의 갈망을 채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있는 중요한 비밀입니다. 룻은 이른 아침까지 거기에 누워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그녀가 타작마당에 왔을 때 아무도 알지 않았다고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체험이 영원히 숨겨진 분의 것임을 압니다. “아침까지 누워있었다는 의미는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체험을 통과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생동안의 체험입니다. 룻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기 전에 일어나 떠났습니다. 그녀가 떠나기 전에 보아스는 보리 여섯 말을 되어서 그녀 머리 위에 이워줬습니다.

 

지난 주 우리는 룻이 강한 여인이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보리 여섯 말은 아주 무거웠고, 룻은 집으로 운반했습니다. 이것에 대한 영적인 의미는 우리가 오늘날 주님과 함께 기꺼이 죽는다면 풍성한 추수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체험이요, 결과입니다. 우리가 불평과 분으로 삶을 산다면 우리가 형제들과 싸우지 않더라도 여전히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죽을 때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됩니다.

 

룻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나오미에게 일어났던 일을 말했고, 나오미는 내 딸아, 이 일이 어떻게 될지 네가 알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이 날 그 일을 끝마치기 전에는 안식하지 아니하리라”(3:18)고 말했습니다. 보아스에 대한 묘사는 사실상 우리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날 진실로 주님과 함께 죽음 안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아를 죽일 때 안식을 가질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주 제게 들었죠? 하나님의 사역은 안식의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의 특징은 안식입니다. 여러분이 섬길 때 여러분이 안식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손 안에 있는 사역을 꽉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섬김이 안식한다면 그 안식은 사역을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입증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중요한 공과입니다. 너무도 쉽게 우리는 걱정을 하고, 우리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꽉 붙잡습니다. 우리가 더 세게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우리는 안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아를 죽일 때 하나님은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역하시면 우리는 거기서 참된 안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아를 죽일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역하심으로 그분의 책임을 맡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그분의 사역을 이루실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안식할 때 그분은 안식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쉬지 않으면 하나님은 휴식하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서 휴식하시기를 원치 않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강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든 근심과 육체가 나올 때까지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역은 그분에 의해 완료될 수 있으며, 그분은 분명하게 완료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가르침을 신약성경에서 설명했습니다. 시간 때문에 주님과 함께 죽는 것에 관해 많이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잠깐만 언급하겠습니다. 로마서 6장은 침례의 체험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으로 침례 받는다는 것을 간과하고 침례를 받습니다. 우리가 침례를 받았을 때 우리는 잠깐 동안 물속에 들어가지만 그분의 죽으심으로 침례를 체험하러 들어가 우리 온 생명을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침례에 대한 참된 의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빵을 만들 때 도우를 치대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물과 밀가루를 혼합한 후 여러분은 즉시 도우를 만들 수 없습니다. 좀 더 숙성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몇 시간이나 하룻밤을 지난 후에 완전히 물과 밀가루가 섞인 후 빵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온 생명의 체험은 침례의 체험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생명 안으로 주님의 죽으심이 들어오시도록 하면 할수록 주님의 사역이 더 여러분의 생명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우리에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2:20)고 말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러분이 죽는다면 예수께서는 여러분 안에 사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산다면 그분은 여러분 안에서 사실 수 없으십니다. 그분이 사실 때 모든 것이 이뤄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귀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원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원하고, 그분의 영광스런 뜻 안에서 살기 원한다면 자아를 죽이는 가르침을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의 혼란, 이 악한 세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 앞에 이 깨끗한 길을 두셨습니다. 우리가 룻기로 돌아가서 이와 같은 진리를 따라 산다면 우리의 삶은 의미로 채워질 것이요,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主護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