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강해/룻기II

실패에서의 회복, 일탈에서 돌아옴 (1)

Hernhut 2014. 10. 17. 11:00

 

룻기를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위해 모일 기회를 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번 룻기를 연구할 때 많은 시간을 할애했지만 이번 연구는 4주간 동안 나누려고 합니다. 어떤 형제님들은 나보다 더 많은 은사를 가졌지만 이번 집회에서 내게 시간을 할애해 준 하나님과 또 <브시드린>교회에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무거운 부담을 갖고 이 자리에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 은혜로 여러분들과 함께 룻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룻기를 다시 하게 된 동기는 주님 앞에서 기도하고 있었을 때 내가 받은 부담은 형제자매들과 룻기를 나누어야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형제자매들이 이 책과 매우 유사하다고 믿습니다. 룻기는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 주님께서 이 책을 통해 우리 마음에 말씀하실 것입니다.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읍시다.

 

룻기 1:1~6, 1:14~19, 1:22, 마태복음 1:1, 5~6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대한 책이라.......*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고 다윗 왕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룻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를 짧게 기록한 이야깁니다. 우리가 이 짧은 이야기를 넘어 영적인 의미를 이해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역사를 연구하는 원칙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경이로울 뿐입니다. 경이로움을 넘어서 어떤 지배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역사의 발전을 넘는 지배하는 요소들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역사를 연구할 때 우리는 영적인 시야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배경에 있는 지배적인 요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야기들 뒤에 있는 참된 의미를 우리가 이해하는 것을 도울 것입니다. 예를 들어 현대 과학에는 고전적인 과학과 다른 학설이 있습니다. 옛 물리학에서는 유도(인도) 법을 사용하고, 현대 물리학은 추론방식을 사용합니다.

 

물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뉴톤의 어떤 중요한 법칙에 관해 압니다. 그들은 유도 법을 사용합니다. 아주 어린 아이라도 이 이야기를 압니다. 어느 날 뉴톤은 사과 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는데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졌습니다. 그는 사과가 위로 올라가지 않고, 왜 떨어질까?라고 의문을 가졌습니다. 이것을 통해 그는 우주적인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참된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은 뉴톤이 이와 같은 현상을 일으킨 법칙을 찾게 되는 표면적인 시각을 사용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인슈타인과 같은 현대 과학자들을 연구하면 수학적인 것을 통해 그는 어떤 법칙과 원칙들을 처음 발견했습니다. 그런 후 그는 그 현상을 보려고 이 법칙들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이제 이 적용이 고전적인 물리학보다 더 정확하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와 같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곳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상을 먼저 보려고 함으로 원칙들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정확하고, 심지어 오류를 산출합니다. 영적인 문제들은 먼저 원칙으로 시작하고 그 다음 현상을 보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인 시야를 갖고 현상 뒤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외부적인 현상을 모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류역사, 특히 이스라엘 역사의 발전을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의 통치체제가 뒤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룻기가 짧은 이야기일 뿐이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 뒤를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의 통치체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말할 때 나는 형제자매들에게 다시 한 번 어떤 중요한 특징들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에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완벽한 의지를 제안하시기 위해 그분의 완벽한 지혜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뜻은 완전무결하십니다. 그것은 그분의 완벽한 지혜로부터 옵니다. 이 지혜는 흠과 점도 없는 결점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관해 이런 기본적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완전무결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뜻은 영원하고, 변할 수 없습니다. 거기엔 어떤 변화나 수정이 필요치 않습니다. 시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런 분명한 이해를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쉽게 실수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상담자가 될 수 없고, 그분의 뜻에 대한 어떤 제안을 하나님께 할 수 없고, 어떤 수정하도록 할 수 없다고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나 여러분에게서 도움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을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경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같은 실수를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영광스런 뜻을 세우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 위에서 그분의 사역을 하신 것처럼 그분은 모든 세대에서 이 영광스런 뜻을 절대 바꾸시지 않습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입증합니다. 특별한 세대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얻으셨습니다. 그 무리는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순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세대에 나타내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대에서 이와 같은 사람들을 찾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분명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실패하겠지만 하나님은 절대 실패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땅 위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멈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늘들에서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패했고, 하나님의 마음이 대단히 슬퍼하셨고 심지어 진노를 하셨고, 또 그분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심각하게 사람들을 꾸짖으셨을 때 왜 그런 것이 구약성경에 있는지를 질문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와 같은 행동을 하셨을까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땅 위에 있는 사람들을 끔찍이 사랑하시고, 그분의 백성을 그분의 자녀로서 다루시고, 그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그분의 뜻 안에 있는 축복을 잃지 않기를 원하시고, 그들이 축복을 받으려고 했지만 그들이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큰 고통과 진노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부모가 있고, 부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자주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축복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순종합니다. 그들은 그 축복을 받으려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을 고통을 구고 화나게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같은 방법으로 다루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분의 뜻의 축복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무리를 얻으실 수 있으시다면 하나님은 극도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역사 속에는 원칙들이 있습니다.

 

동시에 역사가 이것을 입증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것에 대해 방해하는 것들이 적으로부터 오든 사람의 육체의 어리석음으로부터 오든 아무것도 방해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시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가져오는 어떤 힘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마귀는 사탄으로 불립니다. 사탄은 반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장 크게 반대하는 힘은 마귀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마귀의 끝은 정말 끔찍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는 어떤 힘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아래에 빠지는 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는 어떤 힘과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려고 하는 시도는 사람이 고통을 잊게 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는 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물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변하시지 않으시고, 그분의 거룩한 부르심은 취소하실 수 없으시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증거의 문제에서 버림받을 수 있고, 축복을 잃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구약(新舊約)성경을 읽을 때 개인이든지 교회이든지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한 그들이 구원을 받고, 지옥에 가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축복에서 그들을 떼어 놓으실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증거에서 버려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사와 구약성경의 역사에 대한 어떤 지식을 갖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것이 성경에서 온 계시임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이 관련되어 있기까지 우리는 이해하려고 싸워야하고, 그것 아래에서 우리 자신을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 외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최근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복음과 회복사역을 자주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크신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헤매는 자들과 그분의 본래의 목적에서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 오십니다. 비록 하나님의 사역이 쉽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절대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갈 때 우리가 역사의 원칙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역사 이야기를 읽을 때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원칙을 통해 하나님께서 룻기를 통해 우리에게 넓은 안목을 주실 것입니다.

 

룻기가 비록 짧은 이야기지만 이 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의 다스림을 볼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짧은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스런 뜻을 계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 뒤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이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에서 말씀이신 우리 주 예수께서 육신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이 그분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합니다.

 

구약성경시대에서의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마태복음에 의하면 1장에 기록된 족보에서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족보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을 분명하게 묘사합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과 우리 주 예수까지 여러분은 분명한 노선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예수께서 아직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성경은 아브라함에서부터 다윗까지의 노선입니다. 아브라함은 구약성경에서 중요한 시작부분이요, 다윗은 결론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 안에 있는 이 노선의 중요성을 묘사하기 위해 구약성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표면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땅 위에 가정을 세우시기 원하시고, 아브라함과 시작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다윗 시대에 하나님은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하나님은 분명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에서부터 다윗까지 하나님의 영광스런 뜻의 다림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에서부터 다윗까지입니다. 이 노선 안에서 생활을 하고, 이 노선과 관계있는 사람이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룻기가 이 노선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룻기가 중요하고, 사람들이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에 의해 축복을 받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의 노선 안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룻기에 있는 이야기가 아주 간단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의 노선 안에서 사는 방법에 대한 중요한 원칙을 우리에게 계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방법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분은 사람들의 삶을 통해 이 노선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룻기는 축복의 이유와 회복의 방법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룻기가 단 네 장뿐이지만 이 네 장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4가지 원칙을 볼 수 있습니다. 룻기는 사사기 시대의 일어난 사건입니다. 사사기는 룻기의 배경입니다. 사사기를 읽을 때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장 어둡고,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무서운 역사라는 것을 압니다. 그 시대는 가장 큰 황량한 기간이었습니다. 그 때는 사람들이 배교와 타락한 기간이었습니다. 사사기를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교회가 사사시대를 사는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그러므로 룻기는 가장 황량한 기간에 사는 성도들을 위한 중요한 기록이요, 성경부분입니다.

 

룻기는 이 황량함에서 나오는 방법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해 질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사기를 읽을 때 우리는 그들의 실패 사유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려야 할 중요한 이유가 2가지가 있습니다. 사사기 1장과 2장 초반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광스런 위치에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실패의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의 대적들을 내쫓을 수 없었고, 심지어 땅의 상속자들로 언약을 세워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대적들을 내쫓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타협하는 사람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대적들을 내쫓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대적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의 방법과 생각을 사용했습니다. 우리 이웃과 평화를 지속할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선 우리는 그들의 신들을 숭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고, 또 우리는 그들의 신들을 숭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 것입니다. 일보를 더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그들과 결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법리적인 관계가 될 때 그들은 법리적인 관계를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적대적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이었습니다. 사람의 관념에 우리는 이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실패의 두 번째 이유는 정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두 번째 세대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진심으로 의심스럽습니다. 오늘날의 용어를 사용하여 그들은 교리를 알았고,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의 체험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들이 실패한 다른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사사기의 처음 부분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실패한 이유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문장이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것을 행하였더라.”(21:25) 그들의 삶에서 그들은 다스리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세상에 있는 교회(개신교)가 이와 같은 상태에 있는가?” 제지 받기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곳이 어디든 우리는 갑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합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스런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사사들의 시대는 가장 큰 어두움을 가져왔고,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대적의 능력은 그 당시에 가장 높아졌습니다.

 

우리가 사사기를 읽을 때 우리 모두는 백성들이 적에게 시달렸고, 고통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룻기를 읽을 때 1:1절은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이제 재판관들이 다스리던 때에 땅에 기근이 드니라. 베들레헴유다의 어떤 사람이 자기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머물렀는데 우리는 사사기가 적에 의해 가져온 어두움, 시달림, 그리고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룻기는 사사기 맨 끝에서는 기근을 가져왔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보기 드문 기근인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근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이 타협하고, 떠나고, 고통을 받았던 이유는 기근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풍성의 하나님이이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식량을 갖고, 풍성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에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우리 중 부모 된 성도들은 우리 자녀들 이런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먹기를 거절하고 야윈 것을 볼 때 나를 슬프게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아이들이 식욕이 좋고, 통통해 보일 때 나는 부러웠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병약하고 야위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신명기 28장을 읽으면 풍성함과 기근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희가 순종하는 한 하나님의 축복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축복은 풍성이상입니다. 들에 있는 양과 소떼든, 곡식의 추수든, 밀가루든 그것들이 모두 풍성해질 것입니다. 적들이 여러분을 볼 때 적들이 도망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불순종할 때마다 여러분은 즉시 기근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근이 하나님부터 그분의 불순종의 자녀들까지 훈련이라는 것을 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불순종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 땅을 저주하실 것입니다. 그 땅은 소출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식량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충만한 것은 하나님의 받아들임과 기뻐하심을 대표합니다. 기근은 하나님의 불쾌함을 대표합니다.

 

사사기는 기근이 있었고, 룻기는 사사들의 시대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이야기는 기근이 일어났던 사건의 연속입니다. 성경은 한 사람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사실 이 사람만이 아니었고, 그와 같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떡집(빵집)이라는 베들레헴에서 살았습니다. 베들레헴은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이제 그곳이 기근이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기근이 왔을 때 우리는 가족이 그것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타협하기 시작했고,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의 이름을 엘리멜렉이었다고 말합니다. 엘리멜렉은 일반적인 이름이었고, 그의 반응은 평범했습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식량이 없었을 때 그는 무엇을 했을까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압이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땅이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근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땅으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경고가 필요한지! 오늘날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와 같습니다. 그들이 만족함이 없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그들은 잠시 동안만 거주하려고 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진실로 도망하고, 타협하는 마음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시적인 만족을 추구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을 진실로 만족시킬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타협과 달아남 때문에 결국 죽음이 왔습니다. 이것은 정말 비극적인 결과입니다. 모압 땅에서 엘리멜렉은 죽었습니다. 10년 후 그의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이 가족은 완전하게 죽음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영적인 문제에서 영 안에 있는 불만족과 기근은 우리가 타협하고, 도망하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일반적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사기 때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룻기를 통해 중요한 곳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룻기에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몇 명 나옵니다. 우리는 룻기가 나오미, , 보아스 이 세 사람들 주변의 주된 이야기라고 알고 있습니다. 또한 룻기에는 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가장 간단한 이야기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세 사람들은 아주 일반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은사나 특별한 달란트를 갖고 있지 않았고, 그들은 총명한 지식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아주 보통의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보통의 사람들 뒤에 놀라운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성경을 읽을 때 이 보통의 사람들에 관해 읽기를 좋아합니다. 왜 내가 이 보통의 사람에 관해 읽기를 좋아할까요? 그것은 내가 보통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정말 평안함을 갖습니다.

 

내가 모세에 관해 읽을 때 나는 불가능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바울에 관해 읽을 때 나는 내가 그와 필적할 수 없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오미와 룻에 관해 읽을 때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같기 때문에 정말 평안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보통의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이 세 사람은 그 당시에 하나님의 손 안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대들에서 그분의 쓰임에 맞는 그릇들을 찾으셨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이든, 학문의 배경이 어떠하든, 어디에서 왔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분의 쓰임에 맞는지를 찾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사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떤 사사들을 사용하셨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쓰임에 더 맞는 다른 사람들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오미를 찾으셨고, “내가 그녀를 사용하실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룻을 보셨고 내가 그녀를 사용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고, 보아스에게도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우리가 돈을 가지고 있는지, 많은 교육을 받았는지 상관없습니다.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쓰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반적인 사람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에 몹시 감동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갈망에 따라 그들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를 가진 것이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일생에서 이런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룻의 증손자였습니다. 그는 현손(玄孫)이었습니다. 나는 다윗이 태어나기 오래 전 나오미가 죽었다고 믿습니다. 보아스도 죽었습니다. 심지어 룻도 죽었습니다. 그들의 일생에서 그들은 다윗이 그들의 후손이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들은 어느 날 다윗이 이스라엘 민족을 세울 것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방법만 알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격려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우리는 즉각적인 결과를 바랍니까? 우리가 섬길 때 우리는 우리가 교회의 큰 부흥을 가져오길 바라고, 우리가 유명해지기를 원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추구합니다. 소수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관대한 영향을 끼친 무리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얼마나 격려가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큰 것을 바랄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발맞춰 살고, 삶을 인도하심에 따라 주님 앞에서 산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영광을 볼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일반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리 가운데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일반적인 사람들임을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일반적인 우리를 쓰실 수 있습니다.

 

룻기에서 우리가 이 세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여기서 정말 중요한 사람입니다. 나오미는 엘리멜렉과 결혼을 했습니다. 구약에서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했었습니다. 기근이 일어나자 남편은 그의 가족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타협을 했고 실패했습니다. 마지못해 나오미는 그를 따라 모압으로 갔습니다.

 

룻기에서 우리는 환경이 혹독하게 되었고, 가족이 타협한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나오미만은 절대 타협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녀가 남편을 따라 모압으로 간 것은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룻기에서 나오미가 하나님을 안 사람이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녀는 아주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두 아들은 그들의 아내로 이방 여인들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와 각별한 관계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여러분은 이 시어머니가 얼마나 친절한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며느리들이 그녀를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녀를 존경했습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한국 등 동양에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갈등이 있는 적들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환경을 나오미의 가족에게서 보게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도 나오미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일반적인 사람이었을지라도 그녀의 성격은 하나님의 관심을 붙잡았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그녀가 아주 친절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에게 아주 아름다운 증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오미를 따르는 룻의 갈망을 표현하는 룻의 말에서 우리는 나오미를 통해 룻이 하나님을 알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여호와의 이야기를 두 아들에게 말을 했고, 그들이 어려서부터 여호와에 관해 그들에게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또 두 며느리들에게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끝에서 룻은 당신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죽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니이다. 만일 죽는 일 외에 어떤 다른 것이 나와 어머니를 갈라놓으면 {}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매”(1:17)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오미가 그녀의 가족에게 아름다운 증거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가족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를 지키게 했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향한 그녀의 믿음이 확고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긴 고적감을 알게 됩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잃지 않았습니다. 나오미의 남편이 죽었고, 10년 후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아주 슬펐습니다. 그들은 과부들이 되었습니다. 슬픈 가족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녀가 들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사람들을 축복하시기 시작하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들음은 생명의 이끄심입니다. 언제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속생명의 이끄심을 잃지 않는 한 그들은 항상 돌아갈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나의 섬김에서 나는 수년간 주님을 떠났던 사람들을 십자가로 오게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돌아왔을까요? 그들이 생명의 이끄심을 만졌기 때문입니다. 만진다는 의미는 감동하다, 감동케 하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오랜 기간 후 많은 유대인들은 이방 나라로 갔고, 자신들의 나라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나오미가 뉴스를 들었을 때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즉시 그녀는 모압 땅을 떠나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생명의 이끄심에 대한 복종은 행동으로 옵니다. 그녀는 기꺼이 돌아갔습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녀는 믿음 안에서 믿음을 가졌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과 함께 하는 며느리를 택하려고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는 자신과 함께 고통을 받기를 원치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나오미가 정말 친절한 사람이어서 며느리들에게 나와 함께 가지 말고, 너의 가족과 너의 신에게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이것은 선한 의도의 시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역하심의 원칙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절대로 강요하시지 않으십니다. 아담과 이브 창조 때부터 하나님은 어떤 것을 하라고 절대 강요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기꺼이, 기쁘게 따르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르바와 룻은 두 다른 반응을 대표했습니다.

 

아주 친절한 나오미는 그들에게 충고를 했습니다. 오르바는 무엇을 대표합니까? 그녀는 주님에 대한 느낌을 가지고 있지만 기꺼이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이따금 우리는 모임에서 주님에 의해 움직이지만 이후에는 우리의 옛 방식으로 돌아가 갑니다. 그녀는 느낌이 있었지만 따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르바는 나오미에게 아주 선했습니다. 하지만 기꺼이 값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아주 슬픈 것입니다.

 

반면 룻은 사랑과 기꺼이 따르는 것을 대표합니다. 중국어 성경은 룻이 차마 나오미를 떠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영어성경에는 룻이 나오미에게 매달리며, 달라붙었다고 말합니다. 중국어 성경은 아주 사실적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조금의 느낌을 갖고 있는 한 좋은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매달렸습니다. 매달림이나 따르는 것은 영적인 비밀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땅에 계셨을 때 그분은 그분의 제자들을 택하셨습니다. 이 제자들은 물고기를 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많은 힘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들은 이 비밀을 붙잡았습니다. 예수께서 어디로 가시든 그들은 따라갔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신 후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떠났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의탁하시고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 “[],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주께 있사온대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리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것이 어부가 되는 것에서 주님의 사도가 되는 것을 의탁 받은 따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우리는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 처음 믿을 때, 주님을 따랐지만 세월이 지나가면 우리는 이 사람이 선하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그를 따르거나 우리는 세상이 좋고, 우리가 세상을 따른다는 것을 압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고 있었을 때 많은 유혹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끝까지 주님께 매달릴 룻과 같은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주님께 요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주님을 따릅니다. 끝에서 룻은 어머니,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곳에서 제가 죽어 매장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는 룻에게서 이 따름의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저를 떠나라 설득하지 마소서. 저는 이미 결정했습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따를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영적인 생활입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의 부끄러움과 허무에서 이제 풍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에 숨겨진 깊은 영적인 체험이 있습니다. 영적인 이해의 견지에서 보면 우리 중 각 사람은 엘리멜렉입니다. 엘리멜렉에게서 우리는 말론과 기룐을 낳았습니다. 그 이름은 좋은 이름이 아닙니다. 그 이름들은 병약함을 의미합니다. 엘리멜렉이 죽은 후 우리는 이것이 좋은 죽음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나는 그가 죽지 않았다면 나오미가 자유를 갖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 때문에 영적인 원칙에 따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죽음으로부터 부활의 원칙을 아우릅니다. 그들은 빈손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풍성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룻기 1장 마지막에 기록된 것처럼 베들레헴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은 밀 추수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풍성한 추수가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기쁨의 사직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사시대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회복을 걷기 원한다면 첫 번째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기근에서 떠나 걷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분께서 하늘로부터 오는 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영적인 음식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가득해지고 만족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건강한 생명을 선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기근 상태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적 생활에 충만하고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기근 가운데 사십니까? 식량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우리가 식량을 얻을 수 있는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주님의 말씀을 여시고, 그리스도의 풍성을 해방하실 때 이것은 우리의 영을 만족케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말씀을 읽고, 주의 사역으로 충만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주의 말씀을 먹을 필요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오늘날 땅 위에 있는 교회들의 상태를 보게 됩니다. 종종 설교단이 교실이 되고, 교리를 전파하는 곳이 됩니다. 심지어 무대가 됩니다. 그 무대에서 모든 종류의 퍼포먼스가 열립니다. 어떤 설교단은 모든 사람들이 능변을 보여주려고 하는 토크쇼를 개최하는 곳이 됩니다. 오늘날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런 것들을 따라 추구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적감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아오기 위해 우리는 음식이 아닌 모든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음식이 아닌 것을 먹는다면 여러분은 손해가 나는 것을 할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음식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주 위험한 단계라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조차도 걱정스럽고, 두려운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유기농 식품이라는 용어를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은 많은 식품들을 더 이상 먹기 어렵기 때문에 유기농 식품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 식품들은 우리의 생명을 위협할 것입니다. 그 위험한 식품이 육체의 몸을 곤경에 빠지게 할 때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만 왜 영적인 삶에 위협할 때 여러분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까? 우리 안으로 음식이 너무 많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 생활은 훨씬 더 악화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을 얻지 않는다면 만족하지 못하고 충만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타협하는 이유와 우리가 도망치는 이유는 우리가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음식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짜 음식을 줄 때 우리는 그 음식을 받아먹습니다. 아모스 8:11절은 아주 유사합니다. “......그것은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며 오직 {}의 말씀들을 듣는 것에 대한 기갈이니라.” 하나님의 마음은 충만하고 만족하는 그분의 자녀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부르고, 풍성하게 살 때에만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이 사역을 하는지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이 앞뒤로 뛰어 다녔는지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잘 먹고 건강하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근에서 살고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만족하시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슬픈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사사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이것이 슬픈 일입니다. 적은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이러 갈 때 우리는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느낌을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감정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극과 흥분을 추구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지식으로 만족하기를 추구합니다. 특별히 젊은 사람들과 학력이 높은 사람들은 지식을 추구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지식 또한 유혹의 한 종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영적인 음식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혼의 만족을 위한 것뿐이라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여전히 끝에서 굶주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 있는 기근과 타협을 하고, 일탈을 하고, 달아나는 주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영 안에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은 여러분에게 만족함을 줄 수 있습니다. 교회는 벧엘과 같아야 합니다. 교회는 풍성한 음식이 공급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사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널리 열렸을 때, 진리의 빛이 비춰졌을 때 하나님의 자녀들이 얼마나 만족했었는지! 할렐루야!

 

우리가 젊었을 때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에 풍성하게 공급하셨다는 것을 진실로 느꼈습니다. 다윗은 우리 주의 집으로 가자고 사람들이 말할 때 기뻤었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연()모임에서 빵 굽고, 음식을 만드는 모임을 자주 갖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풍성과 임재로 정말 만족함을 얻었습니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만족입니다. 우리가 헤어질 때 형제자매들은 걸어가고, 차를 타고 가는 만큼 찬양을 불렀습니다. 심지어 집에 돌아온 후에도,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그 만족감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날의 상태를 볼 때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태로 살고 있을까요? 우리 하나님은 풍성의 하나님이시오, 그분은 기꺼이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풍성으로 돌아가는 나오미와 굿이 되십시오. 우리는 내면에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 돌아가든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 듣든 하나님의 축복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모임에서 만족을 얻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 만족함을 더 자주 얻습니다. 이 만족은 땅의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만족으로만 살 때 우리는 세상의 유행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풍성으로 살 때에만 우리의 삶이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달아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룻기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 짧은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상기시키십니다. 나는 여러분이 기도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한 번 벧엘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집에 풍성한 음식을 공급하시는 곳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는 충만하고, 만족하고, 우리 영 안에서 강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쁨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증거의 시작일 뿐입니다. 주님, 당신의 말씀을 축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