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들판에도 머물지 말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현재 위치와 그와 관련된 것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으며, 아들이 보좌에 오르고 많은 공동 상속자들이 그와 함께 보좌에 오를 날을 기다리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남아 있기를 원하거나 심지어 남아 있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가(즉, 이집트로 돌아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가)?
우주의 하나님,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분은 세상이 제공하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제공하고 계시기 때문에 비교할 수 없다(히브리서 2:3-5).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왜 어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관한 주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산으로 피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하고자 하겠는가?
답이 있는데, 그것은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오늘날 세계의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롯과 그의 가족과 매우 흡사하다.
그들은 세상의 것들, 평범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산과 관련된 그들의 영적인 감각은 창세기 19:17에 있는 주님의 명령과 경고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마태복음 13:33의 누룩은 수세기에 걸쳐(거의 20세기)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라오디게아 그리스도인의 거의 완전히 누룩이 들어간 상태를 만들어냈다(요한계시록 3:14-21). 사탄은 교회가 일어나면서 이런 누룩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당에 가는 것,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 어떤 형태로든 경건해지는 것 등을 막지 않는다. 심지어 교파를 만들어내고 그곳에서 생활하게 하고, 교리를 만들어 그 교리의 어떤 것을 신앙하게 하는 것을 지원한다. 심지어 교회당 안으로 미신적인 것, 관습적인 것을 형태만 바꾸거나 대상물을 바꾸어 들여오는 것을 허용하곤 한다. 이것이 누룩이다.
그리고 이런 누룩은 단지 자유주의 집단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 전역에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근본적으로 교회 전체에 걸쳐 스며든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용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보는 방식의 의미로 사용되며 반드시 진정한 성경적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누룩의 작용이 자유주의 교회와 근본주의 교회 모두에서 어떻게 이러한 성격의 상태를 가져왔는가?
이는 자유주의 집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와 동일한 성격의 발효 과정이 기본 교회 전반에 걸쳐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앞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사탄이 수세기에 걸쳐 누룩의 작용을 통해 공격의 중심을 어디에 두었는지, 그 지점부터 오늘날 이 점에 있어서 교회에 문제가 어떻게 존재하는지까지 이해해야 한다.
마태복음에서 누룩의 작용에 대한 문맥적 언급을 주목하라(마태복음 13:33). 이 구절의 문맥은 ‘왕국의 비밀’, ‘왕국의 말씀’과 관련이 있다(마태복음 13:11, 19-23, 51, 52). 그리고 더 큰 맥락에서 이 메시지는 성경의 중심 메시지로 간주된다.
(누룩이 공격의 중심이 된 왕국의 말씀은 그것이 파멸된 인간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이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성경의 중심 메시지로 간주된다.
누룩은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공격의 중심으로 삼았다. 창세기 1:26-28] 이것은 계속적인 관점에서 타락 이후의 인간 구원의 목적과 관련이 있다(에베소서 1:2; 2:8-10).
(왕국의 말씀은 창세기 1장의 기본 예표에서 첫째 날 사건으로 예표된 일에 이어 둘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사건으로 예표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 이후 5일 동안의 사건을 통해 본 것은 사람이 전에 구원을 받았으니[첫째 날 사건으로 예표됨], 어느 날 태초에 창조의 목적을 깨닫게 하려는 것인데, 그 일로 예표된 것에서 볼 수 있다. 일곱째 날은 하나님의 백성을 기다리는 안식일이다[히브리서 4:1-9].
그리고 나머지 성경 전체는 단지 창세기의 시작 부분 뼈대에 힘줄과 살과 피부를 붙이는 것이다[창세기 1:1-2:3]).
사탄은 이 메시지를 파괴하는 데 공격의 초점을 맞췄다. 이 메시지는 모든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 자유주의 집단과 마찬가지로 기본 집단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메시지는 이 땅의 교회에서는 전혀 가르쳐지고 있지 않는다.
확실히 근본주의 교회들과 일부 자유주의 교회들은 은혜에 의한 구원의 메시지를 강조하고 가르친다.
교회는 이 메시지를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왕국의 말씀과 관련하여 처리를 받기 전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야 한다(요한복음 5:24; 에베소서 2:1, 5).
즉, 사람은 창세기 1장의 둘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일을 체험하고 통과하기 전에 첫째 날 사건으로 예시된 체험을 통과해야 한다. 창세기 2장은 일곱째 날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문제는 이 땅의 교회들이 매주 창세기 1장 첫째 날에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 본 은혜에 의한 구원의 메시지를 집중한다는 것이다.
갈보리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기초로 한 사람의 영원한 구원은 일차적이고 현재적인 주제이자 미래의 목표로 만들어졌으며, 구원받은 사람은 궁극적으로 왕국에서 영원을 보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나 그 이후의 영원한 시대를 보내게 될 것이다.
특히 근본주의 교회에서 전달되는 메시지는 언제나 은혜에 의한 구원으로 시작하고 끝난다. 성경을 이러한 방식과 예표로 선포되고, 이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은혜에 의한 구원을 다루는 데서 발생하는 주요 문제는 수많은 성경(은혜에 의한 구원 이상의 문제를 다루고 창세기 1장의 둘째 날부터 여섯 날까지의 사건으로 예시됨)이 은혜에 의한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되는 방식을 통해 그들은 그들이 전혀 속하지 않는 영역으로 옮겨진다.
사람은 매주 이런 종류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할 수 없다. 하나는 다른 하나와 동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을 다루는 것은 종종 다루고 있는 바로 그 메시지, 즉 영원한 구원 자체에 관해 왜곡된 메시지요, 그 결과로 사람들은 심지어 은혜에 의한 구원을 올바른 성경적 관점에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성경은 사람이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하든 관계없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한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시작은 창세기의 시작 부분(창세기 1:2b-5)에 있는 회복 기사의 첫째 날 하나님의 활동이다.
그리고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한 구원은 단지 시작일 뿐 목표가 아니다.
성경의 목표는 다음 5일 동안(창세기 1:6-31) 하나님의 회복과 창조 활동을 통해 진행된 후에만 창세기 2:1-3에서 볼 수 있다.
은혜에 의한 구원(첫째 날의 사건으로 예표됨)은 사람을 왕국에서 영원히 보내는 것이 아닌 목표(둘째 날에 시작되는 사건으로 예표됨)를 완성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한다.
오히려, 사람의 구원의 목표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통치하시는 1,000년 동안 그분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다(창세기 2:1-3).
(앞서 언급한 점에서 실수가 발생한 위치와 이유를 기록해 두라. 무엇보다도 예표, 특히 창세기를 시작하는 구절의 초기 예표가 무시되었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했다. 성경의 가르침 방식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은혜에 의한 구원을 목표를 추구하는 개인, 또는 은혜에 의한 구원만을 계속 말하는 개인이 창세기 34절의 시작 부분에 제시된 원래 예표에 비추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주목하라.
그 사람은 결코 [창세기 1:2b-5] 유형의 첫째 날을 넘어서지 않으며, 이전에 본 것처럼 종종 둘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사건이 예시하는 일을 취하여 첫째 날의 사건과 잘못 연관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런 다음, 구원받은 사람의 미래의 영원한 집으로 여겨지는 ‘하늘’은 안식일 이후, 즉 그리스도의 통치 1,000년 이후에 사람에 대해 성경이 계시하는 것과 함께 여섯째 날 이후의 안식일을 대체했다.
원본 예표를 따르거나 은혜의 구원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인자의 날의 끝, 창세기 첫 장에 예표된 6일의 끝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목적지는 왕국이 아니다.
오히려 그 날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이 땅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권세를 행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요한계시록 2:26, 27; 3:21].
위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아버지 우편에 앉아 있으며, 아들과 함께 그분의 능력이 임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아들은 언젠가 이 능력을 행사하실 것이다[시편 2:1-12; 110: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올 미래가 아들과 함께 왕위를 행사하는 것과는 별개의 방식으로 어떻게 생각될 수 있겠는가? 그건 불가능하다!.
그러면 천년왕국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은 새 땅의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권세를 행사하게 될 것이며, 이 통치는 필연적으로 범위에 있어서 보편적일 것이다(요한계시록 22:1-21]).
왕국의 말씀은 자유주의 그리스도인과 근본주의 그리스도인 모두가 공통 기반을 찾는 유일한 곳이다. 두 부류 모두 왕국의 말씀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며, 그들에게 제시될 때 그 말씀과 아무 관련도 없을 것 같다.
사실, 후자 그룹(근본 그리스도인)은 메시지가 제시될 때 일반적으로 전자보다 더 적대적이어서 다소 이상한 시각에 놓이게 된다. 근본주의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들보다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더 많이 없애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사역 기간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함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행동에 주목하라.
이 두 유대교 교파는 당시 이스라엘의 지배적인 교파였으며, 바리새인들은 가장 큰 교파였고 그 수만큼 사람들의 신앙 생활을 통제했다.
바리새인들은 근본 율법주의자들이었으며, 사두개인들은 문제를 좀 더 자유로운 관점에서 보았다. 사두개인들은 천사와 부활을 믿지 않은 반면, 바리새인들은 둘 다 믿었다[마태복음 22:23; 사도행전 23:8].
두 그룹 모두 그리스도를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며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반대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신앙 생활을 통제하는 바리새인들은 제안된 왕국을 민족 차원으로 거부하고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외치며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한 데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교도 이방인 통치자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다[마태. 12:1-50; 16:1-28; 요한복음 19:6-15].
마태복음 22장 전체 내용을 참고하라. 특히 마태복음 23장은 이스라엘 족속이 황폐하게 되면서 끝난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이 정죄하는 말은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함께] 오직 바리새인들에게만 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유주의자가 아닌 당시의 근본적인 율법주의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신앙 생활을 통제하는 이 근본적인 종파가 제안된 왕국을 국가적으로 거부하는 데 직접적인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동일한 제안된 왕국과 관련하여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문제가 어디서 어떻게 끝날 것인지 스스로 비교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은 창세기 19:17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의 명령과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방식으로 반응하는 이유에 대해 답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이 땅 전역에 걸쳐 교회의 좌석을 채우고 있는 그리스도인 대다수는 이 명령이나 이 경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이 영적인 가치의 방식으로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그들이 이해하는 것은 불못이 아닌 천국에서의 영원과 함께 은혜에 의한 구원에 중심을 둔 물질뿐이다.
그리고 문제의 진실이 제시되었을 때, 그들이 계속해서 들었던 것 때문에 그들은 지금 듣고 있는 성경의 참된 메시지, 즉 왕국의 말씀이 이단이라고 믿게 되었다 .
이것은 거의 2000년에 걸친 누룩의 작용으로 교파와 종파가 가져온 퇴폐적인 상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 며칠 내에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에 따르면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할 것이다.
누룩은 ‘전체가 부풀어 오르기까지’ 계속 작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 땅의 교회들에 ‘믿음[신약에서 특별히 사용된 표현은 신약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왕국의 말씀]’은 전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누가복음 18:8 [‘믿음’은 헬라어 본문에서 명사형이고 질문은 헬라어 본문에서 부정적인 대답을 암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습]).
그러므로 그것을 염두에 두고, 성경이 그 문제를 어떻게 요약하는지 주목하라. 이는 창세기의 처음 서른네 절에서 성경이 근본적인 관점으로 그 문제를 다루는 방법과 정확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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