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본질적이고, 생명적이고, 기본적으로 연결된 지체들이다. 각 지체는 다른 지체들과 마찬가지로 소중하다. 비록 열매를 맺지 못할지라도 모든 성도들은 수행할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 사과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잎도, 줄기도, 가지도, 뿌리도 없다면 그 사과나무는 사과나무라고 불릴 뿐 사과나무가 아니다. 단지 죽은 사과나무 정도로 불릴 뿐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그렇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찮아보여도 서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사과나무의 각 지체는 광합성을 해서 영양분을 만드는 일을 하는 잎의 역할, 지지하고 물과 영양분을 전달하는 가지와 줄기의 역할, 지지하면서 물과 영양분을 흡수하고 뿌리의 역할을 한다. 이렇게 각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사과나무는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 큰 줄기에서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 하지만 열매를 맺도록 물과 영양분을 전달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할당된 역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에게 할당된 역할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보시는 각 그리스도인 모두 하나님의 눈에 소중하다. 경우가 이러함으로 각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섬기는 일을 수행함으로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인정하고 또 소중하게 사랑해야 한다(엡 4:12).
한 성령으로 우리는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 여기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도 예외가 없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으로 적셔졌다. 이런 사실로 몸은 한 지체가 아니고 많은 지체를 갖는다. 발이 ‘내가 손이 아니기 때문에 몸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면 그 발이 몸이 아닌가? 발은 여전히 몸에 있다. 다른 지체들도 마찬가지다. 귀도, 눈도, 손도 입도 여전히 여러분 몸에 붙어 있다. 온 몸이 눈이라고 한다면 어디가 사물을 보는 역할을 하는가? 모든 몸이 듣는 역할을 한다면 먹는 역할은 어디서 하는가?
하나님은 지체들을 세우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렇게 세우신 것을 기뻐하신다. 모두가 한 지체였다면 몸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에게 많은 지체들이 있다. 그러나 한 몸이다. 모든 지체를 가진 찬송이를 우리는 찬송이라고 부른다. 눈이 손에게 ‘나는 너의 필요가 아니야.’, 머리가 발에게 ‘나는 너의 필요가 아니야.’라고 말할 수 없다. 찬송이가 경호형제에게 ‘저는 이 교회의 지체가 아니예요.’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약해 보이는 몸의 그 지체들이 필요하다. 새끼손가락이 없으면 다른 부분이 새끼손가락의 기능을 할 수 없다. 어딘가 어색하고 그 기능의 문제가 생기고 전체적인 몸의 기능을 잘 할 수 없다. 우리가 덜 존경 받는다고 생각하는 몸의 지체를 더 소중하게 여겨야한다. 우리의 볼품없는 부분은 더 큰 겸손함이 있지만 드러난 부분은 그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몸을 구성하셨다. 좀 부족해 보이는 지체도 몸 안에 두셨다. 그렇지만 몸의 분립은 없어야 한다. 분립이 일어나면 더 이상 찬송이가 아니고,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다. 지체들이 같은 돌봄을 받아야 한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들이 고통을 받는다. 한 지체가 기쁨이 있으면 모든 지체들도 기쁨이 있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분의 지체들이다(고전 12:13-27, 갈 3:28, 엡 2:16, 골 3:11).
여기에 하나님은 몇 명의 사람들을 세우셨다. 이들은 그분의 프로그램을 전진시키기 위해 세우신 자들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들이 영적 성숙을 이루게 해야 한다. 이들의 교회에서의 목표는 성도들의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고, 완전한 사람에 이르게 하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해야 한다(엡 4: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