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박수를 치면 창조가 완료될 수 있었다. 하늘과 땅은 한 번의 눈짓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을까? 처음부터 끝을 이미 보셨는데 왜 7일 동안 나누어야 할까? 이 질문은 숙고해 볼 가치가 있다.
고대 유대인의 지혜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개인이 온 세상만큼 부유하다는 것이다. 미슈나(산헤드린 4:5)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는 본질적으로 『한 생명을 구하는 사람은 온 세상을 구한다』라고 말한다. 사실, 이것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쉰들러의 반지에 새겨진 비문이다. 한 생명은 한 세상과 같다는 의미이다. 둘은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으며, 같은 복잡성을 공유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수학적으로는 그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다! 다시 한번, 유대인의 생각에 따르면, 사람의 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온 세상이다.
이제 우리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며, 의로움에 대한 우리의 교육에 유익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창세기 1장이 어떻게 의로움에 대한 우리의 교육에 유익할까? 글쎄, 나는 위에서 설명한 원리가 열쇠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 과정을 우리 자신과 연결해야 한다. 마치 세상이 7일 동안 성숙해진 것처럼, 사람의 혼도 7단계의 과정을 거쳐 주님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물이 되는 과정이다. 혼돈과 어둠의 상태에서 일어나 혼은 결국 하나님의 면전에서 안식하는 완전히 발달된 창조물로 성숙한다. 이것이 창세기 1장의 기본 메시지이므로, 그것을 따라가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겠다.
처음에 사람의 혼은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다. 공허함이 존재하고, 엄청난 어둠이 깊은 곳의 표면을 가린다. 혼은 이 땅의 원시 바다처럼 불안하다. 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하나님의 영이 물 표면 위에 떠다닌다. 『떠다니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토라에서 단 한 번만 나온다... 『독수리가 둥지를 뒤흔들고 새끼 위에 맴돌며 날개를 펴서 새끼를 품고 날개 위에 싣는 것 같으니라.』(신명기 32:11) 이 연결은 놓칠 수 없다. 하나님의 영은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품는 것처럼 세상 위에 떠다닌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의 혼 가까이에 머물며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돌보는 것처럼 그 위에 떠다닌다.
갑자기 하나님께서 공허함 속으로 말씀하신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빛이 있었다! 이 순간은 계시의 초기 폭발, 사람이 구세주께 마음을 여는 그 핵심적이고 차원을 넘나드는 순간을 묘사한다. 이 세상에 와서 빛을 주는 참된 빛이다. 그리고 이 빛은 그에게 새로운 분별력을 불어넣는다. 그의 혼은 이제 빛과 어둠, 옳고 그름을 구별한다. 그는 각 영역에 이름을 지정하면서 차이점을 분명히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빛』이고 저것은 『어둠』이다. 그는 이제 자신 외부의 무언가를 알고 있다. 갑자기 그의 삶에 객관적인 진실이 있다. 사물은 더 이상 주관적이지 않다.
2일 차가 온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래의 물과 위의 물을 분리한다. 우리는 이 단계를 갈망이나 갈망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물에 대한 갈증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아래의 물이 해소할 수 없는 일종의 갈증이다. 그에게 물리적으로 이용 가능한 것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2일 차는 하나님이 『좋다』고 말씀하지 않는 유일한 날이다. 왜 그렇지 않을까? 글쎄, 월요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왜 그렇지 않을까? 이론이 있다. 하나님은 이 분리를 좋다고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위의 물에 목마르기를 원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인간이 전혀 목마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은 모든 갈증을 해소하고자 하신다. 흥미로운 점은 요한계시록 21:1에서 『그러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 왜냐하면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읽는다. 마치 이야기의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물을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셔서 아래에 바다가 더 이상 없게 하신 것 같다. 그러한 갈망과 갈망을 불러일으킨 분리만은 더 이상 다가올 세상에서는 요인이 되지 않는다.
3일째에 물이 모이고 마른 땅이 드러난다. 히브리어로 모인 물을 미크바mikvah라고 한다(창세기 1:10). 미크바mikvah란 무엇일까? 침례 탱크다! 사람은 미크바mikvah에 잠긴다. 그리고 침례를 행하는 행위에서 물에서 나오는 것이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3일째 되는 날 우리는 미크바mikvah에서 마른 땅이 솟아오르고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되는 것을 본다. 생명이 생명을 뿌리고 더 많은 생명을 뿌리는 것이다! 풀, 허브, 과일 나무가 낮의 땅에서 돋아나기 시작한다. 이것은 새로운 성도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야기의 이 지점에서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빛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알게 되었다. 그는 위에 있는 것에 대한 갈증을 키웠다. 3단계에서 그는 침례를 받고 거듭나 새 생명을 낳게 된다.
여기 창세기 1장 과정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나누고, 나누고, 나누셨다. 그분은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그분은 아래의 물과 위의 물을 나누셨다. 그분은 바다와 육지를 나누셨다. 이러한 구분은 질서를 가져왔다. 질서는 다음에 올 일의 전제 조건이다. 앞으로 하나님은 채우실 것이다.
4일째에 그는 1일째에 창조한 것을 채운다. 그분은 하늘을 별로 채우고, 해와 달을 창조한다. 그분은 이 천체들을 불러 낮과 밤을 다스리게 하신다. 그 전에는 해가 없었다. 빛은 있었지만 해는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글쎄, 4일째 이전에는 빛이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직접 왔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4일째에 해가 창조되었을 때, 빛의 물리적 근원이 제자리에 놓였다. 새로운 성도의 맥락에서 이것을 생각해 보라. 메시아의 빛은 먼저 영적으로 온 다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님은 빛을 바라볼 수 있는 물리적 그릇을 제공하기 시작한다. 목사, 교사, 친구다. 하나님은 이 몸을 불러 이 사람의 삶에서 빛과 어둠을 감독하게 하신다. 새로운 성도는 자신을 알아가기 위해 이 몸을 바라볼 수 있는데, 마치 이 땅이 태양, 달, 별을 바라보며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고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측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새로운 성도는 자신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확실히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5일째에 하나님은 2일째에 창조하신 것을 채우신다. 그분은 물을 풍부한 생명으로 채우시고, 하늘이라는 광활한 공간을 새들로 채우신다. 하나님은 새들을 축복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개별 성도와 비교한다. 그는 이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축복을 받고 더 많은 생명으로 채워지고 있다. 앞서 우리는 표면적인 삶을 보았다. 풀과 허브, 과일 나무 등이다. 하지만 여기서 5일째에 우리는 엄청난 생명의 확장을 본다. 생명은 새로운 차원, 깊이와 높이로 뻗어 나간다. 이와 함께 처음으로 곱해지는 것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새로운 목적이 있다. (새는 하늘에 새로운 목적을 주고, 바다 생물은 바다에 새로운 목적을 준다.) 세상은 풍요로움, 축복, 목적을 경험하고 있다. 이 단계에서 혼도 마찬가지다.
6일째에 하나님은 3일째에 창조하신 것을 채우신다. 그는 풀과 허브를 소화할 수 있는 동물로 마른 땅을 생기 있게 만드신다. 이제 우리는 물, 땅, 공기의 세 가지 수준에서 생명이 번성하는 것을 본다. 마찬가지로 세 가지 수준(몸, 영혼, 영)에서 성숙한 성도는 번성한다. 이 과정을 시작한 이래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태양과 달은 그들 앞에 일어난 일에 경탄한다. 키가 크고, 목적이 있고, 능력이 있고, 잠재력이 가득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지닌 사람이 되었다!
7일째가 밝아온다. 경탄한 성도는 주변을 둘러보고 일어난 모든 일에 감탄한다. 그는 하나님 말씀의 빛을 경험했다. 그는 경계를 배웠다. 그는 충만함을 찾았다. 그는 구별하고 표현한다. 그는 질서를 알고 있다. 그의 혼은 생명으로 가득하다. 그는 통치 기구에 둘러싸여 있다. 그는 그를 기다리는 사역이 있다. 그는 앞으로 있을 어떤 모험이든 기대한다. 그의 혼은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는 세상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우리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는다. 우리는 창세기가 요셉이나 야곱, 아브라함, 노아와 같은 신앙의 위대한 영웅들에 대해서만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보라! 창세기는 여러분으로 시작된다! 1장은 여러분의 이야기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의 간증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혼에 생명을 불어넣어 여러분을 새로운 창조물로 만드신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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