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카메라는 열린 평원을 가로질러 인류는 『자, 벽돌을 만들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자, 하늘에 성과 탑을 쌓자... 우리 이름을 날리자...』 그러자 하나님은 천사 군대에게 『자, 내려가서 그들의 언어를 혼란스럽게 하자...』라고 말씀하신다.
바벨이 인류를 불러 모아 올라가자고 말할 때, 하나님은 군대를 불러 모아 내려가자고 말씀하신다! 마치 두 진영이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전투 장면과 같다. 다만 이 경우 전장은 수직이다. 하늘과 땅의 대결이다. 땅은 하늘을 향해 전진하며 새로운 영토를 차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천사 군대와 함께 반격을 조직한다. 그분의 군대는 도시를 공격하고 탑을 침투하여 통신 빈도를 혼란스럽게 한다. 사람들은 흩어진다. 패배는 신속하다!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은 승리하여 하늘로 돌아간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시편 89편이 읊어진다.
주님, 하늘이 당신의 기이한 일을 찬양하게 하소서.
성도들의 회중에서 당신의 신실하심을!
하늘에서 누가 주님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존재들 가운데 누가 주님과 같으리요.
거룩한 자들의 회의에서 크게 두려워할 하나님이시요
주변에 있는 모든 자보다 두려우신 분이시니이다.
만군의 주 하나님,
주님과 같이 강하신 분이 누구이신가,
주님, 당신의 신실하심이 사방에 있나이다.
하늘은 당신의 것이요 땅도 당신의 것이니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당신이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나는 인류가 창세기 11장에서 영리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고 말해야겠다. 그들은 아담을 효과적으로 재창조할 계획을 고안했다. 모든 인류가 하나의 목표, 하나의 통치자, 하나의 언어 아래 하나의 구조에 집중되어 있으면 이론적으로 인류는 아담이 가졌던 것만큼의 권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을 것이다. 불행히도 그들의 목표는 『아담이 한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연합된 에너지로 신을 섬기자.』 그들의 첫 번째 생각은 대신 『우리 스스로의 이름을 떨치자』였다.
이 구절을 통해 독자들은 우리가 세계 역사의 문턱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류는 평야에 모여서 자신의 힘과 독창성으로 필요한 재료를 제조하고자 했다. 그들은 공동체의 위대한 힘을 인식하게 되었다. 모두가 힘을 합쳐 함께 일한다면 인간은 자연을 극복하고 지배할 수 있다. 그들은 공동체의 힘과 개인에 대한 공동체의 우월성을 영원히 기념하는 구조물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위험이 있다. 개인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힘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공동체는 그렇지 않다. 공동체는 실제로 강력하기 때문에 개인이 공동체를 통해서만 가치를 갖는 것처럼 자신을 가장 높은 목표로 간주하게 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은 집단에 의해 무효화된다.
공동체가 선언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확립하기 위해 힘을 합치고 싶다. 개인이 공동체의 종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신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지 않는다면 공동체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제시된다면 인류의 도덕적 미래 전체가 상실된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의 힘을 발견하고 처분할 수 있는 인공적 수단을 자랑스러워하게 된다. 헛된 목표의 우상이 만들어지고, 축복을 가져다주지 않는 목표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개인은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하며 공동체는 개인에 대한 충성을 포기한다. 물론 개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에 울지만 공동체가 영광의 건물을 세울 때 인간의 삶에 대한 통행료는 중요하지 않다. 공동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명예, 명성, 영광의 건물을 짓는 데 도움이 되는 한, 우리가 파괴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불태우자.』 수백만 명이 죽을 수도 있지만 공동체는 쉽게 위로를 받고 영광의 건물에 새로운 층을 추가한다. 따라서 공동체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공동체는 더 이상 개인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개별 구성원은 인위적인 수단을 통해 강요받거나 유혹을 받아 전체를 위해 복종하고 희생한다.
전통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니므롯의 지도 하에 수행되었다고 한다. [모세오경은 창세기 10:8-10에서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다. 니므롯은 이 땅 위에서 처음으로 강력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왕국의 시작은 바벨이었다... 시날 땅에서」] 실제로 니므롯과 같은 강력한 사람만이 사람들을 흔들어 그런 희생을 하게 할 수 있다. 그가 자신의 목표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을 모르고,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대중의 영광과 자신의 영광을 동일시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그도 성공할 수 없다.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는 금과 부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재킷 옷깃에 달린 리본 조각으로 대중을 매료시키고 그들의 헌신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다.
창세기 11장의 사건은 영광에 대한 욕망이 「탑」을 짓고 다른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소비하게 만든 역사상 유일한 사례가 아니다. 이 사건은 세계사에서 반복되는 현상이다. 역사는 대부분 니므롯과 그의 후계자들이 그들의 나라를 유혹하거나 강요하여 건설하게 한 상상의 영광의 탑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러나 단순한 인간적 가치, 자신의 집에서의 사생활 속에서의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는 역사책에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한 일은 인류의 궁극적 구원의 전령이자 대리인인 엘리야와 메시아에 의해서만 기록되었으며, 신이 증인으로 서명했다』
말하자면, 창세기 11장은 역사를 통틀어 모든 시민에게 주어진 고대 경고다. 탑은 국가와 개인에 대한 억압을 나타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국가보다 개인을 더 소중히 여시신다. 결국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어떤 국가도 구원받지 못한다. 하늘의 왕국에는 로마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 국기는 진주문 뒤에 날리지 않을 것이다. 미국 의회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소집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세계적 초강대국과 영원을 보내는 데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분은 개인인 당신과 영원을 보내고 싶어 하신다. 베드로전서 2:5는 하나님께서 개인과 함께 무엇을 이루고 있는지 알려준다. 『너희도 산 돌같이 영적인 집으로 지어지고...』 돌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각각 독특하다. 정확히 똑같은 두 개가 없다. 석공의 거장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차이점을 능숙하게 다루고 인내심 있게 일하신다. 그분은 사랑을 모르타르mortar로 사용하여 우리를 모아 위대한 일을 이루신다. 하지만 국가는 다른 것을 이루려고 한다. 돌을 벽돌로 만드는 것이다. 벽돌은 정확히 동일하게 제조된다. 서로 바꿔 쓸 수 있고, 쉽게 쌓을 수 있으며, 쉽게 교체할 수 있다. 국가가 절대적인 권력을 받으면 우리의 차이점을 줄이고 우리를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것은 당신과 당신의 아들, 당신의 손자, 그리고 그의 아들에게 그렇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가 결코 충분히 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건설은 끝없이 계속되는 듯하다. 창세기 11장에서 바벨탑은 미완성으로 끝났는데, 그 이유는 국가가 항상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끊임없이 상승하려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벽돌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가는 모르타르mortar로 무엇을 사용할까? 벽돌을 제자리에 고정시키는 점액은 무엇일까? 물질주의다. 물질주의는 벽돌을 접착하는 타르tar다. 적어도 21세기 온 세계가 그렇다.
한국인들이 정치적 올바름의 형태로 벽돌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 주목하라. 우리는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에 점점 더 제한을 받고 있다. 『허용되는 사회적 대화』로 여겨지는 것은 여러 면에서 획일적인 포장된 언어다. 관용과 다양성은 거리에서 선포되지만, 그것을 선언하는 사람들의 조건에 동의하는 경우에만 그렇다. 당신의 믿음이 대중 과학과 세속주의와 다르다면, 조용히 있는 것이 가장 좋다. 당신의 종교는 교회에 남겨두라. 투표소에 가지고 가지 마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마라. 글로 표현하지 마라. 『이 모양에 맞춰서 우리가 여기서 짓고 있는 것의 일부가 되라, 알겠는가?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여기 새 집, 새 차, 새 여행, 새 TV, 새 TV 쇼가 있다. 당신을 조용하게 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 확실히 물질주의적 집착은 우리를 끈적끈적한 상황으로 만든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맞서야 할 종류의 것다. 실제로 탑의 정신은 살아 있고 건강하다.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탑은 국가와 개인에 대한 억압을 나타낸다. 이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성경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두 구조물을 비교하고 싶다. 시날 평야에 사람들이 지은 탑과 아라라트 산에 노아가 지은 제단이다. 이 두 구조물은 모두 사람이 지었고(바나bana, בנה) 두 경우 모두 인류의 상당 부분이 관련되었다. (노아는 그 제단을 지었을 때 세계 인구의 ⅛이었다.) 그러나 몇 가지 주요 차이점이 있다. 바벨의 구조는 벽돌로 만들어졌고, 노아의 구조는 돌로 만들어졌다. 바벨의 구조는 집단적 작업이었고, 노아의 구조는 개인적 작업이었다. 바벨의 구조는 인간의 영광을 위해 바쳐졌고, 노아의 구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쳐졌다. 바벨은 바벨을 높였다. 노아는 온 땅을 높였다(말했듯이, 그의 돌 제단은 땅의 연속체로, 하늘을 향해 들어올렸다). 바벨은 교만의 영을 불러일으켰고, 노아는 겸손의 영을 불러일으켰다. 바벨의 탑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노아의 『탑』은 불과 몇 피트 높이였지만, 그의 탑은 훨씬 더 높이 올라갔다. 바벨의 탑은 단지 하늘에 닿고 싶었지만, 노아의 탑은 실제로 하늘에 닿았다! 노아는 기분 좋은 향기로서 주님께로 올라갔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바벨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내려가서 그것을 보셔야 했다.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와야 했다. 따라서 우리는 노아의 노력이 바벨보다 더 높이 올라갔다고 추론할 수 있다. 하나님께 헌신한 한 사람의 노력이 자기 자신에게 헌신한 온 나라의 노력을 능가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비교로 마무리해 보겠다. 창세기 11:6, 7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이르시되, 보라, 그들은 한 백성이요, 언어도 하나니, 이것이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이로다. 그들이 하려는 일은 이제 불가능한 것이 없으리라.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이것을 창세기의 앞부분과 비교해 보겠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사람이 선악을 아는 데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으니,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하노라.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어 보내어 그가 취해진 땅을 일구게 하셨느니라』(창세기 3:22-24).
두 구절 모두에서 하나님은 역사의 흐름에 손을 뻗고 직접 개입하신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영원히 살았을 것이고 우리가 제안한 것은 무엇이든 가능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좋은 일처럼 보일 수 있다... 영원히 사는 것?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 왜 하나님이 개입하여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으실까?
맥락이 중요하다. 창세기 3장의 맥락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이다. 창세기 11장의 맥락에서 우리가 제안한 것을 성취하는 것은 당신이 제안한 것을 아무것도 성취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나무에서 (일시적으로) 분리하여 타락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언어에서 (일시적으로) 분리하여 타락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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