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창세기 2장에서 『갈비뼈』로 번역된 단어가 실제로는 히브리어로 『옆구리』를 의미하는 쩰라tzela라는 단어라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떼어내신 옆구리가 갈비뼈 이상이라는 생각을 탐구했다. 더 나은 점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제거하신 옆구리가 여성성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제거가 일어나기 전에, 원래 아담은 자신 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의 두 가지 본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다. 이것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근원적으로 하나의 전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러한 본성은 성별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명심하라. 원래 아담이 해부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양쪽을 모두 가지고 있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편재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혼합을 반영했다는 것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하나님의 일체성의 영적이고 영원한 측면이다. 아담은 처음 창조되었을 때 그 일체성을 반영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 이야기를 알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여성성의 측면을 제거하셨고, 그것으로 하와를 창조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서 남성성의 측면을 고립시키셨다. 그 결과 아담은 순수한 남성성의 표현이 되었고, 하와는 순수한 형태의 여성성을 표현했다.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남성성과 여성성의 이중나선 DNA는 창세기 2장의 이야기에 (축약된 코드로) 나와 있다. 이것은 우리가 다음에 무엇이 올지 탐구하려면 중요한 아이디어다.
먼저 이렇게 말씀드리겠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맥락에서 예수님은 남성적 역할을 하시고 교회는 여성적 역할을 한다. 그분은 신랑이시고 우리는 신부다. 그분은 인도하시고 우리는 따른다. 그분은 시작하시고 우리는 받아들이고 반영한다. 우리는 그분의 지시와 권위에 복종한다. 그분은 아내를 소중히 여기는 남편처럼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신다. 다시 말하지만, 그분은 남성적이고 우리는 여성적이다. 하지만, 성별에 얽매이지 않은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아이디어도 중요하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관계적 역할, 즉 성별을 초월하는 역할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 남자가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한다면, 한 명은 프로젝트를 이끌고 다른 한 명은 따라갈 수 있다. 리더는 남성적 역할을 하고 다른 한 명은 여성적 역할을 하는데, 한 명은 시작하고 다른 한 명은 반영한다. 여기서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예를 들어, 내 아내는 나보다 예산을 잘 짜는 편이다. 예산에 관해서는, 내 역할은 여성적이고 그녀의 역할은 남성적이다. 나는 이 분야에서 그녀의 리더십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관계적 역할의 관점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별보다 더 큰 것을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담과 하와(남자와 여자)를 패턴으로 사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본성의 진정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진리를 나타낸다.
몇 년 전, 나는 기록된 말씀과 살아있는 말씀(모세오경과 메시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말씀이 모세오경이 되면서 남성적 측면(모세)을 통과했고, 말씀이 예수님이 되면서 여성적 측면(마리아)을 통과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호기심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남성성과 여성성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즉, 서로에 대한 그들의 역할이다. 나는 깨닫지 못했지만, 많은 연결과 통찰력을 낳을 의미의 세계가 발견되려 하고 있었다. 이제 과제는 이러한 발견을 요약하여 간결하게 공유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를 남성성과 여성성의 전형적인 모델로 간주하면서 창세기 2장에 나와 있는 세부 사항을 나열해 보겠다.
아담 | 하와 |
첫 번째 왔다 | 두 번째 왔다 |
땅이 솟아오르고 하나님의 숨결이 내려와 두 가지가 만나는 곳에서 아담이 생명을 얻었다. | 아담의 몸에서 나와, 하와는 생명을 얻었다 |
동산 밖에서 창조되어, 그 후 안으로 데려와 졌다. | 동산 안에서 창조되었다. |
이름 짓는 자 | 이름 지어진 자 |
형성된 자, 만들어진 자, 야차르yatsar | 건축된 자, 세워진 자, 바나banah |
적의 유혹에 직면함 | 적에 의해 유혹에 넘어감 |
창세기 2:22,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 오셨다. | 그녀는 그에게서 나왔다. |
타락 후: 그는 그녀를 다스리고, 그녀는 고통 속에서 자녀를 낳을 것이다. |
이것을 모세오경과 메시아와 비교해보면 패턴이 성립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셨던 것처럼, 말씀을 별도의 몸으로 나누셨다. 하나는 잉크와 양피지, 하나는 살과 피였다. 두 몸으로 나누어 하나님께서는 각각에게 다른 임무를 부여하셨다. 그분은 각자 세상에서 자신의 역할을 완수하도록 독특하게 준비시키셨다. 하지만 기억하라. 근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전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더 깊이 인식해 보겠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모세오경은 완전했는가? 그렇다!
원래 아담처럼 모세오경은 완벽했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았다.
기록된 말씀(아담) | 살아있는 말씀(하와) |
땅이 솟아오르고(시나이 산),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와 두 가지가 만나는 곳에서 모세오경이 생명을 얻었다. | 예수님은 모세오경에 의해 세워진 법을 통해 몸에서 나왔다. |
모세오경은 이스라엘 밖에서 세상에 들어왔고, 그 후 이스라엘 안으로 데려와졌다. | 예수님은 이스라엘 안에서 창조되었다. |
이름을 짓는 것은 권위의 표현이다. 예를 들어, 무슬림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했을 때, 그들은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꾸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할 권위를 얻었기 때문이다. 토라는 『이름을 짓는 자』로서 죄와 의를 선언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 예수님께서 완벽하시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까? 그분이 메시야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까? 모세오경이 그와 같이 이름을 붙이기 때문이다. |
형성된 자, 만들어진 자, 야차르yatsar 그 의미는 마치 도공이 진흙을 빚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의 이야기를 전할 때, 나는 도공이 진흙을 빚으며 어떤 특징을 강조하고 다른 부분을 다듬는 모습을 떠올린다. |
건축된 자, 세워진 자, 바나banah 예수님의 생명으로 이어지는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다.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은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었다. |
적의 유혹에 직면함 광야에서 예수님은 적에게 시험 받았다. 세 번 다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물리치셨다. |
적에 의해 유혹에 넘어감 하와의 타락으로 아담이 타락되었다. 예수님이 타락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토라도 타락에 빠지지 않았다. |
첫 번째 옴 | 두 번째 옴 |
예수님은 모세오경으로 인도되셨다. | |
살아있는 말씀은 죄 많은 육신의 모습으로 왔다. 따라서 기록된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을 지배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토라의 규칙에 순종하셨다. 그는 토라의 지시를 받고 그것을 반영했다. 타락은 예수님의 자녀 출산에 고통을 가져왔다. |
그러나 모세오경이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았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은 적절한 조력자가 필요했다.
이 조력자는 어디에 있었는가? 안에 숨겨져 있었다!
이 조력자가 살아나셨을 때, 그는 폐지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성취하기 위해 왔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오경에 대해 『나는 폐지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성취하기 위해 왔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모세오경을 대체했다고 말하는 것은 하와가 아담을 대체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그렇지 않다. 업그레이드된 하와는 아담을 없애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아담을 성취하기 위해 왔다.
이제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불러 이름을 붙이게 하신 놀라운 순간을 떠올려 보라. 그 당시 아담과 하와는 아직 갈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순간,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동안, 그들은 함께 한 몸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도 마찬가지다.
심판의 날에 휘장이 벗겨지고, 그 영광스러운 대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 기록된 말씀과 살아있는 말씀이 다시 한 몸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 앞에 인류의 퍼레이드가 펼쳐질 것이다. 당신과 나는 그분 앞에 소환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이 무엇이든, 그것이 영원토록 우리의 이름이 될 것이다! 물론, 그분의 말씀의 위상에 비하면, 우리는 그저 동물 무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아들의 숭고한 신부가 구별되려 하고 있다! 그분의 대응자가 식별되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