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루

테바스Tebahs

Hernhut 2024. 11. 16. 00:05

 

 

히브리어로 방주라는 단어는 테바(תבה)(타이바우tay-baw라고 발음). 두 개의 테바가 있다. 둘 다 무엇인지 맞혀 보라.

 

노아의 방주라고 했다면, 그렇다, 노아의 방주는 그러한 테바tebah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무엇인지 맞혀 보라.

 

언약의 방주라고 했다면, 아니다, 사실 언약의 방주는 테바tebah라고 불리지 않는다. 이 맥락에서 방주라는 단어는 다른 히브리어 단어인 아론aron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토라의 다른 테바tebah는 어디에 있을까?

 

그렇다! 요게벳이 아기 모세를 위해 만든 방주다. 그녀가 그를 나일 강에 띄우기 전에 그를 태운 방주다. 노아의 방주와 마찬가지로 요게벳의 방주도 테바tebah라고 불린다!

 

이것들은 테바tebah라는 단어가 사용된 유일한 두 이야기다. 이것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하나님은 그분이 만들고 있는 연결에 우리의 주의를 환기하고 계신다. 그러니 이 이야기들을 나란히 놓고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살펴보겠다. 시작하기 위해, 여기 출애굽기 2장에 나오는 요게벳의 방주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나중에 출애굽기 6:20에서 그녀의 이름이 요게벳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레위 집안의 어떤 남자가 가서 레위 여인을 아내로 삼았다. 그 여인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가 훌륭한 아이인 것을 보고 그를 석 달 동안 숨겼다.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그녀는 그를 위해 파피루스 갈대로 만든 [테바tebah]를 가져다가 역청과 피치로 칠했다. 그녀는 그 안에 아이를 넣고 강둑의 갈대 사이에 두었다. 그의 누이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려고 멀리 서 있었다. 파라오의 딸이 강에서 목욕을 하러 내려왔고, 그녀의 젊은 여자들은 강가를 걸었다. 그녀는 갈대 사이에 있는 [테바tebah]를 보고 하녀를 보내어 그것을 데려갔다. 그녀가 그것을 열자 그녀는 아이를 보았고, 아기가 울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불쌍히 여겨서, 이것은 히브리인들의 아이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누이가 파라오의 딸에게 말했다. 내가 가서 히브리인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서 당신을 위해 아이를 젖을 먹이게 할까요?파라오의 딸이 그녀에게 말했다. 가세요.그래서 그 소녀는 가서 아이의 어머니를 불렀다. 그리고 파라오의 딸이 그녀에게 말했다. 이 아이를 데려가서 나를 위해 젖을 먹이세요. 그러면 내가 당신의 삯을 줄게.그래서 그 여인은 아이를 데려가서 젖을 먹였다. 아이가 자라자 그녀는 그를 파라오의 딸에게 데려왔고 그는 그녀의 아들이 되었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다. 내가 그를 물에서 끌어냈기 때문이다.그녀가 말했다(출애굽기 2:1-10 ESV).

 

이미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뛰어들어 두 이야기를 비교해 보겠다. 우리는 유사점뿐만 아니라 반대점도 찾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 우리는 메노라menorah의 원리, 즉 빛을 주는 하나님의 패턴에 따라 이를 수행한다. 메노라menorah의 해당 가지는 모두 동일하고 반대다. 두 가지를 함께 모으면 균형이 이루어지고 충분한 양의 빛을 경험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테바tebah라는 단어는 이 두 이야기에서만 사용된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무언가를 하신다. 그분은 이 메노라menorah 패턴을 형성하도록 이야기들이 정렬되도록 사건을 조작하셨다. 하지만 핵심 진실은 무엇일까? 이 메노라menorah는 어떤 더 큰 그림을 비추고 있을까?

 

핵심 진실은 구원에 대한 것이고, 더 큰 그림은 우리가 그 구원을 이해하게 되면서 당신과 나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그리스도인 삶은 두 가지 단계로 전개된다. 각 테바tebah는 각 특정 단계에서 우리 삶에서 일하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두 개의 방주를 합치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자세히 설명하겠다.

 

처음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절박한 상태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사는 죄 많은 세상에 지쳐 있고, 다가오는 멸망과 심판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기꺼이 한다.

 

노아의 방주는 그리스도인 여정의 첫 번째 부분이다. 테바tebah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한다. 어쩌면 자기 보존의 이익을 위해 육체의 타락을 뒤로 하고 떠날 수도 있다. 당신은 묻는다.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당신은 주어진 지시에 응답한다. 그리고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그것은 내부적인 경험이다. 내면에서 보는 것이다. 당신은 영적으로 고양된 것을 느낀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데려가진다. 당신은 모든 것, 당신의 온 삶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주님의 눈에 은혜를 발견함에 따라 당신의 믿음 때문에 당신에게 의로움을 베푸신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당신의 초기 회심을 설명한다. 바라건대 이것이 우리가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언급한 것과 어떻게 평행을 이루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마침내 배에 올라타서 주님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구원을 경험할 때의 그림이다.

 

하지만 그 후에 당신의 기독교 여정의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이 부분은 요게벳의 방주 이야기로 묘사된다. 다시 말하지만, 테바tebah는 그리스도, 나를 이곳에서 저기로 옮겨주시는 분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신의 삶 전체를 방주에 넣지 않는다. 대신 당신의 마음에 아주 가깝고 소중한 삶의 일부를 방주에 넣는다.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하면서 방주를 내버려 둔다. 하나님께 드린다. 보시다시피, 이 방주는 의로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삶에서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내 확신이다. 나는 지금 42년 동안 기독교인이었다. 나는 구원받은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노아의 방주경험을 통해 보셨다. 하지만 요게벳의 방주는 내 삶에서 반복되는 사건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거룩함에 부응하지 못하는 특정한 측면을 생각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나는 이기심에 집착한다. 그것은 아침에 일어나서 몇 분간 기도하라는 그분의 요청이다. 그분은 내가 하루의 첫 열매를 그분께 바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내가 그 시간을 테바tebah에 투자하기를 원하고, 그러고 나서 그분이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기다려 보라고 한다. 그분은 내 아침 시간을 몇 분만 달라고 요청한다. 이건 사소한 일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재밌다. 내가 고집스럽게 대답하는 걸 보면, 내가 아기를 포기하는 줄 알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시여!내가 항의했다. 하루 중 그 순간이 내가 나 자신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에요! 이른 아침의 그 시간이 내게 아주 가깝고 소중하다는 걸 알잖아요! 그게 내 시간이잖아요! 내 시간이라면, 헤드라인을 확인하고 페이스북을 훑어보고 싶어요. 그게 뭐예요!그러자 내 혼 어딘가에서 하나님이 정중하게 속삭였다. 나를 믿어줬으면 좋겠어. 그 짧은 시간 안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봐야지. 너무나 큰 변화라서 밖에서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을 거야.하지만 나는 종종 그 친절한 속삭임을 무시하고 다른 방향으로 돌아선다. 헤드라인을 확인하고 페이스북을 훑어본 후, 또 다른 하루의 시작에 출근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일강을 따라 왕족의 장소로 흘러가는 빈 테바tebah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왕족이 안을 열심히 들여다보지만, 다시 한번 귀중한 것을 찾지 못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것은 또 다른 빈 테바tebah일 뿐이고, 거룩함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저는 요게벳으로부터 교훈을 받아야 항다.

 

요게벳은 테바tebah에 작은 것 하나를 두었다. 바로 아기 모세였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녀가 해야 했던 가장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을 신뢰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매우 귀중한 것을 버렸다. 그녀는 그에게 집착하면 그를 잃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파라오에게 잃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포기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녀는 그를 되찾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대가를 받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축복이 더해졌다. 하지만! 그 아기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다시 그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는가? 나는 그것이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하나님이 그녀가 내준 것으로 위대한 일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동안 그녀가 원했던 모든 것을 얻었다.

 

우리도 우리의 것을 내주어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거룩함을 추구하면서 이렇게 한다. 거룩함은 세상과 구별된 백성이 되는 것이다. 구별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집착할 수 있는 어떤 것, 우리 마음에 매우 가깝고 소중한 것에서 우리 자신을 분리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시면, 그분은 그것을 요구하시고, 우리는 그것을 테바tebah에 넣고 놓아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요게벳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에 비추어 볼 때, 거룩함은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거룩한 삶은 풍부하고 충만한 삶, 예상치 못한 큰 축복이 있는 삶, 우리가 원했던 모든 것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얻는 삶이다. 이것이 요게벳이 경험한 것이다. 우리의 경험도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항복을 통해서만 온다.

 

다행히도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한꺼번에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그분은 한 번에 작은 것 하나씩 요구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큰 방주로 너희를 구했으니, 이 작은 방주를 내게 맡겨라. 그것을 테바tebah에 넣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아라. 그렇게 한 것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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