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루

베테랑 아브라함

Hernhut 2024. 11. 17. 20:35



우리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 위대한 민족의 아버지 아브라함, 최초의 히브리인 아브라함,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을 존경한다.

하지만 노장 아브라함은 어떨까?

창세기 14장은 아브라함도 그 명예로운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보여준다. 창세기 14장에 기록된 것은 여러 민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주요 전투이며, 아브라함이 그 갈등에서 시대를 초월한 전쟁 영웅으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아브라함을 세이빙 프라이빗 라이언에서 톰 행크스가 연기한 캐릭터에 비유한다. 다만 여기서는 세이빙 조카 롯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

창세기 14장의 설명을 따라가면,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이 12년 동안 남부의 동시대 왕들을 통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13년째 되는 해에 요르단 왕들은 북부의 압제자들에게 반기를 들어 조공을 바치는 것을 중단했다. 이에 대응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은 연합하여 시날 왕국, 엘라살 왕국, 엘람 왕국, 그리고 『고임』 왕국을 대표하는 거대한 군대를 만들었다. 문자 그대로 여러 민족의 왕국이었다. 남쪽으로 진군하면서 이 메소포타미아의 군인 무리는 도시마다 정복하고 약탈했다. 그들은 레바임 사람들, 수스 사람들, 에밈 사람들, 그리고 산간 지방의 호리족을 무너뜨렸다. 시나이 반도 어딘가에서 그들은 돌아서 북쪽으로 진군을 시작하여 정복을 통해 고리를 그려 가능한 한 많은 지역을 발 밑에 두었다. 아말렉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이 그 다음에 칼에 희생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은 분명한 말로 그들의 판결을 내렸다. 『우리가 통치하고 너희는 복종한다.』

그러나 평야의 다섯 도시는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각 도시는 혼자 싸우면 자신의 멸망이 보장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시들은 뭉쳐서 다섯 왕이 이끄는 연합을 형성했다. 그래서 요르단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거대한 군대에 맞서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모든 것을 걸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어진 큰 전투는 사해 근처의 시딤 계곡에서 충돌했기 때문에 시딤 전투로 알려지게 되었다(어떤 사람들은 계곡이 오늘날 사해 아래에 있다고 믿기도 한다!).

이 장의 맥락에서 메소포타미아인을 추축국이라고 부른다. 몇 가지 이유에서 그렇게 부른다.
그들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이 전쟁을 시작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전쟁을 시작한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으로 진군하여 중국인을 억압했다. 독일은 폴란드로 진군하여 폴란드인을 억압했다. 여기 창세기 14장에서 메소포타미아는 남쪽으로 진군하여 요르단인을 억압하고 있다. 압제자로서 그들은 갈등이 일어나도록 강요한다.
시날 왕은 메소포타미아의 교전국 라인업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다. 시날 땅은 바벨탑의 땅이다(창세기 11:1). 전쟁 당시 탑(완공되었거나 미완공됨)은 아마도 시날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가적 랜드마크로 남았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북부 군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상징인 바벨탑의 측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돌이 벽돌로 대체되고, 언어와 사고에 다양성이 없으며, 공통된 목표는 인간과 국가를 높이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메소포타미아인을 추축국이라고 부르는 몇 가지 이유다. 반면에 나는 요르단인을 동맹국이라고 부르고 싶다. 요르단인은 어떤 의미에서든 도덕적으로 정직하지 않지만,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군이 했던 것처럼 압제에 맞서 싸우고 있다. 아브라함이 결국 그림에 등장했을 때, 그는 동맹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이제 이것은 가벼운 비유에 불과하지만, 내가 이야기에 공감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계속해 보겠다...

연합국은 시딤 계곡에서 추축국에 맞서 대열을 이루었다. 이제 이 계곡을 상상할 때, 타르 구덩이가 있는 평원을 상상해 보라. 일종의 지뢰밭으로, 한 발짝만 잘못 디뎌도 거의 확실히 죽을 것이다. 이 위대한 전투가 벌어진 지형이 바로 그곳이었다. 전투가 진행되면서, 추축국은 연합군을 압도했다. 요르단군은 흩어지고 전장에서 후퇴했다. 창세기 14:10은 그들 중 일부가 타르 구덩이에 빠져 다시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보고한다. 하지만 저항을 물리친 메소포타미아 왕들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소돔과 고모라를 공격하여 도시를 약탈하고 요르단 남녀노소를 노예로 삼았다. 메뚜기 재앙처럼, 그들은 이동하기 전에 마주치는 모든 것을 먹어치웠다. 소돔 왕(전투에서 살아남은)은 그들이 떠난 후 도시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했을 때, 그는 거리가 조용하고 도심이 고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소돔 왕은 자신이 아무것도 없는 왕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도시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전투에서 도망쳐 아브라함(당시에는 여전히 아브람)에게 달려간 이름 없는 한 남자를 살려두지 않으셨다면 이야기가 이렇게 끝났을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은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말했다. 창세기 14:14에 『아브람이 그의 형제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태어난 훈련된 사람 318명을 데리고 [롯을 사로잡은 자들을] 뒤쫓아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였고, 롯은 당시 소돔에 살았다. 그는 메소포타미아인들에게 노예로 잡힌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여기 창세기에서 롯은 히브리어로 아브라함의 형제라고 불린다(또한 나중에 창세기 14:16에서 롯은 다시 아브라함의 형제라고 불린다). 왜 그럴까? 글쎄, 그 언어는 혈통 언약을 다시 나타낼 수 있다. 아브라함과 롯은 헤어질 때 서로 혈통 언약을 맺었을 것이다. 그러한 언약은 그들을 친형제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롯의 친족 구속자로 여겼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제 잃어버린 동생을 적의 손에서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아네르, 에스골, 맘레(아모리인 형제 3명)라는 동맹군과 함께 318명의 훈련된 남자들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 군대를 추격했다. 아브라함의 『교육받은』 318명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특별히 엄선된 전사 팀을 상상한다. 아브라함의 달리고 쏘는 자, 총을 쏘고 약탈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확실히 유능한 전사임을 증명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것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아브라함이 엘 샤다이'el shad-day와 가까운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 대한 신뢰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비례했다. 어떤 면에서 아브라함의 집에서 태어난 이 318명의 교육받은 남자들은 기록상 가장 초기의 교회를 나타낸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갔다... 아브람은 하란을 떠났을 때 75세였다. 아브람은 사라와 그의 형의 아들 롯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과 하란에서 만든 혼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났다』(창세기 12:4, 5)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혼들』이라는 구절은 히브리어로 말한 그대로다. 알다시피, 하란에서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하나님, 즉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는 따라서 하란에서 『혼들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육체적으로 번식하지 않았지만(우리가 아는 대로), 영적으로 번식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몇 년을 빨리 넘기면 아브라함의 인도를 받는 이 회중을 만나게 된다. 나는 이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하란과 다른 곳에서 만든 혼들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중에 이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집안의 일원으로서 할례를 받고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피의 언약에 들어갈 것이라는 점에 유의하라(창세기 17:13). 나는 이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318명의 남자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제자 아브라함을 신뢰한다. 이것은 그들을 성도들의 무리, 말하자면 『교회』로 만든다. 그리고 이 『교회』는 무엇을 할까? 그들은 투쟁에 나설 것이다.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을 쫓아 구출할 것이다. 그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얻은 것은 무엇이든 돌려줄 것이다. (이것은 정말 교회다!) 그리고 그들은 약 240km를 의미한다고 해도 충실하게 그들의 사명을 수행할 것이다.

약 240km은 그들이 메소포타미아 군대를 추격한 거리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이 단까지 추격했다고 읽었기 때문이다. 단 지역은 북쪽, 현대 시리아 국경에 있다. 그들을 이렇게까지 추격한 후, 창세기 14:15은 『아브라함이 밤에 그의 군대를 나누어 그들과 맞서게 했고, 그와 그의 종들은 그들을 물리치고 (더 멀리!) 다마스쿠스 북쪽 호바까지 추격했다』라고 말한다. 이제 이 이야기의 이 부분을 읽을 때, 아브라함의 오른팔인 엘리에셀이 떠오를 것이다.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2인자였고, 그가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아는가? 다마스쿠스에서 왔다!(창세기 15:2) 그러니까 엘리에셀은 이 지역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지역에 익숙했다. 그리고 그들이 공격을 계획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훌륭한 지도자인 아브라함은 2인자 엘리에셀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은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강점을 알아차리는 사람이었고, 하인의 조언에 의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렇게 협력하여 그와 엘리에셀은 공격 전략을 고안했다.

아브라함은 군대를 나누어 한 부대를 이끌었고 엘리에셀은 다른 부대를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두 진영은 조정된 기습 공격으로 적에게 합류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므로, 내가 선 사이에 색칠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겠다. 내 생각에 그들은 포로와 전리품이 보관되어 있는 메소포타미아 군대의 꼬리 부분을 공격했다. 군대의 거점은 아마도 길을 따라 몇 km 떨어진 곳에 있었고, 메소포타미아로 돌아가는 행진을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군대를 추격하던 아브라함과 엘리에셀은 뒤에서 와서 뒤에서 구멍을 팠다. 그들의 공격은 밤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이 은밀하게 움직여 한 번에 한 무리의 메소포타미아인을 제거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조금씩 전진하여 마침내 다마스쿠스 북쪽 어딘가에서 롯과 그의 가족을 발견했다. 그 과정에서 아브라함의 부하들은 케돌라오멜이라는 이름의 왕을 포함한 여러 메소포타미아 왕을 죽였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글쎄, 그들이 왕들을 죽인 것을 묘사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 모세가 이집트 노예 주인을 죽인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단어와 같다. 두 경우 모두 기습 공격이었다. 아벨은 그것이 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고 이집트 노예 주인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이 아브라함의 기습 공격에 굴복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읽어보라. 『아브라함이 모든 소유물과 그의 형제 롯과 그의 소유물과 여인들과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왔다』(창세기 14:15, 16). 여기서 나는 아브라함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톰 행크스와 같다고 말하고 싶다. 그 서사시적 전쟁 드라마에서 밀러 대위(톰 행크스 분)는 제임스 프랜시스 라이언(맷 데이먼 분)이라는 일병을 찾아 적의 영토를 통과하는 군인 부대를 이끈다. 밀러는 라이언을 찾아 위험에서 구출한 다음 집으로 데려올 의무가 있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밀러와 그의 부하들은 2차 세계 대전의 한가운데에 갇혀 있는 동안 자신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이것은 창세기 14장에서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용기와 과감함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다! 아브라함은 톰 행크스의 캐릭터처럼 훈련된 부하들을 이끌고 적이 통제하는 지역을 통과하여 잃어버린 형제, 그의 조카 롯을 찾는다. 아브라함은 그를 찾아 구출하고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올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와 그의 부하들은 거대한 전쟁을 헤쳐 나가며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밀러 선장이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10명의 목숨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는 생각에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아브라함도 롯을 구하기 위해 318명의 목숨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는 생각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밀러 선장이 피에 굶주린 전쟁광이 아닌 것처럼 아브라함도 그렇지 않다! 밀러는 그저 학교 선생님으로 계속 일할 수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뿐이다. 아브라함은 그저 목동으로 계속 일할 수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뿐이다. 영화에서 밀러 선장은 『나는 내가 죽이는 모든 사람을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멀리 느낀다는 것을 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나는 또한 아브라함이 북부 이스라엘의 먼지투성이 경사지 어딘가에서 그의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아브라함의 주요 임무는 죽이는 것이 아니라 구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롯과 사람들과 소유물을 구출한 아브라함은 전쟁의 참전 용사가 되어 전쟁 영웅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에 일어난 일을 설명한다.

『아브람이 돌아온 후에... 소돔 왕이 샤베 골짜기(즉, 왕의 골짜기)에서 그를 맞으러 나왔다. 그러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고, 그는 아브람을 축복하며 말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아브람이 복을 받을지어다. 하늘과 땅의 창조주여.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릴지어다.
그는 당신의 원수들을 당신의 손에 넘겨주셨다.」
그러자 아브람은 그에게 모든 것의 십일조를 주었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게 주고 물건은 네가 가져가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말했다. 『나는 손을 들어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지극히 높으신 주 하나님께 맹세하노니, 네 소유의 것은 아무것도 받지 아니하겠노라. 실 한 가닥이나 샌들 끈 하나라도 받지 아니하겠노라. 그러면 네가 「내가 아브람을 부하게 했다」라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니라. 내 사람들이 먹은 것과 나와 함께 간 사람들, 곧 아네르와 에스골과 맘레에게 속한 몫 외에는 아무것도 받지 아니하겠노라. 그들에게도 몫을 주라.』(창세기 14:17-24 NIV)

방금 읽은 것처럼 아브라함은 승리에서 돌아와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그를 축복한 샤웨 골짜기(왕의 골짜기)로 갔다. 이것은 같은 장에 두 개의 골짜기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전에 우리는 큰 전투가 벌어진 싯딤 계곡에 있었고, 지금은 큰 축복이 일어나는 샤베 계곡에 있다. 우리는 두 계곡을 비교하고 대조해야 한다.


나란히 놓고 보면, 나는 시딤 계곡이 물리적 영역을 나타내고, 샤베 계곡은 영적 영역을 나타낸다고 말하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첫 번째 계곡에 너무 빠져서 두 번째 계곡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은 삶의 물질적 측면에 너무 지배되어 주변과 내면의 영적 현실을 알지 못한다. 세상에 얽매여 그들은 왕의 계곡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놓친다. 대신 그들은 일종의 전쟁터에서 나날을 보낸다. 가장 적합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다윈주의적 경험, 자신이 가진 것을 유지하고 조금 더 발전하려는 투쟁이다. 그것은 물질주의적 세계관이지만, 시딤 계곡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이 아는 전부다.

아브라함이 다섯 왕과 그들의 군대가 이루려고 했지만 실패한 것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적이 있는가? 실제로 아브라함(과 그의 비교적 작은 전사 집단)은 메소포타미아인을 물리쳤다. 그는 그들의 왕들을 쓰러뜨렸다. 다시 말해, 훨씬 적은 것으로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루었다. 이것은 영적인 원리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영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다른 계곡, 즉 샤베 계곡, 즉 영적 세계를 나타내는 계곡에서 발견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샤베 계곡은 자체 전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전투의 성격이 다를 뿐이다. 전투는 모두 마음 속에 있다. 이 경우 아브라함의 마음이다. 두 왕이 그를 맞이하러 왔을 때 이를 볼 수 있으며, 아브라함은 누구의 선물을 받을지 선택해야 한다. 그는 살렘 왕 멜기세덱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아니면 소돔 왕 베라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엘리 리조르킨-아이젠버그 박사는 이렇게 썼다. 『이 이야기는 히브리어로 읽으면 훨씬 더 명확해진다.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מַלְכִּי־צֶדֶֿק(말키-체덱malki-tzedek)의 음역으로, 『나의 왕은 의로움이다』라는 뜻이다. 베라bera בֶּ-רַע라는 이름은 『악과 함께』라는 뜻이다. 따라서 히브리어는 아브라함이 의와 악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베라의 유혹적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또 다른 신앙의 시험을 통과했다. 그는 제안들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고 오히려 두 가지 길 사이에서 선택했다. 그것은 물질적인 사람과 신앙적인 사람 사이에서 선택했고,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의 하나님의 축복을 선택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결정했다.』

소돔 왕은 아브라함에게 소돔의 모든 소유물, 즉 물질적 부를 제안했다. 그것은 유혹적인 제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투가 마음 속에서 승패가 결정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건이 따를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만큼 현명했기 때문에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대신 그는 살렘 왕 멜기세덱의 제안을 받기로 선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물질적 부를 받는 대신 실제로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 아브라함은 이 세상의 부를 추구하지 않았다. 즉,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축복을 추구했다. 확실히 더 나은 선택이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참된 추종자,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은 샤베 계곡에서 올바르게 선택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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