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 걷는 두 번째 방면 : “그는 없었다.” 에녹이 정상적이었다고 우리가 보고 난 후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함께 걷는 또 다른 방면을 보여준다.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걷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가 있지 아니하더라.”(창 5:24). 22절에서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걸었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그토록 그는 정.. 빵과 음료/복음칼럼 2018.06.25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에 대한 첫 번째 방면 : 아들과 딸들을 낳음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걸으므로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 이것은 영적인 이가 될 것이라는 우리의 개념과 완전히 대치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면 그가 아이들을 낳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이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면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불가능할 수 .. 빵과 음료/복음칼럼 2018.06.19
하나님과의 동행 성경이 우리에게 에녹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에녹은 육십오 년을 살며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뒤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아들딸들을 낳았더라. 에녹의 전 생애는 삼백육십오 년이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걷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 빵과 음료/복음칼럼 2018.06.15
배움에 대한 다섯 번째 날 : 책임을 짊어 짐 생명 노선의 다섯 번째 세대는 에녹이다. 에녹의 이름은 “배웠다”를 의미한다. 우리는 에녹이 책임을 대표한다고 보았다. 성경에서 숫자 5는 책임을 의미한다. 숫자 5는 하나님의 수 1에 하나님의 창조를 대표하는 사람의 수 4를 더한 것을 상징한다. 숫자 5는 사람이 하나님께 책임이 있.. 빵과 음료/복음칼럼 2018.06.15
배움에 대한 네 번째 날 : 사람이 되기 위해 내려감 이러한 체험을 한 후 우리는 네 번째 세대요, 배움의 네 번째 날 야렛에게 온다. 야렛은 “내려가는, 내려놓는”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숫자 4는 창조, 특히 창조의 머리로서 사람과 관계가 있다. 야렛이 네 번째 세대라는 것이 중요하다. 야렛으로 우리는 사람이 되는 방법에 대한 참된 공.. 빵과 음료/복음칼럼 2018.06.12
배움의 세 번째 날 : 아버지에 대한 찬양 생명 노선의 세 번째 세대는 마할랄렐이다. 마할랄렐은 “하나님은 영광이시다.”를 의미한다. 우리가 처음 이 세 세대를 함께 묶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움에 대한 첫 번째 3일은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알게 하고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에노.. 빵과 음료/복음칼럼 2018.06.12
배움의 두 번째 날 : 그리스도를 얻음 생명 노선의 두 번째 세대는 게난이다. 게난은 “얻다”를 의미한다. 배움의 두 번째 날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얻음은 우리의 약함을 아는 것을 통해 온다. 우리가 진정한 학습을 위해 우리는 첫날부터 두 번째 날까지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 빵과 음료/복음칼럼 2018.06.11
배움의 첫 번째 날 : 영의 빛 비춤 생명 노선의 첫 번째 세대는 에노스다. 에노스는 “부서지기 쉬운, 영원히 살 수 없는”을 의미한다. 또 그는 사람의 나약함을 의미한다. 사람은 자기가 약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 영의 빛 비춤과 드러냄을 통해서다. 이것이 생명 노선에서 배우는 첫 번째 날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에노.. 빵과 음료/복음칼럼 2018.06.11
학습을 위해 7일이 시작되는 일곱 세대 우리가 이 일곱 세대를 연구할 때 일곱 날로서 그들을 나타낼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벽해지는 일곱 날이 필요하셨다. 유사하게 우리는 신성하고 비밀스러운 영역을 입증하기 위해 일곱 날이 필요하다. 생명 노선의 다섯 번째 세대인 에녹은 “배웠다”를 의미한다. 생명 노선은 배.. 빵과 음료/복음칼럼 2018.06.11
신성하고, 비밀스러운 영역을 입증하기 위한 일곱 세대 우리는 아담의 임명된 아들 셋이 신성하고 비밀스러운 영역 전체를 대표함을 보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이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가 셋으로 예표 된 이 영역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는 생명 노선에 있는 일곱 단계를 체험할 필요가 있다. 일곱 단계는 에노스로 시.. 빵과 음료/복음칼럼 2018.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