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속의 기름
모든 처녀는 신랑을 맞으러 등잔을 들고 나갔고, 모든 등잔이 타고 있었습니다. 각 등잔에는 기름이 공급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는 지혜로운 사람이 여분의 기름을 가지고 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신랑을 기다리는 동안 지속될 이 세상의 어둠 속에서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충분한 빛을 공급했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이 여분의 기름 공급 없이, 이 빛의 공급 없이는 이 세상의 어둠 속에서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상태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25:3, 4의 『기름』과 『기름 없음』은 별도의 용기에 담아 운반하여 심지가 닿고 심지가 끌어올린 공급을 보충하는 데 사용되는 추가 공급을 가리킵니다. 이는 이 두 구절을 마태복음 25:7, 8과 비교하면 분명해집니다.
『그러자 그 모든 처녀[열 명 모두]가 일어나 등잔을 손질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로운 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 기름[추가 공급]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우리의 등잔이 꺼졌습니다[문자적으로 「꺼져가고 있습니다」].』
심지에 닿은 저장소의 기름 공급은 모든 등잔에서 고갈되었지만, 지혜로운 자들은 등잔을 계속 타게 하기 위해 저장소를 다시 채우기 위해 추가 기름을 운반했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이 추가 기름 공급 없이는 등잔을 계속 타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등잔은 꺼지기 시작했고,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1) 구약성경에서의 기름의 상징성과 사용
『기름』은 구약성경에서 선지자, 제사장, 왕에게 기름을 부을 때 사용되었으며, 이런 방식으로 기름을 사용하는 것과 성령이 개인에게 내려와 그가 봉헌되는 직분에서 임무를 수행할 능력을 부여하는 것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고(사무엘상 10:1, 6), 다윗은 나중에 사울 대신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사무엘상 16:13). 주님의 영은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부음을 받는 것과 관련하여 내려와 신권 정치 내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임무를 수행할 능력을 부여했습니다(이사야 61:1, 2; 누가복음 4:14-19).
구약성경에서 성령의 능력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험은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기보다는 그들에게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봉사할 능력을 개인에게 주셨지만, 불순종으로 인해 성령이 제거될 위험이 항상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울의 삶에서 그의 불순종으로 인해 일어났습니다(사무엘상 15:1-26; 16:13, 14). 이것은 다윗이 밧세바와 범한 죄뿐만 아니라 기도할 때 그녀의 남편이 죽임을 당한 후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시편 51:11).
기름으로 기름을 바르는 것과 봉사를 위해 성령을 받는 것 사이의 또 다른 연결은 사무엘이 『기름 뿔을 가지고』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 『주님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났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사무엘상 16:13, 14).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임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임무를 위해 그에게 능력을 주었고, 주님의 영은 거절당한 왕인 사울을 떠났습니다. 다윗이 아직 왕의 지위를 차지하지 않았고, 꽤 오랫동안 그러지 않을 것이었지만, 사울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는 구약성경에서 봉사를 위한 기름부음의 약간 다른 측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이 엘리야에게 선지자로서의 봉사를 위한 권능을 주었고, 그가 입었던 망토는 그의 직분과 주님의 영이 그에게 머물렀고 그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권능을 주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외형적인 가시적 표시였습니다(열왕기하 2:13, 15).
하지만 엘리야는 그의 사역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그의 사역이 끝나기 전에 엘리야는 주님께 『죽기를』 간구했습니다(열왕기상 19:4). 어떤 의미에서 엘리야는 사임을 제출했고, 주님은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땅에서 옮겨진 후, 대신 선지자로 기름부음을 받고 그의 사역을 마쳤습니다(열왕기상 19:16; 열왕기하 2:1-13).
하지만 엘리사의 경우는 약간 달랐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임한 성령의 두 몫을 요청했습니다(열왕기하 2:10-12).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이 두 몫으로 엘리사는 엘리야의 망토를 걸치고 그의 사역을 마쳤으며, 엘리야가 행했던 것보다 두 배나 많은 기적[표적]을 행했습니다.
2) 신약 시대의 경험
현재 경륜 시대에 성령을 받는 것과 관련된 조건은 과거 경륜 시대에 성령을 받는 것과 관련된 조건과 같지 않습니다. 구약 시대에 성령은 개인에게 임했지만, 오늘날에는 개인에게 임하기보다는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고 그들을 채웁니다.
성령의 거하심은 개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구원의 시점에 일어납니다(에베소서 1:13, 14; 고린도전서 3:16).
그러나 개인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충만해지라』(에베소서 5:18)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시점에서 성령의 초기 사역에 따른 별도의 성령의 사역입니다.
현재 경륜의 시대에 성령과 관련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열 처녀의 비유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열 처녀 모두 기름이 담긴 등잔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섯 처녀만이 여분의 기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소유하고 있지만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비유에서처럼 여분의 기름을 가진 사람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이 비유에서 여분의 기름 공급은 어둠의 시간 동안 빛을 공급하면서 등잔이 계속 타오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오늘날 기독교에서도 이와 같은 유사점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 곧 우리 발에 『등불』이요 우리 길에 『빛』이 되는 말씀에 깊이 거하는 것 사이에는 분리할 수 없는 연관성이 있습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동반 서신이며 여러 군데에서 서로 유사합니다. 한 가지 유사점은 에베소서 5:18-20과 골로새서 3:16, 17을 비교하면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술에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함이니라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로 서로 말하고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
모든 일에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라.』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모든 지혜로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며 시와 찬송과 영적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마음으로 주께 은혜롭게 노래하라.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말이나 행동으로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에베소서의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명령과 골로새서의 『그리스도의 말씀이 모든 지혜로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는 명령 사이의 문맥적 유사성에 주목하십시오. 각 책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로 대체되어 각 진술은 다른 단어로 표현되기는 하지만 같은 내용을 말합니다.
함께 이해되는 두 구절은 말씀과 이 말씀을 주신 성령(약 1,500년 동안 약 40명의 다른 개인을 통해 이 말씀을 불어넣음)과 관련된 명확한 성경적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자신 안에 『모든 지혜로 풍성히』 거하도록 허락한 사람입니다. 또는 그 반대는 정확히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모든 지혜로 풍성하게』 자신 안에 거하도록 허락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고, 동화했으며, 동시에 이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허락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디모데후서 3:16) 말씀으로 충만해졌으며 삼일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요한복음 1:1, 2).
성령으로 충만해진 그리스도인은 말씀으로 충만해집니다. 그는 말씀을 알고 있으며,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모든 진리로 인도하는 내주하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인도되고 지시를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 아래 있는 이 말씀은 『등불』이며 『빛』을 제공합니다. 성령의 인도 아래 있는 이 말씀은 이 세상의 어둠의 시간을 인도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다른 위치에 처하게 됩니다. 그는 말씀으로 충만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씀을 모릅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더라도, 성령은 말씀(사람이 거의 또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취하여 그 사람을 말씀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런 일은 단순히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멀어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등불』, 『빛』에서 멀어지고, 이 빛 없이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어둠 속에서 안전하게 여행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변함없이 에베소서 4:14에 묘사된 위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간계와 교활한 술책으로 온갖 교훈의 바람에 밀려다니며 요동하여 속이려고 노리고 있느니라.』
그런 그리스도인은 속임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가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그는 가짜 영성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말씀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파 전역에서 만연한 것으로, 셀 수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영적 난파를 초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독교 세계가 현재 경륜의 끝에 가까워져 있는 곳입니다. 성경이 경륜이 끝날 것이라고 정확히 말하는 방식입니다(누가복음 18:8; 디모데후서 4:1-22; 베드로후서 2:1-22; 유다서 1:1-25).
교파는 겨자나무가 전혀 자라지 않을 것으로 자란 시기에 있습니다. 『나무[성경에서 국가적 강대국을 나타냄]』 - 『공중의 새[사탄의 사자들]』가 받아들여지고 나무의 『가지』에 거처를 마련합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여자가 경륜의 초기에 『세 말의 가루』에 넣은 『누룩』이 경륜 전체에서 가장 해로운 일을 하는 시기입니다(마태복음 13:4, 19, 31-33).
(에베소서 5:18-20과 골로새서 3:16, 17에 있는 성령 충만을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본 성령 충만과 비교함으로써 가르치는 내용은 모순되는 것처럼 들리거나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모순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주제에 대한 명확한 성경적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이 현재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이 여러 가지일 수 없습니다.
침례 요한의 부모인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메시아의 선구자인 침례 요한은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누가복음 1:15, 41, 67].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모습이 보입니다[누가복음 4:1; 마태복음 12:24-32].
사도행전의 처음 열세 장에서 사람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한 사람들[사도행전 2:4],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말한 것[사도행전 4:8], 기도 후 신자들이 모인 것[사도행전 4:31], 일곱 명의 특정한 사람을 찾은 것[사도행전 6:3], 스데반이 죽을 당시[사도행전 7:55], 바울이 회심할 당시[사도행전 9:17], 바나바가 파송될 당시[사도행전 11:24], 바울이 그 후에 사역을 할 때[사도행전 13:9] 성령이 충만해졌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앞 구절들[누가가 쓴 것]과 에베소서 5:18에 있는 바울의 메시지는 개인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과 관련하여 직접적인 메시지가 나오는 신약 전체에서 유일한 곳입니다[말씀이 모든 지혜로 풍성하게 한 사람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은 동의어적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충만해지는 것』[에베소서 3:19], 『의의 열매로 충만해지는 것』[빌립보서 1:11], 『모든 지혜와 영적 이해로 그의 뜻을 아는 것으로 충만해지는 것』[골로새서 1:9],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디모데후서 1:4; 요한일서 1:4; 요한일서 1:12]과 같이 분리할 수 없이 관련된 메시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앞의 메시지는 에베소서 4:19와 분리할 수 없이 관련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5:18 [『성령으로 충만해지라』] 단순히 언급된 것 중 어느 것도 성령의 충만, 즉 구원받은 인간의 영으로의 말씀의 수용 없이는 참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과 관련된 성경의 한 구절[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발췌]은 말씀을 수용하지 않고도 즉각적인 사건으로 문제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과 관련된 성경의 다른 구절[신약성경 서신에서 발췌]은 말씀을 수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점진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완전히 다른 측면에서 제시합니다.
차이점은 두 가지 관련 영역에 있습니다.
⓵ 『충만해지다』에 대한 헬라어 본문의 다른 단어 사용.
⓶ 이러한 충만을 둘러싼 시대와 상황.
다른 헬라어는 플레토pletho[또는 핌플레미pimplemi, 다른 형태의 같은 단어, 또는 동족어[같은 의미를 지님], 플레레스pleres와 플레로오pleroo입니다. 플레토pletho와 플레레스pleres는 누가가 그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사용한 단어이고, 플레루pleroo는 바울이 에베소서 5:18이나 서신의 분리할 수 없이 관련된 다른 구절에서 사용한 단어입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 이 단어들의 의미 사이에는 실제로 차이가 없습니다. 세 단어 모두 『채우다』를 의미하며, 세 단어 모두 개인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며, 개인이 분노나 분개심과 같은 무언가로 충만해지는 것과 무생물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식초를 묻힌 스펀지와 같은 무언가로 채워지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됩니다.
다른 단어가 사용된 시간과 사용 방법에 차이가 있습니다. 플레토pletho와 플레레스pleres는 누가가 그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이스라엘에게 왕국을 제공하고 다시 제공하는 시기에 그리고 그와 관련하여 사용했습니다. 신약에서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개인과 관련하여 pletho플레토와 pleres플레레스가 사용된 마지막 사례는 사도행전 11:24과 13:9입니다. 사실, 두 단어 모두 복음서와 사도행전 밖에서는 사용되지 않으며, 요한이서 1:8에서 pleres플레레스가 사용된 경우를 제외하면, 『충만한 보상』을 받는 그리스도인과 관련하여 사용되었습니다. 반면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사용한 pleroo플레루는 이스라엘에게 왕국을 다시 제공하는 것과 별도로 그리스도인과 관련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측면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과 관련하여 pletho플레토나 pleres플레레스를 사용하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두 단어를 사용하여 볼 때 성령의 유형적 충만은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상황에 한정되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할 적절한 단어는 플레루pleroo이고, 이 문제를 보는 유일한 적절한 방법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본 그대로이며,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플레토pletho와 플레레스pleres를 사용하여 성령 충만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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