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그는 주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므로 내가 손을 뻗쳐 내 주인,
곧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은 주께서 금하시느니라, 하더라.
그렇게 다윗이 이 말들로 자기 종들을 금하여
그들이 일어나 사울을 대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사울은 굴에서 일어나 자기 길을 갔더라.”
—사무엘상 24:6, 7
지난 장에서 우리는 다윗이 아버지가 되기를 바랐던 사람에게 어떻게 학대를 받았는지 보았다. 다윗은 자신이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 이해하려고 계속 노력했다. 그는 사울의 마음을 자신에게서 돌리기 위해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그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그는 사울이 공격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쫓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목숨을 살려줌으로써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했다. 그는 머리를 땅에 숙이고 사울에게 외치며 말했다. “내 손에 악이나 반역이 없음을 보시고, 나는 당신에게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다윗은 지도자에게 충성심을 보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중에 그는 더욱 파괴적인 소식을 알게 되었다. 사울은 여전히 그를 죽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자에게 손을 들기를 거부했다. 하나님께서 군대를 잠들게 하셨고 사울을 죽일 수 있는 허락을 간청하는 동료를 주셨음에도 말이다. 다윗은 어떻게든 이 잠자는 군대가 또 다른 목적, 즉 자신의 마음을 시험하는 데 쓰인다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사울의 본보기에 따라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살인을 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영원히 의로움으로 자신의 왕좌를 세우도록 허락할지를 보고 싶어 하셨다.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진노하심에 맡기라. 이는 기록된 바, 원수 갚는 일은 내 것이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기 때문이라. —로마서 12:19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위해 복수하시는 것은 의로운 일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스스로 복수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다. 사울은 스스로 복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명예로운 사람인 다윗을 14년 동안 쫓아다니며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을 죽였다.
다윗이 잠자는 사울 위에 섰을 때 그는 중요한 시험에 직면했다. 그것은 다윗이 여전히 목동의 고귀한 마음을 가졌는지 아니면 다른 사울의 불안함이 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처음에는 의로운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때 훨씬 쉽다.
하나님은 순종으로 그의 종들을 시험하신다. 그는 종교와 사회의 기준이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 의도적으로 우리를 두신다. 그는 다른 사람들, 특히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격려하도록 허락하신다. 우리는 스스로 복수함으로써 고귀하고 다른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에 속한 지혜의 방법다. 그것은 세상적이고, 육적인 것이다.
내 위에 있는 지도자를 폭로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폭로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해칠 수도 있다는 생각과 씨름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계속 생각했다. 나는 진실을 보고할 뿐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끝날까? 다른 사람들이 그를 폭로하라고 격려했다.
하지만 오늘날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 정보를 주신 이유가 하나라는 것을 안다. 나를 시험하기 위해서다. 나는 나를 파괴하려고 했던 그 사람과 같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심판이나 자비를 허락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부패한 지도자들을 어떻게 사용하실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는 지도자들, 심지어 사악한 지도자들의 지배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묻는다.
사무엘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라. 이 젊은이를 엘리라는 부패한 제사장과 그의 두 사악한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의 권위 아래 두신 분은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그들은 매우 사악했다. 그들은 조종과 강제로 제물을 받았고, 장막 문에 모인 여자들과 음행을 저질렀다.
이런 삶을 사는 목사를 섬기고 있다면 상상해 보라. 영적인 것에 너무 무감각해서 기도하는 여자를 알아볼 수 없었고, 그녀가 술에 취했다고 비난했던 목사!, 부정행위로 낳은 자신의 아들을 여자의 남편에게 키우게 한 목사는 어떤가? 너무 육적이어서 엄청나게 과체중이었다. 너무 타협적이어서 교회에서 음행을 저지르는 지도자로 임명한 아들들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기분 나빠하며 다른 교회를 찾아다니며, 전 목사와 그의 지도자들의 사악한 생활 방식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다. 그런 부패 속에서 나는 어린 사무엘이 한 일에 대한 보고를 좋아한다. “이제 소년 사무엘은 엘리 앞에서 주를 섬겼다.”(사무엘상 3:1).
하지만 부패가 대가를 치렀다. “그 당시에는 주의 말씀이 드물었고, 널리 계시된 일이 없었다”(사무엘상 3:1). 하나님은 히브리 공동체 전체에 멀리 계신 듯했다. 하나님의 등불이 주님의 성전에서 꺼지려고 했다. 그런데 사무엘은 다른 예배 장소를 찾아다녔을까? 그는 장로들에게 가서 엘리와 그의 아들들의 사악함을 폭로했을까? 그는 엘리와 그의 아들들을 목회에서 제외하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했을까? 아니다. 그는 주를 섬겼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그곳에 두셨고, 그는 엘리나 그의 아들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없었다. 그는 그들을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그들 아래에 두었다. 그는 엘리가 하나님의 종이지 그의 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바로잡지 못한다. 그러나 자녀를 훈련하고 바로잡는 것은 아버지의 의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훈련시키라고 주신 사람들을 다루고 맞서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와 같은 수준에 있는 사람들을 형제자매처럼 격려하고 권고해야 한다. 그러나 이 장에서 나는 지난 장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대응을 다루고 있다.
사무엘은 판단하거나 바로잡으라는 압력 없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제사장을 섬겼다. 사무엘이 바로잡는 말씀을 한 것은 엘리가 사무엘에게 와서 전날 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예언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뿐이었다. 그러나 그때도 그것은 사무엘에게서 온 바로잡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말씀이었다. 더 많은 사람이 이 진리를 붙잡는다면 우리 교회는 달라질 것이다.
교회는 카페테리아가 아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교회를 매우 쉽게 떠난다. 아마도 목사가 헌금을 받는 방식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돈을 쓰는 방식 때문일 것이다. 목사의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떠난다. 목사는 접근하기 어렵거나 너무 친숙하다. 이 목록은 끝이 없다. 어려움에 직면하고 희망을 유지하는 대신 갈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곳으로 달려간다.
솔직히 말해서 예수님만이 완벽한 목사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이를 해결하는 대신 어려움에서 도망치는 것일까? 이러한 갈등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으면 대개 기분이 상한 채로 떠난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예언적 사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흠 없는 리더십이 있는 곳을 찾아 교회에서 교회로 떠난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나는 지난 14년 동안 두 개의 다른 곳에 있는 두 개의 교회에서만 회원이었다. 나는 리더십에 대해 기분 나빠할 기회가 두 번 이상 있었다. 사실, 수많은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은 제 잘못이나 미성숙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리더십에 대해 비판적이고 판단적일 기회가 있었지만, 떠나는 것은 답이 아니었다. 매우 힘든 상황에서 어느 날 주님께서 성경 구절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교회를 떠나는 방법이다.”
너는 기쁨으로 나가고 평화로 인도받을 것이다.—이사야 55:12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떠나지 않는다. 그들은 교회가 식당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골라서 선택할 수 있다! 그들은 문제가 없는 한 머물 수 있는 자유를 느낀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당신이 교회에 갈 곳을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각자를 몸에 원하는 대로 두셨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각 지체를 몸에 두셨으니”(고린도전서 12:18)라고 말한다.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 있다면 마귀는 당신을 끌어내기 위해 당신을 화나게 하려고 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심으신 자리에서 성도들을 뿌리 뽑고 싶어 한다. 그가 당신을 끌어낼 수 있다면 그는 성공한 것이다. 큰 갈등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의 계획을 망칠 것이다.
중대한 기만
나는 몇 년 동안 교회에 다녔다. 목사는 가장 뛰어난 설교자 중 한 분이었다. 내가 처음 그 교회에 다녔을 때,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성경적 가르침에 경외감을 느끼며 입을 벌리고 앉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목사를 섬기는 내 입장 때문에 그의 결점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었다. 나는 그의 사역 결정 중 일부에 의문을 제기했다. 나는 비판적이고 판단적으로 되었고, 화내기 시작했다. 그는 설교했지만 나는 영감이나 기름부음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설교는 더 이상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 친구이자 직원인 또 다른 부부도 같은 것을 분별하는 듯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교회에서 보내셨고, 그들은 자신의 사역을 시작했다. 그들은 나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그들은 내가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우리 삶에 대한 부름을 계속하도록 격려했다. 그들은 이 목사, 그의 아내, 그리고 리더십이 잘못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함께 슬프며 절망하고 갇힌 기분을 느꼈다.
그들은 진심으로 우리의 복지에 대해 걱정하는 듯했다. 하지만 우리의 토론은 우리의 불만과 불쾌감에 불을 지폈을 뿐이다. 잠언 26:20에서 보여 주듯이, “나무가 없으면 불이 꺼지고, 고자질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툼이 그친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나에게 한 말은 정확한 정보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과 나에게 불쾌감의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들이 나에게 말했다. “그래서 당신이 이곳에서 문제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었다.
나는 서로에게 “그게 다야. 나는 나쁜 상황에 처해 있어. 우리는 빠져나가야 해. 이 목사와 그의 아내는 나를 사랑해. 그들은 나를 목회할 거야. 그들의 교회 사람들은 나를 받아들일 거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역도 받아들일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교회를 떠나 이 부부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몇 달 동안만 다녔다. 나는 문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갈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영은 기쁨이 없었다. 나는 방금 떠난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얽매여 있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강요되고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성령의 흐름에 적응할 수 없었다. 이제 새로운 목사와 그의 아내와의 관계도 긴장되었다.
마침내 나는 내가 나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했을 때, 나는 다른 곳에서 더 받아들여지고 사랑받을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즉시 알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를 놀라게 하셨다. “형제, 내가 너한테 이 교회를 떠나라고 한 적이 없어. 넌 기분 나빠서 나간 거야!”
이것은 다른 목사와 그의 아내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잘못이었다. 그들은 나의 좌절을 이해했고 그들 자신의 마음속에서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을 때, 당신은 어떤 교회에도 축복이나 도움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을 때, 좋은 관계조차도 긴장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다.
기분이 상한 사람들은 상황에 반응하고 하나님의 영감을 받지 않았더라도 옳게 보이는 일을 한다. 나는 반응하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행동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을 찾았는데도 그분이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답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분은 아마도 “있는 그대로 머물러라”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
종종 우리는 압박감을 느낄 때, 우리에게 안도감을 가져다줄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숙하고, 정제하고, 강화하기 위해 이 매우 불편한 도가니에 있게 하신다!
한 달 안에 나는 원래 다니던 교회의 목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나는 비판적이고 반항적이었던 것을 회개했다. 그는 나를 은혜롭게 용서해 주었다. 우리의 관계는 강화되었고, 내 마음에 기쁨이 돌아왔다. 나는 즉시 목사님의 설교를 다시 듣기 시작했고, 그 교회에 수년간 머물렀다.
심겨진 것의 번영
성경은 시편 92:13에서 “주의 집에 심겨진 자들은 우리 하나님의 뜰에서 번영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번영하는 자들은 주님의 집에 “심겨진” 것이다. 3주마다 식물을 옮겨 심으면 어떻게 될까? 여러분 대부분은 뿌리가 줄어들고 꽃을 피우거나 번성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계속 옮겨 심으면 식물이 충격으로 죽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교회로, 사역팀에서 사역팀으로 옮겨 다니며 사역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정받지 못하고 격려받지 못하는 곳에 두시면 쉽게 기분이 상한다. 그들이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으면 기분이 상하고 떠난다. 그런 다음 리더십을 비난하며 떠난다. 그들은 자신의 성격적 결함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받는 압박을 통해 그들을 다듬고 성숙시키고자 하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식물과 나무에 대해 주신 예를 통해 배워보라. 과일나무를 땅에 심으면 폭풍우, 뜨거운 햇살, 바람을 견뎌야 한다. 어린나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제발 저를 여기서 꺼내주세요! 무더위나 폭풍이 없는 곳에 두세요!”라고 말할 것이다.
정원사가 나무의 말을 경청하면 실제로 나무에 해를 끼칠 것이다. 나무는 뿌리를 더 깊이 내리면서 뜨거운 햇살과 폭우를 견뎌낸다. 그들이 직면한 역경은 결국 큰 안정의 원천이 된다. 그들을 둘러싼 요소들의 혹독함은 그들이 다른 삶의 원천을 찾게 한다. 그들은 언젠가 가장 큰 폭풍조차도 과일을 생산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곳에 도달할 것이다.
몇 년 전 나는 농업경영학에서 과실수를 실험하는 공부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무가 겨울이 추울수록 과일이 더 달콤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영적 저항에서 너무 빨리 도망치지 않았다면 우리의 뿌리 체계는 더 강하고 깊어질 기회가 있었을 것이고, 우리의 과일은 하나님의 눈에 풍부하고 더 달콤했을 것이고 그의 백성들에게 더 맛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열매가 없어서 뿌리째 뽑힌 나무가 아니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성숙한 나무가 될 것이다(누가복음 13:6-9).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해 보내신 바로 그 것에 저항해서는 안 된다.
시편 기자 다윗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범죄와 하나님의 법, 그리고 우리의 영적 성장 사이에 강력한 연관성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시편 1편에서 이렇게 썼다.
복이 있는 사람은... 주의 율법을 기뻐하며 주야로 그 율법을 묵상하는 자다. —시편 1:1, 2
그런 다음 시편 119:165에서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더 많은 통찰력을 제공했다.
주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화가 있고 아무것도 그들을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다.
시편 1:3은 마지막으로 그러한 사람의 삶을 묘사한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을 것이요, 제철에 열매를 맺고, 잎사귀도 시들지 아니하며,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기로 선택한 성도는 기분 나빠하는 일을 피할 것이다. 그 사람은 뿌리가 깊이 파고들어 성령이 힘과 영양을 공급하는 나무와 같을 것이다. 그는 그의 영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의 우물에서 물을 끌어올릴 것이다. 이것은 그를 역경이 이제 열매의 촉매가 될 정도로 성숙시킬 것이다. 할렐루야! 이제 우리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에 대한 통찰력을 얻는다.
돌밭에 뿌려진 자들은 이와 같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서 잠시 견디다가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즉시 실족한다. —마가복음 4:16, 17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택하신 곳을 떠나면 뿌리 체계가 작아지기 시작한다. 다음에는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도록 조심했기 때문에 역경에서 벗어나기가 더 쉬울 것이다. 결국 고난이나 박해를 견뎌낼 힘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곳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당신은 영적 방랑자가 되어 곳곳을 떠돌며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학대할까 봐 의심하고 두려워한다. 진정한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마비되고 방해를 받아 이기적인 삶에서 고군분투하며 다른 사람들의 열매의 남은 것을 먹는다.
아담의 첫 아들인 가인과 아벨을 보라. 가인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 즉 포도원의 열매로 주님께 제물을 가져왔다. 많은 수고를 들여서 수확했다. 그는 땅에서 돌, 그루터기, 기타 잡초를 치워야 했다. 그는 땅을 갈고 경작해야 했다. 그는 작물을 심고, 물을 주고, 비료를 주고, 보호해야 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길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자신의 희생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상징했다.
반면 아벨은 순종의 제물, 즉 양 떼의 맏아들과 그 기름진 것을 가져왔다. 그는 가인처럼 수고하여 수확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두 형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죄를 가리기 위해 자신의 행위를 상징하는 무화과 잎으로 벌거벗은 몸을 가리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무고한 동물의 가죽으로 덮어서 받아들일 만한 희생을 보여주셨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죄를 덮는 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길을 보여주었으므로 그들은 더 이상 무지하지 않았고 그들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인은 하나님의 조언과는 별개로 하나님의 수용을 얻으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범위(아벨의 희생)에 따라 그분께 나아오는 자들을 받아들이고 “선악에 대한 지식”의 영역(가인의 종교적 행위)에 따라 시도된 것은 거부하실 것임을 보여주심으로서 응답하셨다. 그런 다음 그분은 가인에게 선을 행하면 받아들여질 것이지만 생명을 택하지 않으면 죄가 그를 지배할 것이라고 지시하셨다.
가인은 주님께 화가 났다. 그는 회개하고 옳은 일을 하여 이 상황이 자신의 성격을 강화하도록 내버려 두는 대신, 하나님께 대한 분노와 원망을 아벨에게 터뜨렸다. 그는 아벨을 살해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동생의 피를 받았으니 네가 땅을 갈 때 땅이 다시는 네게 힘을 주지 아니하리라. 너는 땅에서 도망자요 방랑자가 될 것이다. —창세기 4:11, 12
가인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 즉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 자신에게 심판으로 가져왔다. 그가 하나님의 승인을 얻으려고 했던 바로 그 매개체가 이제 자신의 손으로 저주를 받았다. 피 흘림은 이제 저주를 가져왔다. 땅은 더 이상 그에게 힘을 주지 않을 것이다. 열매는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만 맺힐 것이다.
기분을 상하게 한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끊는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마음을 흙에 비유하셨다. 가인의 밭이 척박했던 것처럼, 기분을 상하게 한 마음의 흙은 척박하고 쓴맛으로 오염되었다. 기분을 상하게 한 사람들은 여전히 기적, 언변, 강력한 설교, 치유를 그들의 삶에서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은사다. 우리는 은사가 아니라 열매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은사는 주어진다. 열매는 경작된다.
하나님께서 가인이 자신의 행동의 결과로 도망자와 방랑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유의하라. 오늘날 우리 교회에는 수많은 영적 도망자와 방랑자가 있다. 그들의 노래, 설교, 예언 등의 은사는 이전 교회의 지도부에서 받지 못하므로 그들은 떠난다. 그들은 목적 없이 달리고 범죄를 품고 그들의 은사를 받고 상처를 치유해 줄 완벽한 교회를 찾는다.
그들은 구타당하고 박해받는다고 느낀다. 그들은 마치 현대의 예레미야인 것처럼 느낀다. “그들과 하나님뿐”이고 다른 모든 사람이 그들을 잡으려고 한다. 그들은 가르침을 받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은 내가 박해 콤플렉스라고 부르는 것을 얻는다. “모두가 나를 잡으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이 단지 박해받는 성도나 하나님의 선지자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의심한다. 이것이 바로 가인에게 일어난 일이다.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보라.
나는 땅에서 도망자요 방랑자가 될 것이요,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일 것이니라. —창세기 4:14
가인이 박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모두가 그를 잡으려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기분이 상한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을 잡으려 한다고 믿는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자신의 삶에서 변화가 필요한 부분을 보는 것이 어렵다. 그들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학대를 초래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자신을 고립시키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고 모든 지혜로운 판단에 반항한다. —잠언 18:1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살도록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녀들이 서로를 돌보고 양육하는 것을 좋아하다. 그분은 우리가 투덜거리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다른 모든 사람이 우리의 행복에 책임을 지도록 만들 때 좌절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가족의 적극적인 구성원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에게서 삶을 얻기를 원하신다. 고립된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한다. 그는 아무런 조언도 받지 못하고 속기 위해 스스로를 설정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개인을 따로 불러서 그들을 준비하고 새롭게 하는 계절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를 가두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에서 교회로, 관계에서 관계로 방황하며, 자신의 세계에 고립된다.
그들은 자신과 동의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틀렸고 자신을 대적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고립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위해 만든 통제된 환경에서 안전하다고 느낀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성격적 결함에 직면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어려움에 직면하기보다는 시험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겪으면서만 얻을 수 있는 성격적 발달은 다시 공격의 순환이 시작되면서 사라진다.
범죄를 저지르면 자신의 성격적 결함을 보지 못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비난이 다른 사람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
'미끼' 카테고리의 다른 글
#7 확실한 근거 (0) | 2024.08.07 |
---|---|
#6 현실로부터 숨다 (0) | 2024.07.30 |
#4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0) | 2024.07.26 |
#3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0) | 2024.07.25 |
#2. 대규모 공격 (3) | 2024.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