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끼

#4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Hernhut 2024. 7. 26. 23:28

 

 

또한 내 아버지여, 보소서, 참으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이는 내가 왕의 긴 옷자락만 베고 왕을 죽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 손에 악함이나 범법이 없다는 것을 왕께서 보고 아시옵소서. 또 나는 왕께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나, 왕께서는 내 혼을 찾아내어 취하려 하시나이다.—사무엘상 24:11

 

지난 장에서 우리는 요셉의 형들이 그를 어떻게 파괴하려고 했는지 보았다. 우리는 그가 이 배신으로 인해 겪은 고통을 보았다. 아마도 당신도 비슷한 상황에 부닥쳐 있을 것이다. 당신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 당신이 사랑과 격려를 원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했다.

 

이 장에서 나는 형제의 배신보다 더 고통스러운 상황을 다루고 싶다. 형제로부터 거부와 악의를 체험하는 것은 한 가지 일이지만, 아버지로부터 거부와 악의를 체험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내가 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생물학적 아버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모든 지도자를 말한다. 이들은 우리를 사랑하고, 훈련하고, 양육하고, 돌볼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사랑과 증오의 관계

 

배신한 아버지의 예를 살펴보기 위해 사울 왕과 다윗의 관계를 살펴보겠다(사무엘상 16:1-31:13).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다음 왕으로 기름 부으면서, 그들이 만나기 전부터 그들의 삶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다.

 

다윗은 “이 사람이 사울을 기름 부은 사람이구나. 내가 정말 왕이 될 거야!”라고 생각하며 흥분에 휩싸였을 것이다.

 

궁전으로 돌아온 사울은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악령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안도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가 하프를 연주하는 소리였다. 사울의 종들은 그의 얼굴 앞에 앉아 그를 섬길 수 있는 청년을 찾기 시작했다.

 

왕의 종 중 한 명이 이새의 아들 다윗을 추천했다. 사울 왕은 다윗을 불러 궁전으로 와서 그를 섬기라고 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미 선지자를 통해 약속을 이루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왕의 은총을 얻을 것이다. 이게 제 입문 직책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다윗의 아버지는 그에게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형들에게 상쾌한 음식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다윗은 전투선에 도착했을 때, 블레셋의 챔피언 골리앗이 하나님의 군대를 조롱하는 것을 보고, 이런 일이 사십 일 동안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왕이 이 거인을 물리친 사람에게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윗은 왕 앞에 나아가 싸울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다. 그는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의 딸을 얻었다. 그때쯤 그는 사울의 은총을 얻었고 왕과 함께 살기 위해 궁전으로 들어갔다. 사울의 장남 요나단은 다윗과 영원한 우정의 언약을 맺었다. 사울이 다윗에게 시킨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그에게 있었고, 그것은 성공했다. 왕은 그가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식탁에서 식사하기를 요청했다.

 

다윗은 기뻤다. 그는 궁전에서 살았고, 왕의 식탁에서 식사했고, 왕의 딸과 결혼했고, 요나단과 친구가 되었고, 모든 전투에서 성공했다. 그는 심지어 사람들의 호의를 얻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예언이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울은 다른 모든 종보다 다윗을 더 좋아했다. 그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었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지도하고 훈련시키고 언젠가는 큰 영광으로 그를 왕좌에 앉힐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신실함과 선하심에 기뻐했다.

 

하지만 어느 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사울과 다윗이 나란히 전투에서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모든 도시에서 온 여자들이 춤추며 노래했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였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 이 말에 사울은 격노했고 그날부터 그는 다윗을 멸시했다. 다윗이 그를 위해 하프를 연주하는 동안 사울은 그를 죽이려고 했다. 성경은 사울이 다윗과 함께 계시지만 다윗과 함께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윗을 미워했다고 말한다. 다윗은 목숨을 걸고 도망쳐야 했다. 갈 곳이 없어 그는 광야로 도망쳤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다윗은 궁금해했다. “약속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이제 산산이 조각났다. 내 멘토인 사람이 나를 죽이려 한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사울은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종이다. 그가 나를 대적한다면, 내가 무슨 기회가 있겠는가? 그는 왕이고, 하나님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 걸까?”

 

사울은 이스라엘의 가장 뛰어난 전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을 광야에서 광야로, 동굴에서 동굴로 쫓아갔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목적이 있었다. 다윗을 죽이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약속은 단지 그림자일 뿐이었다. 다윗은 더 이상 궁전에서 살지 않았고 왕의 식탁에서 먹지도 않았다. 그는 축축한 동굴에 살았고 광야 짐승의 찌꺼기를 먹었다. 그는 더 이상 왕의 곁에서 말을 타지 않았으며, 한때 그의 곁에서 싸웠던 사람들에게 쫓겼다. 그를 돌봐줄 따뜻한 침대도, 하인도 없었고, 왕궁에는 칭찬도 없었다. 그의 신부는 다른 사람에게 주어졌다. 그는 나라가 없는 사람의 외로움을 알고 있었다.

 

악마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사울의 보살핌 아래 두셨다는 점에 유의하라. 왜 하나님은 이것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계획까지 세우셨을까?

 

왜 다윗의 눈앞에 은혜가 드리워져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을까? 이것은 다윗이 사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화를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답이 없는 모든 질문은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에 의문을 제기하려는 유혹을 키웠다.

 

사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젊은이를 죽이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의 광기가 커졌다. 그는 절박한 사람이 되었다. 놉의 제사장들은 다윗에게 피난처와 음식, 골리앗의 칼을 제공했다. 그들은 다윗이 사울에게서 도망쳤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그가 왕을 위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다윗을 대신하여 주님께 여쭈어보고 그를 보냈다.

 

사울은 이 사실을 알고 격노했다. 그는 주님의 무고한 제사장 여든다섯 명을 죽이고 놉 성 전체를 칼로 찔렀다. 모든 남자, 여자, 아이, 젖먹이, 소, 나귀, 양까지 말이다. 그는 아말렉 사람들을 상대로 해야 할 무고한 자들을 상대로 심판을 내렸다.

 

그는 살인자였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사람에게 영을 불어넣을 수 있었겠는가?

 

어느 순간 사울은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3천 명의 용사와 함께 그를 쫓아갔다. 여행 중에 그들은 동굴 입구에서 잠시 쉬기 위해 멈췄는데, 다윗이 뒤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사울은 겉옷을 벗어 옆에 두었다. 다윗은 조용히 숨어 있던 곳에서 빠져나와 버려진 옷 조각을 잘라내고 눈에 띄지 않게 슬그머니 달아났다.

 

사울이 동굴을 나간 후, 다윗은 땅에 몸을 숙이고 그를 따라 외쳤다. “아버지여,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제 손에 있는 당신의 옷자락을 보십시오!... 제 손에 악이나 반역이 없고, 당신께 죄를 지은 적이 없음을 알고 보십시오. 그런데도 당신은 제 목숨을 노려 빼앗으려고 하십니다”(사무엘상 24:11).

 

다윗이 사울에게 외친 외침은 “아버지, 아버지!”였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내 마음을 보십시오! 제게 아버지가 되어 주십시오. 저를 파괴할 지도자가 아니라, 저를 훈련시킬 지도자가 필요합니다”라는 외침이었다.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했을 때도 다윗의 마음은 여전히 ​​희망으로 타올랐다.

 

아버지들은 어디에 계시는가?

 

나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수많은 남자와 여자에게서 이런 외침을 보았다. 그들 대부분은 젊고,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강한 부르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아버지, 제자를 양성하고, 사랑하고, 지원하고, 격려할 사람을 위해 외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버지[지도자]의 마음을 자녀[사람들]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리라 내가 와서 저주로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말라기 4:6)라고 말씀하신 이유다.

 

우리나라는 아버지(아빠, 지도자 또는 목사)를 잃었고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사울과 다르지 않게 우리 가정, 회사, 교회의 많은 지도자는 자녀보다 자신의 목표에 더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이러한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비전을 사람들에게 시중드는 수단으로 보는 대신 자신의 비전을 위해 봉사할 자원으로 본다. 비전의 성공은 상처받은 삶과 산산이 조각난 사람들의 비용을 정당화한다. 정의, 자비, 정직, 사랑은 성공을 위해 타협된다. 결정은 돈, 숫자, 결과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것은 다윗이 받은 것과 같은 대우의 문을 연다. 결국 사울은 보호해야 할 왕국이 있었다. 이런 종류의 대우는 복음의 진전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지도자들의 마음에는 허용된다.

 

얼마나 많은 지도자가 의심 때문에 자신들 밑에 있는 사람들을 차단했는가? 그 지도자들이 왜 의심할까?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전을 섬기고 있다. 사울처럼 그들은 자신의 부름에 대해 확신이 없고, 그것은 질투와 교만을 낳는다. 그들은 경건하다고 아는 사람들의 자질을 알아보고, 그것이 자신에게 이롭다면 그 사람들을 기꺼이 이용한다. 사울은 다윗의 성공을 즐겼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다음 그는 다윗을 강등시키고 그를 파괴할 이유를 지켜보았다.

 

나는 책임을 묻고 싶어 울부짖는 수많은 젊은 남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자신을 제자로 삼아줄 지도자에게 복종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고립되고 혼자라고 느꼈다. 그들은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에게 행하신 일을 그들에게 행하고자 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거부당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라.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반항적이고 사악하다고 믿는 것을 걱정했다. 다윗은 사울의 마음을 살폈을 것이다. “내가 어디서 잘못했을까? 사울의 마음이 왜 그렇게 빨리 나에게 등을 돌렸을까?” 그래서 그는 “또한 내 아버지여, 보소서, 참으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이는 내가 왕의 긴 옷자락만 베고 왕을 죽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 손에 악함이나 범법이 없다는 것을 왕께서 보고 아시옵소서. 또 나는 왕께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나, 왕께서는 내 혼을 찾아내어 취하려 하시나이다”라고 외쳤다(사무엘상 24:11). 다윗은 사울에 대한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면 사울이 자신을 다시 은총으로 돌릴 것이고 예언이 성취될 것으로 생각했다.

 

아버지나 지도자에게 거부당한 사람들은 모든 책임을 스스로에게 떠넘기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내가 뭘 한 거지? 내 마음이 불순했을까?’라는 괴로운 생각에 갇혀 있다.

 

그들은 때때로 ‘누가 내 지도자의 마음을 내게로 돌렸을까?’라고 궁금해한다. 그런 다음 그들은 끊임없이 지도자에게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한다. 그들은 충성심과 가치를 보여주기만 하면 받아들여지리라 생각한다. 슬프게도, 그들이 더 많이 시도할수록 더 거부당하는 기분이 든다.

 

누가 나를 복수할까?

 

사울은 다윗이 자신을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은 것을 보고 다윗의 선함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와 그의 부하들은 떠났다. 다윗은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 왕이 나를 회복시켜 줄 것이다. 이제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는 분명 내 마음을 보고 이제 나를 더 잘 대할 것이다.

 

그렇게 빨리 생각하지 마, 다윗.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사울에게 다윗이 하길라 언덕에 있다고 보고했다. 사울은 같은 3천 명의 군인을 데리고 다시 그를 쫓아갔다. 다윗은 이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그것이 오해가 아니라 사울이 도발 없이 의도적으로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얼마나 거부감을 느꼈을까. 사울은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를 향해 진군했다.

 

다윗은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영으로 몰래 들어갔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두 깊은 잠에 빠뜨리셨기 때문에 한 명의 경비병도 그들을 보지 못했다. 이 두 사람은 군대 전체를 뚫고 사울이 잠든 곳으로 몰래 들어갔다.

 

아비새는 다윗에게 간청했다. “그때에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께서 이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겨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 원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쳐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치지 아니하리이다, 하더라.”(사무엘상 26:8).

 

아비새는 다윗이 사울을 죽이도록 허락해야 한다고 생각한 아주 좋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사울은 무고한 제사장 85명과 그 가족을 냉혈 하게 살해했다!

 

둘째, 그는 3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을 죽이러 나섰다. 아비새는 적을 먼저 죽이지 않으면 적이 반드시 당신을 죽일 것이라고 추론했다. 그것은 자기방어다. 모든 법원이 그것을 허용한다!

 

셋째,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을 이스라엘의 다음 왕으로 기름 부으셨다. 다윗은 예언이 성취되지 않고 죽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면 자신의 상속 재산을 주장해야 한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아비새가 사울에게 바로 걸어갈 수 있도록 이 군대 전체를 깊은 잠에 빠지게 하셨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하실까? 아비새에게는 다윗이 다시는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모든 이유는 타당했다. 그것들은 말이 되었고 다윗은 다른 형제로부터 격려를 받았다. 그러므로 다윗이 조금이라도 기분 나쁘게 생각했다면 그는 완전히 정당하다고 느꼈을 것이고 아비새가 사울을 창으로 찔러 죽이도록 허락했을 것이다.

 

다윗의 대답을 들어보라. “이에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그를 멸하지 말라. 왜냐하면, 누가 자기 손을 내밀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고도 무죄할 수 있겠느냐? 하더라. 다윗이 또 이르되, 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말하거니와, 주께서 그를 치시든지, 혹은 그의 죽을 날이 닥치든지, 혹은 싸움터에 내려가서 멸망하리라. 내가 내 손을 내밀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주께서 금하셨나니, 원하노니, 너는 이제 그의 베개 받침대에 있는 창과 물병만 취하라, 그리고 우리는 가자, 하더라.”(사무엘상 26:9-11).

 

사울이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고 다윗도 죽이고 싶어했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다윗은 스스로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

 

물론, 바로 그 자리에서 끝내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쉬웠을 것이다. 그는 그 나라가 목자가 없는 양 떼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늑대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 그들을 약탈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 것이 그에게 어려웠지만, 미친 왕에게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출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웠을 것이다.

 

다윗은 사울의 유일한 위안이 자신의 멸망에 대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런 결정을 내렸다.

 

다윗은 처음에 사울을 살려주었을 때 자신의 마음의 순수함을 증명했다. 하지만 다윗이 사울을 죽일 두 번째 기회가 있었을 때도 그는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사울은 주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고 다윗은 그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 심판하게 했다.

 

오늘날 다윗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더 이상 물리적인 칼로 죽이지 않고 다른 종류의 칼인 혀로 서로를 파괴한다. “죽음과 생명은 혀의 권세에 있습니다”(잠언 18:21).

 

교회는 분열되고, 가족은 갈라지고, 결혼 생활은 깨지고, 사랑은 상처와 좌절로 쏟아지는 말의 맹공격에 짓밟혀 죽는다. 친구, 가족, 지도자에게 불쾌감을 느낀 우리는 비통함과 분노로 날카로워진 말로 조준한다. 정보가 사실이고 정확하더라도 동기는 불순하다.

 

잠언 6:16-19은 형제들 사이에 불화나 분리를 일으키는 것은 주님께 가증한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관계나 명예를 분리하거나 손상시키려는 의도로 무언가를 반복할 때,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다.

 

하나님께서 내 지도자의 죄를 폭로하기 위해 나를 사용하고 계시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나와 아내를 현재의 사역에 보내시기 전까지 20년 동안 전임으로 청소년을 돕고 목회했다. 내가 청소년들을 사역하는 봉사자로 재직하는 동안, 나나 내가 전하는 메시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보통은 그런 일이 있어도 상관없지만, 이 남자는 나보다 권위 있는 위치에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젊은이들에게 순수함과 담대함의 강력한 말씀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고 믿었고, 그의 아들은 내 그룹에 있었다.

 

이 젊은이의 마음은 확신으로 가득 찼다. 어느 날 그는 울면서 우리에게 왔다. 그는 집에서 본 생활 방식이 내가 그와 다른 젊은이들에게 따라야 한다고 도전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화가 났다.

 

이 사건과 다른 성격 갈등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나를 해고하도록 교회 내에 압력을 가하기로 한 듯했다. 그는 거짓 비난으로 나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기 위해 나와 함께 하는 형제에게 갔다.

 

그런 다음 그는 돌아서서 그 형제가 나를 반대했다고 말했고, 그 형제는 나를 해고하겠다고 말했다. 교회의 평가서에는 다양한 비판적인 직원의 메모가 있었다. 그러나 그 비판적 메모에는 내 이름이 적힌 것은 없었다. 다른 방식으로 나를 나타냈다. 그러나 그 학생의 아버지는 내 얼굴에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의도는 나를 해고하는 것이었다.

 

청소년 그룹의 여러 구성원은 내가 해고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 남자의 아들이 악의적인 의도가 아니라 집에서 들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퍼뜨린 것이다. 나는 화가 났고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 남자에게 가서 내가 전한 의도를 말했지만, 그는 그저 나의 동역자의 생각을 반복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몇 달이 지났지만, 상황을 완화할 방법이 없는 듯했다. 그는 나의 동료와 나 사이의 모든 연락을 끊었다.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그의 편이 아닌 모든 동역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끊임없이 압박을 받았고, 교회에 남을지 아니면 쫓겨날지 결코 알 수 없었다. 나는 갈 곳도 없었다. 나는 어떤 곳에도 이력서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그 교회로 인도했다고 믿었고, 나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계속 머물렀다.

 

한 자매 동역자는 “그들이 당신을 해고할 거라는 걸 알아요. 모두가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들이 나를 고용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승인 없이는 나를 해고할 수 없어요.”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내가 상황을 부정한다고 생각했고 그만두라고 간청했다.

 

마침내 나를 해고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동료들은 교회에 청소년 그룹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알렸다. 나는 동료 형제와의 갈등에 대해 아직 그와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과 동료를 다음 날 만날 예정이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나 자신을 변호하지 말라고 매우 구체적으로 일깨워주셨다.

 

다음 날 동료 사역자를 만났을 때, 그가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형제, 하나님이 당신을 이 교회에 보내셨어. 나는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안도했다. 하나님이 마지막 순간에 나를 보호해 주셨다.

 

“이 사람이 왜 당신을 쫓는 거야?” 그가 나에게 물었다. “그 사람에게 가서 당신과 그 사람 사이의 문제를 바로잡아 주세요.” 그 회의 직후에 나는 리더가 내 책임 영역에 대해 내린 결정에 대한 서면 증거를 받았다. 그것은 그의 진짜 동기를 폭로했다. 나는 그것을 동료 사역자에게 가져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날 나는 바닥을 왔다 갔다 하며 45분 동안 기도하면서 불편한 감정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계속 말했다. “하나님, 이 사람은 부정직하고 사악했습니다. 그는 폭로되어야 합니다. 그는 이 사역에서 파괴적인 세력입니다. 저는 동료 사역자에게 그가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 말해야 합니다!”

 

나는 그를 폭로하려는 내 의도를 더욱 정당화했다. “제가 보고하는 모든 것은 사실이고 문서화되어 있으며 감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를 막지 않으면 그의 사악함이 이 교회 전체에 침투할 것입니다.” 마침내 좌절에 빠져서 “하나님, 당신은 제가 그를 폭로하기를 원하지 않으시죠?”라고 말했다.

 

내가 그 말을 했을 때, 하나님의 평화가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증거를 버렸다. 나중에 그 장면을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사역에 있는 누군가를 보호하기보다 나 자신을 복수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 동기가 이기적이지 않다고 믿도록 스스로를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내 정보는 정확했지만, 내 동기는 불순했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내가 사무실 근무 시간 전에 교회 밖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 남자가 교회로 차를 몰고 왔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에게 가서 겸손하라고 강조하셨다.

 

나는 즉시 방어적이었다. “아니요, 주님, 그가 저에게 와야 합니다. 그는 모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나는 계속 기도했지만, 주님은 다시 내가 그에게 가서 겸손하라고 주장하셨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사무실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사무실로 갔다. 하지만 내가 한 말과 내가 한 행동은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지 않으셨다면 했을 말과 크게 달랐다.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용서를 구했다. “저는 당신을 비판하고 판단했습니다.” 나는 고백했다.

 

그는 즉시 부드러워졌고, 우리는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이후로 그가 나를 공격하는 일은 멈췄지만, 그와 다른 동료들 사이에는 문제가 계속되었다.

 

6개월 후, 내가 다른 지역에서 사역하던 중, 이 남자가 저지른 모든 잘못이 동료들에게 드러났다. 그것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목회의 다른 영역과 관련이 있었다. 그가 저지른 일은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빴다. 그는 즉시 해고되었다.

 

심판이 내려졌지만, 내 손으로 내린 것이 아니었다. 그가 나에게 하려고 했던 일이 바로 그에게 일어났다. 하지만 그에게 일어났을 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그와 그의 가족을 위해 슬퍼했다. 나는 그의 고통을 이해했다. 나는 그의 손에서 직접 겪었다.

 

나는 6개월 전에 그를 용서했기 때문에, 이제 그를 사랑했고 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1년 전에 내가 그에게 화가 났을 때 그가 해고되었다면, 나는 기뻐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내가 품었던 불쾌함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알았다. 겸손과 스스로 복수하지 않는 것이 나를 불쾌함의 감옥에서 자유롭게 해준 열쇠였다.

 

1년 후 나는 공항에서 그를 보았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압도되었다. 나는 그가 서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를 껴안았다. 그가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을 때 진심으로 기뻤다. 몇 달 전에 그에게 가서 그의 사무실에서 겸손하게 굴지 않았다면 그날 공항에서 그의 눈을 마주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를 본 지 몇 년이 흘렀지만, 나는 사랑과 그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보고 싶은 진심 어린 소망만을 느낀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의 재판관이 되도록 선택한 것이 현명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의 종 사울을 재판하기 위해 누구를 사용하셨는가?”라고 묻는다. 블레셋 사람들이다. 사울은 그의 아들들과 함께 그들과 싸우다 죽었다. 이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졌을 때, 그는 축하하지 않았다. 그는 애도했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사울을 죽였다고 자랑했다. 그는 이 소식이 그의 호의를 얻게 되기를 바랐지만, 그 반대의 효과가 있었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내밀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사무엘하 1:14, 15)라고 다윗이 물었다. 다윗은 그 사람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다윗은 유다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기리며 부를 노래를 작곡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블레셋 도시의 거리에서 그것을 외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면 적들이 기뻐할 것이다. 그는 사울이 죽은 곳에 비도 내리지 않고 곡식도 맺히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는 온 이스라엘이 사울을 위해 울라고 외쳤다. 이것은 화가 난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 화가 난 사람은 “그는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다윗은 더 나아갔다. 그는 사울 집안의 남은 씨를 죽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들에게 친절을 보였다. 그는 그들에게 땅과 식량을 주었고 후손에게 왕의 식탁에 앉을 자리를 주었다. 이것이 화가 난 사람처럼 들리는가?

 

다윗은 사울에게 버림받았지만, 사울이 죽은 후에도 충성을 유지했다. 당신을 사랑하는 지도자나 아버지에게 충성하기는 쉽지만, 당신을 파괴하려는 사람에게는 어떨까? 당신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남자 또는 여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복수할 것인가?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위해 복수하시는 것은 의로운 일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스스로 복수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