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사도행전시대(서문)

Hernhut 2022. 5. 20. 19:50

사도행전(AD33-AD62)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늘의 왕국을 재제안 하는 일에 중점을 두고 있다. 본래 하늘의 왕국을 이스라엘 민족에 제안한 것은 복음서에서 약 3년 반 정도였다. 그리고 재제안이 있었는데 약 29년 동안 사도행전에서 다뤄졌다. 사도행전에서 왕국에 대한 재제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복음서에서 왕국 제안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달려 있다. 복음서에서의 이전 제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창세기 첫 장에서부터 모세로 시작해 왕국이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차지하는 위치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달려 있다. 구약성경을 제외하고 성경의 이 부분을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항상 잘못되어 서신서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것이 사람들이 이 메시지와 무관한 수많은 신약성경 구절을 은혜로 받는 구원이라 가르치려고 잘못 시도하는 주된 이유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한 거듭남, 복음서의 비유,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표적들, 2장의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 등은 은혜의 구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를 은혜의 구원 즉 영의 구원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을 통한 구원, 복음 메시지는 단순하다는 생각을 가져온다. 사도행전이나 4복음서 모두 주로 은혜에 의한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 은혜의 구원의 메시지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찾을 수 있지만, 이 다섯 권의 책 모두 이스라엘에 왕국에 대해 제의/재제안에 관한 것이지, 은혜에 의한 구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와 같이 은혜로 받는 구원에 관한 메시지는 28개의 서신서-바울서신, 히브리서, 일반서신, 그리고 요한계시록 2, 3장-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렇게 잘못된 가르침은 먼저 해석과 관계가 있고, 두 번째로는 적용이 다른 문제가 될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는 4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있는 수많은 구절들을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읽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반드시 그 말씀에서 전달해야 하는 중심적인 메시지를 없애는 것만 아니라 은혜의 구원에 대한 메시지도 손상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요한복음은 복음서에 있는 8개의 "표적"의 목적이 같다고 주장하는 다른 세 복음서 즉 공관복음과 분리해서 생각한다. 요한복음은 구원의 메시지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쓰였다. 그 말이 맞긴 하지만 이것은 요한복음의 내용이 아니며, 요한복음 20:30, 31절의 내용도 아니다. 

 

 

(부차적인 측면에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보다 은혜의 구원을 선포하는 데 더 적합하긴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은혜의 구원은 요한복음의 주요 주제가 아니며, 은혜의 구원이 공관복음에서도 주요 주제로 볼 수 없다. 4복음서 중심 메시지는 하늘의 왕국이 이스라엘에게 제안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다른 3복음서와 같은 메시지로, 4복음서가 모두 사도행전으로 이어져 사도행전에서도 동일한 중심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으며, 생생한 그 말씀을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 20:30, 31의 "표적"에 관한 기록은, 요한복음에서 문맥과 장소를 떠나서 읽지 않는 한, 다른 3복음서와의 불가분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며, 누구도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방식으로 표적의 문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의 문제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이 말씀을 구원받지 않은 자와 은혜로 구원받은 자로 잘못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는 오직 하나의 최종 결과만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잘못된 연결로 신약성경의 구성과 의도된 목적과 복음을 완전히 전달되지 못하게 하고 다른 3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연결하지 못해 성경 읽기를 포기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과 시나리오에서 모든 사람은 오늘날 기독교 세계를 둘러보는 것뿐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요한복음에 대한 잘못된 접근이 널리 지켜지고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신약성경의 창세기로서 공관복음서와 함께 시작해야 한다.)

 

본서의 주요 부분은 바울과 그의 사역을 중심으로 말해질 것이다. 비록 바울이 8장까지 사도행전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교회에 대해 핍박하는 행동은 복음서에서 보듯이 하늘의 왕국을 제안하는 사도행전 9장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의 개종 전 행동은 여러 해에 걸친 대중적인 가르침과 생각과는 달리 초기 교회를 중심으로 한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 2장 오순절의 날에 그영에 충만해진 120명 외에는 바울이 박해할 초기에는 교회가 없었다. 오히려 바울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박해했는데, 그의 박해는 갈보리 사건보다 앞서서 행해졌던 것으로 생각되고, 분명히 사도행전으로 이어지면서 처음 부분에 다루어졌다.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유대인들은 복음서에서 믿는 유대인들이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복음서에서 하늘의 왕국 제안을 믿었고, 다른 이들은 사도행전에서 하늘의 왕국 재제안을 믿었다. 그리고 믿음에 따라, 복음서에서 하늘의 왕국을 제안받은 사람들은 사도행전에서 하늘의 왕국을 재제안 받은 사람들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새사람의 지체들이 되지 않았다.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 믿는 유대인들은 단순히 복음서에서 믿었던 유대인들에게 더해진 것이지 교회에 더해진 것은 아니다. 오순절의 120명의 제자들 외에, 신약교회 초기 형성은 사도행전 10장으로 이어지면서 이방인들이 구원받도록 남겨졌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28:28까지 유대인을 위해 신약교회가 형성된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에티오피아에서 온 내시는 종종 이방인들과 연결시킨다. 그러나, 이 사람은 분명히 에티오피아에 사는 유대인으로,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갔다.)

 

그러므로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오순절 날에 그영에 잠겼던 120명 외에 이 29년 동안의 믿는 유대인들은 갈보리 이전에 믿었던 유대인들의 수에 더해진 것이요(사도행전 2:41, 47; 4:4; 5:14; 6:7),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새사람 건축이 신약교회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행전 기간을 이해해야만 다른 어떤 것을 불러일으킨다. 이 시대에 사용했던 교회와 이방인을 이해해야만 하는데 이 두 단어는 각인을 묘사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밖으로 불러내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에클레시아ekklesia"가 교회다. 교회는 사도행전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 중 구원받은 유대인과 세상에서 믿음 안으로 들어온 구원받은 이방인 모두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사도행전 5:11; 7:38; 8:1, 3; 로마서 16:4; 고린도전서 1:2 갈라디아서 1:13, 22, 23). 그리고 "이방인"라는 단어는 이 사도행전 시대에 "유대인"이라는 단어 즉 예수님을 믿었던 유대인들과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들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유대인은 이스라엘 민족 중 예수님을 믿는 일부분을 가리켜 부른 것이고, 한새사람은 아니고,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창조, 한새사람이 되는 것이다(로마서 1:16; 2:9, 10). 사도행전 시대에 필요했던 이런 형태의 용어 사용은 누가 생각해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섞이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사라져갔을 것이다. 사도행전 기간은 29년이며, 유일무이한 기간이다. 사도행전 전후에도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존재했던 특정한 것들이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것과 특유한 것들은 반드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서나 서신서(사도행전 전후의 성경)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부정적으로 반영되어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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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크크출판사 구속이야기 룻기를 읽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