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찬송과 영적 노래로 서로에게 말하며 너희 마음속에서 주를 찬양하고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며”(에베소서 5:19)
우리 가운데 찬송 작가가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찬송을 부르는 법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영감을 적어 두라고 권하고 싶다. 이러한 영감은 체험하거나 또 성경을 읽을 때 계시에서 나올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훈련하면 결국 찬송을 쓸 수 있다. 처음에 찬송이 단순할 수 있다.
처음에 간단한 찬송을 쓰면 결국 더 깊은 것을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찬송 “이삭의 제물”을 예로 들어 본다. 이 찬송의 개념은 매우 깊다. 그것은 영적 감정에 따라 쓰였다. 작가가 창세기에 관한 메시지를 전할 때, 그는 이삭의 제물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그 당시 “주님,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당신께 드려야 합니다. 나는 이것이 쉬운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에게 헌신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기 위해 사흘 간의 여정을 걸었다. 그것은 쉬운 방법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걷는 모든 발걸음이 아들의 죽음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웠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삶의 초점이 이삭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했다. 그는 아들과 함께 여러 해를 살았지만, 그 이후에는 이 여행한 후에 아들은 더는 없을 것이다. 왜냐면 아버지인 아브라함에 의해 제물로 드려졌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주님을 따랐던 이유 이 아들이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겠다.”(창 12:7a)라고 약속하셨다. 그의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 중심이었다. 그는 “내가 어린아이도 없는데 뭘 주시겠어요?”(창세기 15:2)하고 물었다. 아들은 참으로 삶의 초점이었다.
이삭이 그 나무를 피레로 운반한 것은 얼마나 잔인했는가? 아브라함에게 제물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던 것은 그가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번제물로 바쳐지리라는 것을 몰랐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느꼈을지를 상상해 보라. 제물은 그의 아들이었다! “내 품에 안겨 여러 해 하나님의 소중히 여기심과 사람들이 존경을 받아왔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도, 이 아이는 하나님의 경륜의 초점이었다. 이 아이가 없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수 없다.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모든 부와 재산은 이삭에게 주어질 예정이었다. 그 아이는 얼마나 소중한가! 그는 참으로 하나님에 의해 소중히 여겨졌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제물이 된 후에는 더는 없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논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아들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웃지 않았습니까? 나는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당신은 나를 영적으로 만드셨고 나는 고통받았습니다. 당신의 나타나심이 없었다면 저는 단순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죽었어야 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나를 이런 상태가 되게 하셨습니다. 나는 내 나이 든 시절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모두 당신의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그를 돌려주기를 청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꿈처럼 나는 걸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나에게 아들을 주셨고 이제 다시 요구하신다. 난 그분의 언약 조항은 알고 있다.”라고 되뇐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번제물을 바칠 어린 양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다”(창세기 22:8)라고 대답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준비하실지 몰랐다. 그는 그 공급이 이삭인지 아니면 어린 양인지 몰랐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이 죽더라도 다시 살 것이라고 믿었다. 오, 이것은 어떤 믿음이었는가! 히브리서 11장 19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도 사람을 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하셨으니 거기서 이삭을 한 모형으로 다시 받으셨다”라고 말씀한다. 한 찬송은 “이 순간이 사라지면 모든 이득이 내게 타격으로 사라지리라는 것을 안다.”라고 말한다. 이 체험은 얼마나 깊었을까! 그러한 체험은 우리가 통과하기가 가장 어려운 단계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면, 그것은 우리의 중심이 되고 하나님 자신은 사라진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깊은 체험을 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얻은 것이 이 고통과 타격 이후에 끝날 것을 알았다. 이 개념은 얼마나 높은가!
“왜”라는 질문은 매우 좋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우리는 결국 “왜 그렇게 많은 일을 했습니까? 왜 저를 그렇게 많이 축복하셨습니까? 왜 나를 이렇게 인도하셨습니까?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많은 일을 하셨을 때, 왜 당신은 나를 당신의 일로 존경받게 하고 나를 사용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찬송에서 아브라함은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고난을 겪었느냐? 당신이 그를 죽이고 싶었다면, 당신은 나를 발견하고 축복하고 나를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사용합니까?”라고 질문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런 체험을 가진 사람은 너무나 소중하다. 주님으로부터 높은 것을 보고 얻었지만 이런 일들을 위해서만 산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문제가 되고 하나님의 경륜에 방해가 될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오직 자신만을 원하신다.
“나는 지구상의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는 위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를 당신에게로 부르셨지만, 그는 하란에서 지체했다. 하란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족속을 떠나라고 요청하셨지만, 그는 롯을 데리고 갔다. 때때로 우리는 아브라함이 매우 영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같지 않았다.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결국 그들이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매우 일반적이다. “그리고 내가 취하는 모든 발걸음은 어려워 보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당신이 저를 당신 안에서 부르셨을 때 제가 떠나기가 어려웠습니다. 당신이 하란에서 나를 불렀을 때 나는 떠나기가 어려웠습니다. 나는 자랑 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취하는 모든 발걸음은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사랑의 손길이 놓아주지 않고 나를 이끌어 이 믿음의 길을 걷게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가 더는 갈 수 없을 것 같을 때마다 하나님은 오셔서 믿음의 길을 걷도록 그를 이끌어 주셨다. “지팡이 혼자 울리고, 내 몸은 죽었고, 나는 죽음에서 삶으로 인도되었다.” 그는 죽음과 부활을 한 번 체험했다. 로마서 4장 19절은 그가 자신의 몸이 죽은 것만큼 선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아들을 주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부활할 때 이삭을 가졌다는 것을 안다. 그의 몸은 이미 죽은 것만큼 좋았지만, 그는 부활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독생자 이삭을 낳았다. 이제 하나님은 이삭을 다시 데려가기를 원하셨다. 아브라함은 곧 그의 아들을 떠나려고 했다. “이제 당신은 모든 것을 현실로 만드는 자를 데려갔습니다. 그를 당신 자신으로 대체하십시오.”
“나는 손을 들고, 칼날을 움켜쥐고, 눈물로 가득 찬 눈을, 사랑하는 사람을 돌이키지 않는다.” 그는 “나는 지금 그를 죽일 거야. 내가 그를 죽일 때, 나는 내 눈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요? 이것은 내 아들입니다! 내가 그를 죽일 때, 나는 울지 않을까?” 찬송은 계속된다. “아들아, 일단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약속하면, 네가 하나님의 가장 큰 소원이라는 것을 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었다. “이제 나는 너희를 하나님께로 돌려주어야 한다. 너는 내 손으로 죽여야 해.” 체험에 대한 설명은 얼마나 깊은가!
그는 울었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없다. 나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이와 같은 찬송가를 가져야 한다. 이 성구들에 나오는 감정, 영감, 진리는 우리를 다른 차원으로 이끌 것이다. 이처럼 찬송가를 부를 때, 우리는 더 깊은 헌신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저를 드립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는 나타나심과 약속과 체험과 행위가 모두 지나가리라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 자신은 지나치지 않으실 것이다.
“지금 내 길은 어디, 지금 내 희망은 어디 있느냐? 내가 있는 모든 것이 여기서 끝났다.” 얼마나 좋은가! “나타나서, 모든 과거를 약속한다. 경험, 선물은 기억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타나심,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원한다. 그러나 이때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만을 원했다. “오직 나의 하나님,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의 목표, 나의 몫, 나의 보물, 나의 모든 것만.”
내가 이 찬송을 예로 들었지만, 이 찬송이 너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이해하기 힘들다. 처음에는 “오, 내가 예수를 어떻게 사랑하는지”라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십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이것을 노래한다면 건강하지 않다. 우리는 점점 더 높이 자라서 점점 더 멀리 걸어야 한다. 찬송을 더 많이 부를수록 더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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