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Hernhut 2022. 4. 29. 13:20

 

 

그러므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너희]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고 항상 경계하라.”(사도행전 20:31)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성경은 아주 흥미가 있다. 때때로 주님은 그리스도 예수라고 불리고, 다른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불린다. 나도 처음 성경을 읽었을 때 무척 궁금했던 이름이다. 하여 많은 목사에게 물었다. 하지만 시원하게 답해주지 않았다.

 

그냥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알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오랜 기간 기도하는 가운데 그 해답을 얻었다. 성경에서 한가지 궁금증을 발견하면 수십 번을 기도해서라도 그에 대한 계시를 받아낸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나온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시각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주님은 먼저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시다.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주님은 첫 번째시요, 그 주님은 예수님이시며, 우리의 체험에서도 우리는 매우 변변치 않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과 같은 과정을 체험하게 되는데 우리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 십자가의 낮은 곳을 통과해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기를 갈망한다면 우리는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 고통의 체험을 함으로써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우리만 아니라 우리를 통해 또 다른 어떤 사람을 얻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고통을 체험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면서 주님의 위로와 지지와 체휼(體恤)과 만족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만지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우리에게 짐을 지게 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짐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의 제자로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사리사욕의 흥미를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무슨 일이 있어도 견디겠다는 의지를 갖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나를 믿고 나의 본을 따르며 살고, 필요하다면 나에 대한 믿음 때문에 고난을 겪거나 죽을 수도 있느니라.]”(마태복음 16:24)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는 짐은 상상할 수 없이 가벼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평강을 주지 않는 종교적 의식으로] 지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모든 사람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구원으로 너희의 혼을 신선하게 하리라]. [나의 제자로서 나를 따르는 것으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너희 혼의 안식 (새로워지고, 조용하고 침착한 상태)를 찾을 것이라. 내 멍에는 [나르기]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마태복음 11:28-30)

 

이렇게 지는 짐으로 우리는 형제의 약점 때문에 눈물을 흘릴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말했다.

 

삼 년 동안 밤과 낮을 기억하면서, 나는 눈물로 각자에게 훈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사도행전 20:31)

 

무엇이 바울을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게 했는가?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그영이었다. 이 영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졌다. 그는 하나님의 갈망을 위해 기꺼이 대가를 치렀다. 그는 에베소에서 많은 우상을 보았을 때 그는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구리 세공인 알렉산더에게 박해를 받았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고 더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렉산더의 우상 제작 사업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다른 형제들을 위해 살 정도로 예수님의 그영을 누렸다. 그가 그들과 함께 있었을 때 그는 밤낮 눈물로 있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그영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그영께서 우리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만지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형제자매와 교회를 위해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신다. “주여,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고통받는 것처럼 저도 고통받고 있습니다라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우리 안에서 먼저 된 한 형제는 교회생활에 관해 곡을 썼다. 그의 곡은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 생활과 달랐다. 우리의 교회 생활은 얼마나 사랑스러운 교회 생활인가!” 그 곡의 배경은 때로는 형제들이 형제들과 싸우기도 한다네. 모든 사람은 화가 나서 그의 주먹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네.” 였다. 그는 나는 문을 닫고 주님을 찬송한다네. 당신 마음이 아픈 것 알아요. 내 손해는 당신의 손해와 비교할 수 없어요.”라고 썼다. 사람들이 그를 공격했을 때 그는 주님이 가장 고통받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만약 그가 어떤 손실을 보았다면, 그것은 주님의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형제의 반대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바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법을 알고 있었다.

 

당신 마음이 아픈 것 알아요. 내 손해는 당신의 손해와 비교할 수 없어요.”

 

그리스도의 고통이 그의 고통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의 고난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의 십자가가 되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체휼(體恤) 하시고, 지지하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신다. 그분은 그리스도시오, 부활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만질 때 우리는 자신감, 활력이 있고, 하늘에 속한 것을 느끼고, 걸을 힘이 있고, 우리의 삶이 최고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그분을 따를 때 우리는 그분과 하나다. 우리는 자아의 영역에서 벗어나 주님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우리 같지 않다. 우리는 주를 위해 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살지 않는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산다. 그리고 우리는 형제, 자매, 교회에 대해 많은 느낌이 있다.

 

주님을 위해서만 일하지 말라. 우리는 주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분만을 위해 일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선택을 할 것이다. 만일 그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선택하지 않게 된다. 일꾼은 좋은 필드를 선택한다. 그는 축복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선택한다. 그러나 주의 일꾼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의 일꾼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주의 일꾼은 주의 고난을 받고 있다. 주의 일꾼은 형제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 주의 일꾼은 형제와 교회들로 인해 슬퍼한다. 주의 일꾼들은 형제들, 교회들을 위해 기꺼이 쏟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어떻게 거하는가? 주님은 우리의 만족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시다. 주님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부활하신 그리스도시오. 십자가가 우리 안에서 움직이니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는 형제자매와 함께 있어야 하고, 교회와 함께 일해야 하며, 그들의 성장을 위해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들을 건축하는 데 수고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나의 어린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벽하고, 영속적으로]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고통] 수고를 하노니”(갈라디아서 4:19)라고 말했다. 그들의 성장을 위해,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서 형성될 때까지 다시 일하기를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