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두 방식
창세기 5장을 계속 이어가기 전 지금까지 다룬 것을 복습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창조, 성경 처음에 볼 수 있었던 것은 두 나무였다. 한 나무는 생명의 나무요, 다른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였다. 이 두 나무는 인류에 있어서 가능케 하는 생명의 두 방식을 대표한다. 사람 타락이 일어난 후 아담과 이브는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을 낳았다. 그들 역시 생명의 두 방식을 대표한다. 가인과 아벨은 두 다른 노선이었다. 가인은 지식의 노선에 있었고, 아벨은 생명의 노선에 있었다.
가인은 얻음을 의미하고, 아벨은 비다, 자만, 허영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여자의 씨가 서펜트(나아스)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아담과 이브가 첫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아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응답이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가인이 자랐을 때 그들은 가인이 서펜트(나아스)의 머리를 밟을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 몹시 실망해 “빈, 자만, 허영”이라는 의미로 아벨이라 불렀다. 이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은 아담의 후손으로 두 노선의 시작이 되었다. 이 두 노선 지식의 노선과 생명의 노선은 생명의 두 다른 방식을 대표한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어떤 것을 제물로 드렸다. 가인은 농사를 지어 밭에서 나는 어떤 것을 제물로 드렸고, 아벨은 가축을 길러 거기서 나는 어떤 것을 제물로 드렸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셨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다. 그런 이유로 가인은 질투하고 분노하여 자기의 형제를 죽였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후 하나님은 또 다른 아들 셋을 아담과 이브에게 주셨다. 아벨로 시작한 생명의 노선은 셋으로 계속되었다. 셋은 “지정된, 임명된”을 의미한다. 셋은 부활 안에 있는 아벨을 대표한다. 아벨의 죽음으로 인해 셋이 임명되었다. 그 후 섹은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의 이름은 “약하다, 영원히 살 수 없는”을 의미한다. 에노스는 게난을 낳았고, 게난은 “얻다”를 의미한다. 게난은 마할랄렐을 낳았고, 마할랄렐은 “하나님을 찬양함, 하나님은 영광이시다”를 의미한다. 그 후 마할랄렐은 야렛을 낳았고, 야렛은 “내려감”을 의미한다. 이 이름들은 생명 노선에 있는 우리 체험의 과정을 만들어 낸다.
셋에 대한 우리의 체험
우리가 지금까지 다뤘던 이 모든 이름과 상황들은 우리에게 교리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 이름들과 상황들은 체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믿는 이들로서 “임명”되었다. 셋은 지명되었고, 우리 또한 지명되었다. 우리는 셋과 같다. 우리는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미리 정해졌다. 그 후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받았다. 그분의 부활로 우리는 회복되었다. 우리가 신성하고 비밀스러운 영역이라고 부르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 안으로 산출되었다. 이제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높여지신 그리스도와 하나다. 이것이 셋에 대한 체험이다.
에노스에 대한 우리의 체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회복을 통해 셋의 임명됨을 체험한 후 불행하게도 선악을 알게 하는 노선에 그들 자신이 연합해 버린다. 극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회복된 후 에노스로 넘어가야 그리스도인 삶을 계속해서 산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자기들이 연약하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생명 노선에서 살기를 노력하는 이들로서 셋의 선택됨을 체험한 후 우리는 에노스의 영원히 살 수 없음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내가 부서지기 쉽다. 약하고 주님이 필요하고, 주의 긍휼이 필요하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내가 정말 쉽게 부서지는 자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두 천연적으로 자랑스러워한다. 우리는 자기가 “어떤 누구”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에노스가 체험적이어야 하는 이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깊은 축복 중의 하나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부서지기 쉽고, 영원히 살 수 없고, 약하다. 그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분을 부를 수 있을 뿐이다.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우리가 절실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분이 필요하므로 그분을 부른다. 우리는 그분 없이 우리가 전진해 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에노스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생명의 노선에서 자랄 수 있다. 우리가 자라면 자랄수록 우리가 에노스라는 것을 더 알게 된다. 강한 자로 자란다기보다 더 약한 자로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더 제한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으로 체험이 있기 전에 우리는 모든 이를 압도할 수 있지만 이젠 모든 이들이 우리를 압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생명의 노선에서 자라면 자랄수록 우리의 약함과 영원히 살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얻는 모든 것은 “나는 에노스야!”라고 아는 것에서 나와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그분에 의해 쓰임 받을 수 있다.
에노스가 게난을 낳는 것에 대한 우리의 체험
우리가 정말 약하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 영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뽐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대개의 그리스도인은 교회 생활에서 얻은 것을 가지고 자랑을 한다.
“나는 그것을 얻었다. 나는 그것을 본다.”
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얼마나 많이 보고, 얻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성과 비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성을 아는 것(엡 3:8)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에노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안다”고 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정말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생명의 노선에서 에노스를 체험한 사람은 말을 한다.
“주님, 전 에노스일 뿐입니다.”
그럴 때 주님은 말씀하실 것이다.
“이제 넌 나를 체험하고, 나를 얻을 자격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체험 가운데 에노스가 게난을 낳는 것이다. 우리의 약함을 깨닫는 것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는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면 따를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제한을 받고, 영원히 살 수 없는 에노스일 뿐이다. 난 쉽게 부서지고, 약한 존재일 뿐이다.”
아무도 주님께 어떤 것도 뽐낼 수 없다. 우리는 한 가지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주님, 당신의 긍휼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이해 이후 게난이 올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을 누리고, 추구하기 원할 때 우리가 알아야 할 첫 번째 것은 우리가 에노스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참된 얻음을 가질 것이고, 게난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얻고, 누릴 것이다.
마할랄렐에 대한 우리의 체험
생명 노선에 있는 게난 다음 사람은 마할랄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얻음은 “하나님은 영광이시오.”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요, 우리가 그분을 찬양할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하나님은 놀라운 분이시야! 나도 그래!”라는 반응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이 놀랍다고만 듣기를 좋아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너무 좋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지신이 “너무 놀랍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분은 당분간 우리가 넘어지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어느 기간 동안 우리가 세상에 빠지도록 하실 수도 있으시다. 나중에 우리는 그분께 다시 돌아오며 말할 것이다.
“주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 당신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 체험 속에서 다시 한번 게난을 낳을 수 있으므로 에노스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가 주님을 얻음으로 우리는 또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 당신은 영광이십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답고, 멋지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마할랄렐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를 안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만이 영광이시라는 것을 안다.
야렛에 대한 우리의 체험
우리가 하나님께서 놀라우신 분, 영광이시라는 것을 보고 난 후 우리는 야렛이 되기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야렛의 이름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내려놓거나 내려가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영광이시라는 것을 누리는 마할랄렐이 되기를 좋아한다. 문제는 우리가 독특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우리가 너무 영적이고, 다른 사람들은 영적이지 않아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잘못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느끼게 한다. 약한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들 주변의 사람들이 마할랄렐의 신앙이기에 여전히 약하기를 강요받는다. 아무도 기꺼이 내려가고, 그들 주변에서 일반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건강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영적이면 영적일수록 우리는 야렛이 되고 내려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내려가는 것을 배우고, 누구에게나 쉽게 접근하고 대화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심지어 세상에 있는 사람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에게 내려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 주변에 있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이 주의 증거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을 안다.
우리가 약하고, 신앙을 버린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마할랄렐이 아니라 야렛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관심이 있음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배우기 어려운 공과다. 하나님께서 영광이시라는 것을 누린 후 우리는 다른 형제, 자매들과 다른 모든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교제하기 위해 내려가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그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다.
참된 야렛이 되신 주 예수님
주 예수님께서 땅에 계셨을 때 진정한 야렛이 되셨다. 빌립보서 2:6-9절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사도바울은 주님의 내려가시는 것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했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셨다. 하지만 그분은 스스로 내려오셨다. 그분은 종이 되셨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다. 그분은 사람의 방식으로 사셨다. 그분은 스스로 낮추시고, 순종하셨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까지도 순종하셨다. 주님은 끊임없이 내려놓으셨다.
복음서에서 주 예수님은 항상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계셨다. 심지어 그분은 “죄인들의 친구”로 불리셨다(마 11:19). 그분은 그들에게 접근하실 수도 있었고, 진정으로 사랑하셨다. 하지만 그분은 그들의 죄와 세속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야렛이 되는 것이다.
내려놓고, 내려가는 것은 우리가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주의 긍휼로 우리가 어떤 자람이 있고, 영적인 성과가 있다면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배울 것이다. 그것은 아주 평범해져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에 너무 의식할 필요가 없다. 주님은 생각하지도 않으셨다.
“내가 사람이 될 거야. 그리고 종이 될 거야. 나 스스로 겸손한 자가 되고,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할 거야.”
이렇게 주님께서 생각하시고 땅으로 오시고, 그분이 내려놓는 방법이었다면 그분은 정말 이상한 예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분이 정상적으로 내려놓고, 내려오신 것이다. 그분은 본성적으로 내려놓고, 내려오는 인격이 되셨다. 우리가 생명의 노선에서 자라면 자랄수록 이것이 우리의 체험이 돼야 한다. 우리가 영적으로 자란 만큼 우리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돌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그들 주변에 정상적으로 있으면서 그들과 시간을 방법을 배우고 있다. 이것이 야렛에 대한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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