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새로운 시작과 향년을 셈

Hernhut 2018. 5. 31. 00:30

 

창세기 4장에서 모든 부정적인 것이 끝난 후 우리는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 창세기 5장은 생명 노선의 새로운 시작이다. 아주 신선하게 시작한다.

이것은 아담의 세대들에 대한 책이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날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그를 만드시되 그분께서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고 그들을 창조하시던 날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의 이름을 아담이라 부르시니라.”(5:1-2).

이 구절로 하나님은 앞장에서 일어났던 모든 것을 무시하신 것처럼 보인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아벨을 살해했다. 그런 뒤에 가인의 노선은 그의 후손으로 계속 이어졌다. 결국, 가인의 노선은 라멕의 세 아들을 통해 전체적인 인간 문화와 사회를 낳았다. 창세기 4장은 끝부분에 긍정적이다.

셋에게도 아들이 태어나매 그가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더라.” (4:26).

창세기 5장에서 우리는 갑자기 새로운 시작을 접한다.

이것은 아담의 세대들에 대한 책이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날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그를 만드시되

아벨이 살해되고, 가인의 노선이 이어지는 모든 사건이 마치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다뤄졌다. 창세기 5장에 가인의 노선은 모두 사라졌다.

그분께서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고 그들을 창조하시던 날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의 이름을 아담이라 부르시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하신 창세기 1장과 거의 똑같다. 창세기 5장에 와서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을 하신다.

 

하나님의 기억하시지 않는 능력

 

창세기 5:3절은 우리에게 말한다.

아담이 백삼십 년을 살며 자기 모양대로 자기 형상에 따라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더라.”

아벨은 사라졌고, 가인도 사라졌다. 이제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창세기 5장은 우리에게 아담이 130년을 살면서 셋을 낳았다고 말한다. 창세기 4장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사라졌다. 이미 지나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우는 능력을 갖추고 계심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창세기 5장에서 하나님은 4장에 있었던 부정적인 모든 것을 지우셨고, 새로 시작하셨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인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왜 우리는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우는 능력을 갖추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좋은 기억을 하셨다면 우리는 아주 심각해질 것이다. 우리 모두 문제 덩어리다. 우리가 창세기 4장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 모든 이야기가 얼마나 사악하고, 끔찍하고, 심각한지를 알 것이다.

창세기 4장은 끝부분만 선하다. 그 부분에는 셋이 에노스를 낳았을 때 비로소 사람은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4장은 끔찍하고 거의 읽을 가치가 없다. 그러나 5장에서 성경은 아담에게로 돌아간다. 아담은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을 셋이라고 불렀다. 아담의 첫 번째 아들의 이름은 무엇이었는가? “이었다. 우리는 물을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이미 가인과 아벨을 낳지 않았는가?”

창세기 5장은 아담의 아들은 셋이었다고 말한다. 4장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지우셨다.

 

주님과 함께하면 항상 새로운 시작이다.

 

하나님은 늘 새로운 창세기를 쓰시는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이것은 아담의 세대들에 대한 책이라.”(5:1)

마치 창세기 1장에서 바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축복하셨으며 그들의 이름을 아담이라 부르셨다. 그런 후 아담은 그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의 이름을 뭐라고 불렀나? 아담은 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그러나 창세기 5장에는 가인도, 아벨도, 허무도 아니다. 하나님의 시야에는 오직 셋뿐이다. 오직 임명된 자뿐이다. 창세기 4장에 있던 부정적인 것, 기쁘지 않은 것은 모두 사라졌다. 창세기 5장에는 생명의 노선 따른 새로운 시작이 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체험하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하고, 그분의 임재 안에 있으면 항상 새로운 시작이다. 이것은 놀랍고, 위로받는 깨달음이다.

 

생명의 노선에 있는 사람들의 년수를 셈

 

창세기 5:5절에 의하면 아담은 930살을 살았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는가? 930년이면 거의 인류 역사의 의 세월이다. 이것은 가인의 노선과 대조가 된다. 가인의 노선, 지식의 노선은 아주 빨리 움직인다. 가인은 에녹을 낳고, 에녹은 이랏을 낳았다. 이랏은 빠르다를 의미한다. 성경은 지식의 노선의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아주 조금 돌보시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창세기 4:18절에 말씀하신다.

에녹에게 이랏이 태어났는데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두사엘을 낳고 므두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그들의 나이가 세어지지 않았다. 보아하니 하나님은 지식의 노선에 있는 이들을 빨리 살고, 빨리 죽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몇 년을 사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위해 그들의 발명품들을 사용하실 수 있으시지만, 그분은 그들의 나이를 세지 않으신다. 반면에 아담의 나이를 세셨다. 성경은 아담이 130살에 셋을 낳았다고 기록한다. 그가 셋을 낳은 후 800년을 더 살아 전부 930살을 살았다. 이것은 생명의 노선에 있는 모든 이의 나이를 세셨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람들은 장수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년수가 지식의 노선에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눈에서 세어지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노선에 있는 년수만 세신다. 사람이 창세기 4장의 원칙으로 가인의 노선, 지식의 노선으로 산다면 그들이 사는 년수는 얼마나 될까? 답은 제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노인에게 물을지도 모른다.

어르신의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그는 몇 살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지만 창세기 4장에 의하면 그의 대답은 틀렸다.

그가 대답해야 하는 정답은 제로. 창세기 4장에 많은 사람이 살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성경은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시각에는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년수를 기록하지 않는다.

하지만 창세기 5장에서 우리는 생명의 노선으로 들어간다. 생명의 노선에 있는 이들의 삶은 가치가 있다. 하나님은 구체적이고 계획적으로 그들의 년수를 세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지신다. 성경은 생명의 노선에서 아들을 낳기 전 몇 년을 살았는지, 아들을 낳은 후 몇 년을 살았는지를 나타낸다. 그런 다음 성경은 그들이 모두 얼마나 살았는지를 정확하게 우리에게 말을 한다. 생명의 노선에 있는 이들의 년수만이 하나님에 의해 주의 깊게 세어졌다.

우리는 분명한 비전과 이해력을 가져야 한다. 첫째로 앞 세 장에서 우리가 본 것처럼 모든 땅은 사탄의 통제 아래에 있다. 우리가 세상에서 추구하기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사탄에 의해 사용되어 끝날 수 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의 노선에서 살기를 갈망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의 년수를 세시기를 갈망하시지만, 그분은 우리가 생명의 노선에 사는 년수만 세신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오랫동안 살 수 있다. 하지만 이 많은 년수 가운데 우리가 구원받은 후까지도 생명의 노선에서 얼마나 살까? 우리가 생명의 노선에서 보내는 년수가 하나님의 시야로 세시는 유일한 년수다.

 

셋이 에노스를 낳음 :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음

 

아벨의 죽음 이후 생명 노선은 아담의 아들 셋으로 계속 이어졌다. “임명된, 정해짐을 의미하는 셋은 아벨의 계속이었다. 셋은 에노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에노스라는 이름은 약한, 영원히 살 수 없는을 의미한다. 셋은 임명되고 정해진이였지만 그는 자기 아들에게 영원히 살 수 없는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셋이 자기 아들 에노스라 붙인 것은 내는 내가 정해지고 임명된 자인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또한 내가 약하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나는 나와 내 후손이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주님, 제가 영원히 살 수 없으므로 전 당신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체험 가운데 셋에서 에노스까지 자라는 것이다. 임명되고 정해진 사람이라고 깨닫는 사람은 아들을 낳은 사람이어야 하고 영원히 살지 못하는이라는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야 한다. 우리가 정해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아들에게 영광, 영광스러운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하심, 정하심을 체험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영광스러운 이들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 안에서 자랄 때 우리는 우리가 약하고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몹시 짧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제한을 받는다. 우리는 시간이 별로 없다. 이것은 에노스를 의미한다. 우리가 생명의 노선에서 자람으로 우리는 우리의 약함과 언젠가는 죽어야 함을 인식한다. 우리가 에노스요, 영원히 살 수 없음을 안 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성경은 에노스가 태어난 후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더라.”(4:26)

우리가 약하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주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에노스는 주의 이름을 처음 부른 사람이었다.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우리가 생명의 노선에서 살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부를 것이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노선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 가인은 후손을 낳았다. 가인의 노선은 라멕으로 이어졌는데 그는 타락한 사람에서 나오는 총체적인 사악한 본성을 가진 자였다. 하지만 생명의 노선에 있던 사람 아벨은 비전을 보았고, 그 비전을 따라 살았다. 아벨의 노선은 에노스를 낳았고, 그의 이름은 영원히 살 수 없는이라는 의미다. 에노스가 자기가 약하고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주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주님을 부를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부르면 부를수록 주님은 우리의 체험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노선에서 셋으로부터 에노스까지 자라는 것이다.

 

에노스가 게난을 낳음 : 우리의 약함에서 얻음

 

창세기 5장은 생명의 노선의 장이다. 셋이 부활 안에서 아벨을 상징하기 때문에 아벨은 언급되지 않는다. “임명된, 정해진을 의미하는 셋은 약함, 영원히 살 수 없는을 의미하는 에노스를 낳았다. 우리가 약함, 제한, 영원히 살 수 없음을 알 때 우리는 생명의 노선에서 에노스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럴 때 이 약함과 제한에서 우리는 아들을 얻는다. 에노스의 아들은 게난이라고 불렀다(5:9). 게난은 가이난Cainan이라는 철자를 붙이고 번역할 수 있다. 게난은 가인과 아주 유사하다. 가인은 얻다를 의미하고 게난 역시 얻다를 의미한다. 생명의 노선에도, 지식의 노선에도 얻는 어떤 것이 있다.

영적인 것들을 얻는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을 얻는 것과 아주 다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쉽게 얻고, 습득한다. 지식 노선의 원칙은 어떤 것을 얻기를 원하고, 자기를 시간과 정력을 쏟으면 곧 얻을 것이라는 논리다. 게다가 그렇게 해서 얻으면 아주 자랑스럽고, 그것에 관해 자신이 있어 할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이로써 우리는 다른 원칙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크게 되거나, 자만심을 갖기 원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가 약하고, 깨지기 쉽고, 제한적이고, 덧없다는 것을 알기 원하신다. “영원히 살 수 없는에노스는 얻다의 게난을 낳았다. 우리가 약하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생명의 노선에 있는 영적인 것을 얻을 것이다. 게난만이 에노스의 약함에서 온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것을 얻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자신감을 건축하고 재건축해야 한다. 우리는 격려를 받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생명의 노선에 있는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속한 곳에 앉아야 한다. 이것은 높여지고, 임명되고 정해진 셋의 체험이다. 그런 후 우리는 우리가 부서지기 쉽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에노스에 대한 체험이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보아야 한다. 에노스가 태어났을 때 성경은 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4:26). 우리가 깨지기 쉽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 주 예수님!”하고 부르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의 약함과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으로 주님을 찾음으로 우리는 영적인 풍성을 얻을 것이다.

게난은 에노스에게서 온다. 우리가 생명의 노선에서 얻는 풍성은 우리의 약함에서 온다.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영적인 어떤 것을 얻을 수 있다. 영적인 얻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한 형제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전 이겼습니다.”라고 부르짖을 때 그의 체험을 신뢰하기가 어렵다. 우리 영 안에서 이 이김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 형제가 눈물로 회개한다고 하자.

주님, 전 너무 가련하고 부족합니다. 전 너무 약하고, 제한적입니다. 전 당신께서 절 사랑하시는 것조차도 모릅니다. 전 당신께서 제게 긍휼을 베푸시는 이유를 모릅니다.”

우리는 이 형제가 자라고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생명의 노선에서 에노스를 체험하고 있다. 이 형제가 자기의 약함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게난의 체험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영원히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절실하게 주님을 추구하고, 주님을 부름으로 그는 생명의 노선에서 영적인 풍성을 얻을 것이다.

 

생명의 노선에서 얻는 것은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앞서 가인의 노선에 있는 일들은 아주 빨리 지나간다는 것을 보았다. 가인이 에녹을 낳고 에녹의 이름으로 도시를 건축했다. 에녹은 빠르다라는 이름을 가진 이랏을 낳았다. 가인의 후손에서 나오는 인간 문화는 세 가지 방면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영적 생명, 생명의 노선에 있는 일들은 그렇게 빨리 지나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창세기 4장에 있는 이들이 그들이 아들을 낳기 전 몇 년을 살았는지를 세었는가? 그들 중 몇 명은 100년쯤 살았을 것이다. 왜 생명 노선에 있는 이들이 그렇게 나이 들어 자녀를 낳았는가? 생명의 노선에 있던 이들도 다른 아이들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젊었을 때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생명의 노선에 있었던 이들에 의해 많은 아이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성경은 그들 모든 이를 기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그들을 세지 않았다. 각 사람의 때에 따라 하나님은 아들이 가치 있게 태어날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세어질 만큼 생명의 노선에 있는 누군가가 태어날 때 성경은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드디어 이 아이가 내 노선에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영적인 것은 빨리 나아가지 못한다. 영적인 것들은 냉큼 우리가 이긴다.”고 부르짖지 못한다. 영적인 것들은 오랜 기간이 지나서 얻게 된다. 영적인 것들은 우리의 약함, 우리의 깨지기 쉬움을 통해 얻게 된다. 우리가 누구이고, 얼마나 주님이 필요한지를 깨닫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때 우리는 주님에 의해 세어지지 못했던 많은 것을 산출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주님께 돌이키고, 절망 가운데서 그분을 부를 때 우리는 영적인 얻음을 가질 수 있다.

 

우리의 갈망 : 영적인 것을 얻을 준비가 되는 것

 

우리의 갈망은 에노스에서 게난까지 자라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게난이 되는가? 어떻게 우리는 영적인 풍성을 얻는가? 우리는 우리의 약함과 제한에 대한 이해로 영적인 풍성을 얻는다. 우리는 강한가 아니면 약한가? 우리가 약하지 않다면 우리는 이미 에노스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게난의 체험을 얻을 수도 없다. 우리가 강하고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생명 안에서 우리가 성장하는 것은 방해를 받을 것이다. 우리가 가장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성장의 끝자락에 있는 것이요, 영적인 것을 얻는 것이다. 우리가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알 때 영적인 것을 배운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특히 사실이다. 우리는 늘 주님께 말해야 한다.

주님, 제가 어떤 것을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긍휼입니다. 제가 한 사람을 구원받도록 도울 수 있다면, 안 사람을 자라게 하고, 어떤 방식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다면 그것 모두 당신의 긍휼입니다. 저는 약하고,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부서지고 상처 입기 쉽습니다. 제한을 받습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것 모두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제가 영적인 것을 얻을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에서 게난의 영적 얻음이 온다. 우리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 때 생명의 노선에 있는 영적인 것을 얻을 준비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