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가인과 아벨 : “얻음”과 “자만심, 혹은 허영심”

Hernhut 2018. 5. 22. 22:02


 

인류의 두 노선에서의 전쟁

 

1장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 가운데 두 생명의 방식을 묘사하셨다. 이 두 생명의 방식은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예표 되었다. 사람들은 두 번째 나무가 악의 나무라고만 가끔 생각한다. 실제로 이 나무는 선과 악을 포함하는 지식의 나무다. 지식의 나무는 논리의 나무다. 이 논리는 선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생명은 한 노선이요, 지식과 논리는 또 다른 노선이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은 두 나무, 두 노선뿐이다. 우리는 생명을 따라 살거나 아니면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악한지를 이해하는 것에 따라 살고, 지식을 따라 살 것이다. 우리가 생명의 노선으로 살지 않을 때마다 우리의 삶은 자동으로 우리의 논리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모든 사람은 논리의 어떤 양식에 따라 산다. 우리의 논리는 우리의 문화, 우리 부모의 가르침, 심지어 성경의 교리에서 나올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에 따라 살 때 우리는 우리의 논리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노선에 따라 사는 것과 다르다.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사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노선으로 계속해서 타락해 왔다. 그 역사의 중심에서 하나님은 지식의 노선 밖으로 나와서 생명의 노선 안으로 들어오도록 어떤 사람들을 계속해서 부르시고 계시다. 아담이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어 타락했을 때 모든 인류는 그 노선 안으로 이끌려졌다. 하지만 아담 밖에 계신 주님은 그분께서 잃은 것을 회복하시기를 갈망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생명 나무로 되돌아오기를 갈망하신다. 아담의 첫 번째 두 후손에게는 두 노선이 있었다. 하나는 가인의 후손이요, 다른 하나는 아벨의 후손이다. 가인은 지식의 노선이었고, 아벨은 생명의 노선이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아담은 셋이라는 또 다른 아들을 얻었다. 셋은 실제로 아벨 노선의 연속이었다.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은 이 두 구별되는 노선이다. 셋에서부터 노아까지 생명을 따른 노선이다. 노아 시대 이후 사람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타락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도 다시 두 노선이 있었다. 한 노선은 이스마엘이요, 다른 노선은 이삭이다. 이삭은 생명의 노선이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끊임없이 서로 대항하려고 애를 썼다. 이삭에게도 두 노선이 있었다. 한 노선은 에서요, 다른 노선은 야곱이었다. 야곱은 생명의 노선이었다. 이 두 형제는 서로 대항했다. 온 인종의 역사가 두 노선 사이에 전쟁하는 역사다. 하나님께서 땅 위에 두 노선을 두셨기 때문에 인류는 늘 싸움하고 있다. 모든 인간 존재는 이 두 노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내가 생명의 노선 안에 있는가? 아니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노선 안에 있는가?”

우리가 생명의 노선 안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갈망하시는 것에 따라 사는 것이다. 우리가 지식의 노선, 논리 심지어 좋은 논리를 따라 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거절하시는 합당치 않은 노선 안에서 사는 것이다.

 

지식 노선의 시작 : “얻음

 

인류 역사에서 지식의 노선과 생명의 노선은 가인과 아벨로 시작한다. 가인의 이름은 얻음을 의미한다. 사람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은 여자의 씨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3:15). 아담과 이브가 가인을 낳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다. 그들은 십중팔구 이 아들이 서펜트(나아스)의 머리를 상하게 할 약속된 씨였다고 생각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어 그 서펜트(나아스)를 미워해야 했다. 사람들의 타락 이후 육체적인 세계는 철저히 변했다. 예전엔 태양이 쾌적했지만, 지금의 태양은 사람에게 땀을 흘리게 한다. 예전엔 동물들이 해롭진 않았으나 친했던 동물은 위험해졌다.

아담과 이브는 아주 철저한 변화를 체험했고, 이 모든 것이 서펜트(나아스)의 유혹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자의 씨가 서펜트(나아스)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담과 이브가 아들을 낳았을 때 그의 이름을 얻음이라는 의미로 가인이라고 불렀다. 이 가인이라는 이름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응답이었다고 믿었던 것을 가리킨다.

아담과 이브는 기뻐해야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 아들은 서펜트(나아스)의 머리를 상하게 할 거야!”

그들은 심지어 서펜트(나아스)의 머리가 상하게 된 후였고, 땅의 모든 것이 처음으로 회복되어 되돌아갈 것이라고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렇게만 되었다면 사람은 더 힘들게 일할 필요도, 먹을 것을 위해 땀 흘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저주가 지나갈 것이고, 일이 타락 이전과 똑같아졌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질 수 있도록 가인이 자라기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가인이 자라면 자랄수록 그들은 가인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인은 정말 실망스러웠다. 아담과 이브는 가인이 서펜트(나아스)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명 노선의 시작 : “허영심, 자만심

 

아담과 이브의 두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 그의 이름을 아벨이라 지었다. 아벨은 자만심, 허영심을 의미한다. 그들의 두 번째 아들 아벨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했다.

모두 허영심이야. 이 아들 역시 일하지 못할 거야. 하나님께서 절대 이 두 아들로 서펜트(나아스)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전에 있었던 땅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거야. 모두 소망이 없어.”

두 아들 중 하나도 서펜트(나아스)의 머리를 상하게 하게 하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된 걸까? 무엇이 예전의 아름답고, 평온한 상태로 회복된 창조의 소망을 본다는 것이 어떻게 된 걸까? 이와 같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는 잘못된 나무에서 나는 하나의 작은 열매를 먹음으로 황폐해졌다.

아담과 이브는 처음에 있었던 것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첫째 아들은 일을 해내지 못했고, 그들이 모든 현실이 절망 가운데 있을 때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그들은 또 타락 후 인간 존재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다. 가인에게 실망한 후 아담과 이브는 인산의 삶이 헛되고, 허영심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두 번째 아들을 아벨이라고 이름 지었던 이유다.

가인의 태어남은 격앙과 기대였다. 아벨의 태어남은 실망과 헛됨이었다. 가인은 내가 얻었다.”를 의미한다. 아벨은 모든 것이 쓸모없다.”를 의미한다. 이 두 이름은 아주 의미 있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 즉 얻음과 허영심은 생명의 두 방식을 대표한다. 가인과 아벨은 인류 역사에서 지식의 노선과 생명의 노선에 대한 시작이다. 가인의 노선은 확신으로 시작한다. 아벨의 노선은 헛됨으로 시작한다. 지식의 노선은 내가 얻었다.”로 시작하고, 생명의 노선은 내가 소유하지 못한다.”로 시작한다. 생명의 두 방식은 이 두 이름으로 특징짓는다.

 

가인과 아벨에 대한 재평가

 

가인과 아벨이 자라서 자기의 아버지에게 사람 타락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우리는 앞 장에서 아담이 어떻게 그들의 어머니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는지를 아마 설명했다고 보았다. 아담은 타락 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가인과 아벨에게 말했다.

사람은 수고하고, 먹기 위해 어떤 것을 키우고, 경작물들을 수확하기 위해 땀을 흘려야 한단다.”

예전에 식량은 이미 그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구할 수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식량을 위해 땅을 경작해 수확해야 했다. 그 말을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아벨은 아버지에게 물었을 것이다.

아버지, 왜 이러한 옷을 입지요?”

아담은 그에게 대답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것이란다.”

가인과 아벨은 부모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고, 아버지의 말에 대해 이해했다. 가인은 이렇게 이해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땅에서 수고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는 농부가 될 거야.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해.”

하지만 아벨은 가인과 달리 이해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덮기 위해 희생물을 준비하셨어. 그러므로 난 목동이 될 거야.”

또 아벨은 아버지 말을 달리 알아들었다.

내 부모가 자신들을 덮기 위해 나뭇잎을 사용했을 때 하나님은 만족하지 않으셨어. 그들은 숨고, 감히 하나님을 접촉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 하나님께서 사람아, 어디에 있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그분을 두려워했었지. 하나님께서 양을 죽여 그들에게 옷 입히기 위해 가죽을 만들어 주셨어. 그때에야 비로소 나의 부모는 두려워하지 않았지. 하나님은 동물 가죽으로 덮었을 때 만족하셨어.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희생물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어.”

가인만 객관적으로 이해했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아벨은 계시를 받았다.

나는 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공급에 따라 살아야 해.”

 

가인의 번성해 가는 생명과 아벨의 빈약해지는 생명

 

가인과 아벨의 삶은 그들의 다른 이해도에 의해 정해졌다. 가인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이해 때문에 정해졌다. 반면 아벨은 하나님의 공급에 대한 계시로 정해졌다. 그들 사이에 있는 중요한 차이는 가인이 수고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었지만, 아벨의 삶은 그를 부끄럽게 할 뿐이었다. 아벨의 삶은 어떤 것도 산출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의 삶과 수고로 어떤 열매도 수확할 수 없었다. 아벨은 가인에게 의지해서 사는 사람이 되었다. 이때까지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 않았었다. 아벨은 자신의 목동 노릇을 의지해 살 수 없었다. 그는 들에서 수확하기 위해 수고한 가인을 의지해서 살 수 있었다. 가인은 아벨을 살리고, 돕기 위해 어떤 것을 수확해야 했다. 가인의 삶은 표면적 성공을 한 사람이었고, 생산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벨의 삶은 영광이 없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모든 것에는 열매”, “결과로 판단한다. 열매와 결과는 우리의 수고로 산출된 가시적인 어떤 것이다.

우리가 소설 읽기를 즐거워한다면 우리는 열심히 일할 수 있고, 결국 작가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음악을 좋아한다면 훈련을 하여 음악가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아주 좋아하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면 결국 우리는 어떤 것을 취할 것이다. 우리가 자기를 투자한다면 우리는 전람할 어떤 것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보여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런 면에서 유일하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때 트로피는 없다. 우리가 얻는 가시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원한다면 처음부터 우리는 이것에 관해 아주 분명해야 한다.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내가 주님을 따를 것이라면 표면적으로 볼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거나 인정할 사람이 없다. 내 삶은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할 주제 거리가 될 뿐이다. 다른 모든 사람은 그들이 사는 것 어떤 것을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삶은 다를 것이다. 나는 계시에 따라 살 것이다.”

이것이 아벨의 삶이었다. 아벨의 이름이 자만심, 허영심, 이라는 의미가 된 이유가 이것이다. 아벨의 삶은 계시의 생명이다. 그의 삶은 표면적 성공의 생명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시를 따를 때 우리는 우리 모든 삶이 어떤 사람에게서 절대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삶이 의미 없고, 덧없음을 느낄 것이다.

아벨의 삶은 공허했다. 그의 삶은 덧없었다. 우리가 아벨 노선에 있다면 우리 또한 아벨의 깨달음을 가질 것이다.

내 삶, 내 이름은 덧없음, 빈약함, 자만심, 허영덩어리야. 나는 하나님만 갈망해. 난 아무것도 없어. 하나님뿐이야. 내 이름은 가인이 아니야. 왜냐면 난 아무것도 얻지 못해. 가인은 자신을 위해 어떤 것을 가질 수 있어. 하지만 난 어떤 것도 가질 수 없어. 내 이름은 아벨이야. 내 삶은 껍데기뿐이야. 사람들이 내 삶을 볼 때 내 존재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거야. 하나님 이외에 개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지.”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비전을 보고 아벨의 노선에서 살까? 그 열쇠는 우리 영 안에 있다. 우리가 우리 영을 만질 때마다 주님에 대한 비전은 우리 영 안에 있다. 영 안에 있는 인격은 비전이 있는 인격이다. 우리가 우리 영을 만질 때 아벨이 자기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에서 어떤 것을 본 것처럼 우리 또한 어떤 것을 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관해 놀랄지도 모른다. 아벨의 노선에 있는 우리는 미래가 없다. 우리가 우리의 이름이 덧없음, 빈약함, 자만심, 허영덩어리라는 것을 안다면 이 땅에서 더 얻을 것이 없다는 의미다. 우리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될 뿐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갈망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가 이런 깨달음으로 산다면 주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방법을 가지실 것이다. 우리의 삶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비전과 그분의 구원으로 정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증거에서 나오는 아벨의 삶

 

아벨은 하나님의 공급과 관련 있는 비전을 보고 그 비번에 따라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이 정해졌지만 아무도 그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벨은 왜 그런 삶을 살았는가? 그는 왜 식량을 위해 가인에게 의지했는가? 왜 아벨은 들에서 수고하여 자기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나? 왜냐면 아벨은 자기를 위해 죽을 구세주를 의미하는 피 흘림 없이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벨이 양을 제물로 드린 이유가 이것이다.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사랑하고,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셨는가? 왜냐면 아벨의 제물이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증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로 나를 위해 죽어야 할 누군가를 안다. 내가 하나님께 양의 첫 것을 드림으로 나는 이 땅에서의 내 삶이 누군가의 구원 아래에 있다고 그분께 말하는 것이다.”

아벨은 그 누군가가 주 예수님이신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장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피 흘리는 것으로만 그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음을 알았다. 이것이 그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공급이다.

 

자기 동생을 살해함으로 가져오게 된 가인의 삶

 

가인의 삶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려고 하는 인간의 이해도로 정의되었다. 가인은 생각했다.

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어. 난 하나님께서 하라고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할 거야.”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보시지 않았던 이유가 이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자기의 이해도를 따른 가인의 삶의 결과는 자기의 동생을 살해하게 되었다. 가인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 수고했던 바로 그 밭에서 아벨을 살해했다. 가인은 땅을 파는 데 사용한 도구로 자기 동생을 살해했을 수도 있다.

왜 가인은 그렇게 화가 났나? 단지 아벨의 제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가인의 제물이 거절된 것만이 아니었다. 가인은 아벨이 어떤 것을 먹기 위해 자기를 의지했던 것 때문에 화가 났다. 아벨은 자기 형을 의지해서 살았다. 가인은 아벨이 농부가 되어 자기 식량을 위해 일을 하는 직업을 갖기 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벨이 농부가 되었다면 그는 자기의 입장을 잃었을 것이다. 아벨의 입장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준비하신 구원만을 바탕으로 한 그의 삶을 살아야 했다. 설령 아벨이 포기하더라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을 위해 정하신 것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벨은 가인의 수고에 의지해서 살았지만,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여졌고, 가인의 제물은 거절되었다. 이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에 분노할만한 충분한 이유다.

 

셋의 태어남은 아벨의 부활 의미함

 

아벨이 살해된 후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또 다른 아들을 주셨다. 그들은 그를 이라 불렀다.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셋이라는 이름은 정해짐, 임명됨을 의미한다. 아벨의 죽음 후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정하셨다. 우리는 아벨의 죽음 없이 셋의 정해짐이 있을 수 없음을 보아야 한다. 셋은 아벨의 연속이었다. 아벨과 셋은 생명 노선에 있는 한 사람이다. 하지만 거기엔 관련된 과정이 있다. 아벨은 확신하는 입장을 바탕으로 하는 정해진 삶을 살았다. 그 입장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준비하신 희생과 구원에 대한 비전을 따른 것이었다. 아벨의 삶, 허무의 삶은 요절로 끝났다. 하지만 아벨의 죽음 후 하나님은 부활 안으로 그를 데려오셨다. 아벨은 정해진 자, 셋이 되었다. 아벨의 죽음 후 부활의 원칙 안에서 셋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해졌다.

 

우리가 교회 생활에서 체험해야 할 삶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이러한 이해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원칙을 결코 떠날 수 없다. 우리는 지식의 노선인 가인의 노선을 피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규정되고, 명령, 그리고 논리적인 이해로 살지 말아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생명과 계시의 노선, 아벨의 노선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말해야 한다.

주님, 이 땅에서의 제 존재는 허영덩어리요, 비어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당신 외에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당신만을 가져야 합니다. 당신은 저의 구세주이십니다. 당신은 저의 구원이십니다. 저는 당신이 제게 보여주신 비전을 따라 정해진 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제 삶은 사람들에 의해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삶은 당신에 의해 인정받는 것뿐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헌신인가! 우리가 보는 비전은 조절되고, 훈련된 생명으로 안내한다. 비전을 보는 사람은 그 비전에 따라 산다. 아벨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비전을 따라 정해졌다. 목동으로서 그의 제물은 그리스도로 그려졌다. 그것은 아벨이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했다는 깨달음의 증거였다.

결국, 아벨의 정해진 삶은 형의 손에 의해 육체적인 죽음을 가져왔다. 하지만 죽음을 통해 아벨은 상징적으로 부활을 누렸고, 체험했다. 이 부활은 셋에 의해 구현된 것처럼 정해짐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비전을 따라 정해진 아벨의 삶에 대한 영광스러운 결과다. 이것은 생명 노선에서의 우리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