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하나님과 관련된 모세의 비전

Hernhut 2017. 8. 28. 17:00

하나님께서 모세가 파라오에게 말하시기 전 모세는 자신을 알아야 했다. 하나님은 모세를 가르치기 위해 세 가지를 사용하셨다. 그의 구불구불한 재능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그의 지팡이를 사용하셨다. 그의 썩어 문드러지는 본성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그의 손을 사용하셨다. 그리고 세상의 속임수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물을 피로 바꾸셨다.

 

모세의 지팡이가 옛 뱀(serpent)가 됨

양치기로서 모세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여러 해 동안 날마다 자신의 지팡이를 신뢰했다. 하나님은 그의 지팡이가 파라오 앞에서 섰을 때 기댈 수 있었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통과하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신성한 권위의 지팡이가 되기 원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닥에 그의 지팡이를 던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마자 지팡이가 옛 뱀이 되었다. 모세는 옛 뱀(지팡이)을 피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옛 뱀의 꼬리를 붙잡으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가 꼬리를 붙잡았을 때 옛 뱀은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4:2-4). 이것은 모세에게 큰 공과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의 지팡이는 우리가 뽐내는 달란트나 은사다. 어떤 사람은 자신들이 복음을 잘 전파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또 큰 진리를 가르친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을 구원받게 할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도들을 안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이 권위의 지팡이나 아니면 옛 뱀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하고 뽐내는 은사나 달란트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되돌아 올 해를 끼치는 옛 뱀이 될 것이다.

오늘 읽는 이 메시지가 부정적이지 않다. 이 메시지를 읽는 이들은 분명해 질 것이고, 나의 말하는 은사는 살아있게 된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나는 나의 말하는 것이 나를 물어뜯는 옛 뱀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메시지가 옛 뱀이 되게 하는 것이라면 옛 뱀은 영적으로 나를 죽일 것이다. 나는 주님께서 내게 부탁하신 것에 대해 실패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바로 그 은사가 주님을 섬기는 위치에서 의지하는 권위의 지팡이가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를 잘못 사용했을 땐 나를 멸하려는 사탄에게 사용될 수 있다. 우리는 아주 주의해야만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달란트는 우리를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 속에 숨어 있는 옛 뱀을 폭로하셨다. 이 광경이 모세가 두려워 도망친 이유다. 같은 방식으로 그분은 가끔 우리의 달란트 속에 숨어 있는 옛 뱀을 폭로시키신다. 그렇게 폭로하심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 할 것이다. 우리가 이기는 이들, 두 번째 모세라고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자랑거리를 말하고, 옛 뱀을 내보낸다. 승리 대신 우리는 실패자로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토록 크지 않고, 명예롭지 않다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도록 이 실패를 사용하신다. 이것은 배우기가 어려운 공과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달란트를 소중히 여기고, 우리의 은사가 아주 쉽게 우리를 물어뜯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옛 뱀의 꼬리를 붙잡음

우리는 옛 뱀의 꼬리를 붙잡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은사를 발휘하고, 모든 사람이 우리를 칭찬하려고 할 때 우리는 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잘 한다면 그것은 주의 은혜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의존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잡아야 하는 꼬리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가장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영적으로 빈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하고 주님을 신뢰하고,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할 수 있으면 있을수록 이것은 더 어렵다. 그분께서 우리를 축복하면 하실수록 옛 뱀의 꼬리를 붙잡기가 더 힘들다.

우리 각자가 우리의 옛 뱀이 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것을 가지고 있고 나는 나의 것을 가지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시는 것마다 잠재적인 자랑의 요인이 있고, 옛 뱀이 될 수 있다. 결국 그 옛 뱀은 우리를 상처를 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달란트를 신뢰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신뢰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신뢰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신뢰할 수 있다.

나는 30년 동안 수고했다. 30년 동안 신약교회와 교회행정을 위해 일을 했다. 나는 이 일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두드러지는 말이라는 것을 안다. 내가 나의 삶과 내가 수고한 것이 자랑거리이거나 뽐내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때 이후로 하나님이나 사람들에게 아무런 빚도 지지 않았다. 다른 말로 나는 내 수고가 얼마나 큰지를 자랑하지 않았다고 느꼈지만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 채무를 갖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내가 다니며 전달한 메시지는 내가 진 많은 채무를 지불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채무자라는 것을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칭찬해야 하는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지팡이에 숨어있는 옛 뱀의 위험성을 배운 사람들만이 자신들이 특별하지 않고, 사람들과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를 안다.

이러한 깨달음이 없이 우리는 많은 시간을 낭비할 수 있고, 우리의 외견상으로 보이는 성공에 의지해 사는 이들이 될 수 있다. 내가 결혼을 했을 때 많은 신문들을 보았다. 나의 아내는 내가 신문을 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종종 성경을 들고 내 곁에 와서는 그 성경을 읽었다. 결국 나의 아내가 이렇게 행동한 것 때문에 주의 봉사자로서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나의 형제자매들에게 내 시간을 빚을 졌다. 그 후 나는 나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수고를 해야 했다.

 

모세의 손이 나병이 일어남

“{}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이제 네 손을 네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자기 손을 품에 넣었다가 품에서 꺼내니, 보라, 그의 손에 눈같이 나병이 생기니라. 그분께서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네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자기 손을 품에 넣었다가 품에서 꺼내니, 보라, 그것이 다시 그의 다른 살처럼 되었더라.”(4:6-7)

모세가 첫 번째로 자신의 품속에 그의 손을 넣었을 때 나병이 생겼다. 그가 다시 넣었을 때 건강한 손으로 회복되었다. 우리는 나병이 생길수도, 건강하게 회복될 수도 있다. 그것은 모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다루냐에 달려있다. 이것은 배워야 할 큰 공과다.

주님을 섬기는 모든 이들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품속에 우리의 손을 넣고 하나님께서 무엇이 진실인지를 우리가 바라보도록 하실 때에만 우리가 어떻게 나병이 생기는지, 어떻게 불결해지는지를 알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절대 신뢰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방법들을 절대 신뢰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 우리가 가장 순수한 때에 우리는 우리가 전혀 순수하지 않다고 주님께 말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불결할 때 우리가 주님께 온다면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어느 날 주님은 우리의 정확한 상태를 보도록 나의 눈을 열어주셨다. 내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본성적인 생명 안에 있다고 말할 때 나는 나의 본성적인 생명 안에 있는가? 내가 한 형제를 꾸짖을 때 나는 육체에 속해 있는가? 내가 주님께서 네 안에서 소망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을 할 때 나는 주님께서 내 안에 더 소망을 갖는다고 생각하는가? 갑자기 나는 주 예수님, 저는 정말 재밌는 사람입니다. 저는 두 본성이 있습니다.”라고 알기 시작한다. 나는 나를 사로잡던 것보다 더 불결한 질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것을 볼 때에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다. 우리는 가끔 아주 아름다운 어떤 것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다른 때에 그것이 아주 무서워질 수 있다. 오직 우리가 우리 자신에 관해 이것을 깨달게 된다면 우리가 주님을 귀하게 섬길 수 있다. 그것 없이 우리는 섬기려고 할지는 모르나 다른 사람들을 상처를 줄 것이다.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가끔 신성한 것들이 우리에게서 나온다. 하지만 우리는 타락한 아담의 아들이기도 하다. 우리에게서 가끔 타락한 본성이 나온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심각한 손상을 줄 수 있다. 우리가 섬기는 교회들과 우리와 함께하는 믿는 이들을 위해 우리는 무척 주의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의 일부가 나병이 있다는 것이고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가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은 어려운 교회를 보고서 그들이 그 어려운 교회를 돕는 것으로 영웅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섬기기 위해 섬기지 않는다. 우리는 따르는 이들을 얻기 위해 섬기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섬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로 생명을 나눠주려고 우리의 일생을 보낸다. 아무도 우리가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에 의해 쓰임받기 원하는 이는 없다.

내가 네게 모든 것을 주었다. 나는 이제 되돌려 받기 원한다.”고 우리가 생각하기 너무 쉽다. 거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다. 베드로가 주님께 이와 똑같은 말을 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19:27)

이 구절은 내가 읽을 때마다 나를 웃게 만든다. 베드로의 모든 것 그것을 저버렸다고 말했다. 그가 버린 것은 그의 구멍 난 낡은 낚시 배뿐이었다. 하지만 주님은 아주 품위가 있으셨다.

주님은 말씀하지 않으셨다.

나는 너의 배를 원치 않는다. 그것을 가지고 여기서 떠나라.”

주님은 말씀하셨다.

또 내 이름으로 인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모든 자는 백 배를 받고 또 영존하는 생명을 상속받으리라.”(19:29).

주님, 제가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라고 말할 때에 우리의 나병의 본성은 전람되고 있다.

우리가 주님은 나를 구원하십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건강해진다.

 

물이 피로 변함

그들이 만일 이 두 표적도 믿지 아니하며 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물을 취하여 마른 땅에 부으라. 네가 나일 강에서 취하는 물이 마른 땅에서 피가 되리라.”(4:9)

하나님께서 우리의 달란트와 은사의 기원이시기 때문에 구불구불한 지팡이는 하나님과 관련돼 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대한 경고이기 때문에 나병이 난 손은 우리와 관련돼 있다. 그리고 기만적이고 절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피로 변하는 물은 세상과 관련이 있다.

물은 성경에서 많은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물은 세상의 기만을 대표한다. 물은 우리의 갈증을 해소시켜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만족을 위해 세상으로 갈 때 그 물은 피로 물든다. 이것은 세상의 원칙이다. 세상의 물은 이것을 약속한다. 세상의 물은 저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세상의 물은 모두 우리의 피로 물들인다. 어떤 사람은 많은 권력을 행사하는 소송을 벌이지 않고,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세상을 피로 물들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그가 세상 사람과 똑같이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불이익을 당했어도 피로 물들일 줄 아는 이들은 주님께 맡긴다. 주님은 우리의 불이익을 책임을 지시는 분이시다.

이 말은 세상에서 종종 반복되는 말이다. 하지만 항상 화려한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사업가들은 이것은 간단한 사업이야.”라고 여러분에게 말할 것이다. 세상의 사업가들은 그들이 우리의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부분까지 소진시킨 후 우리를 해고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사용하기 위해 고용했고, 끝에서 우리는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안다. 하지만 교회는 다른 것을 한다. 교회는 항상 우리를 건축하고, 돕는 방법을 생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