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큰 구원을 체험함
주님께서 이집트에게 재앙이 닥치게 하시고, 유월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탈출시킨 후 그 길은 모세가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어내려고 만들어졌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를 위한 구원의 그림이라는 것이 정말 놀랍다.
하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을 산 후 그에게 나타내셨다. 그분은 그에게 그들의 노예 신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탈출시키도록 이집트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 아론과 백성들의 장로들과 모임을 가진 후(출 4:27-29)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 앞으로 가서 그에게 말했다.
“그 뒤에 모세와 아론이 들어가 파라오에게 고하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내 백성을 가게 하여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위해 명절을 지키게 하라”(출 5:1)
파라오는 그의 종들을 자유롭게 떠나게 해 달라는 그들의 요구를 일축함으로 비웃었다. 하지만 모세는 그가 한 번 당했던 것처럼 더는 실패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옛 뱀 지팡이를 가졌을지라도 분노로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모세와 아론은 간단하게 말했다.
“히브리 사람들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셨은즉 원하건대 우리가 사흘 길쯤 사막으로 가서 {주} 우리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게 하소서. 그분께서 역병이나 칼로 우리를 덮치실까 염려하나이다”(출 5:3)
그러므로 파라오는 이스라엘 후손들이 여호와라 하는 하나님을 가졌고, 그분이 히브리인의 하나님이시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들에게서 들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히브리인의 하나님, 여호와
이 세 주제에 따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시작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고,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교회를 보기 원한다면 우리는 이 주제들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세 주제 각각 완전히 적용될 귀중한 분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세 주제의 하나님은 합당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여호와로서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그분은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며, 히브인들의 하나님으로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신다.
여호와는 생명이시다.
여호와라는 이름의 뿌리는 생명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하야haya”에서 나온다. 이와 같은 생명은 나누어 주는 생명이요, 회복시키는 생명이요, 부활시키는 생명이다. 여러분이 모세가 만났던 것처럼 여호와로서 이 하나님과 만났다면 여러분은 생명의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위조된 신들은 하나님과 동일할 수 없다.
이집트인들은 이런 하나님이 없었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피돈과 람세스라 불리는 두 도시를 건축하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부렸다. 피돈은 “스스로 산출되는 신(하나님)”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그분 자신의 존재를 위해 스스로 다시 채울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재생산을 주신 원칙은 남자와 여자 이 둘에 의해 일어났었다. 이집트인 “신”은 이 법을 우회하도록 주장했다.
생명의 하나님은 이집트에게서 나오도록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그분께 오도록 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생산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원칙을 우회하려고 한다. 하지만 생명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오라.
어디에 있든 오라.
내게로 오라.
생명인 내게로 오라.
회복시키고, 부활시키고, 베풀어 주는 나를 누리러 오라.
여호와는 오늘 우리에게 우리가 영속적인 가치가 될 어떤 것을 우리 자신이 산출할 수 없기 때문에 그분께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생명의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다. 그분은 그분의 사람들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은 야곱에게서 태어났다. 하지만 야곱은 주님의 변화시키시는 모든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세우시는 사역을 통해 여러분을 또 다른 인격 안으로 들어가게 하실 수 있으시다. 우리 하나님은 전혀 다른 우리가 되게 하실 수 있으시다. 심지어는 우리가 그분처럼 확장 될 정도까지 하실 수 있으시다.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영역 안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그분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 히브리인의 하나님으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히브리인의 하나님”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히브리인의 하나님은 히브리라는 단어가 강을 건너는 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강을 건너는 이의 하나님이심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한 지역에서 또 다른 지역으로 강을 건너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이 하나님은 우리가 전에 절대 하지 못했던 누군가의 안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구성하신다. 더욱이 그분은 한 조각의 땅에서 더 높이 있는 땅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또 이 땅은 훨씬 더 높아질 것이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은 훨씬 더 높은 영역 안으로 들어가도록 강을 건너게 하신다. 이것이 놀라운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말할 때 우리는 그분께서 생명이시요, 생명주는 분이시요, 생명 공급자(디스펜서)시요, 회복시키시는 분이시요, 부활케 하시는 분이시다. 여러분이 그분을 만질 때마다 생명의 모든 것, 생명과 관련된 모든 것은 여러분에게 일어날 것이다. 그보다 더 여러분이 그분을 만질 때마다 그분은 여러분을 복원하시고, 다른 인격으로 만드신다.
여러분에게 이와 같으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과 구원받지 않은 여러분의 주변 사람들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 안에는 여러분을 변화시키시고, 재구성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다. 여러분이 이와 같은 변화를 겪고 있지 않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여러분이 계속적으로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시고, 또 다른 인격 안으로 이끄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이것이 놀라운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그분은 한 영역에서 나오게 하셔서 또 다른 영역 안으로 계속해서 건너도록 하는 그분의 증거로서 단체적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길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셔서 그분 자신께로 우리를 이끄실 수 있으시다.
우리가 오늘날 우리 위에 이와 같은 육체적인 파라오 통치를 받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집트에서 나오도록 이끌림 받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먼저 그들은 여호와로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이 여호와를 알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그분 자신이 생명이시요, 생명으로서 그분 자신을 나눠주시는 분이시요, 생명 안에서 우리 모두를 부활시키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이시라는 발견하게 된다.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시요, 생명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매일 아침 우리는 그분을 만져야 하고, 날마다 그분을 누려야 한다. 여러분이 이와 같은 풍성한 방식으로 이 하나님을 체험할 때 여러분이 관련되어 있는 한 파라오는 없다.
이제는 젊은이들에게서 별로 기대할 게 많지 않다. 주님께서 그들 중 몇몇에게 좀 더 강하게 호흡하셔야 한다면 그들은 마치 그들의 생명이 끝났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들의 필요는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을 변화시키시고, 재구성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는 것이다.
나는 내가 그분을 알게 된 만큼 주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이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내가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다. 왜 그런가? 재구성(회복)이 내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떤 많은 양의 변화가 일어났다.
더욱이 하나님은 히브리인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그분의 증거를 이끄시는 하나님이시다. 교회생활 가운데 불태우는 젊은이들이 상당히 많다. 그들은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려고 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온 교회가 강을 건너도록 격려되어야 한다는 이들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힘을 발휘하고 그분의 백성들을 학대하는 이집트 땅을 심판하는데 파라오를 사용하셨다(출 7:4). 출애굽기 7-11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많고, 크고, 무서운 재앙을 이집트에 보내셨는지를 보게 된다. 그 재앙 중 절정에 이르게 된 것은 이집트인들 중에 첫 번째 아들 모두를 죽게 하셨다는 것이다. 파라오는 마침내 이스라엘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그들이 이집트를 떠나도록 애원했다. 하지만 모세는 그들이 이집트 밖으로 나가 어디로 가게 했을까?
시편 43:3에서 시편 기자는 노래했다.
“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사 그것들이 나를 인도하게 하시며 주의 거룩한 산과 주의 장막들로 나를 데려가게 하소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어디로 이끌었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좋은 땅으로 이끌었다. 이 시에서는 좋은 땅은 주의 거룩한 산으로, 주의 성막은 찾을 곳으로 묘사했다.
시편 기자는 계속해서 찬송한다.
“그리하시면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되 나의 지극한 기쁨이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리이다.”(시편 43:4a)
우리가 우리 자신을 헌신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넘치는 기쁨이 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 여정의 초점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넘치는 기쁨이신 하나님께 여행을 하고 있다. 출애굽기 6장에서 주님께서 그분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출 6:7). 주님은 우리를 어떤 종교에게로 아닌 자신께로 받아주셨다.
우리의 달들의 시작
이스라엘 자손들이 유월절에 주의 구원을 체험한 것에 대해 출애굽기 12장에서 말씀하셨다.
“{주}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 달이 너희에게 달들의 시작이 될지니 곧 그것이 한 해의 첫 달이 될지니라.”(출 12:1-2).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원한다면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실로 기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넘치는 기쁨이시다(시 43:4). 하나님은 또 그분께서 우리가 자신의 백성들이 되어 그분 자신께로 오기를 갈망하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출 6:7). 이제 우리는 이 달이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달(아빕Abib) 즉 “봄에 시작하다”를 뜻하는 3-4월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아니다.”
“아빕Abib은 너희의 1월이 될 것이다.”
아빕Abib은 우리에게 달들의 시작이 된다. 하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1월이 있는가? 여러분은 왜 그렇게 많은 2세대들이 소망 없어 보이는지 아는가? 그 이유는 그들이 아직 1월을 가지기 못했기 때문이다. 1월은 무엇인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하나님은 조만간 우리가 새로운 어떤 것에서 빠르게 지나가고, 낡은 모든 것에서 지나가야 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이 이처럼 지나갈 때 여러분의 생명의 1월이 되는 것이다.
나의 참된 1월은 구원받던 그날이 아니었다. 나의 진정한 1월은 주님 그분을 알고 사랑하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나의 1월은 나의 삶이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탈출의 삶으로 시작했을 때였다. 나의 1월은 내 삶의 진정한 시작이 되었다. 모든 이들의 첫 번째 달은 다를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이런 시작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이 구원받았고, 주님을 따르기를 갈망하지만 그래도 여러분이 그분께 여러분 자신을 헌신했고, 믿는 이로서 여러분의 삶이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님을 전혀 만나지 못한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라암셋(람세스)에서 숙곳까지 여행했다(출 12:37-39). 그들은 마침내 말할 수 있었다.
“가자!”
이스라엘 자손이 여행한 숫자가 무려 2백만 명이나 되었다. 그 숫자가 인천 시민 전체가 일어나 같은 길을 따라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들은 양 떼와 짐승 떼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닭, 다른 사람들은 양이나 염소들이 있었다. 이런 여행 그 자체가 기적과 같았다. 그들 가운데 늙고 병약한 이들이 있었던 것처럼 신생아들과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들도 있어야 했다.
나는 어떤 이들은 생존할 수 있었던 편안한 사회에서 움직였다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라암셋(람세스)에서 숙곳까지 모세를 따를 수 있었다.
라암셋에서 숙곳까지
라암셋은 이집트인 태양신의 이름이었다. 라암셋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강제로 벽돌을 구워 건설한 도시 중의 하나의 이름이었다. 파라오는 자신들이 신이 있는데 그 신은 태양이라고 선포하고 있었다. 라암셋은 또 장벽을 의미할 수 있다. 세상인 이집트는 사악한 모든 것들을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주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가라!”
나갈 때에 그들은 장벽을 통과해야 했다. 갑자기 한 도시로 약 2백만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다음 도시로 일어나 움직였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일은 큰 시야를 가졌어야 한다. 그들은 라암셋에서 휴식의 장소, 초막을 의미하는 숙곳까지 여행했다. 이집트 태양신의 도시, 장벽을 넘어 뒤로하고서 이스라엘 자손은 휴식의 장소에 도착했다. 이 장소에서 그들은 그들의 장막을 쳤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집트에서 좋은 땅으로의 여행 방식이다.
우리의 첫 태생을 구별함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처음 난 것 즉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를 여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그것은 내 것이니라.”(출 13:2)
하나님께서 “처음 난 것, 그것은 내 것이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신 점이었다. 모세는 그가 이집트로 들어가기 전 자신의 맏아들을 할례 해야 했다(출 4:24-26). 유월절 밤에 이집트인들의 맏아들 모두가 죽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우리는 그분은 우리에게 맏아들을 요구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맏아들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맏아들은 가장 좋은 것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모든 축복이 맏아들에게 간다. 그러므로 모든 맏아들은 하나님께 속해야 한다. 여러분이 주님을 따르는 것처럼 여러분이 소중히 여기는 것 무엇이든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쉬운 여정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지만 출애굽기 12장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은 구원을 의미하는 티끌 하나 없는 유월절 어린양을 드리게 함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유월절 어린양은 하나님의 첫 번째를 대표한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날마다, 매 순간마다 말해야 한다.
“주님, 나에게 가장 좋은 무엇이든지 당신께 속해 있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 글 쓰는 재능이 있었다. 내 글 몇 개는 몇몇 교회나 선교회 잡지에 올랐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 말을 했다.
“저는 주님을 위해 글을 쓸 거예요.”
그러자 주님은 내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좋다. 애를 써서 무엇인가를 내게 주라. 네가 가장 좋은 것을 내게 주라. 그러면 결국 너는 나를 위해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따르기를 갈망한다면 우리는 유월절을 체험하고, 새로운 시작이 있어야 한다. 이 새로운 시작으로 주임께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구원의 길을 따름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우리는 한 번에 모든 것을 구원 받았다. 하지만 여러분이 구원받은 후 여러분은 주님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유월절을 통과했다는 것은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여정동안 주님의 구원을 계속적으로 체험해야 한다.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큰 구원”이라는 용어를 찾을 수 있다(히 2:3).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구원하고 계시고, 계속해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았다. 우리는 유월절을 통과했다. 이 구원은 계속해서 우리 일생동안 체험이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구원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옷 입는 방법에서 구원받아야 하고, 책 읽기를 사랑하고, 영화보기를 사랑하는 것에서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 외 다른 것을 좋아하는 것에서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 집중하는 것, 뽐내는 것에서도 구원받아야 한다.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것,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든 구원받아야 한다.
에담에 진을 치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누림
“그들이 숙곳에서 떠나 광야 끝에 있는 에담에 진을 치니라. {주}께서 그들 앞에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빛을 주사 밤낮으로 가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 기둥을 밤에는 불기둥을 백성 앞에서 치우지 아니하셨더라.”(출 13:20-22)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전진해 갈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엄청 큰 기쁨이신 하나님께 향해 갈 필요가 있다. 모세는 “내가 나의 엄청 큰 기쁨으로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께로 너희 모두를 이동시키길 원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헌신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만족이 되도록 제단에 누워 있고, 자신들의 엄청난 기쁨으로 하나님을 차례대로 발견한다. 여러분의 전 생애에서 이것은 여러분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여러분은 사역, 일을 위한 것이 될 수 없고, 다른 어떤 것의 여러분이 될 수 없으며, 단지 하나님의 것이요, 여러분의 기쁨은 하나님 자신이 되어야 한다. 이것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질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임재 없이 여러분은 여러분의 누림으로 하나님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숙곳을 떠나 에담에 도착했다. 에담은 “힘, 강함” 그리고 “쟁기”를 의미한다. 쟁기의 날(보습)은 딱딱한 땅을 갈아엎는데 사용했다. 이제 수고의 시간이다. 이와 같은 수고 때문에 주님은 힘을 허락하신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짧은 체험을 얻을 수 있다. 에담에서 하나님은 밤엔 불기둥으로, 낮엔 구름 기둥으로 오셨다. 무엇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지시할 수 있었는가? 수많은 경찰관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아니다. 이와 같은 구름처럼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셨다.
나는 이 기둥이 수십 킬로미터에서 볼 수 있었을 것으로 믿는다. 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원천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 자신이 그 원천이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만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잃어버리는 길을 찾는다. 아주 많은 것들이 여러분 주위에 일어나고 있다. 많은 것들이 이해할 수 없다. 여러분은 수많은 혼란과 혼동의 중심에 완전히 짓눌리게 되었다. 하지만 여러분이 영 안에 있을 때 여러분은 말 할 수 있다.
“저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은 이끄시고 계신다. 여러분이 이런 방식으로 따르는 한 문제가 없다. 심지어 일이 나빠지는 밤에도 불기둥이 외어 거기에 있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에 놀라워해야 한다. 수년에 걸쳐 나는 혼동의 중심에서 어떤 것을 잃게 되는 체험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낙심되어 보일 때 빛이 거기에 있고, 여러분은 외친다.
“저는 당신의 임재에 놀랐어요.”
내가 집회를 위해 어떤 지방에 가 있었을 때 수많은 형제들이 주님의 증거를 분명하게 알리기 위해 거기에 왔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이동하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한 형제는 그들에게 말을 했다.
“형제, 모든 이들은 형제를 가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나를 여기로 이끄셨습니다. 나는 이동할 수 없습니다.”
그날 나는 그 말에 감사했다. 이와 같은 형제들 때문에 교회가 일어설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 흐름을 수행하기 위해 거기에 있었다. 그들의 말하는 것이 아주 강해졌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 나는 주님께서 여전히 자신의 사람들을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이끄시고 계셨음이 아주 분명해졌다. 그러므로 나는 안심되었고 든든해졌다. 나는 그 형제와 함께 세워졌고, 돌아왔다. 우리는 성도들을 조정할 수 없고, 어디로 가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처럼 거기에는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있을 것이다.
믹돌까지 계속 나아가 움직임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말했다.
“가자!”
그러자 사람들은 일어나 따랐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왜 앞으로 전진 하는가? 먼저 여러분은 항상 구원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을 안다. 여러분이 구원을 누리면 누릴수록 여러분은 주의 구원을 더 누린다. 여러분이 구원을 누릴 때마다 여러분은 새로운 시작을 체험하고, 새로운 발걸음을 걷고, 새로운 헌신을 체험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 말할 수 있다.
“나의 맏아들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로 여러분이 주님을 따르는 것처럼 여러분은 주님께 말할 수 있다.
“주님 저는 당신이 이와 같은 풍성한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낮이든 밤이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절대 떠나지 않는군요. 파라오의 군대가 와도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우리를 보호하는군요. 불기둥은 우리와 우리를 무섭게 하는 자들 사이에 서는 하늘에 속한 빛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스본Baal Zephon 맞은편 믹돌과 홍해 사이에 있는 비하히롯Pi Hahiroth 근처에 진을 쳤을 때(출 14:2) 불기둥과 구름 기둥은 파라오 군대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세워져 움직였지만 맞은편에 있던 이집트인들이 어둠 가운데 있었던 반면 그 빛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비쳐졌다(출 14:19-20).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가 되신다는 하나님을 보기 시작했다.
더 확장되어 감
이스라엘 자손들은 정말 해방 받았다. 그들은 여전히 깨끗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해방에 대한 목적에 관해서는 깨끗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먹고 마시는데 해방 받았다. 믹돌Migdol이라는 단어는 망루(望樓)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 어원은 “확장했다, 확대했다”를 의미한다. 주님의 사람들은 그들이 이집트에서 정말 어려웠던 것에 관해 불평으로 가득했었다.
우리의 입장에 있어 우리는 우리의 끊임없는 반복하고 했던 것이다.
“오, 나의 육체!”
“오 나의 죄!”
“오 나의 티비 프로그램!”
“오 나의 습관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이집트를 나오고, 이것과 같은 것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주님의 강하신 손의 도움으로 그것들에게서 나온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추론과 숙덕거림으로 산다. 믹돌에 있던 사람들은 그와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어졌다. 주님은 확장될 곳으로 그들을 이끄셨다. 여기 사람들은 “내가 중심인 것”에서 “그리스도께서 중심인 것”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이집트의 속박을 받는 일로 더 이상 억눌리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항목에 대해 소문을 내지 않았다. 소녀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었던 새로운 패션에 대해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 모든 사람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 이와 같은 것에서 해방 받았다. 세상의 일을 통해 우리를 통제하는 파라오는 이제 끝났다. 하지만 그들이 400년 동안 그들의 거주지였던 파라오의 영역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전진해야 했다.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존재
믹돌과 바다 사이에 있는 그들의 야영지는 비하히롯과 맞은편 바알스본 근처에 있었다. 비하히롯Pi Hahiroth은 생명이 있는 여물지 않은 곡식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직 그들은 생명의 패턴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생명이 있지만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다른 말로 이집트를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말을 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이 외칠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은 정말 풍성하시다. 그분은 정말 광대하시다.”
하지만 설명을 요청했을 때 그는 반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분은 정말 풍성하시다. 그분은 정말 광대하시다.”
그것이 생명에 대한 완성되지 않은 깨달음의 예이다. 모든 생명은 그 패턴이 있다. 하지만 생명이 성장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많은 성도들 가운데 우리는 생명의 표식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의 표식들은 완성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자매가 증거로 슬피 울 수 있고, 우리 모두 그녀가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지만 그게 다다. 여호와의 백성들은 이집트를 떠났고, 생명의 것이 있었지만 생명의 표현이 부족한 단계였다.
여전히 우상들의 손닿는 곳에 있음
그들이 진을 친 이 곳 바로 건너편은 바알스본Baal Zephon이었다. 그곳은 우상들의 장소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한 면에서 여러분은 여전히 여러분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다른 한 면으로는 이와 같은 힘이 있는 우상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다른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우상이 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우상들이 기술적 도구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상들이 특정한 추구다. 하나님은 이 모든 우상들 가운데서 말씀하신다.
“확장하라!”
우리가 갈 때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따를 수 있을까? 먼저 우리는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구원 받는 것이 죽음의 때이지만 그 때는 죽음에서 보호받는 유월절이다. 여러분이 어린양의 피를 적용받았다면 여러분은 과거의 것, 오늘날의 것에서 구원받고, 미래에서 구원을 체험할 것이다. 환경이 얼마나 어려운지 상관없이 여러분은 구원을 누릴 것이다. 게다가 여러분은 주님의 임재를 누릴 것이다. 구원을 누리는 것과 주님의 임재를 누리는 것은 정말 풍성하다. 여러분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체험할 것이다.
바다를 통과함
그런 다음 홍해를 통과할 시간이 온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에서 완전히 끊어진다. 모세는 그의 지팡이를 뻗었고, 사람들이 마른 땅으로 통과할 수 있도록 물이 솟아올랐다. 여러분은 그렇게 할 용기가 있는가? 각종 동물들이 포함된 천만의 생명들이 홍해를 통과했다. 어마어마한 광경이 펼쳐졌다. 정말 어리석은 파라오는 생각을 바꾸고 그들 뒤를 쫓아왔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개입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를 통과하도록 몇 시간이 주어졌던 것처럼 나타나 있지만 그 시간이 몇 날이 걸렸다면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끝이 났고, 구름 기둥이 사라졌다.
그런 다음에 이집트인들은 말했다.
“이제 우리 차례다! 자, 가자!”
하지만 주님 그들을 위해 물을 쌓지 않으셨다. 물론 그들은 익사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다른 편에 있었다. 그들은 한 지역을 떠나 또 다른 지역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홍해 안에서 침례를 받음으로 하나님께로 구별되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로 모든 것들로부터 구별됨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재앙과 표적을 행하신 것처럼 먼저 기적의 사역자, 능력 행하시는 분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런 다음 그분은 파라오가 그들에게 대한 것을 갚고, 그분의 벌에서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었던 분으로서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되기 원하셨지만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을 대표한 모든 것이 되셨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풍성했지만 그 땅에 대해 그들은 아직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하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이것은 이 시점까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지식의 확장이었다. 이와 같은 단계에서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시작에 대한 실제를 적용하는 것이 끝날 수 있었기 때문에 홍해를 건넜다. 홍해의 도움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참된 하나님이 되셨던 분을 대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옛 관계는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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