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도착한 후 두 가지에 집중된다.
1) 그들은 보리 추수가 시작할 때 돌아왔다.
2) 나오미는 죽은 남편의 친척이 있었다.
그 친척 보아스의 밭에서 룻은 이삭을 주을 수 있었다.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어야 함을 스스로 알았다(룻 1:22-2:3). 부자였던 보아스는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룻에 대해 몰랐고 그녀에게 물었고, 다른 밭에서 이삭을 줍지 말도록 했으며, 그녀가 이삭을 줍도록 일꾼들에게 이삭을 밭에 떨어뜨리도록 했다. 룻은 추수 시작부터 끝까지 하루 종일 이런 방식으로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었다(룻 2:4-23).
이 모든 것은 믿음의 경주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그림이다. 그들은 보아스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다. 밭은 세상을 상징하여 성경에서 사용되었다(마 13:38, 창 37:15). 밭에서 이삭 줍는 것은 세상에 있는 동안 열매를 산출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이삭을 줍는 기간과 시간은 현 제도 도처에 확대되어 결코 끝나지 않는 일과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앞에 자신의 목표를 정해 놓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주인의 밭에서 오늘날 바쁘게 지낸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 일로 자신을 연결한다. 그는 다른 사람이 이삭 줍게 하지 않고 자신이 이삭을 줍게 하는 것이다.
보아스는 룻이 이삭을 줍도록 자신의 일꾼들 뒤에 한줌의 곡식을 떨어뜨려 놓도록 했다. 그래서 보아스는 룻을 위해 특별하게 한줌씩 곡식을 떨어뜨리도록 일꾼들에게 말함으로 그녀가 이삭을 줍게 했다. 그녀가 해야 했던 모든 것은 보아스가 일꾼들에게 말한 대로 곡식을 떨어뜨리면 그 이삭을 줍는 것이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열매를 산출하고 있다. 주님은 추수하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해 준비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이삭을 줍도록 주님의 가르침으로 준비시키신 바대로 단순히 이삭을 줍는다. 그들은 그들을 위해 이미 준비하신 바대로 단순히 일을 함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들이 주인의 밭에서 이 같은 방식에 따라 바쁘게 일하는 시간은 단순하게 언급되었다.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룻 2:17)
“.......보리 수확과 밀 수확을 끝마칠 때까지 이삭을 줍고......”(룻 2:23)
일을 절대 그만두지 않는다. 이 일은 오늘날 교회시대 끝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추수와 관계있는 또 다른 하나의 일은 가장 중요성과 상징성의 어떤 것이 원문에 두드러진다. 밭에서 온종일 이삭을 주운 후 룻이 그녀가 이삭 주운 것을 떠니 보리 약 한 에바를 얻는다(룻 2:17). 한 에바는 약 22L이므로 22Kg이다. 즉, 그녀를 위해 떨어뜨려 놓은 곡식을 모으는 일에 대해 한 부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곡식을 모은 후 그녀는 이삭을 줍는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삭을 떨어 알곡을 다시 모았다. 이삭 하나가 남을 때까지 그녀는 이삭줍기를 일을 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같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일하는 것을 제한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구원을 선포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구원받은 후 그들은 밭에서 얻은 것으로 그들의 일을 계속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은 이유에 관해 가르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다가오는 영광의 메시지의 여러 방면을 선포한다. 또 그들은 계시된 특정한 시간까지 이 가르침을 계속한다. 그들은 집요하게 밭에서 곡식의 이삭을 거둔다. 그들은 수확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밭에서 이삭 줍는 일을 계속한다. 그들은 쓸모가 없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것에서 떨어질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한다. 그들은 각 개인이 미성숙에서 성숙에 이를 때까지, 그노시스gnosis에서 에피그노시스epignosis까지, 그들이 믿음 안에 근거를 둘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한다(엡 4:11-15). 바울은 이 노선을 따라 그의 사역을 했다(행 20:20-32, 골 1:1-29).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서 깨어 있고 고난을 견디며 복음 전도자의 일을 행하고 네 사역을 온전히 입증하라.”(딤후 4:5).
복음전파자는 헬라어 “유앙겔리스테스euaggelistes”로 복음에 대해 선포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협의(狹義)에 있어 성경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종종 사용되어 왔다. 복음전파자는 영원한 진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만을 선포하는 자를 말한다. 성경은 훨씬 더 넓은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복음전파자의 일을 하라는 말을 하는 디모데는 단순히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디모데가 선포하고 있었던 복음은 무엇인가? 그 문맥 자체는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과 관계가 있다(딤후 3:15, 4:1, 7-8). 그러므로 문맥적으로 복음은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복음의 또 다른 측면이 있다. 디모데의 명령은 문맥이 다른 단어를 다루고 있지만 복음의 이런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디모데가 구원받지 않은 이들을 상대하고 있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구원받지 않은 이들이 여전히 불법과 죄에 죽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른 어떤 것을 선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영적인 안목이 없었다(고전 2:14).
그렇지만 그들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들어 간 후 디모데는 더 이상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지 않았다. 은혜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그들이 이 메시지를 들었고, 영접했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 다음 디모데는 그들이 영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다(고전 2:9-13).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든 그는 복음전파자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즉, 그는 은혜의 복음이든, 영광의 복음이든 구원과 관계있는 복음을 선포했을 것이다.
룻기 2장에 있는 중심 내용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이 영접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밀알(보리알곡)이 쭉정이에서 분리되기까지 계속 선포한다. 추수의 주님은 그분 스스로 심판대에서 이러한 분리를 해야 하실 것이다.
에베소서 4:11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복음전파자들과 목사-교사들 사이에 비성경적인 차이가 있다. 실제로 그들의 메시지는 같은 것이다. 그들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 둘 다 포함한다. 그들 사역의 차이점은 목사-교사에게 위임된 무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복음전파자보다도 목사-교사 사역을 강조하고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복음전파자와 목사-교사는 그들이 처해 있는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복음의 모든 것을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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