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1
빌립보서 2장은 “그러므로”로 시작한다. 이 단 한마디로 바울은 앞에서 말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가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이 되었다(빌 1:27–30). 여기 이 “그러므로”라는 단어에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합당한 이, 주, 사도들, 그리고 반대하는 이들을 향해 합당한 이가 되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또 “그러므로”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격려, 사랑의 안위, 성령의 교제, 그리고 사랑과 동정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미덕은 서로 교제의 기초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격려
격려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파라클레시스paraklēsis다. 이 단어는 두 단어의 합성어인데 파라para는 “곁에 있다”를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을 격려를 할 때 합당하게 격려하려면 계속해 나가도록 만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어떤 것이 계속해 나가는 그들과 하는 것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격려는 다른 사람들 곁에서 함께 걷는 것을 말한다. 클레시스klēsis는 “부르다”를 의미한다. 생각은 목적 있는 지지(支持) 중 하나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 있는 행동을 하고, 강화하도록 다른 성도들과 옆에서 걷는 것을 말한다(빌 1:27).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격려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 의해 세워진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격려는 일반적으로 서로 권하는 많은 경우의 격려와 아주 다르다. 어떤 형제가 좌절하고 낙담해 있다면 주변에 있는 성도들은 “힘 내! 내일 잘 될 거야. 예수님을 바라 봐.”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한 격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격려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것과 그분께서 모든 것이라는 것에 근거한 격려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보고, 이해하고, 체험하기 시작할 때 참된 격려를 체험한다. 이와 같은 격려는 거룩한 부르심으로 하나 되는 것에서만 온다. 이런 격려는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게 한다. 거룩한 계시로 사로잡히면 사로잡힐수록 이 격려를 체험한다.
사랑의 안위
안위라는 단어는 헬라어 파라para의 접두어로 시작한다. 이것은 격려와 같은 안위가 단지 단어의 문제가 아님을 가리킨다. 안위는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것에서 인격을 띠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인격과 말이 그 성도일 때에만 참된 것과 실질적인 것을 공급하는 위로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두 종류의 위로를 체험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말로만 위로하려고 하는 반면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인격을 띤 위로를 하려고 한다. 그들은 위로하는 일을 하려고만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은 그들이 간 후에도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있다.
바울이 빌립보서 2:1절에서 추구하고 있었던 안위는 사랑의 안위다. 여기서 사랑은 아가페agapē다. 아가페agapē의 동사형은 사랑의 대상을 지식적인 계산 없이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것에 대한 미덕과 특성들을 고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아가페agapē는 그 대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랑이다. 흔히 아가페agapē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해왔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가페agapē는 높은 가치로 평가된 것에 대한 사랑이다. 70인역에서 아가페agapē는 아이들을 위한 부모의 사랑을 말할 때 사용했다. 왜냐면 부모는 다른 모든 것 위에 자신의 아이들에게 상주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이들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동료 성도들에게 관심을 가질 때 이런 방식으로 그들을 소중히 여기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것이 참된 위로가 아니다. 이것은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을 받아들인 후에도 교회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방문하고, 심지어 그들에게 선물을 주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그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것은 그들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높다. 부모가 자신들의 자녀들을 이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성도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기 원한다면 자신의 자녀들처럼 그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이런 사랑으로 소중히 여길 때 인간의 필요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각도에서 오는 성도들의 상황을 생각하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을 위한 가장 좋은 것을 도모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도록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사랑을 소유한다면 다른 성도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성도들을 위로할 때 그들에게 덕을 돌리고, 기꺼이 어떤 값을 치르려는 성숙한 가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체험에 의해 다른 성도들을 위로해야 한다(고후 1:3–4).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다른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의 체험을 위해 체험적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주게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 사랑 안에서 진실로 다른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다.
가끔 격려와 위로로 풍성하게 되는 대신 개인적인 선호, 취향, 유행, 문화에 풍성해 진다.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관점과 실행을 나누는 이들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에 의해 다른 성도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아가페agapē 사랑은 보이지 않게 된다. 건강한 교회생활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격려와 사랑의 위로가 더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관점과 실행보다 성도들을 소중히 여지는 것 없이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성도들을 위로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성도들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하는 대신 다른 성도들을 이기려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성령의 교제
빌립보서 2:1절에서 바울은 성령의 교제에 대해 말했다. 격려와 위로는 믿는 성도들과 같은 혼이 된 상태에서 생겨난다. 하지만 성령의 교제는 성령과 함께 하는 것에서 일어난다. 어떤 성경번역은 성령이 신성한 영을 가리키는 대문자를 사용했다. 또 다른 성경번역은 사람의 영을 가리키는 소문자를 사용했다. 어찌 보면 주님과의 교제와 성도들 서로와의 교제 모두 영적인 훈련이다.
사랑과 동정
격려, 위로, 그리고 교제는 사랑과 동정으로 이뤄진다. 사랑은 안에 있는 것이요, 동정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애정이 있는 사람은 동정어린 행동을 할 것이다. 어렵고, 힘들고, 불안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위로해야 한다. 사랑 안에서 그들에게 인내와 격려를 주시는 하나님을 가리지 말고 그들을 위로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롬 15:5). 영 안에서 그들과 교제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에서 우쭐한 태도를 갖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본을 따르는 겸손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빌 2:5–8).
내가 복음을 전파하러 자그마한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저녁식사를 하러 한 식당에 갔을 때 나는 음식가격이 너무도 비싼 음식을 먹게 되었다. 난 그곳이 그렇게 비싼 음식점인지 몰랐다. 하지만 형제들이 안내하는 대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만난 건 상당히 비싼 가격이 붙은 메뉴판이었다. 여러 날 동안 그렇게 먹다간 교회의 재정과 또 형제자매들의 가계에 부담을 줄 것 같았다. 그래서 교회 사역자들에게 말했다.
“형제들, 이 음식 너무 비싼데 저렴한 것으로 먹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갑시다.”
하지만 형제들은 앉아서 주문하기 시작했고 얼마 되지 않아 음식이 테이블에 놓였다. 그리고 맛있게 먹고서 한 형제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오늘 음식 값은 제가 냅니다. 그렇게 해주십시요. 그리고 이번 한번만입니다. 저는 다시 이 음식을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는 형제들의 가정에서 자매들이 해 주는 음식 먹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2년이 지난 후 나는 우리교회의 어떤 형제에게 복음전파 하러 오라는 말을 듣고 갔다. 그들은 그날 저녁 그에게도 같은 식당으로 인도했다. 같은 식당에서 음식을 먹은 후 그는 한 사역자에게 가서는 “아무 곳에서나 먹을 걸 그랬어요.”라고 말했다. 우리가 지역 성도들에 대한 느낌이 얼마나 부족한지!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성도들이 하는 대로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들이 가난하다면 우리는 그들이 먹는 것과 똑같이 먹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이다. 우리와 함께하는 이들이 그들과 하나라는 것을 느껴야 한다. 이러한 마음 없이 격려와 위로를 사역할 방법은 없다.
주님께서 힘든 길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이를 돌보도록 그리스도인 한 형제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생각해 보라. 다른 형제들은 그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위해 그 형제를 데려 오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여러 상황 때문에 이와 같은 도움을 받아들일 수 없을 수 있다. 이 때 동정심을 발휘해야 한다. 그가 “지금 성경공부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말을 할 때 우리는 “무슨 말인지 압니다. 함께 기도합시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와 함께 하는 우리의 기도는 탄식과 눈물로 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
비록 격려, 위로, 그리고 교제일지라도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선포한다. 모세가 주님과 함께 40일 밤낮을 있은 후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 피부는 빛나고 있었다. 그의 얼굴 표정으로 모든 사람을 사로잡기 보다는 사람들을 위해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출 34:28–35).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와 같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지 않고서 다른 사람들의 집을 방문한다.
“나 여기 왔어요. 난 당신을 위해 하루 세 번 기도했어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불쑥 방문한 사람들은 그 순간 하나님의 방문에 준비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 방문이 필요할 수도 있다. 모세는 낮은 방식으로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갔다. 그의 영광스러운 체험 모두가 가려져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엄청난 체험을 전람하는 대신 그는 그들 가운데 보통의 사람으로서 갔다. 그는 자신에게 전해졌던 모든 것을 덮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그들 자신을 덮는 것을 거절하는 그리스도인 동역자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들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 자신들의 계시와 비전을 설명한다. 적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원한다면 합당한 인간성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목적을 드러낼 수 있음을 느끼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하게 할 인간성이 부족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문하는 것을 영웅들로 느끼지만 그들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과 동정이 없다면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교리와 가르침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동료로서 가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주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낮고 겸손한 자세로.......
'the Brethren > 연(輦)모임 메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룻기2장)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줍기 (0) | 2017.01.13 |
---|---|
룻의 가족관계 (0) | 2017.01.08 |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가치 있는 행동 (0) | 2016.08.03 |
브렉시트와 성경 (0) | 2016.07.29 |
성도들을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함 (0) | 2016.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