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가치 있는 행동

Hernhut 2016. 8. 3. 08:43


빌립보서 1:2730

 

시민권에 따른 행동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가치 있는 태도를 갖게 하는 일을 맡았다. “행동하다라는 헬라어는 폴리튜오마이politeuomai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시민으로서 행동하다, 시민의 신분으로 생활하다를 뜻한다. 이 단어는 문화나 왕국에 속한 이들과 일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남자고등학생들은 여학생들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으로 사는 경향이 있다. 인류대학 졸업생들은 다른 대학 출신자들과 다르게 살아갈지 모른다. 주요 국제 중심지의 거주민들은 작은 마을에서 사는 이들과 다르게 행동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은 그들이 속한 교회의 입장과 추구에 기초한다. 바울이 오직 너희 행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하라.”(1:27)고 쓴 이유가 이것이다. 이것은 도덕적 어떤 코드에 따른 행동방식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땅 위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전람하는 거룩한 왕국 안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은 하늘에 속한 시민권과 일치해야 한다(3:20).

 

 

가치 있는 행동

 

합당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액시오스axiōs저울질, 무게를 달다, 가치 있는 것과 무게를 달다의 어근에서 비롯됐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더 큰 전진을 위해 무게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성도들이 성숙한 생활을 하고, 이끌리도록 하는 요소가 되어야 한다. 건강한 성도의 행동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에 합당한 무게다. 성도들이 결정을 내릴 때 그리스도의 복음은 무게를 다는 요소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일치할 때 그리스도인들의 결정은 옳은 것이다.

 

내가 30년 전에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리스도의 복음은 나의 결정을 다스리는 요소가 되었다. 그래서 나의 행동은 복음의 가치였다. 나는 하나님의 왕국에 따른 가장 좋은 삶을 살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 모두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가장 좋은 행위를 무게로 달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성숙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왕국에 살지만 모든 결정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가치를 두게 될 것이다. 성도들은 이 복음에 합당한 것이 무엇이든 선택할 것이다. 복음은 모든 성도들의 생활을 활력 있게 하는 살아 있는 요소가 될 것이다.

 

 

가치 있는 행위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가치 있는 행동을 설명하면서 바울은 네 가지를 말했다.

 

하나는 너희가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복음의 믿음을 위하여 한마음으로 함께 싸우는”(1:27) 입장이어야 한다. 같은 약속을 나누는 다른 믿는 성도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

둘째는 그리스도인들은 상황과 환경 그리고 대적들로 인해 불안함에 떨지 말아야 한다(1:28). 그리스도인들은 반대에 부딪힐 것이다. 이 반대는 반드시 외부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이러한 반대는 그리스도를 떠나 종교적인 열심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셋째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 아니라 그분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것도 주께서 그분을 대신해서 너희에게 주셨다.”(1:29)

 

넷째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앞에서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 사도 바울과 같이 같은 행동을 한다(1:30).

 

 

 

한 영 안에서, 한 혼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가치 있는 행동하기 위한 첫 번째 필요한 항목은 한 영 안에서 굳게 서서 한 혼으로 복음의 믿음을 위해 분투하는 것이다(1:27). 마음은 여기서 혼으로 번역될 수 있다.

 

한 영 안에서 굳건히 서는 것은 거룩한 생명 안에서 유기적으로 하나 되는 것이요, 한 혼 으로 함께 고투(苦鬪)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초점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취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 영 안에서 굳건히 서는 것은 모든 성도들로 나눈 거룩한 생명의 자연적 결과로 온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생명을 만지는 순간 유기적으로 다른 모든 성도들과 한 영이 된다.

 

하지만 다른 성도들과 한 혼이 되는 것은 한 영이 되는 것만큼 쉽지 않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혼들과 다른 것에 감사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조용하고 내향적이고, 말을 잘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외향적이고, 심지어 거칠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한 혼이 될 수 있을까? 그 비밀은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겸손해지는 것이다(2:8). 서로를 향한 마음의 겸손함으로(2:3)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혼이 그리스도에게서 돌렸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독선적이게 되고, 더 이상 그리스도의 복음에 단순한 성도들과 한 혼이 아니다. 성경적인 진리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도 한 혼이 되는 것에 대한 체험을 잃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혼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이를 때 한 혼으로 함께 고투(苦鬪)할 수 있다. 한 혼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 유일한 초점을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함께 분투함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초점을 맞출 때 분투, 고투, 싸움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함께 분투하는 것은 헬라어 쉬나델로sunathleō로 아델로athleō에서 왔다. 그 의미는 게임을 경쟁하여 다투다를 뜻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분투함으로 상이 있으며, 그 경쟁에서 느긋해지거나 산만해지지 말고, 용기를 가져야 한다. 함께 이와 같은 마음을 갖고 훈련을 한다면 상 받기를 갈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인내하며 달릴 수 있을 것이다(12:1, 고전 9:2425).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분의 몸의 지체들로서 유기적인 관계를 누리고, 자연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목표를 이루도록 함께 달리기를 갈망한다.

 

 

복음의 믿음을 위한 분투

 

바울은 복음의 믿음을 위해 함께 분투하도록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했다(1:27). 그리스도인들이 이 경주를 시작하도록 한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왜 여전히 이 경주를 하고 있는가? 무엇이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을 끌어당기는가?

 

바울이 그의 여행의 끝에 이르렀을 때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은 그에게서 떠났고(딤후 1:15), 그의 많은 동역자들은 그를 저버렸다(딤후 4:10). 그는 격려를 받으려고 어마어마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신실했던 몇몇 형제들뿐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그의 수고를 보여줄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기쁨이 있었다. 그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딤후 4:78)고 말할 수 있었다. 그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이 믿음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었다. 교회가 엉망이 되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격려가 되고 있을 때 그리스도 자신은 복음의 믿음을 위해 함께 분투를 계속하는데 격려가 되도록 점점 더 움직이신다.

 

나는 1980년에 주님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여러 해 동안 복음의 믿음을 위해 분투하기를 계속할 수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것은 나 때문이 아니다. 나는 주님께서 신실하게 움직이셨기 때문에 여기에 내가 있음을 안다. 나는 계속해서 반응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났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는지 모른다. 나를 매혹시키시고 이끄시고 있었던 분은 주님이시다. 그분은 나를 부르셨다. 나는 평안한 삶을 살고, 성공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주님을 섬기는데 그분의 긍휼로 모든 것을 드렸다. 나는 여전히 복음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대자들로 놀라지 않음

 

두 번째 항목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가치 있는 행동을 반대하는 자들로 놀라지 않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영 안에서 굳건히 서서 한 혼으로 복음의 믿음을 위해 함께 분투하는 것만큼 반대에 맞부딪칠 것이다. 건강한 지역교회는 종교적인 괴롭힘들과 맞선다(3:2).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외에 것을 말하는 이 종교적인 괴롭힘()들에 물려서 상처를 받았다. 이런 괴롭힘을 받은 후 부상과 출혈이 생겼지만 종종 그 이유를 모른다. 결국 교회생활에 완전히 참여하는 것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바울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 밖으로 이와 같은 개들을 쫓아내라. 그들을 출교시키라.”말해야 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필연적으로 믿는 성도들이 믿는 복음에 함께 분투하기 시작할 때 거기엔 의심이 자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 교회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잃기 시작하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잃는 것이 괴롭히는 사람을 만난 직후 시작됐다는 것을 알 것이다. 바울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온 종교적인 열심당원들은 모든 교회들의 성도들이 율법을 지키도록 했다. 그들은 할례, 안식일, 편식, 십일조 등을 지키도록 했다(15:1). 이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의문을 제기하고, 의심을 품게 했다. 바울은 교회가 건축된 후 이와 같은 반대자들이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을 반대할 것이고, 어떤 다른 것들을 들여와 그리스도에 섞어 복음을 대체할 것을 알았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영 안에서 굳게 서는 것처럼 한 혼으로 성도들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음의 믿음을 가져가는 데 함께 분투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목표는 이뤄질 수 있다. 교회생활이 이와 같을 때 그것은 놀라운 것이다. 이런 것이 일어날 때 어떤 사람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이고, 사람들이 복음에 대한 믿음의 체험을 할 것이다. 하지만 바울의 말은 그들이 멸망을 체험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일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가리킨다(1:28, 3:19). 그리스도인들은 반대자들을 직접적으로 부딪칠 필요가 없다. 주님은 그들을 돌보실 것이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전파한 복음은 결국 승리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이 한 영 안에서와 한 혼으로 함께 분투하는 것처럼 여전히 승리한다.

 

 

그리스도의 목적을 위한 고통

 

복음에 대한 가치 있는 행동의 세 번째 항목은 그리스도의 목적을 위해 고통을 받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의 상황을 볼 때 눈물을 흘려야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외에 어떤 것을 도모하는 종교적으로 열심을 내는 것 때문에 이 복음에서 떠나고 상처를 받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에게 큰 고통을 준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가장 큰 고통을 받으신다.

 

그리스도인들의 고통은 그분의 고통과 하나라고 계시한다. 그리스도의 목적을 위해 그분을 믿는 것뿐만 아니라 고통을 받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은혜로 주어진 것이었다(1:29). 그리스도의 고통은 교회를 산출하셨지만 오늘날 그분의 신부로서의 교회는 여전히 그분을 위해 준비되지 못하고 있다(19:7). 그리스도의 신부가 그리스도 자신의 밖으로 산출되었기 때문에 교회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초점은 그리스도께만 맞춰져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건축되어야 한다. 이것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은 아무런 방법이 없고, 오직 고통 받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다른 성도들을 인정하고, 유익하게 하고, 안위하고, 능력과 부하게 하게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위는 내게 주어졌다.”(28:18)

이때 제자들은 커다란 소망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분의 사역은 십자가로 가게 하시는 것이었다. 교회를 위한 주님의 고통은 그리스도인들의 것이 되어야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건축을 위해 필요한 그분의 사역과 고통을 나눈다. 주님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고통은 큰 영광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을 믿는 성도들일뿐만 아니라 그분의 몸을 건축하는 오늘날 그분의 사역을 위해 그분의 공동으로 수고하는 이들로서 그분께서 하신 구속을 이루는 공동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다(1:24).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목적을 위해 한 영 안에서 굳게 서고, 한 혼으로 분투하기로 결심했다면 고통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하는 많은 고통은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벗어나 주장하는 종교적인 괴롭힘의 결과다. 괴롭힘의 영향을 받은 사랑하는 이들은 기쁨과 결심을 잃어버린다. 어떤 사람은 교회생활을 떠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지도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 이러한 것들을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고통의 원인이 되는 자들의 뿌리를 뽑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추구하시는 것을 얻으시도록 계속 함께 분투해야 한다. 주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자. 그분은 모든 것을 경영하시는 방법이 있으시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 외의 어떤 것을 도모함으로 그분을 반대하지 않는 그분의 긍휼이 필요하다.

 

 

같은 갈등을 체험함

 

복음에 대한 가치 있는 행동의 네 번째 항목은 사도바울과 같은 이들로서 같은 갈등을 하고 주님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지키려고 분투하는 것이다. 주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분과 그분의 복음을 섬기고, 그리스도인들의 분투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영 안에서 견고히 서고, 한 혼으로 복음에 대한 믿음을 위해 함께 분투하는 서로의 일을 듣기 원한다(1:27).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 안에서 본 같은 갈등을 체험한다(1:30)고 말했을 때 빌립보 성도들은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로 복음을 전하러 처음 갔을 때 여러 날 동안 말했었다(16:1-40). 빌립보 성도들은 그 때에 그의 분투를 간증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큰 실수를 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바울은 궁금하기도 했을 수 있다.

내가 왜 마케도니아 사람에 대한 환상을 믿었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그들은 서로를 보며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기쁘게 찬양을 했고, 주님께서 그들을 풀어주시리라고 그들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풀려났다. 그들이 어떻게 풀려날 수 있었는가? 그들 안에 있는 이 믿음이 좌절하게 하는 족쇄에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투하게 하는 것 때문이었다. 그들이 함께 찬양을 하고,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분을 확대함으로 기적적으로 지진이 일고, 감옥의 문이 열렸고, 죄수들을 묶은 사슬이 풀렸다. 간수가 주님을 영접하고,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고 침례를 받았다.

 

바울이 그들에게 쓴 편지처럼 그는 다시 한 번 수감되었고, 그는 그리스도를 누리고 확대하는 자신의 분투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빌립보성도들이 알기 원했다. 바울을 수감시키는 자들의 손에 놓여 있을지라도 바울의 입장에서 그를 떼어놓을 방법이 없었다. 빌립보에서 비록 모든 것이 그를 반대한 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는 끊임없이 계속했다. 이제 로마에서 그는 자신의 분투가 헛것이 아니었음이 훨씬 더 분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러한 말로 빌립보성도들을 격려했다.

 

 

신실한 성도들의 복음에 대한 입장

 

유대인화 된 사람들은 빌립보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믿은 후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의 이유로 논쟁을 한다. 하지만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복음에 대한 믿음을 위해 굳게 서고 함께 분투하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복음의 가치 있는 행동, 주님의 왕국의 시민으로서 행동하는 것을 갈등하도록 성도들을 격려했다.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복음을 위해 분투하는 것을 간증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이 같은 분투에 참여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어떤 특정한 가르침, 실행, 그리고 교리에 서 있지 말아야 한다. 성도들의 입장은 그리스도뿐이어야 한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도모하는 열심을 내는 자들로 싸워야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성도들 가운데 건축될 수 있도록 기꺼이 고통을 받아야 한다. 성도들은 바울이 전파한 같은 복음을 영접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영접한 바울이 전파한 복음에 견고히 서야 하고 복음에 대한 믿음을 위해 분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