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구원의 확신

Hernhut 2016. 7. 17. 00:00

 

빌립보서 1:1819

 

바울의 기쁨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헌신케 하신 것에 전적이었다. 그는 이 거룩한 헌신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가장 극심한 환경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를 사로잡아 가둔 사악한 사역자들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었던 것조차도 기뻐할 수 있었다(1:16, 18, 3:2).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절대 그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앙갚음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도 그는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자신을 핍박하는 이들을 더 폭로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유대인화 된 이들은 바울이 다니는 모든 도시에까지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그러면서 그들은 바울이 일으킨 모든 교회에 사람들의 법령과 문젯거리를 더하여 그리스도를 가르쳤다. 그들은 자신의 야망, 불순, 그리고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오는 시기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1:15, 17, 1:7). 바울이 감옥에 있었을 때 한 교회는 안식일에 관심을 갖고 모였고, 다른 교회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런 말로 유대인화 된 이들은 복음으로 수고한 바울의 모든 것을 손상시키려고 했다. 그들의 뜻은 은혜의 복음이 영향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7:13).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러면 무엇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치레로 하든지 진실로 하든지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선포되시나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 참으로 기뻐하리라.”(1:18)고 말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선포되고 있는 한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히 이행되었다.

 

이와 같은 웅장함은 주님의 참된 종의 표이다. 하지만 그의 웅장함은 아량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기꺼이 교회들이나 진리에 희생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의미와 상관없이 성령의 사역을 기뻐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유대인화 된 이들의 전파가 주님께서 그에게 헌신케 하신 것을 방해하고 있었고, 그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루시기 갈망했다. 그래서 그는 삶의 과정에서 분명하게 고통을 받았다.

 

기쁨의 능력은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높은 미덕이다. 기쁨의 능력은 심리적인 것도 아니요, 정신적인 것도, 감정적인 것도 아니요, 의지적인 것도 아니다. 또 단지 일을 견디는 것을 기뻐하는 능력도 아니다. 참된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의 누림에서만 온다. 은혜가 있을 때 주님과 하나가 되고, 그분의 달콤함과 평안을 누린다. 기쁨은 자연스런 결과다. 불안과 극단적인 상황이 일어날 수 있고, 격려하고, 기뻐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런 상황과 관계없이 꿈쩍하지 않고 그분께 헌신하고, 그분의 은혜를 누려야 한다. 바울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누렸고, 그리스도는 전파되었다. 그래서 그는 기뻐했다. 이것이 그가 살기로 한 방법이었다.

 

주관적인 지식

 

바울은 19절에서 “....... 이것이 나의 구원으로 바뀔 줄 내가 알므로라고 말했다. 바울이 내가 안다고 확언한 것은 그의 개인적인 체험, 영적인 감각, 그리고 직관에서 비롯되었다. 한 개인의 주관적인 지식은 그들 체험의 수준에 기초를 둔 것보다 더 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젊은 성도들은 주님, 제가 버스를 타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고, 평강을 얻을 수 있고, 아니나 다를까 버스가 거기에 있었다. 비록 이와 같은 체험이 전진된 것이 아닐지라도 그것은 주님에 대한 귀한 체험이요, 주님을 아는 원인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의 주님에 대한 이와 같은 지식은 그들 생활 속에서 모든 기저(基底)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인 생활 가운데 이렇게 아는 것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체험을 못한다면 그리스도인 생활과 교회생활에서 좌절하게 될 것이다. 지식에 대한 그리스도인 체험은 계속적으로 전진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관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은 풍성한 내적지식에 의한 통제의 부족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은 내적지식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내적지식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요일 2:20, 27), 거룩한 생활의 내적구조(10:10, 8:12), 거룩한 진리의 장비(요일 2:21, 요이 1:1-13)에서 온다.

 

이런 내적 느낌과 지식은 그리스도인들 생활 가운데서 이끌려지고. 통제되어야 한다. 이런 것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찮은 소리를 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하나 됨으로 사는 내적능력을 증가시킴 없이 외적지식만을 갖는다면 자신들이 기뻐하는 것 무엇이든 행하고, 말하게 된다. “내가 안다는 것에 대한 체험을 갖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교회의 기도와 성령의 공급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을 때 그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는 감옥에 갇혀있었고, 카이사르 앞에 나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로마에 붙잡혀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그가 세운 교회들 가운데서 비정상적인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다. 오늘날 기독교와 얼마나 흡사한지!

 

이 교회들 중 한 지도자는 바울형제, 형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라고 말했소. 우리는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소. 사랑하는 형제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편지를 썼다.

 

바울은 이 편지로 골머리를 앓았다. 그는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주의 손에 달려있다.”라고 간단하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많은 것을 느꼈다. 그는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대했던 것 때문에 그는 기뻐하고 있었다(1:18). 바울이 알고 있었던 것은 패배나 죽임도 아니었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었다.

 

19절에 있는 구원은 헬라어 소테리아sōtēria에서 나왔다. 이 단어는 감옥에서 구출되는 것 이상의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구출 외에 구원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가 빌립보성도들의 기도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공급으로 구출에 이르는 것을 가리켰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섬기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이들이 아무리 영적이더라도 그들은 많은 성도들의 기도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들의 기도 없이 최전선에 나아가 수고하는 것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공급이라는 헬라어는 코레게오chorēgeō의 어근에서 온 에피코레기아epichorēgia로 그 의미는 합창단을 이끌다”, “합창단에 물질을 대다를 뜻했고, 그 이후에 은유적으로 공급하다로 사용되었다. 고대에 극단은 도시에서 도시로 여행하며 드라마나 연극을 했다. 이와 같은 무리는 합창단이라고 불렸고, 코라구스choragus라고 불리는 이들의 넘치는 공급으로 후원을 받았다.

 

바울의 단어 선택은 로마에 그리스도를 드러내려는 것이었음을 가리킨다. 이 전람을 위해 그를 풍성하게 공급하는 코라구스choragus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님이셨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드러내도록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님의 모든 풍성이 그의 모든 생활에 공급되고 있었다. 바울은 어떤 상황이나 어떤 시간에도 그가 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과 그의 또 다른 차원의 구원 체험을 증가시키기 위해 이런 공급과 교회의 기도가 필요했다.

 

 

바울의 전진하는 갈망

 

바울은 영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낙원과 세 번째 하늘로 사로잡혀 올라가는 체험을 했다. 그는 그곳에서 사람이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못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후 12:4). 그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다. 그가 받은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을 완성하도록 하는 것이었다(1:25).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그가 구원이 여전히 필요했다고 말할 수 있었는가? 바울을 전진해 가기를 원했다(3:1214). 그는 변화, 증가된 계시, 그리고 이런 놀라운 구원에 대한 더 높은 체험을 더 갈망했다. 바울은 구원받았다. 그는 높은 수준의 영적 성숙을 얻었다. 그래도 그의 갈망은 그의 영, , , 그리고 환경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어떠함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 삶 가운데서도 이 네 영역에서 주님의 구원 사역이 필요하다. 바울은 교회의 기도와 성령님의 풍성하신 공급으로 주님의 구원을 체험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