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립보서 1:9
바울은 지혜가 있었다. 그는 빌립보교회가 아주 순수하고, 뚜렷했고, 기쁨이 있었지만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빌립보교회는 많은 혼란스러운 일들에 대해 듣기 시작했다. 다른 많은 교회에 있던 유대이즘에 대한 요소들이 그들에게 몰래 기어들어 와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그들의 단순함을 도둑질을 해갔다(갈 1:6). 이와 같은 요소들은 그리스도의 일들과 섞였다. 그 일들은 빌립보교회가 거절하기 어려웠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이와 같은 일들로 영향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안목으로 점점 더 풍성해 지기를 기도했다.
너희의 사랑이 풍성케 되기를 ......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주님의 배적부분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관심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빌 1:8). 이 관심은 그들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케 되는 것이었다(빌 1:9). 그들이 이미 사랑으로 가득했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이 풍성케 되는 것이 필요했다고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말한 것이 아주 흥미롭다.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사랑이 부족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전체에 사랑의 의미를 썼다.
하지만 빌립보 성도들은 고린도 성도들과 같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주님의 종으로 바울을 사랑했고, 또 성도들 서로가 사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랑은 점점 더 풍성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전진해야 했고, 훨씬 더 높아져야 했다.
“풍성해 지다”를 의미하는 “페릿슈오perisseuō”는 “남아돌다, 탁월하다, 더 풍성하게 갖다”를 의미에 담고 있다. 예상한 것보다 더 많아지는 것을 나타낸다. 내가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면 여러분은 푸짐한 식사를 먹었기를 기대 했었겠지만 내가 집에서처럼 적은 식사를 가져다가 먹었더라도 그 식사는 넘치는 식사였을 것이다. 바울은 성도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훈련하기를 갈망했다. 빌립보 성도들은 이미 풍성했고, 순수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사랑의 더 높은 단계에까지 계속하고, 발전시키고, 획득하도록 권고하는데 이 “페릿슈오perisseuō”를 사용했다. 사랑이 풍성하다는 것은 높은 관점과 체험을 가지고 있고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모든 부모는 자신들의 자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모두가 다 풍성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부모는 기대를 가지고 아주 높은 수준으로 자녀들을 사랑을 한다. 이것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다. 가장 좋아하는 갈망의 사랑이다. 이것은 그들의 사랑이 풍성하다는 의미다. 또 다른 부모도 자신들의 자녀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자녀들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이 자녀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높은 수준의 사랑이 아니다. 풍성한 사랑의 부모는 자녀들에 대한 높은 기대가 있다.
주님은 높은 수준의 사랑을 가진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의 높은 수준의 사랑은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가는 그런 사랑이다. 주님은 우리의 삶이 더 높은 곳, 하늘에 속한 곳에 있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점점 더 풍성해 지는 사랑, 높은 기대, 증가된 사랑을 갖는 우리를 원하신다. 우리는 보통의 성도들이 되기 원하지 않고, 더 높이 가기 원하고, 심지어 우리의 사랑이 하늘에 속하기를 원한다. 바울은 이와 같았다. 그는 천연적인 애정을 갖고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주의 사랑을 가지 자였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을 높은 수준으로 이끌기를 추구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이 주님을 갖고, 주님의 갈망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했다. 이것이 바울이 “너희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 지기를 .......”이라고 쓴 이유다.
풍부한 지식
빌립보 성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풍성했다. 여기서 지식은 꼼꼼하고, 풍성한 지식, 인식과 안목을 의미하는 에피그노이스epignōis를 사용했다. 에피그노이스epignōis는 그노이스gnōis가 강화된 형태다. 보다 더 풍성한 지식, 알려진 것을 더 아는데 참여하는 것, 강하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피그노이스epignōis는 단지 직관을 바탕으로 해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을 따른 신성한 계시의 지식이다. 이 지식의 풍성함은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갈망하심, 그분께서 움직이심, 그리고 그분 사역이 완성에 참여하게 한다. 풍성한 지식은 우리를 격려하고, 통제하고, 이끌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과 섬김, 특히 그분의 관심과 교회의 유익의 근거가 된다. 풍성한 지식이 살아있는 말씀과 관계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과 그 모든 풍성이 되는 것으로 여겨진 것처럼 이 풍성한 지식은 우리의 것이 된다. 이 풍성한 지식을 갖는 우리는 성경으로 시간을 보내야 하고, 그 풍성이 되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우리의 지식이 이와 같은 넒은 범위를 갖는다면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과 교회생활에 탄탄한 기초가 될 것이다.
지식은 우리를 통제하고, 장비시키고, 보호한다. 이것이 우리가 진리, 성경, 영적인 서적을 접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우리는 우리의 기초로서 지식이 필요하다. 우리는 건강하지 않은 어떤 것을 대항하기 위해 영적인 지식이 되어야 하고, 장비할 필요가 있다. 이런 지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사랑에서 우리가 산만해지게 하는 모든 것을 대항하여 설 수 있다.
누군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반응하는 방법을 알 것이다. 지식은 우리를 보호하고, 합당하게 주님을 따를 수 있게 한다. 지식의 부족은 우리가 이상한 일을 하게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진실로 모른다면 우리는 이상한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다. 한 학생은 “주님, 제가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시험을 통과하고 좋은 성적을 받게 해 주소서. 제게 ‘A’를 주시면 더 성경을 읽기로 약속합니다.”라고 기도할지 모른다. 주님께선 이런 이상한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실 수 있으실까? 우리는 주님을 곤욕스럽게 합니다. 우리에게 응답하시지 않아 그분께서 참되시지 않은 분이라고 말하든, 그렇지 않고 우리에게 응답하시든 우리는 그분께서 마술사로 생각한다. 문제는 지식의 부족이다. 이런 방식으로 기도하는 누구든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한다. 가끔 그리스도인들은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영적인 일에 관해 경험・지식 부족 등으로 순진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주님, 저를 이끄소서.”라고 기도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우리가 가진 지식에 따라 우리를 이끄실 수 있을 뿐이다. 지식이 성숙하기 때문에 풍성한 지식, 에피그노이스epignōis가 된다. 그러면 주님의 이끄심은 수정같이 맑게 된다. 이 지식은 우리 그리스도인 삶과 섬김의 기초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께서 무엇을 돌보시는지를 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고, 이 일이 어떻게 완결될 것인지를 안다.
그런 후 우리는 그분과 그분의 갈망에 대한 것이 아닌 어떤 것을 멀리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사는 방법, 우리 자신을 투자하는 방법을 안다. 우리는 “주님, 당신과 당신의 갈망과 관련된 풍성한 지식으로 저를 장비시키소서. 제가 당신의 말씀 안에서 수고하는 것처럼 제가 얻는 지식이 풍성한 지식으로 성숙하게 하소서. 그러면 저는 당신의 관심과 당신의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살고,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기도해야 한다.
모든 안목
나는 여기서 안목이라고 번역을 했지만 다른 번역에서는 총명으로 번역을 해 놓았다. 안목이라는 헬라어는 아이스데이스aisthēis로 인식, 통찰력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관심의 진보를 위한 풍성한 지식과 자신들의 참된 본성을 이해하고, 분명하게 일들을 인식하는 능력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을 갈망하신다. 안목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은 거짓과 불순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 쉽게 열심을 갖게 되고, 우리의 안목을 잃어버릴 수 있다. 또 영적인 지식을 가진 성도들 역시 그들이 가장 열정으로 가장하기 쉽기 때문에 그들의 안목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우리의 기질이 그리스도 안에서 반응하기보다 오히려 천연적으로 환경과 상황에 반응한다. 우리는 움직임과 감정적 고무(鼓舞)에 자극을 받기 쉽다. 그것은 시류에 편승하기 쉽지만 영적인 것들은 시험을 받을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것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은 것들이다. 안목은 지식에 더해짐이 필요하다.
사도바이 빌립보 성도들의 순수함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는 또한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알았다. 예를 들어 율법에 열정을 가진 성도가 예루살렘에서 와서(행 21:20) 그가 “바울이 가르치는 것은 선하다. 그리고 나는 바울이 나누는 것을 누린다. 하지만 약간의 조정과 조절이 필요하다.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너희는 우리가 예루살렘에서 계속 안식일을 지켜왔다는 것을 알았는가?”라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빌립보 성도들은 먼저 자신들의 보호를 위해 지식이 필요했다. 그런 후에 그들은 아주 순수하지 않은 자들의 움직임을 보는 안목이 필요했다(빌 1:15).
안목보다 더 중요한 것들은 없다. 우리가 안목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하는 너무 많은 사람들과 환경이 있다. 안목은 그리스도인이 도달하고 훈련하는데 가장 어려운 미덕이다. 어떤 것의 표면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것은 내면에서는 매우 보기 어렵다.
우리가 풍성한 지식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을 이행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모든 안목을 훈련할 수 있어야 한다. 지식은 우리에게 우리의 개념과 목표를 주지만 우리가 전진해 가는 상황을 볼 능력을 주는 것은 안목이다. 풍성한 지식은 하나님과 그분의 관심을 알게 하지만 안목은 그 관심을 보호하고 보존하게 한다. 영적인 것은 모든 것을 안다고 성경이 말하는 이유다(고전 2:15). 영적인 것은 모든 것들의 본질을 볼 수 있다. 이 아는 능력은 성령의 움직이심과 이끄심을 우리에게 보여 줄 것이다(고전 2:10–12). 성령의 움직이심과 이끄심은 아는 능력과 관계가 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그분을 누리면 누릴수록 이 앎의 능력은 증가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유익할 수 있는 것과 그분께 무례한 것을 알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관심에 도움이 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것이다.
바울은 진실로 빌립보 성도들을 사랑했다. 그는 기쁨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빌1:4). 빌립보 성도들이 그들의 마음에 바울을 가졌기 때문에 바울이 주님의 은혜를 누린 것처럼 그들은 같은 은혜에 그와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빌 1:7). 바울은 주님의 내적부분에 있었고,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그분의 갈망에 참여했다(빌 1:8). 그는 그들의 사랑이 풍성해지고, 더 확장되고, 높아지기를 기도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그들을 보호할 풍성한 지식이 필요했다. 그들은 가끔 믿는 성도들의 마음에 불순한 것들이 자랄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안목이 필요했다.
풍성한 지식과 모든 안목으로 더 풍성하게 사랑하는 것은 모든 불순에게서 순수하게 보호할 것이다. 그들은 또 불순하게 된 자들조차도 사랑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의 목적의 지식을 따라 사랑하는 것이 필요했다. 풍성한 지식과 안목으로 사랑하는 것은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을 분발시킬 것이다.
우리가 빌립보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관심을 배우게 하소서. 우리의 풍성한 사랑이 풍성한 지식과 모든 안목으로 점점 더 자라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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