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거룩한 명령에 따라 사는 것

Hernhut 2016. 7. 10. 14:15

 

성경 : 빌립보서 1:1218

 

빌립보서 처음 11절에서 바울은 기틀을 마련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들로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이 되기를 구하노라.”고 썼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힌 나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바란다.”를 추가함으로 이 부분에서 그의 편지를 맺기를 바란다. 하지만 좁고 사방이 막혔고, 아주 가난하고 가련한 상태에 있었을지라도 그는 갇힘이 복음의 확장의 기회가 되었음을 알았다(1:12). 두 가지의 일이 일어났다.

하나는 결박된 그의 사슬이 그리스도 안에서 된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온 궁궐 안과 다른 모든 곳에”(1:13)

다른 하나는 바울의 결박당함 때문에 주님에 대한 신뢰, 그리스도에 대해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1:14). 바울의 종들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전파되고 있었다. 바울이 거룩한 약속에 의해 통제되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는 복음의 확산하는 사역자가 되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는 바울의 영향

 

바울은 이미 복음에 참여하는 빌립보 성도들에 대해 주님께 감사를 했다. 그는 자신의 종에게 조차도 복음을 알기 원했고, 그를 지키는 근위병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선구자였다. 이 근위병들은 궁중을 지키고, 시저의 재판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바울과 같은 자들을 지키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바울은 빌립보서 1:13절에서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결박당한 일이 온 궁궐 안과 다른 모든 곳에 드러나게 되었고

드러나다, 알려지다, 빛이 비춰지다는 헬라어로 파이노phainō의 어근에서 온 파네로스phaneros. 이 빛 비춤의 결과는 어떤 것이 드러나고, 알려지고, 눈에 띄고, 분명하게 보이고, 나타난다.

바울은 자신의 종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의 간증은 근위병들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해졌다. 그는 자신의 지키는 자들에게 준 영향이 머지않아 모든 무리에게 영향이 미친다는 것을 알았다. 사로잡힌 자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로마제국의 심장부로 전진해 가고 있었다. 결국 그의 사역은 온 땅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수고하는 것처럼 이 일을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복음을 전파하러 대학교로 나아간다면 대학교를 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신뢰해야 한다. 캠퍼스 한 구석에서 복음을 전파하지만 머지않아 모든 캠퍼스 구석구석에 복음이 영향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믿는 자들에게 주는 바울의 영향

 

바울의 종들이 억류자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믿는 이들이 주님 안에서 확신이 증가가 되는 원인이 되었다(1:14).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담대하게 말하도록 하는 원인됐다. 바울의 본은 믿는 성도들이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하는 담대함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됐다.

성도들은 바울의 간증이 바울의 종들에게 증거가 되었다는 것을 보았을 때 주님 안에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바울이 전파한 같은 복음을 전파하도록 그들에게 담대함을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가치에 대한 전적인 확신 없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이 억류된 가운데 담대함을 보고서 그들은 믿은 것에 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두려움 없이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1:14).

 

 

웅장한 마음

 

바울에게는 장엄함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질투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전하지 않았다. 이기적인 야욕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이 투옥되는 고통을 받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했다(1:15, 17). 오늘날에도 진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어떤 사람들은 야망과 욕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한다.

또 다른 이들은 사도를 사랑하는 것 등 좋은 의도를 가지고 복음을 전파했다. 그들은 바울이 복음을 변호하고,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것을 알았다(1:1517). 이 모든 것에 대한 바울의 평가는 그리스도께서 전파되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1:18). 그리스도께서 전파되는 것이 그의 헌신이었고, 그가 초점을 맞는 것이었으며, 바로 그것이 그의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이 계획적으로 그를 해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선포되고 있었던 것 때문에 그는 기쁨이 있었다. 많은 성도들의 생각에 이와 같은 불순한 복음 전파는 좋은 열매를 전혀 맺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무가 열매를 결정하는가?(7:1718) 사실 많은 성도들은 질투로 복음을 전파한 이들에게 주님께서 그분의 축복을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에게 영광을 돌리시지 않으시고, 복음을 듣는 이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무리가 아주 많이 모이고, 그들의 일에 대한 반응을 때때로 들을 수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는 불순하게 복음 전파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하노니 내게서 떠나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7:2223)

하지만 주님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었을 때 그분의 축복을 주신다.

바울은 질투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이들일지라도 그의 형제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산만하게 하는 어떤 가르침을 반대했지만 항상 분열이 될 만한 적개심을 피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그는 주님의 다른 사역자들과 그 자신 사이를 선택하도록 어떤 누구에게 절대 강요하지 않았다(고전 1:1013). 다른 사람들이 다른 것을 추가하여 불순하게 그리스도를 전파한 반면 바울은 단순히 그의 헌신에 집중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선포되었던 것에 기뻐했다. 이와 같은 웅장함은 주의 참된 종임을 나타낸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장엄했던지!

 

 

그리스도의 것

 

하나님은 그리스도만을 원하신다. 하지만 종교는 항상 다른 어떤 것을 추가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에 추가하기 위해 어떤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그 교회는 그 중심에 그리스를 잃고, 그것을 제도화하려고 한다. 다른 누구나 다른 어떤 것을 더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이들은 그리스도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다른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변질시킨다.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 성도들이 행한 것처럼 특정한 사람을 따른다(고전 1:1113).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이끄는 이들을 존경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성도를 이끄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그들은 성도들의 본이 된다(고전 11:1).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가르침, 품행, 목적, 믿음, 인내, 사랑, 끈기, 핍박, 그리고 고통을 친밀하게 따라야 한다(딤후 3:1011). 하지만 이와 같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자신을 대체할 수 없다. 가르침들은 성도들의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대체시킬 수 있는 또 다른 것이다. 교회가 합당하게 하는 가르침 없이 살 수 있는 교회는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가르침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에 플러스가 될 수 있다.

바울의 복음은 그리스도뿐이었다. 유대인화 된 사람들은 율법을 더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 바울의 사슬에 고통을 추가했다. 유대인화 된 이들은 할례, 식이조절 법, 안식일 등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해 자신들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에게서 떠난 사람들을 자신들에게로 데려왔다. 그들의 실행들은 그리스도를 대체할 수 있다. 사실 그들의 실행들은 붙잡기 쉽기 때문에 일반 사람이나 일반 가르침보다도 훨씬 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해가 될 수 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보다 오히려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을 행하는 것이 쉽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실행은 주님의 이끄심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것이 결국 외적인 움직임에 의해 삼켜지게 될 것이다.

 

 

부패케 하는 질투의 힘

 

시기, 질투는 프흐도노스phthonos. 이 단어는 프흐데이로phtheirō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단어는 타락하다, 더럽히다, 심지어 파괴하다를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이 질투와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을 때 바울은 복음의 전진에만 관심을 두었다(1:15). 자아생명은 사람들을 멸하고, 타락시키고, 더럽힌다. 하지만 자아생명이 이런 바울의 방식으로 증가될 때 시기하는 사람들을 사라지게 한다. 이렇게 되면 그런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질투하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성도들은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헌신케 하셨던 것을 위해 싸워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부러움, 질투에 의해 붙잡힐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의 유익을 위해 싸우지 못한다. 시기는 사람들을 더럽히려고 가장 기본적인 전략을 사용할 수 있고, 또 그들 자신의 사람, 가르침, 실행, 사역 등으로 위협하거나 또 자랑함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대해 낮추려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만을 붙잡을 때 이런 시기와 질투가 그리스도인들 안에 설 땅이 없다. 시기와 질투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기 때문에 주님의 긍휼과 은혜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몸에 해()를 끼치게 할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시기와 질투는 결국 분열을 산출한다. 루시퍼가 하나님의 위치를 부러워했기 때문에 그는 사탄이 되었다(14:1215). 시기 때문에 온 세상 시스템이 일어났다. 그 후 세상 시스템은 발전했다. 그리하여 시기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파괴하려고 한다. 주님을 죽게 했던 종교지도자들은 그렇게 질투를 했다(15:10). 같은 방식으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질투와 시기 때문에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손상시킨다. 종교 세계가 시기와 질투를 만들어 내고, 도움을 주는 사탄의 시스템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데 있어 다른 동기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선한 뜻과 사랑으로 전파했다(1:1516). 여기서의 사랑은 가장 높은 수준의 사랑인 아가페agapē. 이와 같은 사랑은 질투와 시기를 일소(一掃)한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바울처럼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그분을 추구케 한다.

바울을 반대하는 이들은 순수한 동기로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야심과 욕망으로 전파한다(1:17). 진정함 없이 전파하는 것은 거룩한 동기로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목표는 바울의 매임에 고통을 더하게 하는 것이었다.

야고보와 관계있었던 이들이 바울이 로마로 끌려가기 전 그의 유익을 위해 개입할 위치에 있었지만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음을 믿는다. 바울에게 일어난 일은 비극적인 것이지만 이런 비극적인 일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보다 종교에 사로잡혔을 때 일어난다.

그에 반해서 바울은 사랑으로 행동했고, 심지어 그가 보석으로 풀려났을 때 교회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믿는 성도들을 위해 돈을 모으도록 격려했다(고전 16:13).

 

 

은혜 안에 있는 기쁨

 

바울이 했던 것처럼 주님의 참된 사역을 한다는 사람 누구든지 표적(標的)이 될 것이다. 바울은 공격을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반응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을 때 그는 그것을 기뻐했고, 그리스도는 선포되었다(1:18). 바울의 기쁨은 단지 행복이 아니었다. 그의 기쁨은 은혜의 누림이었다.

기쁨이라는 헬라어 카이로chairō는 은혜를 의미하는 카리스charis에서 왔다. 이와 같은 환경과 처지에서의 기쁨은 은혜를 요구한다. 견디는 것은 한 가지의 일이지만 진실로 기뻐하는 것은 또 다른 것이다.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이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다. 바울은 동기와 상관없이 그리스도께서 선포되는 것이면 기뻐한다. 사람이 내게 취할 수 없는 은혜를 누린다.”고 말할 수 있었다.

 

 

거룩한 헌신으로 움직임

 

헌신 없이 사는 사람들은 빈 삶을 산다. 거룩한 헌신을 따라 사는 이들은 의미가 가득한 삶을 살고, 어디를 가든지 전진하는 복음을 볼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기뻐할 수 있다. 왜냐면 그들은 거룩한 헌신으로 사역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에게 주님께서 계시하시는 대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에 분명하다. 그래서 학생일 때, 풀타임사역자일 때에도 의미로 가득하다. 헌신의 사람은 환경과 처지와 관계없이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웅장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왜냐면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가 교회를 일으키러 여행하고, 그의 손으로 일을 했으며, 또 사슬에 묶여 감금되었어도 그의 삶은 목적이 있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거룩한 헌신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