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20–26
바울의 기대와 소망
바울은 로마에서 죄수로 있는 동안 그를 지키는 이들의 눈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루 24시간 동안 감시받았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진심어린 기대와 소망이 있었다. 그런 환경에 있으면서 그는 절망하거나 짜증내거나 또 불평하지도 않았으며 그리스도 외에 어떤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이 그의 투옥에 강한 고통의 원인이 되게 했었지만(빌 1:17) 그의 거룩한 헌신은 오직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뿐이었다. 그는 로마에 그리스도를 전파하려고 했고, 로마에 들어갈 것을 확신했었다. 그의 원대한 기대와 소망은 그가 알았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구원의 영역 안으로 빌립보성도들의 기도와 성령님의 풍성한 공급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전파될 것이라는 확신이었다(빌 1:19).
기대와 소망은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같은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하지만 마치 그분을 기대하는 것처럼 다 살지 못한다. 누군가가 “오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라고 말했다면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회개하는 데 열을 올릴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소망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분께서 오시는 것을 기다리시기를 요청한다. 왜냐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진심어린 기대가 부족하고 준비가 덜 되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대했다면 그분은 지금쯤 이미 다다르셨을 것이다. 왜냐면 그분의 신부는 준비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계 19:7). 그분의 신부의 소망은 강렬한 갈망이기 때문이다.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의 입장(立場)이다. 기대는 그리스도인들의 준비됨을 산출한다. 바울의 기대와 소망은 그가 로마에서 감시받고, 전시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담대함으로 그리스도를 확장함
바울이 사슬에 묶여 있었던 것처럼 그는 흔한 범죄자가 되어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부끄러운 상황 속에서 그는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따라 내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나니”(빌 1:20).
이 구절에 있는 “높이다”라는 단어는 “확장하다, 확대하다, 큰 것을 보여주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메가루노megalunō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음에도 그는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기를 기대했다.
“모든 담대함”이라는 헬라어는 “파르헤시아parrhēsia다. 이 단어는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말하고, 알리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에게는 넘치는 것이 있었다. 그와 그를 따르는 이들 조차도 그들이 본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렸다. 성령님께서 그를 채우고 계셨다. 그에게는 죽음조차도 무서울 것이 없었다.
거룩한 풍성들이 그 안에서 넘쳐 있었다. 그는 생명, 진리, 계시, 체험이 넘쳐 있었다. 그는 어떤 부족함, 결핍이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고, 그의 환경에 대해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풍성들이 흘러 넘쳐났다. 그는 아주 용감했다. 갇힘이 그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을 좌절시킬 수 없었다.
바울이 로마에 보내지기 전 아그립바왕 앞에서 재판을 받았을 때 그는 왕 앞에서 말했다.
“각하뿐 아니라 이 날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이렇게 결박당한 것을 빼고는 거의 나와 같이 되고 전적으로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 26:29)
그가 험악한 분위기에서도 얼마나 용감했던지! 그리스도께서 그의 용감함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의 담대함, 확신은 그리스도를 높였고, 그분께 영광을 돌렸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가운데 성령의 향기가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원인이 될 때 그분은 드러내신다. 그것은 단순한 언어의 선포이상이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확장되시는 성령님을 누려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그
그리스도께서 드러내져야 한다.
죽느냐 사느냐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했다.
“내게는 사라는 것이 그리스도시오, 죽는 것이 유익이라.”(빌 1:21)
역사 속에서 이와 같이 말한 사람이 없고, 바울이 행한 방식으로 그것을 의미한 사람이 없음을 안다. 한 면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풍성하게 누리는 것에서 자신이 돌이킨 모든 것에서 떨어져 나오기를 갈망했다. 그는 단순히 순교의 순명(順命)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어떤 고귀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바울은 주님을 여러 해 동안 알았고, 체험했다. 하지만 주님을 풍성하게 알고 체험하는 장벽이 그를 막고 있었다. 그가 100% 예수님과 함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육체적인 존재의 한계에서 느슨해지는 것이었다.
바울과 같은 영적인 형제들조차도 그가 부분적으로만 알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전 13:9). 그러므로 그는 영원히 주님과 하나 된다는 확신을 풍겼다. 그에게는 주님을 거울로 희미하게 보는 것이 육체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여겼다(고전 13:12).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에 어느 정도 고통을 겪는다. 그리스도인들도 종종 죄를 짓는다.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들은 반복적으로 짓는 죄를 고백하러 주님께 나아와야 한다. 하지만 어느 날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풍성하게 그분의 임재를 누릴 것이다. 그런 고귀한 삶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주님과 함께하는 교제를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또 다른 생각으로 빌립보 성도들과 그들의 필요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했고, 그와 그들이 서로의 마음에 두었을 때 그는 자신의 육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더 필요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을 위해 그는 남았을 것이고, 그들의 전진을 위해 계속 그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믿음 안에서 기뻐했을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들의 전진이 멈추지 않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또 그 반대의 상황에서는 성도들을 앞으로 향하도록 이끌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죽느냐 사느냐는 카이사르 네로에 달려있었지만 네로는 단지 주의 주님의 손에 달려 있었다. 바울은 주님께서 교회들과 함께 하려고 하는 바울의 갈망에 따라 일하실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바울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다. 그의 논리는 하나님의 갈망하심과 일치했다. 그는 주님 앞에서 죽어야 할지, 아니면 살아야 할지를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땅에서 계속 수고하기를 선택했다. 이렇게 땅에서 수고하기로 한 것은 이런 선택이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이었음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바울이 유일하게 붙잡은 것은 믿는 성도들이었고, 지역교회들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같은 마음을 갖기를 주님께 구해야 한다. 또 빌립보 성도들과 같은 신실한 성도들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시고, 믿는 성도들을 위해 살게 하소서.
기쁨의 원인이 되는 것
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빌립보 성도들의 신뢰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풍성케 함으로 그들에게 다시 돌아갈 것을 말함으로 이 부분을 결론을 내렸다(빌 1:26). 의심의 여지없이 그가 빌립보 성도들을 볼 수 있었던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통과한 체험은 그를 변화시켰다. 그는 하나 됨을 기키는 소망을 가진 이방인 교회들부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성도들까지와 유대인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의 교제를 갖는 성도들에게 재정적인 후원을 전달했다(롬 15:25–31). 그의 갈망은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적인 분위기를 지워버리는 것이었다(행 21:20).
유대인 성도들과 하나 됨을 유지하려고 그는 율법을 지키는 그들과 함께했다(행 21:21–26). 그 결과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빌립보 성도들은 그에게 일어난 것에 놀랐다. 그래서 그는 “내가 너희를 다시 보러 갈 때 내 안에 있는 너희 신뢰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풍성해 지기 위해서다. 너희는 열심 있고, 적극적이고, 고투하고, 전파하고, 빈틈없이 꽉 짜인 바울을 볼 수 있다. 허나 너희가 다시 나를 만날 때 너희는 영적인 바울을 볼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 누구에게도 기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안다. 예루살렘에서 나는 일어났고, 내가 내 자신의 감옥에 있었다. 몸 안에서 하나 됨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이제 나는 이 하나 됨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말할 수 있었다. 바울은 전진했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 성장해 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빌립보 성도들의 기쁨은 더 풍성해졌을 것이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해져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2년 전의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장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기쁨의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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