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뛰어난 것들을 입증하며 그리스도의 날까지 성실하고 실족거리가 없는 사람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들로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이 되기를 구하노라.
—빌립보서 1:10–11
빌립보서 처음부터 두 가지 면이 열린다. 하나는 하나님께 속한 면이다.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 바로 이것을 나는 확신하노라.”(빌 1:6)
하나님은 빌립보 성도들 가운데서 일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 일을 수행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책임이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의 책임이다.
“너희가 뛰어난 것들을 입증하며 그리스도의 날까지 성실하고 실족거리가 없는 사람이 되며”(빌 1:10)
이것은 빌립보 성도들이 해야 할 아주 실행적인 어떤 것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두 구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 그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결하실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날까지 성실한 성도들이 되고, 실족하지 않는 성도들이 되기 위해 우리는 탁월한 일들을 입증해야 한다.
탁월한 일들을 입증함
입증하다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도키마조dokimazō다. 이 단어의 의미는 “시험하다. 테스트 받다. 증명하다. 검사하기 위해 살펴보다”를 의미한다. 더 깊이 들어가면 진짜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것, 시험한 후 진짜로 인식하고,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또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진짜라는 것이 하나님 자신에게서 오기 때문에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가장 진짜이신 분이시다. 그분은 위선과 불순의 동기가 없으시다. 이것은 영원히 참이다. 게다가 하나님께 오는 것, 하나님의 것, 하나님에 의해 산출된 것,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모든 것은 자격이 있고 높은 가치가 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탁월한 일들로 입증할 필요가 있다고 썼다. 빌립보 성도들은 어떤 일들이 진짜이고, 자격이 있는지를 테스트를 해야 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공과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리스도인 복음전파자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자신의 삶을 드릴 수많은 사람들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에 감사해야 하지만 그것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일어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들이 진짜인지를 알고, 일들을 시험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무엇이 진짜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서 일으켜지기 쉽다. 우리는 영적인 일들에 관해 냉철해져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복음전파자들에게 듣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감정으로 일으킴 받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가져오신 것을 받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영적인 일들을 잡으려고 시도할 때 그 일들의 진짜임과 자격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빌립보 교회생활은 성도들이 정말 사랑스럽고, 단순하고, 순수했기 때문에 놀라워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성실이 일을 테스트 하는 능력과 그들이 진짜였는지를 아는 능력을 잃는 원인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탁월한 일을 입증하도록 말한 이유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의 안목을 잃지 말아야 하고, 단순함과 순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마 10:16). 예를 들어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헌신된 젊은 성도들 무리가 있을 것이다. 이 젊은 성도들이 목사에게서 그들의 방향을 찾는다면 그 목사는 “주님을 사랑하는 형제들이군요. 그러면 여러분은 성경학교와 신학교에 가야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서 교회생활을 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청년들이 정말 들어야 하는 것은 “주님을 좀 더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 매일 주님을 갖는 것을 훈련하라. 그분과 함께 교제를 하는 시간을 가지라.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이끄실 것이다. 그분 자신을 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을 보여주실 것이다.”라는 말이다. 오늘날 주님을 사랑하는 젊은 성도들은 주님 자신에게보다 오히려 교파나 목사의 지시나 말에 빠르게 반응한다. 왜냐면 그만큼 이 젊은 성도들은 단순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그 길을 따른다. 이것은 테스트로 일을 입증하는데 중요한 이유다. 그것은 무엇이 탁월한지를 아는 능력을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정말 쉽다.
일반적이지 않고 탁월함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탁월한 일을 입증하라고 권고한다. 이 탁월한 일은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다. 이 일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산출하고, 자라고 건축되는 일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 서점 진열대에 성경에 대한 많은 책들이 꽂혀 있다. 우리가 이 책들을 읽고 주님께 인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그 책은 일반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이 우리를 주님께 이끈다면 그것은 탁월한 일들 중에 하나다. 우리 안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증거를 산출하게 하는 일들이다.
지역교회들은 탁월한 일에 포함되었다. 지역교회는 일반적이지 말아야 한다. 모든 지역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해야 한다(엡 2:22). 어떤 교회들은 성령으로 가득하고, 다른 교회들은 좌절로 가득하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의 증거를 산출하시기 위해 각 교회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참된 교회생활을 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고 탁월한 것이다. 교회생활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때문에 그분에 의해 완전하게 입증된 어떤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산출하고 전달하기를 열망해야 한다. 우리의 태도는 항상 그리스도를 살아야 하고(빌 1:21) 그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빌 3:9). 우리는 함께 그분을 추구한다(딤후 2:22). 우리는 서로를 건축한다(엡 4:16). 우리는 일반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전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산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갈망과 함께하는 삶이다. 우리의 삶은 주님의 증거를 위한 삶이다. 우리와 함께하는 삶은 일반적인 어떤 것이 아니고 탁월한 어떤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산다.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
바울은 그리스도의 날까지 빌립보 성도들이 성실하기를 갈망했다. 성실한 사람은 순수하고, 단일하고, 숨김없는 동기를 가진 사람이다. 성실이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에일리크리네eilikrinē다. 이 단어는 태양광선을 의미하는 헤일레heilē와 올바르게 구별하는 것, 심리적으로나 법적으로 결정하다를 의미하는 크리오krinō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태양의 빛으로 판다하다, 진짜임을 시험하다, 순수함, 심도 있는, 정성이 있음을 말하는 의미한다. 순수한 사람은 빛으로 심판을 받은 사람이다. 헤일레heilē는 강렬하고, 꿰뚫는 것을 나타내는 태양 빛의 광선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태양 빛의 광선 아래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내적존재는 계속해서 이 빛으로 심판 받았고, 시험받았다. 이와 같은 강도(强度)의 빛은 부정적인 것들을 드러내고 죽이고, 긍정적인 것들을 분배하고 주입한다.
우리가 젊을 때 주님을 위해 일하기 원한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서 우리의 갈망은 점점 더 주님과 함께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젊을 때 우리의 갈망은 큰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그리스도와 함께 단순하게 살기 원한다. 이것은 우리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누구고, 무엇인가를 알고, 더욱이 빛 비춤이 우리를 찌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회개의 눈물조차도 완전히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드러내는 이 빛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끝낼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된다. 빛은 우리가 행하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만 광선은 우리의 내적존재를 드러낸다. 우리가 이 빛과 맞닥뜨릴 때 점점 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광선으로 순수해짐
신실함, 성실은 순수함과 단순함을 말한다. 처음 주님을 믿을 때 초기 순수함은 균형 잡힘과 자람이 필요하다(벧전 1:22). 순수함이 자라기 위해서 거룩한 광선이 필요하다. 순수함은 천연적인 노력으로 오지 않는다. 사람이 순수해지도록 힘을 가할 수 없다. 더욱이 순수함은 거짓으로부터 해방 받는 주님의 심판의 광선으로 온다.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순수함의 실제시다. 주님께서 태양으로서 움직이시고, 광선으로서 그분의 빛을 비추실 때 탁월한 것을 알아차릴 능력을 주입하신다. 순수함은 주님의 광선을 비추시는 결과다. 인격을 만지시는 이와 같은 빛 비추심이 필요하다. 이 빛 비추심이 순수하게 하고, 거짓으로부터 지킨다. 순수함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이는 빛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순수함은 광선이 속 중심을 파고들고, 관통할 때 나타나는 결과다. “당신은 치료하는 태양! 당신은 사람의 소망! 나는 당신을 당신의 광선을 사랑합니다.” 이 광선은 단순한 빛이 아니다. 빛은 모든 것을 드러내지만 빛의 광선은 뚫고 들어간다. 빛의 광선 아래에 있음으로 온 존재가 관통된 후에야 순수해질 것이다. 심지어 부정적인 것에서 해방하고, 긍정적인 것을 속속들이 주입하기 때문에 이 광선을 사랑해야 한다. 이 광선은 진지하고, 성실하게 하고, 단순하게 한다. 이 광선은 주님에 대한 풍성하고, 가득한 누림이 있게 한다.
광선의 해방시키는 것, 죽이는 것, 그리고 공급하는 것
주님의 빛의 광선이 비출 때 내적 존재의 모든 것이 드러난다(엡 5:13). 빛에 의해 부정적인 것은 죽고, 긍정적인 것은 공급 받는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날 영화를 보고 있을 때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지?”라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들려왔다. 그럴 때 그들은 내면에서 싸우기 시작한다. 영화의 노예가 되었다는 깊은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체험 후 영화를 봐야할 것인지를 논쟁을 할 것이다. 복음은 노예 상태를 폭로하고 해방시키는 빛의 광선이다(요 8:32–36). 그들은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광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영화에 흥미를 잃기 시작한다. 이것은 어떤 영화를 절대 보지 않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더 이상 영화에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의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T.V와 영화와 오락에 노예가 되어 있다. 그들에게 주님의 광선이 비춰질 필요가 있다. 주의 광선은 이런 것에 노예 된 것을 죽인다.
광선이 비춰질 때까지 어떤 것에 노예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주님의 빛의 광선이 심판을 하고, 순수함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영적인 일만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노예가 된 영화, 스포츠, 취미, 그리스도께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에서 구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광선이 비춰진 후에도 여전히 그런 일을 하겠지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그러한 일을 할 것이다. 광선으로 말미암은 사람은 한번 노예된 것을 사용할 수 있다. 스포츠, 취미로 노예 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비춰지는 광선은 노예가 되는 것에서 해방할 뿐만 아니라 부적절한 것을 죽인다. 노예가 되게 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싸우는 대신에 기쁘게 하고 노예가 되게 하는 것에 대해 흥미를 잃게 한다. 어떤 사람이 “그토록 좋아하던 것을 왜 하지 않죠?”라고 묻는다면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주님을 찬양해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그런 것에 흥미가 없어요. 전 주님을 사랑해요.”라고 말할 수는 있다. 주님의 광선 아래에 있기 때문에 아주 단순해진다. 주님은 성도들의 어떤 것으로 괴로워하신다. 광선은 인간의 방식으로 주의 임재 안에서 살 수 있게 하는 것과 불순하고, 부적절한 것을 죽인다.
주의 빛의 광선은 노예 됨에서 해방함으로, 건강하지 못한 것을 죽임으로 깨끗케 한다. 이것은 방사선으로 암을 치료하는 요법과 같다. 방사선이 특정한 세포를 계속 쬘 때 결국 암이 죽는다. 하지만 경건하고 영적인 광선은 방사선 치료보다 훨씬 더 좋다. 왜냐면 영적인 광선은 건강치 못한 것을 죽일 뿐만 아니라 영 안으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주입하고 생명을 공급하기 때문이다(요 8:12).
주님은 순수하게 되려고 이를 악물고, 힘들이기 원치 않으신다. 자기의 의지로 오는 영적 승리는 진짜가 아니다. 광선이 비춰질 때 어둠이 폭로되고, 부적절하고, 부당한 것이 드러나고, 건강치 못한 것이 죽고, 영적인 양분이 주입되고, 생명이 공급된다. 광선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한다. 결국 이것은 순수하고, 경건한 사람을 산출하는 과정이다.
순수함을 지키기
순수는 상대적이다. 어떤 순수가 순수함인가? 예를 들어 주님을 향한 순수가 있는가? 그것은 말하기가 어렵지만 한편으로는 말하기가 어렵지 않다. 영적인 것에 흥미가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어떤 것에 순수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것이 완전히 순수하다거나 순수성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었을 때 받았던 처음의 순수성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다(고후 11:2–33). 주님을 처음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그분의 긍휼이 있었다. 주님의 긍휼 없이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제 자신을 주님께 드립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롬 9:16). 그 최초의 순수성은 유지될 필요가 있고, 점점 성장해 가야 한다(딤후 2:22).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쉽게 잃어버릴 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마음에 끌렸고, 그분의 긍휼을 보았기 때문에 주님을 믿었다. 주님께서 얼마나 놀랍고, 사랑스러운 분이신지를 알았다. 많은 성도들이 그분께 “주님, 전 당신께 속했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일생에서 당신을 섬기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함으로 헌신했다. 이것은 주님의 긍휼이었다. 이것이 그분에 대한 최초의 순수성이다.
이어서 교회 안에서 수년 동안 다른 방식으로 자란다. 예를 들어 생명과 진리와 주님을 섬김으로 자란다. 동시에 복합적으로 자란다. 많은 체험, 어려움, 그리고 좌절을 맞본 후 순수성을 잃게 되고, 아주 복잡해지고,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단순함을 잃기 쉽다.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성은 최초의 상태를 넘어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의 긍휼이 여전히 필요하다. “주님, 제가 자라는 것처럼 여전히 당신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복잡함으로부터 저를 지켜주소서. 단순함을 유지하도록 저를 도우소서. 제가 당신을 사랑했을 때처럼 저를 순수하게 하소서. 저의 순수함이 자라고 또 성숙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순수성은 중요한 요소다. 긍정적으로 자라는 것처럼 동시에 부정적인 것이 자랄 가능성이 있다. 다른 성도들과 함께 주님을 사랑하고 추구한다면 생명과 진리와 섬김 안에서 자라고 성숙되는 것이 분명하다. 거기엔 탁월함이 있다. 동시에 복잡함도 자랄 것이다. 인간의 천연적인 능력은 자랄 것이다. 묘책(妙策)의 능력과 권모술수(權謀術數)가 자랄 것이다. 이 부정적인 것들은 주님보다도 그리스도인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이 자라게 할 수 있고, 주님의 이끄심 대신 사람의 방식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부정적인 것들의 성장으로 패배하지 않기 위해 순수함을 지킬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주의해야 할 것은 항상 주님께서 순수하게 하시기를 간청해야 한다. “주님, 저는 당신의 광선에 엽니다. 저의 복잡한 것들을 드러내소서. 많은 날 저는 당신께 좌절합니다. 저의 불순한 동기를 폭로하소서. 저는 매순간 불순한 것들을 행합니다. 때론 그릇된 곳에 이끌리기도 합니다. 저와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칠 저의 어떤 것을 드러내소서. 주님, 당신께서 드러내시고, 제가 기도하는 것은 죽음에 둘 것입니다. 저는 당신을 향한 것들이 복잡하고, 산만해합니다. 주여, 단순함으로 복잡한 것들을 죽이소서. 당신께서 죽음에 두는 것마다 당신 자신으로 대체하시고, 당신의 영적인 풍성으로 저를 먹이시고, 또 불어넣으소서.”
종교적인 거짓에서 지킴
모든 지역교회는 경건한 커뮤니티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 없이 이 커뮤니티에서 생활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많은 교회는 필터 없이 말하고 행동한다. 그리스도와 엇비슷한 것이면 모두 받아들인다. 특정한 용어를 사용할 수 있지만 주의 사역의 실제가 부족하다. 이것은 종교적인 거짓이다. 거짓 영적인 것으로부터 나올 주님의 빛의 광선이 필요하다. 주님의 심판하는 광선 없는 것은 종교적일 것이고, 특정한 것을 말하는 것을 배울 것이고, 특정한 의식을 훈련하고, 특정한 방법을 행하게 될 것이다. 종교적인 세상에서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러한 것들을 행하지 않는 자들을 거절한다. 이런 이유로 종교는 배타적으로 나아간다.
주 예수님은 아주 포괄적이시다. 하지만 종교는 배타적이게 한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게 하는 원인이지만 주님은 그분 자신께 이 사람들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 복음서의 주님은 얼마나 순수하신지! 그분은 성공을 위해, 그분의 사역을 증가시키기 위해 사람들과 교통하시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이런 순수한 방식으로 각각의 상황에 반응하셨고, 하나님의 관심에만 관심을 가지셨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적일수록 점점 더 비난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적이라면 의로운 자, 의롭지 않은 자를 판단하고, 인정된 것인가, 아니면 인정되지 않은 것인가를 판단한다. 순수한 자라면 이런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대신 모든 것이 되시는 주님을 신뢰한다. 그리스도인의 순수함은 천연적인 노력으로 올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순수는 순수성의 실제이신 주님 자신이시다.
그리스도의 광선은 종교에서 해방시킨다. 그분의 심판하는 광선으로 종교적인 거짓에서 순수하게 된다.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관심에만 관심하고, 그분께서 받아들이시는 자들 모두를 받아들인다. 주님께서 그리스도인 존재 안으로 그분의 순수하신 광선을 비추실 때 그분의 심판을 체험할 것이고, 그분의 끝내시는 사역으로 강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많은 것들을 불태우게 될 것이다. 이 광선은 치료의 광선이요, 공급의 광선이다. 주님께서 성도들 안으로 빛 비추실 때 그분은 교회생활에서 활력 있게 하는 통찰력을 주신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빛으로 공급하시는 통찰력이 탁월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주님 앞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건강하게 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넘친다는 것을 알 것이다(빌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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