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우리의 영적 풍성을 소중히 함

Hernhut 2016. 6. 9. 11:30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빌립보서 1:7

 

 

갖는 것, 소유하는 것, 누리는 것

 

너희가 너희 마음에 나를 가지고 있다.”라고 바울이 말했을 때 그는 아주 특별한 단어를 사용했다. 소유하고, 누리고, 분배되고, 갖는 것을 의미하는 에코echō를 사용했다. 우리가 성경을 가졌다면 우리는 성경을 단지 소유하거나 에코echō할지 모른다. 우리가 성경을 에코echō한다면 우리가 반복적으로 성경을 읽음으로 누린다.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긋고, 중요한 부분을 적어두고, 표시하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영감을 받고, 또 때로는 여백에 그 영감을 적어 두기도 한다. 성경은 단지 책상에 놓여 있거나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를 정말 사랑스럽게 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을 누린다. 왜냐면 우리가 성경을 마음껏 누리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살아있다.

우리가 많은 것들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가진 것들 중 어떤 것은 정말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축구공을 갖고 있다면 우리에게 그것은 작고, 대수롭지 않은 소유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 우리는 잠깐 동안 그것으로 축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많은 생각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하지만 프로축구 선수에게 축구공이란 극도로 중요하다. 그는 우리가 갖는 것과 다르게 공에 반응한다. 축구선수는 축구공을 누린다. 축구공은 그의 일부다. 다른 사람에게 축구공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 그것은 그의 삶이다. 그것은 그의 전 인격이 반응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마음껏 누린다면 우리는 그것에 깊고 개인적인 반응을 갖는다. 우리는 그것을 단순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에 반응을 한다. 우리는 그것 외에 훨씬 많이 누림을 갖는다. 헬라어에서 이것은 그것 때문에 정말 살아있다고 느끼는 어떤 것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시간에 성경을 붙잡을 것이다. 성경은 단지 소유가 아니다. 성경은 우리의 일부가 된다. 성경은 우리의 끊임없는 누림을 위한 어떤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살았다. 우리는 성경을 반복적으로 읽는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마음껏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소유와 누림

 

불행하게도 우리 중 많은 성도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빌립보 성도들이 건강했고, 그들은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지 않은 바울과 그의 사역을 확장하는 것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그가 그들의 마음에 있었다. 이것은 빌립보 성도들이 사도와 함께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나 사도를 가졌다고 말을 할 때 더 영향력을 갖거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 것이 무슨 가치를 하는가? 우리가 우리를 섬기는 성도들에게 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인가? 우리가 그들을 소유하는가? 아니면 그들만을 갖는가? 우리가 그들을 소유한다면, 그들을 누린다면 그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들로 살아있고, 자극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모든 반응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주님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우리는 그분을 위해 살 것이다. 우리의 삶은 그분 없이 어떤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가 너희 마음에 나를 가졌고, 너희는 나를 마음껏 누리고, 나의 모든 영적인 풍성을 누린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은 아주 귀한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것이 부족하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소유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사는 주님 자신, 성경, 성도들, 교회생활, 성경교사를 포함해서 섬기는 자들을 포함한다.

 

 

주님 자신

 

우리는 주님을 소유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 5:12).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는 이 분을 소중히 여기고, 그분을 누리기를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 저는 제가 당신을 가지고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소중히 여기고 주님께 감사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가장 깊은 방식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체험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가 주님께 부르심을 받음으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분의 구원의 풍성을 안다(10:123). 우리는 날마다 그분께 부름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생활을 하고, 드라이브를 하고, 직장에서 바쁘게 일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기억하고, 얼마간의 시간을 그분께 응시할 수 있다(12:2).

우리는 그분의 달콤함과 귀하신 이름을 누릴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에코echō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단지 소유로서만이 아닌 그분을 갖게 되고, 우리 마음에 그분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성경

 

우리는 보배롭고, 크고, 의미 있는 약속으로 성경을 소유한다(벧후 1:4).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마음껏 누리는 에코echō의 시간을 갖지 못한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잡지나 소설을 읽는 것보다 성경을 읽는 것이 더 어렵다. 하지만 한번 우리가 성경 붙잡기 시작하면 읽기가 쉬워진다. 자발적으로 우리는 열정을 갖게 되고, 생동감을 갖게 된다(6:63). 살아 있는 말씀은 우리 안에서 움직이고, 경영된다(4:12). 우리는 생명과 기쁨으로 채워진다.

 

 

성도들

 

하나님은 우리를 다른 성도들을 주셨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가 그들을 보길 원하지 않을 때에도 그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 가끔 우리가 집에서 쉬고 있을 때 현관에 붙어 있는 벨이 울리거나 전화벨이 울릴 때 우리는 짜증스러워 한다. 우리는 혼자서 살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방문자가 성도들이라면 우리는 앉아서 교제를 하고, 짜증을 냈던 감정이 사라지게 된다. 그 때 우리는 기쁨이 있게 되고, 생명의 흐름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가끔 영적인 것들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우리는 곧 말하고 싶어 하게 된다.

주님의 임재는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우리의 시간이 아주 달콤해 진다.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 우리는 성도들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배운다(살전 4:9).

 

 

교회생활

 

우리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과 우리가 함께 모여 누려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 마음에 서로를 가졌기 때문에 빌립보 성도들처럼 함께 교제하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 사도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고 말했다. 우리는 함께 교제를 누리고 있다. 그처럼 우리는 나는 이 성도들을 사랑한다. 나는 교회생활을 사랑한다. 내가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 주님은 진정으로 참되시다.”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 때 만족을 느낀다. 교회생활은 우리에게 귀한 보물이 된다.

 

 

섬기는 성도들

 

원칙적으로 사도들이 우리의 소유인 것처럼 우리를 섬기는 성도들은 우리의 소유다(고전 3:212). 우리는 우리의 영적성장을 돌보고, 우리를 섬기는 성도들을 마음껏 누려야 한다. 빌립보 성도들이 그들의 마음에 바울을 가졌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에 그들을 가져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쉽지 않다. 너무 많은 성도들을 돌보는 것은 힘이 빠질 수 있다. 우리를 돌보는 이들을 격려하고,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은 좋은 실행이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은혜에 참여하는 이들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실행한다면 우리교회는 달라질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돌보는 성도들에게 감사하고, 그들에게 우리는 우리 마음에 당신을 갖는다는 말을 하는 습관을 발전시킨다면 우리교회는 살아있게 될 것이다.

바울이 일으켰던 교회들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다. 고린도교회에 있는 문제만으로도 바울은 두통이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한 교회 빌립보교회는 사도의 기쁨이 되었다. 그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4:1)라고 그들을 불렀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을 마음껏 누렸다echōed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단지 그를 소유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소중이 여겼다. 이것은 바울에게 공급과 강한 격려가 되었다.

누군가 빌립보 성도들에게 왜 바울을 따르는가? 사람을 따르는가?”라고 물었을지 모른다. 그들은 어떤 반응을 가졌어야 하는가? 한 면에서 그들은 아니다 우리는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른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다른 면에서 그들은 우리는 바울을 사랑한다. 우리는 그의 영적인 풍성을 사랑하고, 우리는 심지어 복음 안에서 그와 함께 교제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참되시고, 살아계신 분이 되게 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진실로 우리 마음에 그를 갖는다. 그는 우리에게 속해 있다. 우리는 우리가 그것들로 살았기 때문에 그의 풍성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도왔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형제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우리 형제를 에코echō한다. 이 형제가 누린 것은 우리의 누림이 된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가졌고, 또한 사도 바울을 가졌다.

 

 

우리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나?

 

우리가 우리 마음에 갖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 활력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난 전문학위를 받을 거야. 그러면 더 많은 돈을 벌고, 승진도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문학위를 받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교육과 직업을 소유할 수 있지만 이것은 우리의 보물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들로 우리의 생각을 채우지 말아야 한다. 대신 우리는 내가 전문학위를 받지만 전문학위가 나를 차지하지 못한다. 내게는 좋은 직업이 있지만 나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들은 나의 삶이 아니다. 내가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요, 성경이요, 성도들이요, 교회생활이요, 모든 영적풍성을 가진 주님의 종들이다. 이것이 나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영적풍성이 넘치지만 그것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책꽂이에 영적인 책들이 가득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마음껏 에코echō할 수 없다. 대신에 우리는 물질적인 소유를 소중하게 여긴다. 우리는 이런 물질적인 것들을 위해 우리 마음에 작은 방을 마련해 놓았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빌립보 성도들은 그들의 마음에서 바울을 마음껏 에코echo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행한 것마다 아멘으로 격려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한 것마다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이것이 우리가 빌립보 성도들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일들을 마음껏 에코echō하는 것을 배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