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안에서의 교제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3–6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기억할 때마다 첫날부터 바울이 그들을 떠난 이후에까지 그들의 복음에 참여하는 것을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했다(빌 1:5). “참여함”이라는 단어는 다비의 번역과 KJV 성경에서는 “교제함”으로 번역되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준다. 하나는 복음이란 무엇인가? 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이 복음 안에서 교제하는 것인가? 이다.
복음
복음은 새 왕의 탄생과 대관식을 알리고, 왕족의 선언하는데 사용되었던 고대어다. 새 왕의 통치는 새로운 시대를 가져왔다. 갖춰진 것들이 새로운 것이 되었다. 그 때 큰 축하와 연회가 이뤄졌다. 이것이 복음이었던 것이다.
참된 복음은 주 예수님께서 왕 중의 왕으로서 통치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분은 새 시대를 가져오셨다. 이 복음이 축하와 연회가 있는 이유이다. 복음을 들은 우리는 사실상 복음으로 교제 안에 들어왔다. 우리는 더 이상 옛 창조가 아니고, 새 창조다(갈 6:15, 고후 5:17). 우리는 더 이상 어둠의 권세 아래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아래에 있다(골 1:13). 우리는 더 이상 사탄에 의해 학대나 악용되지 않으며, 새로운 왕,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보호와 지키심과 축복을 받고 있다(빌 4:7).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복음을 들었던 첫날부터 시작해 이 놀라운 복음의 교제를 갖는 것을 정말 기뻐했다.
복음의 영역
복음의 역역을 우리는 밖에 두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에 의해 살았고, 죄의 종, 어둠의 세력 안에 있었다(골 1:13, 롬 6:16, 엡 2:2). 어느 날 주의 긍휼로 복음을 듣고, 권원이 찾아 왔다.
“구원받았어요. 주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들은 처음에 복음의 풍성함이 있었고, 주님의 죽으심과 죄에 대한 용서를 가졌지만 그들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간다. 그들은 몇 년 동안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날 내가 하늘로 갈 거야!”라고만 생각한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도, 복음도 이해하지 못한다. 복음의 중심에는 왕이 계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이 왕의 통치는 새 시대요, 새 역역이요, 새 범위다. 주님의 왕국 안에는 정말 풍성한 연회, 기쁨, 축복이 있다.
“나는 그 왕과 함께 왕으로 산다.”
우리는 이런 선포를 날마다 해야 한다. 이 영역 안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수고하고, 살아야 한다.
구원받은 후 복음 안에서 교제를 시작한다. 우리는 새 왕국의 중심으로 직접 옮겨졌다(골 1:13). 새 생명을 영접하고, 새 위치를 받아들인다. 새 창조, 새 왕국으로 나왔다. 복음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새로운 것이다. 이 새 왕국에는 많은 영적 풍성이 있고, 우리가 목표를 향해 전진하도록 하는 하늘에 속한 공급이 있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의 의를 위해 죄 용서함뿐만 아니라 성화, 회복, 변화, 순종, 영광과 같은 더 많은 항목들을 배우게 된다. 구원을 받았고, 우리의 생활은 영광의 마지막 결과로 우리를 데려갈 “복음 안에서의 교제”를 배워야 한다. 복음의 결론은 그분과 같은 형상을 갖는 것이다. 우리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죄로 인해 그 형상이 변형되었다. 완전치 않다. 교회 안에 있다할지라도 우리가 영광을 맛보지 않는 이상 우리의 형상은 완전케 될 수 없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복음은 우리가 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가 살아야 하는 생명이다. 복음은 단지 우리가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가 살고, 탐험하고, 누려야 하는 영역이요 범위다. 복음 안에서의 교제는 우리가 왕 중의 왕과 함께 더 있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첫날부터 우리는 구원 받았고,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졌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 안에 살고,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의 흐름을 갖는다. 복음은 거룩한 모든 일이 있는 그리스도의 영역이다. 우리는 이 영역 안으로 들어갔고, 이 새 왕국 안에서 성장하고 있다. 우리는 새 생명 으로 변화되고 새로워지고 있다. 결국 우리는 영화롭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있을 것이다. 영원함을 위해 그분의 왕국을 누릴 것이다. 그날까지 우리는 놀라운 이 복음의 영역과 범위 안에서 살고 수고한다.
바울의 확신
바울은 계속해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착한 일을 완결하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고 말했다. 사람들은 신뢰하기 힘들다. 특히나 순수하지 않을 때 더욱 그렇다. 그런데 바울은 순수했었다. 빌립보 성도들도 순수했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바울은 단순하게 빌립보 성도들을 사랑했다. 빌립보 성도들 역시 아무 조건 없이 단순하게 바울을 사랑했다. 이런 관계 안에 있는 순수성 때문에 진정한 확신이 발전할 수 있었다. 자신감을 갖다, 확신하다, 당당하다를 의미하는 페이토peithō는 설득하다, 설득시키다, 확신시키다, 납득시키다로 확대할 수 있다. 확신은 헌신으로 이끄는 어떤 사람에 대한 신뢰와 의존도에서 나온다. 직관에 바탕에 둔 것은 확신이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건축되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완결될 것과 그들 안에서 시작하신 주님의 일이 어느 날 완전하게 될 것에 확신했다. 그는 주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이러한 확신은 바울의 주님에 대한 수년간의 체험에서 나왔다. 그는 “내가 비천하게 되는 것도 알고 풍부하게 되는 것도 알아 어디에서나 모든 일에서 배부른 것과 배고픈 것, 풍부한 것과 궁핍당하는 것을 다 배웠노라.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3)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좋은 때와 나쁜 때에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일을 완료하시는 그분의 능력에 대한 바울의 확신을 절대 나눌 수 없다.
시간은 결국 우리의 교제가 복음 안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종교적인 일을 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나는 주님께서 살아계신다. 나의 생명은 그분께 맡겨졌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관적인 분이 되실 때까지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확신 갖기가 어려울 것이다. 주 예수님의 일은 종교 영역에 없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진실하고도 견고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착한 일을 완결하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주님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는 “나는 주님을 안다. 그분은 네게 참되시다. 그리스도는 정말 살아계신다. 그분은 신뢰할 만하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그 일을 완료하실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종교와 프로그램이 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확신하는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것을 완결시키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3–6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기억할 때마다 첫날부터 바울이 그들을 떠난 이후에까지 그들의 복음에 참여하는 것을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했다(빌 1:5). “참여함”이라는 단어는 다비의 번역과 KJV 성경에서는 “교제함”으로 번역되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준다. 하나는 복음이란 무엇인가? 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이 복음 안에서 교제하는 것인가? 이다.
복음
복음은 새 왕의 탄생과 대관식을 알리고, 왕족의 선언하는데 사용되었던 고대어다. 새 왕의 통치는 새로운 시대를 가져왔다. 갖춰진 것들이 새로운 것이 되었다. 그 때 큰 축하와 연회가 이뤄졌다. 이것이 복음이었던 것이다.
참된 복음은 주 예수님께서 왕 중의 왕으로서 통치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분은 새 시대를 가져오셨다. 이 복음이 축하와 연회가 있는 이유이다. 복음을 들은 우리는 사실상 복음으로 교제 안에 들어왔다. 우리는 더 이상 옛 창조가 아니고, 새 창조다(갈 6:15, 고후 5:17). 우리는 더 이상 어둠의 권세 아래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아래에 있다(골 1:13). 우리는 더 이상 사탄에 의해 학대나 악용되지 않으며, 새로운 왕,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보호와 지키심과 축복을 받고 있다(빌 4:7).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복음을 들었던 첫날부터 시작해 이 놀라운 복음의 교제를 갖는 것을 정말 기뻐했다.
복음의 영역
복음의 역역을 우리는 밖에 두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에 의해 살았고, 죄의 종, 어둠의 세력 안에 있었다(골 1:13, 롬 6:16, 엡 2:2). 어느 날 주의 긍휼로 복음을 듣고, 권원이 찾아 왔다.
“구원받았어요. 주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들은 처음에 복음의 풍성함이 있었고, 주님의 죽으심과 죄에 대한 용서를 가졌지만 그들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간다. 그들은 몇 년 동안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날 내가 하늘로 갈 거야!”라고만 생각한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도, 복음도 이해하지 못한다. 복음의 중심에는 왕이 계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이 왕의 통치는 새 시대요, 새 역역이요, 새 범위다. 주님의 왕국 안에는 정말 풍성한 연회, 기쁨, 축복이 있다.
“나는 그 왕과 함께 왕으로 산다.”
우리는 이런 선포를 날마다 해야 한다. 이 영역 안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수고하고, 살아야 한다.
구원받은 후 복음 안에서 교제를 시작한다. 우리는 새 왕국의 중심으로 직접 옮겨졌다(골 1:13). 새 생명을 영접하고, 새 위치를 받아들인다. 새 창조, 새 왕국으로 나왔다. 복음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새로운 것이다. 이 새 왕국에는 많은 영적 풍성이 있고, 우리가 목표를 향해 전진하도록 하는 하늘에 속한 공급이 있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의 의를 위해 죄 용서함뿐만 아니라 성화, 회복, 변화, 순종, 영광과 같은 더 많은 항목들을 배우게 된다. 구원을 받았고, 우리의 생활은 영광의 마지막 결과로 우리를 데려갈 “복음 안에서의 교제”를 배워야 한다. 복음의 결론은 그분과 같은 형상을 갖는 것이다. 우리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죄로 인해 그 형상이 변형되었다. 완전치 않다. 교회 안에 있다할지라도 우리가 영광을 맛보지 않는 이상 우리의 형상은 완전케 될 수 없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복음은 우리가 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가 살아야 하는 생명이다. 복음은 단지 우리가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가 살고, 탐험하고, 누려야 하는 영역이요 범위다. 복음 안에서의 교제는 우리가 왕 중의 왕과 함께 더 있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첫날부터 우리는 구원 받았고,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졌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 안에 살고,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의 흐름을 갖는다. 복음은 거룩한 모든 일이 있는 그리스도의 영역이다. 우리는 이 영역 안으로 들어갔고, 이 새 왕국 안에서 성장하고 있다. 우리는 새 생명 으로 변화되고 새로워지고 있다. 결국 우리는 영화롭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있을 것이다. 영원함을 위해 그분의 왕국을 누릴 것이다. 그날까지 우리는 놀라운 이 복음의 영역과 범위 안에서 살고 수고한다.
바울의 확신
바울은 계속해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착한 일을 완결하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고 말했다. 사람들은 신뢰하기 힘들다. 특히나 순수하지 않을 때 더욱 그렇다. 그런데 바울은 순수했었다. 빌립보 성도들도 순수했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바울은 단순하게 빌립보 성도들을 사랑했다. 빌립보 성도들 역시 아무 조건 없이 단순하게 바울을 사랑했다. 이런 관계 안에 있는 순수성 때문에 진정한 확신이 발전할 수 있었다. 자신감을 갖다, 확신하다, 당당하다를 의미하는 페이토peithō는 설득하다, 설득시키다, 확신시키다, 납득시키다로 확대할 수 있다. 확신은 헌신으로 이끄는 어떤 사람에 대한 신뢰와 의존도에서 나온다. 직관에 바탕에 둔 것은 확신이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건축되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완결될 것과 그들 안에서 시작하신 주님의 일이 어느 날 완전하게 될 것에 확신했다. 그는 주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이러한 확신은 바울의 주님에 대한 수년간의 체험에서 나왔다. 그는 “내가 비천하게 되는 것도 알고 풍부하게 되는 것도 알아 어디에서나 모든 일에서 배부른 것과 배고픈 것, 풍부한 것과 궁핍당하는 것을 다 배웠노라.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3)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좋은 때와 나쁜 때에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일을 완료하시는 그분의 능력에 대한 바울의 확신을 절대 나눌 수 없다.
시간은 결국 우리의 교제가 복음 안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종교적인 일을 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나는 주님께서 살아계신다. 나의 생명은 그분께 맡겨졌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관적인 분이 되실 때까지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확신 갖기가 어려울 것이다. 주 예수님의 일은 종교 영역에 없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진실하고도 견고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착한 일을 완결하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주님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는 “나는 주님을 안다. 그분은 네게 참되시다. 그리스도는 정말 살아계신다. 그분은 신뢰할 만하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그 일을 완료하실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종교와 프로그램이 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확신하는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것을 완결시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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