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두 번째 주제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살펴보게 된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이 고린도전서 12장을 읽으려고 하라. 그러고 나서 여러분이 할 수 있다면 해석하고, 기도로 연구를 하라.
고린도전서 12장의 개요.
우리는 잘 알려진 구절을 단순하게 읽게 된다. 여기 28절을 읽을 때 교회행정의 은사를 가진 성도들을 보게 되고 밀접한 경우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사실이요, 슬프게도 많은 방면에서 무시되었지만 놀라운 진리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그것보다 훨씬 더 가르칠 것이 있다. 28절에서 행정이라는 단어만을 붙잡는 것은 정말 충분하지 않다. 이 구절에서 다스리는 것이 은사로 나온다. 다스리는 것은 다른 말로 이끈다는 말이다. 우선 여러분은 겉으로 보이는 것을 보려고 하는 것보다 교회행정의 폭넓은 시야로 성경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고린도전서 12장 전체에서도 여러분은 이 은사에 대한 문맥을 꽉 붙잡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시고, 그들 각자를 움직이게 하신다(6). 또 은사는 교회의 다른 지체들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7). 모든 지체들이 기여하도록 은사가 주어졌다(7). 모든 기여가 필요하다(21).
고린도전서 12장의 모든 효력은 은사의 다양성과 한 몸의 일치다. 만일에 여러분이 이 장과 아주 유사한 다른 장을 나란히 펼쳐두고 유사한 것을 찾는다면 여러분은 은사의 거의 완벽한 목록을 아무도 찾지 못한다. 하지만 너그러우신 하나님은 그분의 교회 성도들에게 그분의 교회가 되도록 은사를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교회행정의 분명한 은사를 드러내기 전에 신중해져라. 하지만 여기서 확신을 갖는 것과 가능성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은사들은 구체적으로 교회행정이다.
교회행정이라는 진리는 많은 교회에서 분명하고, 충분하게 말한 적이 없었다. 지도자, 가르침, 방언 등 역동적인 은사들 때문에 많은 교회행정과 같은 사역들이 한 단계 낮은 은사들로 인식되었다. 역동적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많은 교회행정을 영적인 사역과 육적인 사역으로 나누게 되었다. 육적인 사역은 영적인 사역이 아니라고 시사한다.
다른 사람들은 은사들을 초자연적인 것과 천연적인 것으로 나눈다. 물론 교회행정은 두 번째 범주로 버려졌다. 그들이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동일한 은사들(고전 12:28),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고전 12:27), 성령의 카리스마적인 은사에 대해 말한다(고전 12:31). 그러나 고린도전서 12:28절에 있는 돕는 성도들과 행정을 맡은 성도들의 천연적인 것들은 사도들, 대언자들, 가르치는 자들, 기적을 행하는 자들, 그리고 치료하는 은사와 타언어로 말하는 은사 사이에 끼워졌다. 다음 두 구절을 읽을 때 돕는 은사와 행정을 맡은 것은 언급되지 않고 31절에서 앞에서 나열한 은사들을 중 가장 좋은 은사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천연적인 능력과 영적인 은사 사이에 있는 다름에 관한 많은 논쟁이 있다. 나는 그들이 몸으로서 교회를 공평히 다루지 않거나 그리스도께 영광을 가져오지 않는 방법으로 그들의 능력을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면 이 영역에 있는 영적인 은사를 갖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사역에서 전문적인 교회행정을 맡은 성도들로 생각한다.
세속적인 곳에서 배울 것이 많지만 거기엔 분명한 다름이 있는데 먼저 교회는 계약적인 이윤관계이기보다 오히려 자원사회요, 두 번째로 교회는 정확하게 교회가 무엇인지에 관한 말하는 곳이다.
하나 이상의 교회 행정적 은사
바울이 사용한 교회행정은 그리스어 “쿠베르네세이스kuberneseis”다. “쿠베르네세이스kuberneseis”는 일반적인 단어가 아니다. 이 단어는 항해를 의미하는 항해 용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쿠베르네세이스kuberneseis”는 배를 암초나 물이 얕은 곳을 피해 정박할 수 있는 곳까지 이끌어 들이는 수로 안내자처럼 교회의 지도적 일로 가장이 경영하는 일의 용어다. 이 업무를 수행한 세속적인 사람들은 사도행전 27:11절에서 “파일럿”, 요한계시록 18:17절에서 “선장”으로 번역되었다. 이 사람은 그 과정을 조정함으로 기업, 일, 배를 이끌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생각은 무대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이기 보다 사람들 앞에서 나서서 책임을 맡은 대로 움직이는 지도자이다. 번역본마다 이 구절에서 “교회행정”을 바꾸고 있다. 왜 번역본마다 “교회행정”을 바꿔 번역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영국인들은 미국인들이 오바마를 말하는 것과 다르게 “행정부”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라의 정책을 조정하는 지도자라는 용어에서 행정을 본다. 사전은 다스림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돕는다. 문화적으로 단어를 줄이거나 단어에 대해 더 낮게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교회행정, 다스림이란 여전히 좋은 단어다. 먼저 교회행정과 사역이 영어에서 같은 어근이라는 것에 주목하라. 위의 정의는 협동이라는 단어에 교회행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여러분이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뒤에서 순조롭게 일을 돕는 종으로서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성도, 교회행정에 앞장서는 은사를 무시했었다. 이 의미에 맞는 고대 그리스어 어근은 “안티렘프세시스antilempseis”로 “사람들이 어떤 것, 인지력, 그리고 불안감을 갖게 하는 보수(報酬)”를 뜻한다. 하지만 성경적인 그리스어는 이타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70인역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시 22:19). 그러므로 우리는 대개 집사가 언급되어 있는 신약성경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단어는 “서로를 돕는 것, 다른 성도들에게 격려가 되고, 보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다. 여러분은 당번을 생각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단어가 누가복음 1:54절에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분이시라고 설명되었다. 사도행전 20:35절에서는 약한 성도들을 돕는 방법을 보여주는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뒤에 나오는 교회행정은 교회 안에서 사무를 보고, 커피를 제공하고, 모임상황을 기록하는 성도들과 더 유사할 수 있다. 이 은사들은 모든 교회활동의 협력에서 한 방면의 겸손한 조직에 이르기까지 교회행정적인 스펙트럼으로서 두 부분으로 대표된다. 그것은 교회행정의 모든 부분이다.
다른 가능성에 이르는 결론들
여기까지가 우리가 확실성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공과가 있는데 이 메시지에서 더 얻을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28절에서 첫째, 둘째......그리고 그 다음이라는 말이 나오고, 돕는 것과 다스리는 교회행정이라는 은사는 어떤 더 활동적인 은사들 사이에 끼어있다. 그 은사들은 떨어져 있는 은사들이 아니고 돕는 은사가 교회행정(다스림)의 은사 앞에 오는 것처럼 더 낮은 위치에 특별하게 놓인 것이다.
돕는 은사를 받은 성도가 가끔 지도자의 은사를 받은 성도로 개발하게 될 수 있는가? 교회행정을 맡은 성도들이 사역자로 임명된 경우가 많다. 사도행전 6:5절에서 스데반과 빌립을 볼 수 있다. 비록 모든 사람은 아니지만 복음전파자로, 순교자로 부름을 받을 것이다.
돕는 은사와 교회행정(다스림)의 은사는 29-30절에서는 다른 은사들처럼 반복되지 않았다. 이것은 지역교회에서 어떤 성도가 특별하게 은사를 받은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 모든 성도들이 돕는 성도들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게 된다는 말인가? 그건 확실하다. 모든 성도들이 그들의 생명과 사역에 있어서 행정을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성도들은 개인적으로 교회행정을 하는 은사를 가져야 한다.
오늘날 은사에 대해 교회에게 주는 시사점들
만일 여러분이 교회행정을 맡은 성도라면 용기를 내라. 다른 성도들이 여러분의 사역을 평가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높게 평가한다. 여러분의 교회행정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행하는 영적인 사역이다. 이 은사들은 배경이 될 수는 있지만 어떤 은사만큼이나 하나님의 영이 필요하다. 만일 여러분이 각지 교회에서 은사들이 주어졌다는 것을 느끼면 그 은사들을 사용하고 개발하려고 하라. 여러분이 그렇게 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사역을 위한 미래 사역을 계획하실 수 있으시다.
어떤 형제는 지도자로 사역할 수 있고, 어떤 형제는 운영담당자로, 다른 형제는 협력사역자로 사역할지 모른다. 여러분의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은사를 보고, 그것들을 가르치도록 격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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