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그리스도의 몸 (3)

Hernhut 2016. 1. 23. 21:05


지역교회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실제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세 번째 메시지에 왔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몸 생명을 가져야 한다면 발휘해야 하는 실제적인 문제를 만질 것이다. 첫 번째로 입는 것과 두 번째로 영광을 돌리는 것과 세 번째는 대언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새 사람을 입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 창조된 새 사람을 입는 것이라고 말한다(4:24).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신선한 깨달음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주님께 요청해야한다고 들었고 또 듣고 싶어 할지 모른다. 왜냐면 이것이 실제적인 교회생활에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말씀에 포함된 진리는 절대 우리에게 옛 것이 되지 말아야 하고, 그것은 항상 신선해져야 한다. 부모는 그들의 자녀들이 날이면 날마다 곁에서 재갈거리더라도 그들을 돌보는 것을 절대 지긋지긋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삶과 관련이 있는 어떠한 것들로 덮여 있다. 우리는 회개해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 우리는 지금 지역교회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을 입는 것을 배워야 한다.

 

새 사람은 누구며, 무엇인가? 트라이윤 하나님은 새 사람의 본질이시요, 성분이시요, 그리고 실체이시다. 그리스도는 트라이윤 하나님의 본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새 사람의 모든 것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새 사람을 입을 때 우리는 새 사람으로서 교회의 생명이시요, 인격이신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입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역적 표현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덮음이 되셔야 하고, 많은 지체들을 통한 실제가 되셔야 한다. 이것이 새 사람을 입는 것에 대한 의미다.

 

나는 재빠른 형제가 되고, 다른 형제들은 느린 형제가 될 수도 있고,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우리는 서로 입으려 할 수 있지만 서로에게 어떻게 아량을 베풀고, 서로를 어떻게 받아들이려는가와 상관없이 그것은 일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새 사람 안에서는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일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체험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자신을 제한하신다면 우리는 여전히 새 사람을 입지 못하는 것이다.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어떠하심과 교제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이요, 다른 성도들과 그리스도와 엮여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체험 곧 결합체의 도움으로 인한 것이다. 우리는 새 사람 안에서 서로 입는 것을 나눈다. 그리스도 외에 새 사람을 입는 그런 일은 없다.

 

교회생활은 동료들과의 생활이 아니다. 지역에 있는 장로들이 동료로서 함께한다면 교회생활 안에서 손상을 입을 수 있다. 이 결합체 생활 외에 우리가 함께 하도록 하는 천연적인 이유들은 없다. 교회생활 안에는 유일한 교제만 있고, 이 교제는 결합체 생활의 교제를 통해서만 이뤄진다. 이 결합체 교제는 우리 가운데 뒤얽힌 존재를 산출한다. 이런 뒤얽힌 교제는 성도들이 서로를 입도록 할 수 있다.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일을 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새 사람을 입는 것을 배우기 때문에 우리 둘은 교회에 축복이 될 수 있다.

 

영 안에서 생각을 새롭게 하는데 필요한 조건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 옷 입는데 첫 번째로 방해가 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 안에서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4:23). 우리는 교회당에 모였을 때 우리와 함께 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소망 없는 우리의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아마 나와 함께 모이는 어떤 형제는 나보다 훨씬 외모적으로 젊고, 영적으로 주님을 덜 체험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고서 어떻게 우리는 서로 옷을 입을 수 있지? 농담하고 있군.”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영 안에서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가능한 관계에 반하는 것을 찾을 것이다. 한 형제는 너무 냉철함을 드러낼 것이고, 다른 형제는 너무 경솔함을 드러낼 것이다. 어떤 형제는 너무 지방적이고, 다른 형제는 너무 도시적이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모두가 한 몸이다. 나는 너희가 서로 옷을 입도록 같은 장소에 두었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서로 완전히 다르다고 느낄지 모르나 주님은 그분께서 뜻하신 대로 몸 안에 우리 각자를 한 장소에 두셨다(고전 12:18). 모든 부모는 아인슈타인, 에디슨을 낳기를 소망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는 것도 주님께서 몸 안에 우리를 두심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 그분은 특별한 방식으로 여러분을 산출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또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본떠 만드셨다. 여러분이 그것을 깨닫지 못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여러분이 어떤 다른 성도를 보는 방식으로 여러분을 만드셨다. 그분은 여러분과 함께 있도록 성도를 그곳에 두셨고, 구성하셨다.

 

두 자매가 있다. 한 자매는 꿈꾸는 자이고, 다른 한 자매는 아주 실용적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함께 있도록 같은 곳에 두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여러분이 어디서 사는가? 그리스도는 여러분이 옷 입도록 어떤 누구를 그곳에 두셨다. 그분은 누군가가 옷 입도록 여러분을 그곳에 두셨다. 여러분이 너무 다르다는 것에 신경 쓰지 마라. 하나님은 각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즐거워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으로는 이것을 행할 방법이 없지만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될 때 그것은 가능하다. 한 자매가 당신을 볼 때 그녀는 절망적인 낭만주의자로 보지 말아야 하고, 당신이 그 자매를 볼 때 상상력이 없는 싱거운 사람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둘 다 예수 안에 있는 누군가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영 안에서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서로 옷 입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무도 교회생활에서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그리스도 외에 교회생활 가운데 있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만족함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모든 것 안에서 서로에게 동의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교회생활에서 건강한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빈번하게 주님 앞에 우리가 있게 되고, 우리가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을 따라 서로를 좋아하지 않거나 천연적인 사람을 따라 함께 있지 않는 이런 단계에까지 도달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은 영 안에서 그들의 생각을 새롭게 되도록 강요받을 것이다. 여러분이 형제와 자매들을 볼 때 성령께서 보여주시는 형제자매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영 안에서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되었을 때 모든 성도들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우리가 영 안에서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우리는 성도들에 대한 존귀한 생각을 가질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성장과 축복을 위해 몸부림을 칠 것이다. 그 동시에 여러분은 그들의 몫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게 될 것이요, 여러분은 그들에게 고마워 할 것이며,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로 완전하게 옷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더 이상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불만족하지 않을 것이고, 다만 그들은 그들의 몫을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이다. 여러분은 더 이상 성도들이 다르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요, 다만 성장하기를 바랄뿐이다.

 

우리 모두 영 안에서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성도들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너무 거친지, 너무 냉철한지에 관심 갖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리도록 몸 안에 그들 각자를 두셨다. 나는 교회 안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축복하는 사역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다른 성도들로 옷 입을 수 있다.

 

우리는 각자의 기능을 가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축복하는 사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형제들의 사역으로 옷 입을 수 있다. 이것이 놀랍지 않은가? 이것이 교회생활이다. 모든 성도들은 여러분의 생명공급이다. 모든 성도들은 여러분이 영 안에서 여러분의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여러분의 축복이 된다.

 

서로의 지체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의 지체들이 되는 실행을 해야 한다(4:25). 가족의 형제자매들은 이러한 어떤 통찰력이 주어질 수 있다. 많은 때에 통찰력은 형제나 자매가 서로에 대한 많은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시기가 오면 유대감은 드러난다.

 

어렸을 때 나와 나의 동생은 아주 친숙한 사이였다. 서로 위로해 주고 생각해 주었다. 동네 나이 많이 먹은 형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때릴 때 우리는 힘과 용기를 내 그들과 주먹다짐으로 싸웠다. 그 후 그들은 우리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 때 나는 나의 동생을 동생은 나를 생각해 주는 유대감이 강했던 것이다.

 

교회생활은 이와 같은 것이다. 서로 충분히 사랑하고, 기도하지 않은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가 서로 필요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것이 있음을 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우리는 서로의 지체들이다.

 

 

성령으로 충만 받으라.

우리는 어떻게 교회생활에서 서로를 귀하게 여길 수 있을까? 바울은 우리가 와인()을 마시지 말아야 하고, 성령 안에서 충만 하라(5:18)고 기록했다. 여러분이 어떤 누구를 알기 원한다면 바울은 먼저 술 마시는 것을 거절하라고 했다. 많은 이들은 여기서 술을 취할 정도로 마시지 말고 한두 잔을 마시는 것은 괜찮을 것이라고 말한다. 포도주는 괜찮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독주든, 포도주든 한두 잔의 술도 마시지 말라고 말한다. 술 마시는 행위가 교회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교회생활 가운데 술 마시는 행위는 천주교에서 술 마시는 사람들을 포용하기 위해 받아들인 행위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술 마시는 것을 금해야 한다. 술 문화는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을 완전히 바꿔 버릴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술을 마신 후에는 자제력을 상실해 버리고 마음에 있는 말을 내뱉어 버린다. 그래서 바울이 술 마신 것이 영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 된 것과 유사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을 때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우리 자신의 얼굴, 위신을 지키려고 우리는 베일로 가리고 위선적으로 행동한다.

 

우리 안에 영적인 사람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영 안에서 성령을 마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경계하는 보초의 삶만을 살고, 행함으로만 살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술을 마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교회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영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 된 생활이 꼭 필요하다. 여러분은 교회생활하기 원하는가? 그러면 영 안에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

 

제자들이 오순절 날에 성령으로 충만 되고 타국 언어로 말을 하고 있었을 때 사람들은 그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다(2:13). 우리가 성령으로 취하지 않을 때 영 안에서 해방받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 안에서 성령에 취할 필요가 있고, 찬송, , 영적인 노래로 서로에게 말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영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3:9, 16). 우리가 영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을 때 교회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거짓된 것을 하게 된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는 주님께 노래를 하고, 찬양, 노래, , 그리고 영적인 노래들로 서로에게 말할 것이다(5:19). 우리 영적인 속사람을 덮는 것은 더 이상 없게 될 것이다. 대신 우리는 짧은 찬양의 노래, 더 긴 진리의 노래, 심지어 깊은 찬송을 산출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께 이르는 이러한 노래의 시간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가 교회생활에서 그렇게 냉철할 때 우리는 모든 형제들을 보고 그들이 얼마나 많이 다뤄졌는지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영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할 때 모든 성도들이 아주 사랑스러움을 드러낸다. 우리는 교회생활 안에서 성령 충만을 실행해야 한다. 우리가 함께 모이러 올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모두 흠뻑 적셔질 때까지 찬양, 선포, 환호, 심지어 탄식하도록 우리 자신을 주어야 한다. 모든 교회생활이 이와 같을 때 주님께서 새 사람 안에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끝까지 모든 성도들을 사랑할 것이기 때문에 어떤 차이가 없다. 성도들은 어떤 문젯거리를 드러내지 않는다. 모든 성도들은 축복으로 보게 될 것이다. 성도들이 문젯거리를 우리에게 보일 때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지지 않았다는 표시요, 우리가 영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 되지 않았다는 표시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지역교회로 돌아갈 때 성령께서 여러분의 교회생활을 결정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성령님이 여러분을 채우시고, 경영하신다. 탁월하신 성령의 결정이 여러분의 교회생활의 실제다. 그러므로 모든 모임에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성경을 읽고, 시편을 노래하고, 성숙한 누림을 갖고,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서로를 양육하고, 소중히 여기기

새 사람을 입는 성도들처럼 우리는 또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의 지체 모두를 양육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필요하다(5:29). 양육하는 것은 먹이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들이 어떠하든지 개의치 않고 그들이 먹도록 해야 한다. 자녀들이 어떻게 성장하느냐는 부모의 양육에 근거하기도 한다. 그것처럼 교회생활에서 더 먹이는 것은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아는 성도들에게 더 먹이게 되어 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 성도들에게는 영양분 공급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성도들이 말씀을 공급 받으면 그들은 양육된다. 또 말씀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여전히 소중히 품어야 한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양육 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성도들은 각지교회에서 제대로 양육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많은 지역교회의 설교를 맡은 형제들은 성경을 말하기보다 인본주의를 말하고, 세상 철학과 사회에서의 성공과 행불행을 말한다. 이런 설교는 사탄이 좋아하는 설교다. 사탄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교회에 나가서 인본주의, 세상의 것을 공급받는 것을 좋아한다. 사탄은 교회에서 상처를 받는 것을 좋아한다. 세상의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빙자해서 말하는 것은 설교자들이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모든 교회모임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양육되고, 교회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교회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부드럽게 보살피고 아끼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 주님은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딱딱한 말씀으로 말씀하신다. 우리가 딱딱한 말씀을 체험한 후 격려와 안위의 말씀이 있는 것처럼 딱딱한 말씀은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어떤 잘못을 찾는 미스터 모세가 있다. 교회생활이 부족한 양육이 있을 때 교회는 힘이 부족할 것이고, 온기가 부족할 것이다. 우리가 따뜻한 온기의 교회생활을 갈망한다면 우리는 서로 소중히 여기는 것을 실행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문제가 있는 존재들이다. 우리 중 어떤 성도는 깨닫기도 하고, 어떤 성도는 깨닫지 못하지만 서로를 판단하기보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를 안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교회생활에서는 율법을 행사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전진갑주를 입는 것

결론적으로 우리가 서로를 입는 것처럼 우리는 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6:11).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다는 것은 교회생활에서 다른 많은 성도들의 많은 미덕이 우리의 보호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서로를 존중하는 것

몸 생명 안에서 우리가 짚고 가야하는 또 다른 문제는 모든 지체들 안에 계신 주님을 어떻게 영광 돌리느냐의 문제다. 여러분은 어떤 것에 관해 어떤 느낌을 가질 수 있고, 나는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분이 나의 몫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 반역적이지 말고, 오히려 서로 존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열정적인 사람만이 자신 외에 아무도 주님의 이끄심을 가진 자들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종교의 열정적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존중할 수 없는 이유다. 그들은 나는 길을 안다. 너희가 그 길을 따라 가지 않으면 너희는 여기에 속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군대조직, 정부조직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을 체험하고 있다. 우리는 율법, 규칙, 종교적 행위를 주는 이들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한다. 우리는 주께서 성도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을 행하시는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한 성도의 내면에 들어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서 주님께서 그들 안에 말씀하시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들을 자유롭게 지시해도 된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성도들을 존중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일어서게 할 것이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든지 수행하게 하고, 기능을 하게하고, 움직이도록 도울 것이다. 모든 지체들이 존중받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누구도 아래로 보아서는 안 된다. 한 지체가 거칠어 보이면 우리는 그것에 더 존중함을 보이고, 그것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생활에서 모든 지체들을 존중하라. 우리만 어떤 것을 보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만 주님의 공급하심을 알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 중 어떤 형제들은 젊은 형제들이 미래라고 말하며 젊은이들만을 존중한다. 그런 존중은 좋은 것이다. 젊은 형제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름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교회 안의 모든 무리는 미래가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미래다. 그리스도의 몸이 유기적이요, 유기적인 연장(延長)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금 보는 나는 몇 년 전에 있던 내가 아니다. 나의 몸은 유기적으로 대체되었다. 모든 세포가 새로운 세포로 대체된 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은 계속 이어진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미래다.

 

 

서로 같은 보살핌을 받음

몸 생명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 같은 보살핌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전 12:25). 어떤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할지 몰라도 내게는 돌봄이 필요한 지체들이 있다. 우리 생각은 주로 젊은이들, 연약한 이들, 가난한 이들, 새로운 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몸 생명 안에 있는 우리 모두는 보살핌이 필요하다. 여러분이 네게 메시지 사역을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여러분은 여전히 내게 메일을 쓰고, 기도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보살핌이다. 우리는 상호간의 돌봄이 필요하다. 우리 모든 지체들은 우리가 나이 들었든지, 젊었든지, 은사가 있든 없든, 따뜻하든 차갑든 서로 같은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상호간의 보살핌을 받을 필요가 있다.

 

 

고통이 있는 성도들과 함께 고통을 받고, 존귀를 받는 성도들과 함께 기뻐함

모든 지체들을 존중하는 것을 배우는 성도들처럼 우리는 고통을 받는 성도들과 함께 고통을 받고, 존귀를 받는 성도들과 함께 기뻐한 방법을 알아야 한다(고전 12:26). 우리는 고통 받고 있는 성도가 받을 만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절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생활에서 한 형제가 도둑질을 하고, 감옥에 갇힐지라도 우리는 그가 교회에서 떠나게 되었다는 것에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편으로 우리는 그에게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말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와 함께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고통을 받는 성도들과 함께 고통을 받는 그리스도의 몸 원칙이다. 나는 여름에도 약간 긴소매의 옷을 입어야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나는 절대 이게 문제가 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 부분이 고통을 받을 때 우리는 그 부분과 함께 고통을 받는다. 이것이 사랑의 표현이고, 유출(流出)이다.

 

어떤 형제가 존귀함이 있다면 우리 또한 그 형제와 기뻐한다. 이것은 고통을 받는 형제와 함께 고통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왜냐면 존귀함이 있는 형제와 함께 기뻐하는 것은 자아를 부인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교회생활에서 어떤 지체들은 드러내지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자아를 부인해야 하고,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몸을 떠나서는 선택받을 수 없다.

설령 한 지체가 더 이상 지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할지라도 이와 같은 선언은 생명관계를 깨뜨리지 못한다(고전 12:15-16).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몸 안에 없다고 말하는 누구든지 절대 몸을 본적이 없는 것이다. 바울의 예에서 귀는 더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눈이 없었다는 것에 낙담을 했다. 그래서 귀는 나는 몸이 아니야.”라고 말했다. 바울은 이 같은 말이 전에 있었던 것보다 덜한 지체가 되게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누군가 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사람은 회개하자마자 몸의 지체가 된다. 우리는 우리가 모든 지체들을 인정하는 범위에서 몸을 보아야 한다. 그들이 교회생활을 실행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모든 지체는 그 사역이 있다.

몸 안에 있는 모든 지체들은 사역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든 지체들의 모든 사역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모든 지체는 그리스도의 몸을 섬길 특정한 몫이 있다. 몸 안에 있는 모든 부분은 그 기능을 가지고 있고, 모든 부분은 그 몫이 있고, 아무것도 완전하게 또 다른 부분을 대체할 수 없다. 우리는 한 지체가 또 다른 지체가 되라고 요구할 수 없다. 왜냐면 각자가 자신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어떤 지체가 또 다른 지체를 모방하려고 하지 말아야하기 때문이다. 눈은 보는 것으로 몸을 섬긴다. 귀는 듣는 것으로 몸을 섬긴다. 각 지체들은 각자의 기능을 발휘함으로 몸을 섬기고 그 책임이 있다. 어떤 지체가 해야 할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온 몸은 고통을 받는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책임을 무시하면 교회생활은 고통 받을 것이다. 여러분의 특징과 능력이 여러분의 위치, , 사역을 구성한다. 아무도 같은 위치에 있지 않고, 몫을 가지지 못하고 여러분이 하는 사역을 소유하지 못한다. 우리 모두가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된다면 교회생활이 정말 달라질 것이다. 교회생활 안에 있는 모든 지체들은 나는 내 사역이 있다.”라고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사역에 완전히 도달했다고 말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우리의 완전한 성장에 이르는 순간에 우리는 몸의 축복이 될 수 있다. 모든 지체들의 사역은 몸이 되게 하는 것을 공급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축복을 위한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몸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몸의 모든 지체들이 그들의 사역을 파악하고, 완수하게 하소서.

 

 

대언과 대언자들

우리가 생각해야 할 마찬가지로 아주 중요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을 읽으면 바울은 성도들이 간절하게 대언하기를 갈망해야 한다고 말한다(24). 또한 같은 장에서 바울은 은사를 받은 성도무리가 대언자들이라고 말한다(29-33). 모임에서 한 사람이 말을 하려고 일어날 때 우리는 어떻게 그가 대언하는 사람으로서 말하는 것인지, 대언자로서 말하는 것인지, 대언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인지 알게 될까?

 

대언자들의 필요

대언자로서 대언하는 것은 교회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어떠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많이 체험하지 않고, 훈련하지 않는다면 교회에 큰 축복의 대언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모든 성도들이 대언하기를 추구해야 하지만 이런 훈련을 하는 우리가 다 반드시 대언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한국의 직업 중에는 각종 숙련공이 있고, 각종 기능장이 하는 일이 있다. 숙련공들은 많은 일을 잘 할 수 있다. 의자 다리가 부러졌을 때 그는 그것을 고칠 수 있다. 하지만 기능장들은 어떤 특정한 생산물의 품질을 생산해 내는 경험과 훈련을 했다. 숙련공들은 쇼핑센터나 가구점에서 갖가지 물품들을 사서 다 함께 조립할 수 있지만 그 결과는 기능장들이 생산할 수 있는 것과 똑같지 않다. 우리는 지체들의 대언하는 것과 대언자들이 대언하는 것이 이와 같을 수 있다.

 

바울이 쓴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쓴 것에 따르면 모든 지역교회에 있는 어떤 성도들은 계속적으로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습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모든 지체들이 대언하기를 훈련하지 말아야 한다,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성도들의 몫은 귀중한 것이다. 어떤 은사자들은 대언자들로 불렸지만 바울에 의하면 그들은 모임에 온 두 세 성도들 곁에서 기능을 해야 한다. 이 그림은 온 회중을 건축하기 위해서 함께 배우고, 추구하는 교회 안의 성도들 중 대언자 무리에 대한 것이다.

 

교회생활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대언자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대언할 능력을 갖기를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대언자들처럼 두 세 성도들이 말을 해야 하고, 다른 대언자들은 판별해야 한다. 어떤 대언이 가까이에 앉아 있는 대언자 중 하나에 대한 것이었다면 모든 사람이 배우고 모든 사람이 위로 받게 하기 위하여 너희가 다 한 사람씩 대언해야 하기”(고전 14:31) 때문에 먼저 대언한 사람은 잠잠해야 한다. 문맥에 따르면 이 한사람씩은 모임에서 모두 숙련된 성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기능장이거나 대언자들이라는 것이다. 대언자들의 사역은 본질, 생명, 그리고 풍성으로 되어야 한다. 건강한 교회생활을 하기 위해 대언자들로서 함께 기능을 하는 형제들의 무리가 되어야 한다.

 

 

둘이나 셋이 말하기

지역교회에서 이 형제들이 누구인지 분명해야 한다. 이 형제들은 교회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모든 성도들이 보살핌을 받고, 양육되고, 격려 받고, 안위를 받도록 하는 사역방법을 이야기 하러 모여야 한다. 그들은 합력해서 수고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알아듣기 쉽게 말하는 것을 추구하도록 모든 성도들을 먼저 격려했고, 원했다. 또 바울은 여전히 둘이나 셋만이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오늘날 기독교에 있는 계급적인 자격이 아니라 동등한 형제로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대언자들은 함께 준비한다. 그런 후 그들은 말하고, 다른 형제들 역시 거기에 있으면서 함께 준비하고, 듣고, 탐구한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는 필요하다면 말하는 것을 준비한다. 한 형제가 말하는 기름부음이 느슨하다면 곁에 앉아 있는 또 다른 형제가 일어서서 대언자들의 말을 계속할 수 있다. 또 그들 중 한 형제가 그들이 훈련한 것을 따라 나누어야 할 것을 더 추가해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주님의 이끄심과 기름부으심에 따라 함께 움직인다.

 

그러므로 교회모임에는 두 타입의 대언이 있어야 한다. 하나는 그들이 주님에 대한 영접과 주님을 체험한 것이 무엇이든지 나누는 성도들이다. 이것은 놀라운 것이다. 또 교회 모임에는 대언자들의 대언이 있어야 한다. 수많은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모임이라면 교회의 필요를 채우는 대언자 형제들의 무리가 있어야 한다. 그들 사이는 아주 좋은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같은 부담, 같은 약속, 같은 돌봄을 나누어야 한다.

 

오늘날 모든 교회들은 대언자들의 대언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들은 영양결핍이 될 것이다. 모임이 끝난 후 주님께서 풍성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느껴야 한다. 대언자들의 합당한 훈련 없이 이것은 부족이 될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교회들을 건축하기를 계속합시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건강한 방식 안에서 실행하게 하소서. 주님의 증거가 우리 가운데 부담이 되게 하소서.

 

아멘.


'the Brethren > 연(輦)모임 메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행정의 특성  (0) 2016.01.31
교회행정의 은사들  (0) 2016.01.29
그리스도의 몸(2)  (0) 2016.01.15
그리스도의 몸  (0) 2016.01.09
그리스도와 성경(3)  (0) 2015.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