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그리스도의 몸(2)

Hernhut 2016. 1. 15. 19:08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표현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표현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우주적인 어떤 것, 하나님 자신의 생명에 대한 어떤 것임을 알고 있다. 믿고, 거듭난 모든 사람들은 이 영광스러운 몸 안에 있는 그들의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몸이 아주 큰 문제라서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어떤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것처럼 우리는 그분의 몸을 알도록 되어졌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 그분의 몸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크기로 그분을 파악했을 때 우리는 그분의 몸에 대한 체험을 인정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보는 즉시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삶에 대한 통제의 요소가 된다.

 

그리스도의 몸이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포함할 때부터 교회생활은 빈번히 인간의 실패와 약함을 초대한다. 예를 들어 일이 사라지면 어떤 사람은 장로, 집사, 혹은 교사의 책임을 맡을지 모른다. 하지만 주님은 진짜 문제는 나를 꽉 붙잡느냐, 붙잡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도 다른 책임을 맡지 말라. 내가 너의 실제, 너의 풍성, 너의 만족, 너의 누림, 너의 힘, 너의 소망, 너의 미래, 그리고 너의 생활인가?”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뿐일 때 우리는 놀라운 실체로 몸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젊은이들은 도전을 좋아한다. 우리들 가운데 교회를 일으키려는 젊은이들로 인해 이뤄내는 어떤 새로운 노력이 있다. 그들의 수고 가운데 증가만을 겨냥하고 있다거나 독특한 것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몸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이 교회생활을 오랫동안 하여 그들을 산출하고, 지지한 것으로 관여하려고 한다면 그들을 일으키고, 재정으로 지원하고, 그들이 격려할 수 있도록 한 성도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아주 어리석인 일이 될 것이다. 그들이 이루어내려고 하는 것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더 나이가 든 젊은이라면 무섭겠지만 아무도 몸을 보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이가 든 우리는 더 젊은 사람들을 지나치게 비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몸은 놀라운 것이다. 몸은 성도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다. 젊은이들은 그들이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한 새로운 접촉의 지혜를 발휘할 것이다. 그들은 성숙한 성도들에게 그들의 새로운 성도들을 이끌며 이 성도들은 우리의 원천이예요. 이들이 아주 인상적이지는 않아 보이지만 이들은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나는 가난한 농부였던 부모가 젊은이를 대학을 다니게 하려고 애를 쓴 이야기를 알고 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아들이 아무 일도 못하도록 하면서 공부에만 집중하도록 두 가지의 일을 했다. 한 번은 아들이 학교에 있을 때 어떤 것을 자신에게 가져오도록 아버지에게 요청했다. 그런데 다른 학생들이 교육을 받지 못한 농부를 보고서 그 농부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그 학생은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 그는 우리 집을 돌보는 집사야!”라고 대답했다. 얼마나 슬프고, 어리석은 일인가! 그렇게 말하는 대신 그는 나의 아버지, 이렇게 공부할 수 있고, 배울 수 있게 해주시려고 많은 희생을 하시는 나의 아버지셔!”라고 말했어야 했다. 같은 학생들이 이렇게 희생하는 분에게 존경하고, 감사하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했다면 모든 대학생들은 감사를 표했을 것이다. 아마 학생들은 아버지, 아버지는 위대한 아버지십니다. 아버진 아들에 대한 높은 이상을 가지셨군요. 큰 장애에도 불구하고 아버진 성공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러한 곳에서 교회생활을 하는 젊은이들은 그들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인정하고 새로운 성도들을 도와야 한다. 먼저 된 성도들은 여러분에게 인상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복음을 전하고, 다른 사람을 일으키는 여러분의 능력은 그들과 많은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원천으로서 그들을 존경하라.

 

 

한 몸은 많은 지역에서 표현됨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좀 더 말해 보자.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의 부분이다. 여러분은 기본적으로 몸과 연합되었다. 이것 때문에 여러분은 이 몸 안에 있는 모든 다른 사람들과 하나다. 그리스도의 몸의 표현은 어떤 형태를 취하는가? 엄밀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몸의 형태는 지역에서 있는 교회의 형태다.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의 표현이다.

 

지역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은 보통의 사람들로만 느낄지 모르지만 주님은 그분의 증거를 하도록 그들을 일으키셨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를 부르신 것을 너희가 보거니와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너무 많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우주적이고, 유기적인 몸의 표현이다. 교회인 우리는 지역적 그분의 표현이다. 모든 지역적 교회는 그 위치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표현이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 지체니라.”(고전 12:27)고 설명했다. 이 말은 각 지역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지 성도 각자가 그 몸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같은 몸이 각 위치에서 표현되었다. 각 교회가 그리스도의 지역적 몸을 그 스스로 부를 수 있는 것이지 각 지역적 교회가 그리스도의 유일한 몸의 지역적 표현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인천에 있는 교회다. 그리스도의 몸은 서울의 교회다. 그리스도의 몸은 대전에 있는 성도들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의미가 그분께서 각 지역에 교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세 몸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분은 수만 개, 수백만 개의 지역에 그렇게 많은 몸을 가지고 계시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수백만 개의 지역에서 그분의 한 몸을 표현하신다. 수백만 개의 지역교회가 있을지라도 오직 한 몸뿐이시지만 수백만 개의 지역적으로 표현된다.

 

 

각지 교회는 똑같이 소중하다.

우리는 몸에 대한 각지 표현이 몸에 대한 모든 다른 각지 표현만큼이나 소중하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한 위치에 있는 몸이 또 다른 곳에 있는 몸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어떠한 사람은 각지교회가 그리스도의 유일한 몸의 표현이라고 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부모는 서울에서 살고, 아들은 대전에서 산다고 하자. 이 가족은 하나는 서울에서, 다른 하나는 대전에서 두 표현을 한다. 부모가 서울에 있을 때 서울에서 아들이 사는 대전을 갈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 서로를 보게 된다. 두 위치에 있는 그들이 두 가족이라고 의미하는가? 물론 핵가족화가 되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두 가족이 아니라 한 가족인 것이다. 그들은 같은 가족의 지체들이지만 한 가족이 두 위치에서 표현된 것이다. 이 예는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이 예보다 훨씬 더 신성한 것이다.

 

좋은 의미로 대전에 있는 교회는 서울에 있는 교회요, 서울에 있는 교회는 부산에 있는 교회다. 왜냐면 그 모든 교회가 다 같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와 함께하고, 같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증거하고, 선포하고 있다. 비록 어떤 형제가 한 지역교회에서 다른 지역교회로 옮기려고 할지라도 그는 같은 주님을 표현하는 지역교회를 찾을 것이다.

 

 

주의 종들에 의해 보살핌을 받음

각지교회는 어떻게 앞으로 전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아주 실제적인 것이다. 각지에서의 몸의 성장은 주님의 종의 수고로 가능하게 되었다. 어떤 지역교회가 그리스도를 선포하지만 주의 종들을 부인한다면 주님은 거기서 그분에 대한 많은 증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교회로서 모이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총회나 다른 교파나 이단을 위해 일어선다면 더 이상 교회로서 세워지지 않을 것이다. 각지 교회는 주의 종들에게서 오는 도움을 받아들이기 위해 열려 있어야 한다. 어떤 형제가 주님의 감동으로 복음을 선포하도록 어떤 지역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도록 하셨다면 그는 가고, 그 교회는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지역교회가 주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시는 그 종들을 거절한다면 그 지역교회의 성도들은 주님께서 갈망하신 것처럼 자랄 수 있을까?

 

 

그들은 각지교회들을 위해 청지기직분을 받아들였다.

각자의 입장에서 주님의 종들은 주의 갇힌 자들, 주의 노예라고 생각했다(3:1, 1:1). 하지만 각지 교회들은 자신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노예요, 갇힌 자, 청지기직분을 받아들였다(3:2).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한 면으로는 우리가 내가 자유로운 자가 아니냐?”(고전 9:1)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할 때 그것은 내가 휴가를 얻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내가 어떤 곳에 가기를 원할 때 읽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그 때마다 주님은 내게 네가 휴가는 얻었다.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신다. 왜 그런가? 왜냐면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갇힌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래가 없고, 주님 자신 외에는 아무것에도 소망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모두 그분의 하늘에 속한 갇힌 자들이다. 여러분은 지역에 있는 감옥에서 그들을 찾지 못하겠지만 하늘에 속한 감옥에서는 그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 사로잡힌 모든 이들은 각지 교회를 위해 청지기 직분을 받아들였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주의 청지기가 구원을 위해서만 사람들을 구원한 것이라거나 다른 사역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섬기는 성도들이 얻는 다른 성도들은 우리의 청지기들이 그분의 지역 증거자들을 일으켰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사역은 각지교회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할렐루야! 내게 주님을 위한 62명의 형제자매들이 있다.”라고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주님은 네가 교회생활 안으로 그들을 이끌었니?”라고 물으실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 때 기뻐하시지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헌신하도록 청지기으로서 지역 교회에 있게 하신다. 바울은 각지교회가 주의 건강한 증거가 되도록 밤낮 수고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일으켰다. 우리가 사는 곳의 교회에 헌신하게 될 때 우리 모두의 자유는 사라진다. 이런 경우가 될 때 우리는 그만두고 싶어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주님의 갇힌 자들이고, 이런 의견을 갖지 못한다.

 

주님의 종, 그분의 갇힌 자들로서 우리는 젊은이들의 사역이나 특별한 곳을 위한 청지기 직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각지교회를 위해 청지기 직분을 받아들인다. 우리의 수고 가운데 우리는 주님께 저는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저는 주님의 축복을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의 갇힌 자가 되고 이 청지기 직분을 수행하기 원합니다.”라고 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섬기고 있는 젊은이들이 마음에 이런 말씀을 갖기를 소망한다.

 

여러분의 지역교회에 있는 장로들과 목사들은 그 지역교회에 대해 제안서를 산출하도록 여러분에게 의뢰하고, 그것을 없애고, 또 다시 하도록 말을 할 충분한 권리가 있다. 왜 그런가? 여러분이 주의 갇힌 자들이요, 그 지역교회를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빠르게 모이게 하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청지기가 될 때까지 기도하게 하셨다면 그것이 정말 놀라운 것이 되고 얼마나 축복받는 지역교회가 되었을까! 누가 교회생활이 실제가 되도록 하는 종들일까? 그들은 지역교회를 위해 청지기 직분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께 갇히는 자들이다.

 

 

청지기들은 그리스도의 신비로 교회들을 섬긴다.

청지기 직분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신비다(3:3). 다른 말로 내가 주님 앞에서 나의 청지기 직분을 발휘할 때 나는 성도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필요를 돌봄으로 교회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분배하고 나눈다. 시중을 드는 좋은 형제자매들이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주의를 기울인다. 지역교회는 품위 있는 레스토랑과 같다. 모든 성도들은 우리가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가득한 항목들을 읽는 사람들과도 같다. 성도들이 어떤 것을 준비하고 있을 때 장로나 시중드는 형제들이 즉시 나타나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성도들이 완전히 만족할 수 있게 준비한 것을 특별한 접시에 담아서 건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의 항목과 성도들의 필요에 따라 그들을 섬기는 것을 배워야 한다. 모든 지역교회는 유일한 한 종류 곧 그리스도만으로 시중드는 식당과 같다. 그리스도는 많은 방법으로 시중들 수 있지만 우리가 시중드는 분은 항상 그리스도시다.

 

우리 중 어떤 형제자매들이 접시에 담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지만 모두가 그분을 따르고,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통감자 구이를 좋아한다. 그런데 식당마다 여러 방법으로 감자를 굽고, 시중을 든다. 사람들은 나처럼 통감자 구이를 좋아하는 만큼이나 으깬 감자, 튀김감자, 삶은 감자를 맛있어 한다. 우리는 교회생활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판매하는 것이 프랑스식 감자튀김이기 때문에 우리는 해시 브라운(다진 감자에 양파를 넣어 만든 음식)을 주문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좋은 청지기는 건강한 교회생활이 산출되도록 많은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분배하는 방법을 안다.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을 따라 아주 많은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이 신비를 교회에게 분배하는 하늘에 속한 청지기입니다. 이로써 교회생활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성장하고, 만족하게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교회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에 대해 말을 할 때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에 대해 말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것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부활하시고, 왕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하늘에 속한 능력을 힘입었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복음처럼 선포하는 수고로 그분의 능력에 대한 움직이심을 힘입었다(3:7-8).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에 대해 말하기 원하지만 그들이 그분의 풍성함을 많이 소유하지 못해 많은 말을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젊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 주님의 깨끗하신 피의 여러 방면, 주의 생명이 영, , 몸 안으로 적시는 것처럼 사람의 인격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친구에게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젊은 성도는 어떤 용어를 알지만 그들은 계시와 체험이 뒷받침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더 얻고, 다른 성도들에게서 여러 말을 들어 그분의 부활능력 안에서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추구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말한다.

그리스도의 풍성은 부활과 하늘에 속함에 있다.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능력으로 말한 것을 요구한다. 나는 여러 해를 보냈음에도 한 가지 비밀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로 말하려고 할 때마다 나와 부활하시고, 위로 오르시고, 보좌 위에 앉으신 능력 사이에서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이다. 내 비밀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는 능력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것들이 나를 하락시키고, 교회생활에서 성도들을 하락시키려고 음모를 꾸밀지라도 나는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성을 선포한다. 내가 그리스도의 풍성을 선포하는 것은 내가 그 풍성에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이 능력으로 성도들이 강화되길 바란다. 내가 다른 성도들이 이런 능력으로 강화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 그들은 성령을 통해 속사람 안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움직임은 강화된 속사람이 되게 한다.

우리는 겉 사람이 있고 또 속사람이 있다. 겉 사람은 날마다 쇠잔해 가고, 늙어가고 있는 반면 속사람은 매일 신선해지고, 더 성숙해지며, 확고해지고 있다. 나는 젊은이들에 대해 천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안에 있는 속사람은 10년 전 보다 훨씬 더 이기고 있다. 나는 전에는 더 강한 겉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더 강한 속사람이 있다. 누가 교회생활에서 사역들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우리가 우리 속사람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람들이다. 여러분이 그들과 함께 말씀을 읽고, 교제하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나면 어느 정도 여러분의 속사람은 강화된 것이다. 모든 지역교회들은 이와 같은 주의 종들이 필요하다. 그들은 우리의 속사람이 강화되고, 더 건축되게 하는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풍성을 선포함으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사역하는 청지기직분을 가진 그리스도의 갇힌 자들이다. 여러분은 이들을 좋아하는가? 이렇게 수고하는 이들이 교회들 안에 필요하다. 성도들은 내가 사역을 잘 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들이 나를 잘 지지해주었다고 말을 한다. 내가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내 속사람 안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하나 됨을 지킴

지역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화평의 매는 띠로 성령의 하나 됨을 부지런히 지킨다(4:3). 교회는 한 성령, 한 주, 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의 논리를 일치시키는 것이 불필요하다. 바울이 기록한 것 중의 가장 먼저 기록한 하나한 몸이다(4:4). 다른 말로 우리의 체험 가운데 다음의 모든 하나는 이 한 몸에 참여하는데서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평의 매는 띠로 성령이 하나 됨을 부지런히 지킬 필요가 있다. 가끔 우리는 우리가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많은 교파로 갈라질까?”라고 질문을 한다. 사실 이렇게 많은 교파로 갈라지는 것은 비정상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한 몸만이 실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분열은 잘못이다. 하지만 우리만이라도 분열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무의식중이라도 다른 성도들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서울에 있는 한 우리는 서울에 있는 교회의 일부다. 이 집회를 위해 여기에 온 다른 지역의 성도들일지라도 이 순간은 서울의 교회의 일부다. 우리는 이 한 몸에 증거를 하는 서울의 성도들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주님을 전달한다.

 

 

하나 됨은 획일화가 아니다.

무엇이 우리를 몸으로 이끄나? 우리를 몸으로 이끄는 것은 획일화가 아니고 하나 됨이다. 군인이 줄을 맞춰 걸을 때처럼 획일화로 이끄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군인의 획일화는 군인의 힘이다. 하지만 몸은 획일성의 문제가 아니다. 지역교회 내에서도 각 성도 안에서 움직이시는 성령은 같은 방식으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으신다. 한 형제는 아주 냉정할 수도, 또 다른 형제는 변덕스러울 지도 모르지만 여러분은 두 성도 가운데서 표현되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여러분은 획일적이지 않은 그분의 한 몸 안에서 표현되신 그리스도를 보지만 아주 다른 모든 성도들의 하나 됨 안에서 본다.

 

 

하나 됨은 한 성령에 의해 실행되고, 우리가 한 소망을 가짐으로 실행되었다.

몸 안에서 그리스도만이 표현되신다. 이 표현은 성령으로 수행되신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표현되는 교회는 성령으로 수행되기 때문이다. 성령의 움직이심은 교회생활을 수행하는 것이다.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는 한 소망과 한 세워짐을 갖는다(4:4). 우리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성도들로 세워지고, 주님으로 살아낸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부르심의 이런 소망으로 통제를 받는다. 여러분이 어떤 것에 대한 상을 받기를 기대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날을 위해 준비를 한다. 여러분은 아무렇게나 대충 옷을 갖춰 입고 식장에 가지 않는다. 왜냐면 여러분이 단장하지 않고서 식장에 간다는 것이 그 상을 받기 위한 것과 맞지 않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부름 받음은 여러분이 어떤 방식으로 사는지를 나타낸다.

 

우리가 진정으로 몸을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표현이라는 것을 보고, 우리는 성령께서 교회생활 가운데 모든 것들을 통제하시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성령께서 모든 것을 경영하시는 것을 보길 바란다. 몸 안에서 성령님은 모든 성도들을 이끄시고, 다스리시고, 움직이게 하시고, 격려하신다. 이것이 그분의 경영하심이다. 그런 가운데 모든 성도들은 그들의 부름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부름을 볼 때 우리는 매일의 삶을 소중히 여긴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증거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의 증거를 전달하는 이기는 자들이 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날마다 본다.

 

 

한 주()

한 성령과 우리의 부르심에 대한 한 소망과 함께하는 한 몸이 있고, 또 한 주()가 있다(4:5a). 물론 주 없이는 교회가 되지 못한다. 왜냐면 교회는 주님 그분 자신과 함께하는 본질로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4,000년 동안 하나님은 그분의 본질의 어떤 것이 그분의 거주지가 되기를 기다리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얻으시고 장막과 성전과 함께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얻으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여전히 미흡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거주지로서 그분과 일치할 하늘에 속하고, 영적인 어떤 것이 필요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본질로서 그분과 함께하는 그분의 거주지 교회를 창조하셨다.

 

여러분의 개집이 얼마나 멋진지 상관없이 여러분은 개집에 거주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개집이 여러분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개집은 여러분이 아닌 개를 위해 디자인되었다. 주님은 그분의 참된 만족을 얻으시기 위해 그분과 함께하는 본질로서 그분의 몸이 되도록 교회를 창조하셨다.

 

 

한 믿음, 한 침례

몸 생명 안에는 한 믿음과 한 침례의 놀라운 문제가 있다(4:5b). 이 한 몸 안에서 긍정적인 모든 것들은 싹이 돋아났다. 나는 이 한 믿음의 움직임 때문에 그리스도에 관한 영적인 모든 것들을 추구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다른 성도들을 사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한 침례 안에서 부정적인 것들이 끝났다. 나는 젊었을 때 복음집회에서 주님을 영접한 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침례를 받았다. 침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 모인 무리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했다. 수년 동안 나는 그 물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매장되었는지 감사해 하며 그곳에 갔었다. 나를 소유하고, 차지했던 내가 좋아했던 일, 싫어했던 일, 그리스도에게서 나를 떠나게 했던 나의 죄는 모두 그 물에서 끝이 났다. 한 믿음 안에서 우리는 모든 긍정적인 것들이 싹을 내는 이 몸 안에 있고, 한 침례 안에서 부정적인 모든 것들이 끝났다.

 

 

한 하나님 곧 모든 이들의 아버지

이 한 몸 안에서 결국 우리는 아버지이신 한 하나님의 완전한 체험으로 이끌려진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 모든 것이 되시고, 모든 것 위에 계시고, 우리 모두 안에 거하시는 분이시다(4:6).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에게 너희는 나의 몸이라고 말씀하신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님, 저는 교회들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화평의 매는 띠로 성령의 하나 됨을 지키려고 하는 실제적인 곳은 어딘가? 그곳은 지역교회다. 지역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건축하신 생명 있는 곳이지만 총회나 본부는 사람이 만든 곳에 불과하다. 우리는 교리로 논쟁할 수 있지만 에베소서 4장에서 바울이 성도들에게 하나 됨을 지키도록 한 것을 기억하라. 이 하나 됨은 빌립보교회가 함께 분투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1:27). 이런 하나 됨, 추구, 분투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요, 그리스도의 몸의 확장이다. 이 이면에는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함께 싸워야 하는 것이다. 몸의 하나 됨이 아닌 다른 하나 됨은 분열을 가져온다. 내가 머리를 기르거나 수염을 기르는 형제들에게 그것들을 깎도록 하는 것으로 하나 됨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내가 형제들에게 수염을 깎고, 머리를 자르라고 조언을 할 수는 있지만 나는 그것을 주장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이와 같은 문제를 만들 때마다 우리는 하나 됨을 위태롭게 한다. 우리가 같은 한 성령, 한 주, 한 믿음, 한 소망을 나누는 한 우리는 만족함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됨 이외의 것으로 문제를 만들지 말라. “복음전파자가 누구인지, “목사가 누구인지, “장로가 누구인지에 관해 말하는 것은 우리가 따라야 한다. 우리가 부지런히 화평의 매는 띠로 성령의 하나 됨을 지키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왜냐면 우리는 우리 모두 안에 거하시고, 우리 위에 계시고, 우리 모든 것이 되시는 한 성령, 한 주, 한 하나님과 한 믿음, 한 침례, 한 소망과 함께 하는 한 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리적으로 결함이 있고, 비현실적인 것들이 교회 안에서 나타나게 하여 문젯거리가 되게 하지 말라. 분열을 일으키는 문젯거리가 생기지 않는 한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 됨 안에 있는 것이다.

 

 

한 새 사람 안에서 증오와 원망은 사라졌다.

교회생활 안에는 빈부(貧富)가 없고, 세대가 없으며, 사회적 계급도 없고, 인종적 구별이 없다. 교회생활에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나 어떤 사람에 관해 질문하거나 생각을 말하는 것은 무서운 질문을 요구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새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분은 모든 증오나 원망을 죽이셨다. 이 몸 안에서 주님은 놀라운 하나 됨으로 평강이 있도록 창조하셨다.

 

 

교회는 은사의 도움으로 건축되었다.

모든 지역교회는 어떤 사도들, 어떤 대언자들, 어떤 복음전파자들, 어떤 목자들와 교사들의 움직임을 통해 사랑 안에서 자라고 건축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어떤이라는 사용했다. “어떤은 하나 이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은 사라졌다. 누가 사도인가?”라고 물었다. 이 재밌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바울이 살아있었을 때에도 사도로 수고하고 있었던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 사도들 중에 가장 큰 형제였다. 하지만 이제 어떤 사도들, 선지자들, 복음전파자들, 목자들, 그리고 교사들이 되었고, 여전히 있다. 어떤이라는 단어는 교회생활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에게 많은 압박에서 벗어나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당신이 대언자인가?”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어떤 사람이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여러분은 그렇다, 아니다.”로 대답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교회생활에서 사도로서 기능을 한다면 여러분은 그렇게 말하는 것을 어색해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자신 스스로가 여러분의 품위를 떨어뜨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다스림 안에서 그분께서 배열하신 것을 배열하신다. 어떤 사람이 교회 안에서 당신이 이런 사람인지, 저런 사람인지, 누구인지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한편으로 아무도 나는 사도다.”라고 말할 수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도 내가 언제가 사도가 될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일으키셔야 하는 것이 아주 정상적이지만 교회 안에서는 지위가 아니고, 움직임과 기능의 문제임을 기억하라.

 

 

 

사역 안으로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려고 은사가 주어졌다.

이 은사들은 무엇을 하고, 은사들을 받은 지체들은 무엇을 하는가? 은사들은 사역 안으로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려고 움직인다. 여러분이 어떤 은사를 가졌든 여러분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해야 한다. 여러분 중 어떤 형제는 성공적으로 캠퍼스에서 수고한다. 질문이 있는데 여러분이 얻은 이들이 교회를 아는가? 그들은 그들이 주의 종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가? 사역 안으로 다른 사람들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구원받도록 하는 그리스도인 사역은 흔한 일이지만 완전하게 하는 사역은 흔하지 않다. 새로운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모임에 가고, 심지어 기능을 발휘할 수 있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보는가? 그들이 지역교회를 아는가? 그들이 완전케 되는 필요를 느끼는가? 그들의 하나님의 경륜을 아는가? 그들은 그들의 삶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가?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그들이 완전케 된 적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은사를 받은 성도들의 완전케 하는 사역은 사역 안으로 이끄는 데까지다. 이 사역은 신약성경의 사역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역이다. 여러분이 돌보는 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안으로 완전케 되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수고는 헛된 것이다. 수고하는 여러분 중 어떤 이는 형제는 집회를 하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을 데리고 오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심지어 한 형제에게서 우리는 새로운 이들을 옛 곳으로 되돌아가게 할 수 없습니다.” 주변에 있는 교회들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여러분, 가정생활로 여러분의 영적인 어린 성도들을 데려오는 것이 여러분의 일이다. 여러분은 우리가 좋은 시간을 갖지 못하고, 찬송을 리듬에 맞춰 부르지 못해도 그들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삶, 그들의 움직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서 수행하시는 바로 그 사역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도록 이끌어야 한다.

 

사람이라는 단어와 같이 사역이라는 단어는 포괄적인 단어다. 사역이라는 단어는 한 유일한 사역이지만 수고하는 이들이 새로운 이들을 사역에까지 완전하게 하는 수많은 사역을 포함한다. 우리 모두가 충만하게 자란 성도에 도달하고, 그리스도의 풍성함으로 성숙되고 사랑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진리를 말하도록 하는 사역이다. 완전하게 하는 은사의 도움으로 우리는 사랑 안에서 실제를 붙잡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자랄 수 있는 것을 배워야 한다(4:15).

 

여러분은 여러분이 자랐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여러분이 자랐다는 것을 아는 것은 개인생활과 교회생활에서 더 그분을 알려고 할 때 알 수 있다. 그것은 누구의 가르침을 더 받아야 하거나 성경지식을 더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과 성경지식이 필요하나 우리는 성경연구의 교회, 누군가의 사역을 하는 교회가 아니다. 우리는 각지에서 주 예수님의 증거를 전달하고, 하나 됨 안에서 그분의 몸을 표현하는 교회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성장함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몸을 표현하는 사역을 수행할 수 있다.

 

 

지체들은 결합체들이고, 부분들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공급은 풍성한 공급의 모든 결합과 각 부분의 성숙으로의 움직임을 통해 온다(4:16). 성경은 교회생활을 하는 지체들로 우리를 묘사한다. 우리는 한 결합체이기도 하고 한 분분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팔에 문제가 생겨 정형외과에 갔을 때까지 이것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의사는 내게 문제가 복합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몇 가지 치료를 하고 나의 팔의 기능은 다시 정상적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그 후 다시 문제가 생겼다. 의사는 내게 근육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운동을 함으로 팔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때가 내가 결합체와 부분 사이가 다르다는 것을 보았던 때이다. 각 부분은 결합체를 필요로 했고 결합체는 각 부분의 도움이 필요로 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교회에서 여러분은 결합체로서 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여러분이 하는 것이 여러분의 부분을 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어떤 몫을 수행하는데 있어 기능을 잘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긍휼로 나는 결합체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내게는 나의 움직임을 세워주는 부분들이 많이 필요하다. 결합체와 부분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함께 사역한다.

 

이런 움직임을 통해 몸은 함께 결합되고, 함께 짜 맞춰진. 이와 같은 교회생활이 얼마나 좋은지!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표현이요, 이것이 지역교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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